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시대의 일상사 |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 테러 속에서의 일상과 질서에 대한 염원
우리는 파쇼의 역사를 경험함으로써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 자신과 다른 의견 및 다양성에 대한 기쁨, 낯선 것에 대한 존중, 혼란스러운 것에 대한 관용, 종말론적인 총체적 신질서의 실현 가능성과 소망스러움에 대한 회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자신의 규범에 문제를 제기하는 타인에 대한 개방성과 학습 능력 등이 그것이다. (『나치 시대의 일상사』, 381-382)
‘작은 사람들’의 경험으로서의 ‘일상사’
아직 패전의 절망적인 먹구름이 독일을 뒤덮기 전, 히틀러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 필름이나 사진에는 히틀러의 선동적인 연설에 온몸과 온정신을 맡긴 채 신들린 듯 열광하는 대중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일부는 그저 흥분된 분위기에 덩달아, 일부는 재미와 호기심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차마 거스를 수 없어 마지못해 열광하는 척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중 상당수가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히틀러와 나치를 믿고 지지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랬기 때문에 아우슈비츠행 마지막 열차는 정확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
나치즘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이론은 폭력, 테러, 감시 등의 나치 국가의 억압 메커니즘이 작동했기 때문에 대중이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보통의 역사학처럼 당하는 사람들, 즉 ‘작은 사람들’의 경험은 도외시한다. 두 이론 모두 나름대로 정당하고 나치즘에 대한 부분적 통찰을 전달해주기에 일상사에 초점을 둔 연구에 의해 대체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일상사에 대한 연구가 앞의 두 이론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는 숲 전체를 보고, 또 하나는 나무를 살핌으로써 서로 부족한 부문들을 보충할 수 있는 나치즘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 시도는 기존 연구에서 얻지 못했던 다양한 이해와 깊은 통찰을 얻어낼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들은 '질서'를 위해 기꺼이 '자유'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질서를 생산하려는 현대적 시도의 결과물로서의 폭력
데틀레프 포이케르트의 『나치시대의 일상사(Volksgenossen und Gemeinschaftsfremde: Anpassung, Ausmerze und Aufbegehren unter dem Nationalsozialismus by Detlev Peukert)』는 제3제국의 억압 메커니즘이 부분적으로는 제대로 작동했지만, ‘작은 사람들’의 비정치적이고 사적인 부분까지 전부를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불평 • 불만은 수시로 지역 나치 조직에 보고되었고, 첩자들에 의해 국외로 망명한 사민당 지도자들에게도 보고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평 • 불만은 체제 전복을 기도하거나 데모를 벌이는 등의 적극적인 저항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비판이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체제에 대한 암묵적 동의와 공존하고 있었고, 그 동의는 다름 아닌 삶의 정상성, 즉 일자리와 질서라는 기초적 욕구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 제3제국이 많은 노인의 기억 속에 두 가지 업적, 즉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 둘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는 장발(長髮)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것으로 기억되었듯, (한국의 노년층이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를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나치는 소위 직업 범죄자들과 반사회적인 집시들과 상습적인 동성연애자들을 수용소에 장기 수용함으로써 인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나치가 정적들을 고문하고 잡아 가두는 것을 비판했던 사람들도 그것을 지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질서를 요구하는 국민의 외침에는 위로부터의 테러에 대한 적극적 혹은 수동적 동의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랄트 벨처(Harald Welzer)는 자신의 저서 『기후전쟁(Climate Wars, 윤종석 옮김, 영림카디널)』에서 인종청소와 민족말살이 현대성의 골목길로부터의 일탈현상이 아니라 현대적인 사회발전들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가능성 그 자체로서 생성되었고, 질서를 생산하려는 현대적 시도의 결과물로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느낀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현대적 시도들이 낳은 결과물 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나치 체제에 대한 합의는 종종 언급되는 대로 나치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테러가 ‘공동체의 적들’을 겨냥하는 한, 그리고 그로써 소위 ‘질서’ 재건에 이바지하는 한 테러에 정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의 해석도 일리가 있다.
‘작은 사람들’과 ‘지배 권력’의 합의점 ‘질서 유지’
‘일상사’에 대한 연구는 지배 체제, 지배 집단, 억압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파시즘과 전체주의 이론으로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던 것들, 즉 아우슈비츠와 파쇼의 테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어찌하여 그것이 감내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지지를 받기도 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를 마련해줌으로써 체제에 대한 지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떤 종류의 일상적 태도와 기대가 ‘총통’의 그럴싸한 성공에 대한 환호로 이어졌는가를 인식할 수 있는 굵직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한마디로 데틀레프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나치즘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와 통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911테러 이후 서구 사회에서 제안된 각종 대테러 정책들을 보면 현대화된 시민이라도 질서와 안정을 위해서는 그동안 부단한 노력과 희생으로 어렵게 쟁취한 자유를 기꺼이 국가에 헌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삼청교육대가 자행될 수 있었던 이유도 질서를 염원하는 국민의 적극적 • 수동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정부는 ‘질서 유지’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시켰다. 질서가 내포하는 의미와 목적, 그것을 획득하는 수단에 대해 ‘작은 사람들’과 ‘지배 권력’ 사이의 이해와 욕구는 서로 모순적으로 작용할지라도 질서는 현대 사회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작은 사람들’은 안정적인 삶을 위한 질서를 유지해줄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홀로코스트는 ‘작은 사람들’과 지배 체제가 ‘질서 유지’라는 하나의 합의된 목표를 도출했을 때, 그리고 ‘질서 유지’가 인종주의와 결합하여 극단적으로 추진되었을 때 결과될 수 있는 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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