2013/12/12

한중록 | 정사에 실리지 못한 궁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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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에 실리지 못한 궁중의 뒷이야기

세자빈의 꿈

조선시대 후기, 영조 20년(1744)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이듬해 10살이 되면서 동갑내기 남편이자 세자가 있는 궁중으로 시집을 와 순조 15년(1815)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년의 세월을 조선 권력의 중심이자 핵심인 궁중의 모진 풍파 속에서 살아간 한 여인이 있다. 바로 『한중록(閑中錄)』의 저자이자 지금까지도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조선 제22대의 왕인 정조의 어머니이고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의 할머니이기도 한 혜경궁 홍씨이다.

훗날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자들 주위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내게 될 혜경궁 홍씨는 가족과 함께 큰 탈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를 떠나 가마를 타고 궁중으로 들어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소하고 엄격한 궁중 생활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도 남편이 영조의 뒤를 이어 당당한 조선의 왕이 되면, 자신은 그 시대 여자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중전, 즉 조선의 국모인 왕비가 되는 부푼 희망과 설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오래 살아 욕심을 부린다면 임금의 어머니인 왕대비가 되는 생각도 해보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아마도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 반 걱정 반에 작은 두 손으로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감싸면서 남몰래 눈물도 흘리며 한숨지었으리라.

보통의 백성이라면 한낱 꿈으로만 끝났을, 아니 생각만으로도 대역죄가 될 수도 있었을 이러한 일들이 그녀에게는 그저 꿈만은 아니었다. 바로 눈앞의 현실과 미래에 닥친 일이었고, 그녀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모든 것이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그녀는 조선의 국모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었다면 조선의 최고 문학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중록』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현실과 미래는 그녀가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순조롭고 평화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리가 먼 것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누구도 겪지 못했을 혹독한 시련을 그녀에게 무책임하게 떠넘겨주었다. 그 시련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행복과 권력을 주어야 했을 남편에게서 왔다.

남편의 죽음과 함께 묻힌 그녀의 꿈, 그리고 가문의 몰락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남편 사도세자와 아버지 영조와의 불편한 관계, 이로 말미암은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자신의 남편을 달래면서도 그런 불행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 그녀에게 닥친 첫 시련이었다.

결국, 남편 사도세자는 영조 38년(1762) 한여름에 뒤주에 갇혀 굶어 죽는 참사를 당하고, 그녀의 첫 번째 꿈은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가고, 동시에 또 한 번의 가혹한 운명의 시련을 만난다. 그 시련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목숨과 하나뿐인 아들 세손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조는 이미 사도세자와는 달리 눈치 빠르고 민첩한 세손에게 마음이 기운 상태였고,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이나 사도세자의 친모 선희궁, 영조의 사랑을 받고 있던 사도세자의 동생 화완옹주 등이 세손과 혜경궁 홍씨를 편들어 일단 무사히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무사히 모든 것이 넘어가고 세월이 눈 감아 준다면 세손이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다. 그렇게라도 된다면 왕비가 되는 꿈은 이미 저 산 넘어 저물었을지언정, 여전히 왕대비의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혹시 또 몰랐다. 어린 세손을 남기고 연로한 영조가 이대로 승하한다면, 자신은 왕대비로서 발을 치고 정사를 펼치는 수렴청정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영조는 아들을 죽이고 2년 후인 영조 40년(1764) 2월, 세손을 오래전에 죽은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대를 잇게 하라는 하교를 내린다. 하루아침에 혜경궁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생전 본 적도 없는 아주버님에게 빼앗기고, 그렇게 그녀의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은 그나마 세손이 무사히 왕위를 이어주는 것뿐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세손에 문제가 생겨 사도세자의 서자가 왕이 된다면, 과거 폐비 사건이 있었듯이 그녀가 궁에서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정말이지 궁중 생활은 비정함 그 자체였다. 그나마 까다롭고 변덕이 심한 영조가 세손만은 애지중지하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가혹한 운명의 장난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칠 줄 몰랐다. 아버지 홍봉한은 ‘뒤주를 가져다 놓았다.’, ‘은언군 • 은신군(정조의 이복동생)을 추대하려 한다.’라는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끝내 역적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고, 작은아버지 홍인한은 친아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삼불필지(三不必知)’가 문제가 되어, 역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다. 그리고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한 혜경궁의 가문을 그녀가 칠순이 되는 1804년에 모든 걸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녀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아들 정조마저 한창 뜻을 펼칠 나이에 갑작스레 승하한다. 그리고 손자 순조가 그 뒤를 이었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자신과 적대적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면서 셋째 동생 홍낙임마저 천주교 신자로 몰려 사사된다.

한중록 | 혜경궁 홍씨 | 정사에 실리지 못한 궁중 뒷이야기

한도 풀고 가문의 죄도 발명하고

그녀가 자랑스러워 하고 애지중지했던 가문이 이렇게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에 엮이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몰락의 처참한 과정을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그녀의 한 맺힌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기록이 바로 『한중록』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작품을 읽을 때는 혜경궁의 정치적 의도에 너무 휘말리게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지만 그녀가 정적들에게 수없이 당한 공격과 그로 말미암아 품게 된 원한 등이 알게 모르게 작품 곳곳에 깊숙이 배여 있기 때문에 그녀의 정치적 견해와 그녀의 가문에 대한 변명은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과 오빠를 비롯한 남동생들에 대한 (읽는 이로 하여금 반감을 품게 할 정도로 지나친) 극찬의 연속은 앞서 말한 내 의견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한 예를 들어 그녀는 “ … 내 여편네로 오래된 역사는 모르지만, 우리 조선 사백 년 역사에 아버지의 공처럼 큰 공은 없으리니 ….”라고 말하면서, 아버지를 조선 최고의 신하로 끌어올린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 가문의 남자들은 정말 대단한 능력과 재능의 소유자들이며 청렴결백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실록에 적힌 ‘홍봉한의 졸기’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몇 자만 살펴보자.

“ …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왕실의 지친(至親)임을 가탁하여 특별히 영종의 위임(委任)을 받았으므로 … 10년 동안 정권(政權)을 잡고 있으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였으며 선류(善類)들을 미워하여 은밀히 중상(中傷)당한 사람이 많았다. 아들 셋과 아우 둘이 모두 조정에 포열(布列)되어 권병(權柄)을 농락하여 마구 휘둘렀는데, 권세의 기염이 대단하여 감히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 (『정조실록』, 정조 2년 12월 4일)

혜경궁의 주장과는 너무나도 다른 평가이다.

정사에는 실리지 못한 역사의 뒷이야기

이런 단점에도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시대 궁중과 명문가의 생활과 정치적 사적 배경까지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실록 같은 정사에서 어떠한 이유나 우여곡절로 기록할 수 없었던 사건과 사실에 대한 보충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영조 47년(1771) 2월 5일에 영조는 갑자기 국가의 형세가 위급하다며 궁성 호위령을 내린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후궁이었던 양재 임씨와 그녀가 낳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 은신군 집안의 사람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실록에서는 이렇다 할 글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혜경궁은 이 사건의 발단을 그해 정월 그믐께 있었던 ‘밤 사건’ 때문이라고 말한다.

궁중에서는 해마다 정월 보름에 동상(東山: 창덕궁 후원에 있던 작은 산)의 밤을 따 각 궁전과 군주(郡主)들까지도 나누어 주곤 했는데, 그해에는 그 밤이 인(은언군)이와 진(은신군)이 형제에게도 간 것 때문에 영조는 급한 변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화를 내며 궁성 호위령을 내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에는 홍봉한이 인이와 진이와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었고, 혜경궁은 이 소문에 대해 아버지는 단지 그들이 경모궁(사도세자)의 골육이니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만약 영조가 홍봉한이 인이와 진이 형제를 추대하려고 한다는 소문과 ‘밤 사건’을 연관지어 궁성 호위령을 내렸다면 결국 인이와 진이 형제에게 밤을 가져다준 사람은 홍봉한이거나 그의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2월 5일에 영조는 뜬금없이 궁성 호위령, 즉 지금의 계엄령을 발동하고 정승과 승지의 청대를 거절하다가 2월 9일 홍봉한을 청주목에 부처시키고, 인이와 진이 형제는 대정현에 안치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홍봉한에게 내려진 명령은 혜빈(혜경궁)을 위한 것이라며 며칠 후 환침된다.

한때 궁궐을 휩쓴 ‘밤 사건’ 소란은 『한중록』을 통해서나마 그 원인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궁중 뒷얘기를 통해 실록 같은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아니 기록할 수 없었던 임금의 세세한 언동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짐작건대 숙종에게 있었던 가끔 ‘욱’ 치밀어 오른다는 화병 비슷한 것이 영조를 통해 사도세자에게 유전되어 그러한 비극의 종말을 맞게 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중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명해지기보다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노인네로 변모해 가는 노년의 영조 모습을 쉽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영조는 때로는 지나친 엄격함으로, 때로는 관대함을 넘어선 수수방관으로 아들을 대했고 그러한 변덕스러운 아버지 밑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자학했을 사도세자의 고통도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친아들을 매정하게 아사로 몰아세웠던 그 순간의 영조는 또 한 명의 사도세자였을지도 모른다.

영조는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였을까?

참았던 화가 치밀어 올라 순간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영조 스스로 변명하기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주림과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던 순간은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 짧지 않은 시간에 임금을 설득해 죽어가는 세자를 구원해 주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을 정도로 영조의 성격은 불 같은 면이 있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아버지 김한구가 홍봉한을 공격하면서 ‘영조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아도 화를 잘 내는데 술까지 마시면 어떻게 되겠냐.’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영조가 신하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신하들은 감히 말은 하지 못했지만, 사도세자의 광증이 어떤 면에서 영조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었다고 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조나 사도세자나 백성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성군의 모습을 보였을지는 몰라도 매일 마주 대하는 신하와 궁성 근무자들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하고 바로 후회를 했다. 처참한 아들의 시신을 보고서야 화가 가라앉고 정신이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영조 또한 얼마나 참혹한 심정이었을까. 혹은 영조가 앓고 있던 정신적 질환은 누군가를 괴롭히면서,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끼는, 일종의 도착증 비슷한 정신적 질환은 아니었을까. 비록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스스로 불러온 화 때문에, 바로 광증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누누이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과 영조, 아버지 홍봉한, 친어머니 선희궁 등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애써 변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옮긴이 정병설 교수가 책 속에서 대충 얼버무릴 때 쓰는 말처럼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이다. (참고로 ‘납득’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건너온 말로 ‘이해’라고 쓰면 좋을 것이다.)

한중록 | 혜경궁 홍씨 | 정사에 실리지 못한 궁중 뒷이야기

‘광증’을 앓는 세자는 쉬운 먹잇감이었을까?

사도세자는 뚜렷한 광증이 있었기 때문에 적들에게 쉬운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과 실제로 그런 이유로 사도세자는 김상로, 홍계희 등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이들이 노론의 음모에 의해 그러한 일을 꾸민 것인지, 아니면 사적인 원한이나 개인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노론의 ‘택군(擇君)’에 의해 왕이 된 영조와 치세 초반과는 달리 중후반으로 갈수록 노론으로 권력의 무게가 옮겨지면서 무용지물이 된 영조의 탕평책, 훗날 일어나는 정조 암살미수 사건과 선대 임금인 효종이나 현종, 경종의 의심스러운 죽음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서인이나 그들의 후손인 노론에게 왕은 단지 ‘선택’일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소론 대신 조재호를 불렀다. 이것만으로 평소 소론과 남몰래 소통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노론과 처가에서 버림받은 사도세자가 도움을 구할 수 있었던 곳은 노론과 적대적인 소론뿐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노론은 평소 그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사도세자의 광증이 훗날 그대로 왕이 되었을 때 노론에게 어떤 불행을 안겨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역대 수많은 사화를 통해 보았듯이 왕이나 권력을 가진 무리가 마음만 먹으면 수십 명쯤 저세상 보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고, 노론은 경종 때 목호룡의 고변으로 일어난 신임사화로 처참한 죽음의 패배를 맛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다. 소론에게 빈틈을 보이면 어떤 화가 닥치는지 노론은 뼛속 깊숙이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면 ‘광증’을 앓는 세자는 쉬운 먹잇감이다. ‘화를 잘 내는 왕을 자극해서 아들을 죽이게 한다.’라는 ‘완전범죄 시나리오’가 기다리는 것이다. 정말 영화나 추리소설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이야기이지만, 고사를 보는 독자라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는 고사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일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영화보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것이 바로 고사다. (‘역사’는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그래서 ‘고사’라는 말을 써봤는데 조금 어색하긴 하다. 참고로 ‘역사(歷史)’라는 한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단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면서...

아무튼, 영조는 왕위와 권력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친아들을 독살한 인조에 이어 어떤 이유가 되었건 역시 친아들을 아사시켰다는 조선사에 길이 남을 불명예를 가지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 최고의 폭군이라고 불리는 연산군조차 천수는 누리지 않았던가. 비록 제 마음에 차지는 않는 자식이지만, 제 손으로 친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심지어 친어머니까지도 아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비극적인 상황은 도대체 어떠한 상황이었을까? 또한, 왜 혜경궁의 기록에는 병을 앓기 시작한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간호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혜경궁은 남편이 일을 저지르고 나면 기억을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혹시 사도세자는 다중인격자 비슷한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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