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30

전환시대의 논리 | 의식화 영양제

The logic of the transition period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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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 리영희 | 의식화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고품질의 영양제

‘객관적인 자기위치의 인식’ 없이 한 정부나 지도자나 국민이 내일의 생존을 기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제사회에서의 ‘객관적인 자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국민에게 ‘주체적인 자기’가 있을 리 없다. (『전환시대의 논리, 246쪽)

고故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70, 80년대 한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상의 은사’이자 권력으로부터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갖은 핍박을 당하며 모진 인생을 살아온 우리 시대를 대표했던 한 지식인의 논문집이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지 이미 4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논문의 주제들은 빛바랜 세월 속에 퇴색해버린 역사의 한 조각으로 굳어버렸을지 모르지만, 문장과 행간에 담긴 저자의 예리하고 객관적인 지적 편력과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놀라운 식견은 지금에 와서도 이 책 『전환시대의 논리』가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논문집에는 권력에 눌려, 혹은 아첨하느냐 반공(反共) 이외의 가치나 진실에 대해서 침묵하는 언론과 지식인에 대한 비판, 대중매체로 자리 잡기 시작한 텔레비전이 가져올 국민의 ‘백치화’에 대한 우려(TV 시청은 치매 발병 위험을 높인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반적인 안보 관계의 현황과 전망,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재등장한 일본의 배경과 현실, 한 • 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베트남 전쟁의 숨겨진 진실 등 60년대 ‘전환시대’를 거쳐 ‘화해’의 시대 70년대로 막 진입한 시기의 한반도와 이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통찰하는 폭넓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베트남 전쟁 관련 논문 두 편은 필자처럼 아직도 베트남 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모르는 독자에겐 정말 긴요한 논문이다. 베트남 전쟁을 기술한 두툼한 책들과 비교하기에는 턱도 없는 짧은 분량이지만 양보다 질이라는 말이 있듯이 핵심적인 부분만을 추스르고 객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돕는 데 손색이 없다.

이 책에 실린 여러 논문 중에서 백미를 꼽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바로 중공(현재의 중국) 근현대사를 다룬 부분을 선택하겠다. 당시 반공환자와 극우환자로 득실대던 한국에서 반공의 껍질을 벗겨 내고 중공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매우 드물었으며, 특히 ‘인류 사상 초유의 일대 실험’이라고 칭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에 대한 논문은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가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을 집필했던 상황처럼 제한된 자료로 원격 연구를 했음에도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상당히 예리하다. 당시 외부 세계에는 상부층의 권력투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내란에 버금가는 혼탁하고 무질서한 상황으로 비추었던 문화대혁명의 본질에 대해 저자는 정신주의를 앞세운 ‘인간-사상 개조운동’으로 정의한다. 이는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시킨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1981년)를 토대로 저술한 『문화대혁명사(文化大革命間史)』(진춘밍 외 지음, 이정남 외 옮김, 나무와숲)에서 문화대혁명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좌경적인 착오 중 한 부분인 마오쩌둥의 공상주의적 이상 사회 건설에서 말하는 공산주의 신인간과 비교해보면, 저자 리영희 선생의 통찰력이 얼마나 앞서간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훗날 자서전 『대화』에서도 밝혔듯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리영희 선생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문화대혁명을 본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이상에 대한 염원에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의 한 수단이 발휘되는 거대한 실험으로 문화대혁명을, 그리고 그 실험 무대로써 중국을 바라본 것 같다.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 의식화 영양제

리영희 선생은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며, 지식인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라고 말한다. 거대한 권력과 야만적인 무지의 폭력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영웅적인 지식인도,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부조리조차 고발할 수 있는 소박한 지식인도 구경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현대의 지식인은 전부 죽었다고.

실천은 믿음에서 나오며 이 믿음은 가치관과 신념에서 나오고 이 신념은 객관적인 자기 인식과 자기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전환시대의 논리』는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의식화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고품질의 영양제이다. 객관적인 논리와 예리한 통찰력, 그리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한 순수한 지성을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정독함으로써 함양할 수 있다면, 독자는 우리 사회의 실태와 그 위를 부유하는 사실과 거짓 속에서 진실을 꼭 집어낼 수 있는 독수리 같은 매서운 안목을 키우기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사회를 오염시키고 부패시키는 부조리를 쪼아대며 비판할 수 있는 가상한 용기도 발휘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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