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0

사형장으로의 초대 | 혁명 전 과거에 대한 편집증적 향수

사형장으로의 초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혁명 전 과거에 대한 편집증적 향수

구소련 문학 몇 작품을 읽다 보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긍정적인 체제로 표현한 작가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한 작가도 만나게 된다. 앞의 작가에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막심 고리키가 대표적으로 할 수 있고, 그 반대편에는 『수용소군도』의 솔제니친, 『우리들』의 예브게니 자미아틴, 그리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구덩이』 등이 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롤리타』로 유명한 러시아 망명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 역시 자신의 가족이 망명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인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가져온 이질적인 사회 풍조에 대한 불만이 드리워진 작품이 아닌가 싶다.

Priglasheniye na kazn'(Invitation to a Beheading) by Vladimir Nabokov

투명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혼자만 투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은 작품의 주인공 친친나트의 감옥 생활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상상, 그리고 내적 불만 표출을 위한 글쓰기가 주요 일과이다. 그에게는 현존하는 모든 사물이나 인물들이 ‘무의미한 환영, 불쾌한 꿈, 쓰레기 같은 헛소리, 악몽의 잡동사니’이다. 그래서 이러한 허구의 세계에서 탈출하려면 ‘이론적으로 잠에서’ 깨어나야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형집행인 므슈 피에르의 도움으로 죽음을 통해 그는 마침내 허구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자신이 꿈꾸던 모든 자유가 보장된 세계로 나가게 된다.

작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친친나트는 구소련 사회의 무엇이 그렇게도 불만이었을까.

부유한 귀족 출신의 작가는 혁명이 가져온 가문의 몰락과 공산주의 사회가 가져온 전체주의적인 삶, 즉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보다 집단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집단화되고 획일화된 사회가 가져온 경직된 분위기와 사회적 냉대 속에서는 더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 더불어 혁명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과 작가의 아버지가 러시아 극우파에 암살당한 사실도 그에게는 크나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아쉬워하지 않았고 ‘과거’에 대한 이해 자체도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렇게 그는 과거에 애착과 미련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가 잊지 못하는 과거는 혁명 이전의 러시아이다. 즉 그는 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부유한 귀족 계층의 입장을 고스란히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귀족이 볼 때 노동자와 농민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어서 벌거벗은 투명한 존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는 자유보다는 당장 눈앞의 끼니와 추위에 대한 걱정이 더 중요했다는 사실을 부유한 귀족 출신의 작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영글지 않은 예술에 대한 섣부른 욕구는 때로는 배부른 자의 오만과 허영으로 보일 수 있다. 같은 귀족 출신인 톨스토이 백작과는 사뭇 다른 관점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바라본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며 외롭고 고달픈 오랜 망명 생활에서 오는 억울함과 지친 몸과 마음을 러시아 혁명 이전의 과거를 기억하고 되살리는 것을 넘어, 글쓰기로 재가공을 완성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한다. 그가 러시아 어를 버리고 영어를 선택하며 미국 작가로서의 길을 선택했지만, 죽는 그 날까지 정착하지 않고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호텔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결국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향을, 혁명 이전 러시아를 애타게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독자가 쉽게 읽으면서 즐겁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다. 그래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어쭙잖게나마 후기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도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설을 보고 조금은 특이하게 작가의 귀족 출신을 작품과 연결지어 본 것이다. 아무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그러한 특별한 과거가 있었기에 과거와 기억, 그리고 상상을 재가공하여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불행한 과거는 친친나트의 사색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뭔가를 알고 있다. 나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표현하기가 너무 어렵다! 아니, 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친친나트의 고뇌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유럽으로 망명하기 전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렇게 정당하게 표출하지 못하고 쌓이고 쌓인 억압된 재능은 작가에게 심적 부담과 표현의 갈증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러한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간수의 열두 살 딸인 말괄량이 소녀 엠마치카는 서른 살의 유부녀 친친나트의 품에 안기며 자신과 같이 감옥을 탈출한 다음 결혼하자고 고백한다. 훗날 『롤리타』를 예상한 심오한 한 수였을까.

“시계의 숫자판은 비어 있지만 30분마다 간수가 옛 바늘을 지우고 새 바늘을 그려 넣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렇게 색칠된 시간에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계 소리는 보초가 내는 것이고,그래서 그는 보초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사형장으로의 초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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