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평전 | 윌리엄 J. 듀이커 | 기회주의자? 범죄자? 아니면 헌신적인 혁명가?
그러면서 호는 이렇게 덧붙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꿈이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그것도 아직 꿈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호치민 평전』, 556쪽)
헌신적인 혁명가에서 무원칙한 기회주의자까지
헌신적인 혁명가이자 노련한 공산주의 요원, 국제 정치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노련하고 현실적인 실용주의자, 억압받는 인민을 서구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해방하는 일에 헌신한 성자, 전 세계에 공산주의적 전체주의를 확산하는 일을 저지른 범죄자,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성실하고 소박하다는 평판을 이용한 무원칙한 기회주의자.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 있으니 다름 아닌 베트남 혁명가 호찌민 (胡志明, Ho Chi Minh: 2004년 12월 20일에 발표한 동남아시아 언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호치민’은 ‘호찌민’으로 표기)이다.
한때는 신격화의 우려까지 낳았을 정도로 폭넓은 인민의 존경을 받았음에도 호찌민으로 알려지기 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진 ‘호 아저씨’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한 프랑스 정부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오랜 시간 망명과 도피 생활을 했다. 그가 평생 사용한 가명은 50개가 넘을 정도라니 그의 과거가 베일에 가려진 것도 그렇게 무리는 아닌 듯싶다.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20여 년의 노력과 현존하는 호찌민의 모든 자료를 수렴한 끝에 완성한 『호치민 평전(Ho Chi Minh: A Life)』에서 베일에 가려진 호찌민의 과거를 포함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추적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호찌민에 대한 서로 엇갈린 다양한 평가들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역사적 자료와 해석이기도 하다.
< © Steffen Schmitz (Carschten)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 CC BY-SA> |
의도적인 이미지인가? 아니면 타고난 성정인가?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 주석이 되고 나서도 총독궁에 거주하라는 동료의 제안이 너무 호화롭다고 뿌리치고는 총독궁 구내의 조그만 오두막에 지낼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다. 온화하고 소박한 호찌민의 이미지가 진짜 그의 내면의 모습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실제로 호찌민이 어떠한 마음을 먹고 살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후세는 그의 업적과 행위만을 보고 나름의 그를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악한 행동을 일삼으면 타인은 그를 악당이라고 평가할 것이며,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선한 행동을 일삼으면 타인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왜냐하면, 한두 번의 실수로도 본심은 쉽게 탄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호찌민은 자신의 소박하고 온화한 이미지를 끝까지 잘 지켰다. 이 또한 상당한 인격 수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레닌과는 달리 혁명가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면서 언행일치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던 점은 유학자 집안에서 공부하며 자란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러나 옥에 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호찌민의 옥에 티는 재물도 권력도 아닌 바로 여자다. 그는 혁명과 베트남 독립이라는 대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에서 여성 편력을 즐겼던 것 같다. 본문에 호찌민의 사생아는 그가 65세, 또는 66세에 낳은 아들 한 명만 나오지만, 그의 사후 나돌던 소문을 보면 사생아가 더 있는 것 같다. 또한, 중국 지도자들이 마련한 호찌민의 75세 생일잔치에는 호찌민을 위해 특별히(?) 젊은 여자들이 초대되었으며 몇 달 뒤 중국의 당 지도자 타오 주가 하노이를 공식 방문했을 때,호찌민은 갑자기 이 옛 친구에게 벗을 삼으려고 하니 중국 광둥성의 젊은 여자를 하나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요청을 보고받은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고민 끝에 조용히 묻어두었다고 한다.
호찌민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베트남 독립을 위해 헌신적이고 성실한 삶을 살았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사상적 도구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택했다.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혁명가들은 조국을 식민지로 착취하는 형태로 자본주의 체제를 처음 겪었으며, 이 체제는 그의 동포들을 잔인하게 짓밟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사회주의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찌민에게서는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교조주의의 경직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필요와 상황에 따라 수단은 언제든지 바뀌고 변형될 수 있다는 사상적 유연함이야말로 베트남 독립에서 호찌민의 가장 큰 기여가 아닐까. 이 유연함이 부족했던 한반도는 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피를 뿌렸음에도 결국엔 분단국가로 고정되고 말았으며, 이후에도 사상적 유연함의 결핍은 소모적인 정치적 파벌 싸움의 소모되지 않는 밑거름이 되곤 한다.
그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얻어내기 위해 자존심과 체면까지 팽개쳐가며 이들의 비유를 맞추고 아첨하면서 현실주의적인 줄타기 외교를 벌였다. 덕분에 베트남은 중소 갈등의 위기 속에서도 자국의 이익을 성실히 챙길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도 찬양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런 그를 보고 일부는 교활한 기회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그 아첨의 목적은 사적인 이익의 추구가 아니라 대의, 바로 베트남 독립임이었으니 그의 애국을 향한 헌신과 의지만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모자라지 않다.
마치면서...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소박한 이미지는 진짜인가 아니면 단순한 책략인가? 여전히 그늘 속에 감춰진 인물 호찌민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윌리언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Ho Chi Minh: A Life)』을 통해 혁명가 호찌민의 삶과 베트남 역사의 역학 관계를 더듬어갈 뜻밖의 기회를 얻은 독자의 몫이다. 또한, 기원전부터 이어져 온 중국의 침략과 간섭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 강대국들의 국가 이기주의적 편의에 의한 국토 분단,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말미암은 동족 간의 전쟁을 겪은 베트남 역사는 통한의 한반도 분단 역사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이러한 역사적 유사점은 넘실넘실 파도를 타고 먼바다를 건너온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처럼 한국의 독자에게 특별한 공감과 메시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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