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치의 꽃 정쟁(신봉승)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 비교
같은 주제를 다룬 두 책 비교 리뷰
먼저 신봉승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의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을 읽고 개운치 않은 점과 속이 체한 듯 응어리가 남아있어서 혹시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이 있나 하고 찾아보다가 발견한 책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다. 앞의 책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고 뒤의 책은 90년대 후반에 집필된 책임을 고려해도, 대중역사교양서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이덕일 소장의 책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참고로 그의 다른 저서인 <사도세자의 고백> 은 기존의 역사관과는 상당히 다른 역사책이니 나처럼 비주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조선 정치의 꽃 정쟁> 보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가 더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음에도 이덕일 소장의 책을 읽고 속이 확 풀린 것은 아니다. 이덕일 소장의 책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역사는 알면 알수록 더욱 궁금해지는 것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돈도 가진 놈이 더 욕심을 부리고, 아는 거 많은 놈이 먹고 싶은 것도 많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방대하고 파란만장한 역사의 부침에 대한 호기심이 그 어찌 몇 권의 책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이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읽는 재미는 많은 역사소설을 저술한 경험이 다분히 녹아있는 신봉승 교수의 책이 이야기 중심의 구성이라 소설처럼 막힘없이 술술 넘어갔다. 거기에 약간은 붓이 절제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노학자로서의 여유와 슬기로움일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역사가 중에서 기존의 가치관을 혁파하는 부류에 속하는 이덕일 소장의 책에서는 패기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대중적인 역사서가 꽤 출판되는 요즘, 역사에 흥미 있는 독자에게는 읽을 자료가 많을수록 다양한 풍미를 음미할 수 있어 좋다. 음식은 많이 먹으면 탈도 나고 살도 찌지만, 지식은 먹어도 먹어도 오히려 배가 더욱 고파지는 경향이 있기에, 이러한 대중역사서 뿐만 아니라 다른 대중교양서들도 많이 출간되고 번역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책을 한두 권만 읽고 과거의 어떠한 정황이나 사건을 섣불리 판단한다거나 사실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란 학문이 원래 부족한 사료를 가지고 저자가 가진 지식과 판단력으로 과거사를 추리한 결과물이다 보니 역사가마다 다른 의견과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자료만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사실 인척 주장하고 고집하는 학자들도 있기에, 우린 여러 저자의 다양한 의견과 해석을 접함으로써 편견에 빠지지 않는 슬기로움을 얻고 더불어 사료를 습득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의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럼 두 책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붕당의 기원과 예송 논쟁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붕당(朋黨)의 기원은 중국 남송(11세기) 때 왕안석의 부국강병책을 둘러싸고 농민 중심의 개혁을 주장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과 이를 반대하고 계속 지주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한 사마광(司馬光) 중심의 구법당(舊法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는 비슷한 시기에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朋黨論)이 저술됨으로써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조선 붕당의 주축인 사림파(士林派)와 사림파를 탄압해서 사화(士禍)를 만들었던 훈구파(勳舊派)의 뿌리는 고려 말기 나타난 신흥사대부 세력이었다.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던 새로운 정치 세력은 고려를 타도하자는 급진 세력(역성 혁명파: 정도준, 하륜, 조준)과 고려 자체는 존속시키자는 온건 세력(온건 개혁파: 정몽주, 갈재, 이색)으로 나뉘었고, 새 왕조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 개혁파는 자신들의 토지가 있는 고향에 돌아가 학문을 연마하면서 중소 지주라는 자신들을 지위를 이용해 향촌 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힘썼다. 이들이 성종 때부터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사림파가 되었고, 조선이 개국할 때 정권에 참여한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정변을 통해 다수의 공신을 배출함으로써 집권세력이라 할 수 있는 훈구파를 이루게 되었다. 성종 때 주요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가 훈구파의 끈질긴 탄압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입때까지만 해도 같은 이념과 학통을 공유하는 하나의 정파였기 때문에 쉽게 재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쟁이 가속화되면서 공존의 틀이 붕괴하고 정치가 정책이나 민생에 대한 정쟁이 아닌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전개되면서 조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주범이 된다.
조선 붕당의 기원은 선조 7년(1574)에 이조정랑(吏曹銓郞) 자리를 놓고 동인 •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었던 시기다. 이조정랑은 정5품의 낮은 관직이었지만, 이조정랑은 청요직(淸要職)으로 불리던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대한 인사권과 후임 이조정랑에 대한 추천권이 있었기에 권력을 잡기 위한 요직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조정랑 오건이 다른 자리로 가면서 김효원을 추천하지만, 심의겸(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이 외척 윤원형(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 소윤, 대윤은 중종 첫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오빠인 윤임)의 식객이었다며 반대한다. 그러나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고 김효원의 뒤를 이은 정랑에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오르자 김효원이 심의겸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때 대체로 젊은 사대부들은 김효원을, 노장들은 심의겸을 지지했고, 결국 이들은 1575년 동 • 서인으로 분열한다. 선조 4년(1571) 영의정 이준경이 유차(鑵羕)를 올려 이이를 중심으로 붕당의 조짐이 있음을 선조에게 경고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이이는 이준경을 비난한다. 나중에야 이이는 붕당의 폐단을 깨닫고 남은 일생을 동 • 서인 사이를 중재하는 데 쓰는 실천적인 개혁 정치가로 남게 된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살아있던 시대에는 붕당이 있었어도 최소한의 공존의 틀은 지키고 있었다. 이이와 성혼은 같은 당파 및 학파에 속해 있었다고 하여 당론을 개인의 사상보다 우선시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학자답게 학문의 개방성과 상대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후 전개된 문묘 종사 운동은 철저히 당파적 입장으로만 전개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상대 당의 모든 것을 배척하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공존의 틀은 무너진다. 정당한 경쟁이나 공정한 룰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에는 대량 살육을 부른 보복 정치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대체 예송 논쟁이 무엇이었기에 이들을 피에 굶주린 괴물로 만들었나?
효종 10년(1659) 5월, 끝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효종이 승하한다. 전통시대의 예는 오늘날 헌법 이론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제를 삼년복으로 할지 아니면 기년복(1년)으로 할지가 조정의 핵심 문제였다. 효종이 인조의 장자(소현세자)가 아니라 차자(次子, 봉림대군)였기 때문에 생긴 혼란이었다. 송시열은 아들로서는 다음 서열이기에 기년복을 주장했고 그의 의견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현종 15년(1674) 2월에 대비 인선왕후(효종비) 장씨가 57세로 승하하면서 시작된다. 자의대왕대비 며느리의 상복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또다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을 장자로 본다면 기년복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공복(9개월)을 입어야 했다. 송시열 등은 대공복을 주장하지만, 대구 유생 도신징이 대공복의 부당함을 상소하여 기해년의 국상 때는 국제(國制)를 따르고, 이번 갑인년의 국상 때는 고례(古例)를 따르는 모순을 지적한다. 만약 송시열의 의견을 따르자면,비록 효종이 왕실의 종통(宗統)은 이었으나,적통(滴統)은 인조의 적장자인 소현세자의 소생 경안군 석견에게 있다고 해석될 소지가 있다. 남인들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인조반정 이후 집권을 계속한 서인을 공격할 근거로 삼았다.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어 기년복을 선택해 남인이 정권을 잡게 하고 숙종 1년(1675) 8월 현종에 대한 자의대왕대비의 복제를 다시 의논할 때 윤휴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짐으로써 햇수로 16년에 걸친 예송 논쟁의 결말은 윤휴 등 남인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송시열,윤휴,허목 등의 논쟁은 순수한 학문적 논쟁으로 시작된 것이었어도 점차 논쟁이 격화되어 갈수록 효종의 적통에 관한 싸움으로 변질하면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이처럼 당시의 당쟁은 이념이나 정책을 떠나 정권 강화와 이념 문제 등 비생산적인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봉승 교수는 예송논쟁을 수준 높은 논전이라고 평가한다. 조일, 조청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성은 굶주리다 못해 고향을 도망쳐 나와 도적이 되어야 했던 그 고난의 시기에, 그 수준 높았던 논쟁의 결과로 백성과 조선에 얻어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아니라 양반천하지대본인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너무나 많다. 고로 신봉승 교수의 말을 곧이 고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당쟁을 바라보는 두 책의 서로 다른 시선
신봉승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당쟁을 정쟁으로, 그리고 정치의 꽃으로 끌어올리려 하지만, 그의 글만 봐도 당쟁이든 정쟁이든 결코 곱게 봐줄 수는 없다. 조선의 역사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정쟁의 장면 좀 많이 실어주었으면 좋았겠지만, 두 책에서 피비린내나는 싸움만 구경한 것 같아 아쉽다. 지금의 시점으로 당시 조상의 언동을 보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던 장면이 너무나도 많았다. 널리 알려진 '문묘 종사'나, '예송 논쟁' 같은 이런 소모적인 싸움들은 제외하고, 우리 조상이 진정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지혜와 슬기를 엿볼 수 있는 깔끔한 정쟁의 장면을 소개한 책은 어디 없으려나.
반면에 이덕일 소장의 글은 당쟁의 부정적인 면을 애써 피해가고 덧칠하기보다는 과감히 파헤치고 드러내어 논박하면서 가려웠던 점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다. 그는 비주류 역사학자답게 당쟁의 부정적 영향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하지만, 역사는 추리이고, 해석의 학문이다. 부족하거나 미흡한 사료는 시대와 역사가에 따라 생각과 판단이 다원화되는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새로운 사료가 출현하면 주류의 흐름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학문이다. 고로 신봉승 교수의 글이나 다른 역사가의 책과 비교해서 보기를 권장한다. 한 권만 읽고 만족하여 독선에 빠진다면 책을 안 본 것만 못할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그렇다 보니 두 책에서 같은 사건에 대해서 내용이나 해석이 달랐던 부분이 몇 개 있었다. 그 중 기억나는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로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들 수 있다. 선조실록에는 십만양병설은 없다. 선조실록 16년(1583) 1월 22일 기록을 보면 병조 판서 이이가 군대를 정비할 것을 상소한다는 내용이 있고,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에 의해 집필된 선조수정실록 15년(1582) 9월 1일 기록에 이이의 상소문 본문이 아니라 아래 사관의 평에만 등장한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자.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백지원 선생의 <조일 전쟁> 을 보면 십만양병설은 이이의 문인이었던 김장생의 행장에 처음 등장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서인들에 의해 기정사실로 되고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지금의 주류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십만양병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현실적인 개혁 정치가이자 누구보다 애민사상이 투철했던, 공납의 폐단을 없앤 혁신적인 세법이었던 대동법의 전신인 대공수미법을 주창한 이이가, 그 당시 경제 상황을 보나 인구를 보나 10만이라는 병사 육성이 가능하다고 봤을까? 아무래도 후예들이 이이를 조금 띄워 주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여곡절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대동법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이의 종통을 이었다는 김집이나 송시열은 대동법을 처음엔 반대했었다는 사실도 알아두자. 대동법은 근대적인 세법(가진 것만큼 많이 내는)이었기에 기존에 가진 것과 상관없이 똑같이 정해졌던 세법에 비교해 보면 양반이 당연히 찬성할 리가 없는 법이었다. 그나마 송시열이 봐줄 만한 건 대동법이 시행되고 나서는 백성이 평안하다고 시인하며 대동법을 찬성한 것이다. 이런 혁신적인 세법을 처음으로 과감히 시행한 왕이 광해군이었던 걸 보면 인조반정은 정말 명분 없는, 나라를 좀먹은 짓이었다. 아무튼,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대해 이덕일 소장은 내가 배운 국사 교과서 그대로 기록했고, 신봉승 교수은 새로운 학설을 받아들였다.
두 번째로 인조 16년(1638), ‘세자가 심양에서 사무역(紗貿易)을 하고 있다 하옵니다’, ‘시강원에서 많은 백랍과 망건 등을 주상 몰래 보내었고, 세자와 강빈은 그것을 팔아 도에 넘치는 사치를 하고 있답니다’라는,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에 대한 소문이다.
신봉승 교수는 당시 소현세자를 비난하는 소문에 대한 이렇다 할 변명은 없다. 하지만, 이덕일 소장은 청나라 조선 주재 대사관의 역할 외에 두 나라의 무역 기관이었고, 소현세자의 거처이기도 했던 심양관을 운영하는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사무역은 세자빈 강빈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세자에게 사적 축적이 아닌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개연의 여지를 독자들은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세 번째로 숙종 14년(1688) 10월. 희빈 장 씨의 산후를 위해 친정어머니 윤이례와 교군들이 입궁하다 건양문에서 문직갑사와 다투는 와중에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나서서 가마를 부순 다음 불까지 지르고 이들을 쫓아내는 장면인데, 신봉승 교수의 책에서는 교군들이 저지된 이유가 입궁에 필요한 통행증인 문패가 없어서라고 되어 있지만, 이덕일 소장의 책은 문패가 없었다는 내용이 없이 옥교가 그냥 들어오다 다짜고짜 저지된 것처럼 되어 있다. ‘문패가 있었다', '문패가 없었다.’의 차이는 작지 않기 때문에 더욱 궁금하다.
네 번째로 숙종 20년에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고 그 후에 희빈 장 씨가 사사되기 전까지 희빈 장 씨가 인현왕후를 향해 했다는 방술에 대한 일화가 이덕일 소장의 책에는 생략되어 있다. 희빈 장 씨를 동정한 것일까? 아니면 그 일화가 말할 가치도 없는 사실과 거리가 먼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숙종실록 숙종 27년 9월 28일 기록에 ‘인정문에 나아가 무녀의 딸 정 등을 친국하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신봉승 교수의 책에 언급된 희빈 장 씨가 고용한 무녀 오례의 이름이 나온다.
이상으로 기억나는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마치면서...
유럽의 헨리 2세는 아들 3명이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도전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관용을 베풀었다. 누구처럼 마음에 안 든다고 친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이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국제 관계에서 갈등이 빚어지면 많은 국민의 죽음을 불러오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정책을,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거나 수상한 음모를 꾸미는 정적의 죽음보다는 타협과 관용 우선시한 자비로운 여왕이었다. 조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만 돌아도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고문만으로 자백을 받아 처형해 버리는 무자비한 나라가 아닌가. 이런 잔혹한 옥사는 중세의 종교 재판이나 마녀 사냥과 다를 게 없었다.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 모두 힘을 모아 국가를 회복시켜야 할 시기에 이로 말미암아 낭비된 국력은 글이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엔 세종대왕이 있었다. 언제나 손에서 책이 떠날 날이 없었던 세종대왕은 한 학문에만 집착하지 않았고, 문무에 걸쳐 골고루 인재를 배양하고 등용할 줄 알았기에, 성리학에 빠져들어 다른 학문은 멀리하고 결국은 자신들의 생각만이 옳다는 종교적 광신에 빠져든 후세들과는 융통성이나 포용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통해 불완전한 인간을 수양할 줄 알았다면 그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사상도 불완전하리라는 가장 기본적인 의구심도 떠올릴 수 없었던 조선의 유학자들. 그들의 쓸데없이 강직하기만 하고 타협과 관용을 모르는 편협한 성품은, 가끔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로 감동을 불러내기도 했지만, 그런 굽힐 줄 모르는 아집과 고집은 붕당의 공존 법칙을 무참히 깨버렸고, 광복 후 여운형 선생이 겪었던 것처럼 국익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타협을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우는 악습을 만들었고, 반대를 위한 반대로 무조건 상대 당을 죽이고 보자는 막장까지 가게 되었다.
이덕일 소장은 무참한 살육으로 치달은 당쟁의 원인으로 정치밖에 가질 직업이 없었던 사대부들의 처지를 언급한다. 문제는 성리학이란 학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받아들인 사대부들에게 있었고, 사대부들로 하여금 정치와 학문 이외에 다른 길을 갈 수 없게 하는 사회 구조에 있었다는 것이다. 소수였던 청백리 이들도 정치와 학문 외 직업은 가질 수 없었고, 정치를 업으로 태어난 양반 사대부들에게 정치는 권력은 물론 명예와 돈도 얻을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길의 종착점인 로마였다고 이덕일 소장은 말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지만, 사람은 익을수록 더욱 뻣뻣해지기만 하는 것이 세상 도리인가 보다. 군자의 도리를 외치고 글로 쓸 줄만 알았을 뿐,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던 우리 선비들. 언제나 말 뿐인 지금의 정치가와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역시 피는 못 속이는가 보다. 다양한 인간이 살아가는 것만큼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이 한 가지 사실만 모두가 잊지 않아도 이 사회는 꽤 괜찮은 소통과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다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독서야말로 세상에 산재한 다양한 인간상과 다양한 의견을 두루 접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통로다.
마지막으로 이런 책들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식민사관 중 하나인 ‘조선은 붕당 때문에 망했다’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와 그 진위를,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가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판단해 보는 것도 역사를 깊이 있기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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