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노리즈키 린타로 | 풀어야 할 오해, 풀지 말아야 할 오해
‘일본의 조지 시걸’이라고 불리는 전위 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가 오랫동안 공백을 깨고 회고전을 준비하던 준 지병인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미모의 외동딸 에치카를 라이프캐스팅 기법으로 모형을 뜬 전신 석고상이었고 이 작품은 21년 전 에치카의 어머니이자 조각가의 전처인 리쓰코가 에치카를 임신했던 모습을 모델로 한 ‘모녀상’ 시리즈의 완결판이었다. 그런데 이 ‘에치카 조각상’의 얼굴 부분이 절단되어 묘연히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각가의 동생 아쓰시의 부탁으로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가 조각상 도난 사건에 끼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치카마저 실종된다. 그리고 그녀의 절단된 머리만 가와시마 이사쿠의 추모전이 열릴 예정인 미술관으로 보내지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석고상 머리 도난 사건은 예고 살인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16년 전 조각가 부부와 리쓰코의 동생 유코 부부들 간에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각관계와 유코의 자살이 에치카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걸까.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조각가가 완성한 석고상의 머리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은 작가의 이름인 노리즈키 린타로이고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인 주인공의 아버지는 경찰관이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이 같고, 탐정의 아버지가 현직 경찰관! 이쯤 되면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독자와의 대결’로 유명한 본격파 추리소설 작가의 거장 ‘엘러리 퀸’이다. 참고로 ‘엘러리 퀸’은 필명이고 실제 작품을 쓴 작가는 프레데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이고 두 사람은 사촌 형제 사이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 또한 엘러리 퀸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하니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마니아에게는 마냥 반가운 작품이다. 그뿐만 아니라 엘리리 퀸의 수사 방식, 즉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이곳저곳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실수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하나하나씩 잘못된 단서들을 제거해나간 끝에 결국 정제된 하나의 또렷한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 또한 다름이 없다. 거기에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는 일반 대중이 가까이 가기에는 조금은 먼 조각이라는 예술의 세계, 그중에서도 조각가가 석고상의 ‘눈’을 표현하는 어려움과 조각으로 표현한 ‘눈’의 의미에 대해 조각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 있어 한층 독자의 지식을 넓힐 기회도 주고 있다.
그래도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역시 트릭을 빼놓지 않을 수 없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는 독자가 무심코 읽고 지나갈 수도 있는 페이지 여기저기에 복선이 깔려 있다. 그리고 나중에 사건 주변 인물들 간에 뒤엉킨 오해가 서서히 밝혀지고 풀리면서 독자는 무심코 흘려보낸 복선을 떠올리고 전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복선을 관통하는 핵심은 작가도 인정하듯 ‘오해’다.
조각가는 21년 전 ‘모녀상’ 시리즈를 만들 때만 해도 잉꼬부부로 소문났던 사랑하는 아내 리쓰코에 대한 오해와 라이프캐스팅으로 만든 석고상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인 ‘눈을 감은’ 석고상을 뛰어넘고자, 허용되지 않은 예술적 탐미를 이겨내지 못하고 악마와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아내를 잃고 동생과도 절교한다. 하지만, 악마는 결코 그 일을 잊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고 나서 하나뿐인 딸 에치코도 결국 ‘악마와의 계약’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비록 그가 며칠 차이로 딸보다는 먼저 죽지만 말이다.
보통 오해가 풀리면 그동안 오해의 대상자와의 쌓이고 묵은 앙금도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일도 있다. 조각가 이사쿠는 사망하는 해 초반에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동생과 극적으로 화해한다. 그 결과 16년 전 헤어진 아내에 대한 오해도 풀리자 이사쿠는 예술가적인 독창적인 기질로 16년 전의 진실을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에는 절대 평범하지 않은, 어찌 보면 조금은 비뚤어진 방법으로 세상에 알릴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모녀상’ 시리즈의 완결판인 ‘에치카 석고상’이다. 그리고 그 진실의 핵심은 바로 ‘에치카 석고상’의 도난된 머리에 있었다. 이사쿠가 오해를 안고 그대로 죽었더라면 딸 에치코만은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만약’은 독자를 안타깝게 한다. 보통 우리는 오해를 푸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감정이 더욱 불거져 서로의 감정이 더 악화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도 있듯 때로는 지나친 호기심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도 세상사는 지혜일 것 같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일반적인 추리소설로서 좋은 작품인 건 분명하지만, 진정한 본격 추리물로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완성된 트릭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16년 전 유코 자살 사건의 개연성이 좀 찝찔했다고나 할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적을 수는 없지만, 노리즈키 린타로가 “본격 미스터리의 경우, 리얼리티와 트릭이 서로 경쟁을 벌이죠.”라고 말했듯이 트릭의 완성을 위해 사실성을 조금 감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래도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주요 단서들이 16년 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증거들이 물질적인 증거보다는 정황증거일 경우가 좀 있다 보니, 매우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완성된 추리일지라도 그것들을 가리키는 단서들과의 연결고리들은 좀 느슨한 감이 없지 않나 하는 시건방진 생각을 해보면서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지루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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