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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30일 수요일

[책 리뷰] 청년의 내면적인 성찰과 자각을 구체화한 ~ 청년(모리 오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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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내면적인 성찰과 자각을 구체화한 성장 소설

Original Title: 青年 by 森鷗外
도쿄에 가면 하려고 고향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물거품과 같이 사라져서 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사람에게 의지해서 얻으려 하는 것은 대개 헛된 기대로 끝나는 것이라고 느꼈다. 이것에 반해서 생각지도 않게 접촉한 사람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극을 받아 꿀벌이 어느 꽃으로부터도 색다른 이슬을 빠는 것과 같이 내면에 뭔가를 얻었다. (『청년(青年)』, p268)

본의 근대 소설가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청년(青年)』은 2년 정도 먼저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산시로』를 연상시킬 정도로 등장인물의 구성이나 대략적인 이야기 흐름 등이 『산시로(三四郞)』와 꽤 닮았다. 기억나는 대로 두 작품의 비슷한 점을 추려보면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청년이 주인공이며, 주인공들은 문학을 지망한다. 또한, 주인공들은 급격한 서구 문물의 수용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본의 사상과 번화한 대도시의 격렬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갈 길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조급해한다. 도시로 상경한 주인공들에게 낯선 도시의 생활을 안내할 길잡이로서 세속적이고 적극적이며 활달한 성격의 친구인 요시로(산시로의 친구)와 세토(준이치의 친구)가 등장하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두 주인공 모두 여자 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숙맥이라는 점이다.

『산시로』의 주인공 산시로는 도쿄행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여자와 같은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산시로는 일부러 여자에게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쓰며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젊은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안절부절못한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산시로와 하룻밤을 보낸 여자는 “당신은 어지간히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라는 묘한 말과 함께 웃음을 남기고는 떠난다. 또한, 산시로는 매혹스러운 여인 사토미 미네코와의 관계에서도 청년다운 열정을 발휘하지 못한다. 산시로는 미네코의 아리송한 태도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말들을 곱씹어 보며 청춘의 고민에 빠지지만, 자신감이 부족한 산시로는 그녀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 적극적으로 다가갈 용기와 배짱을 발휘하지 못한다. 소설이 끝나갈 무렵까지 미네코에 대한 마음을 다잡지 못했던 산시로가 문득 미네코 때문에 겪는 번민이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청년』의 주인공 준이치는 미소년에 부유하게 자란 귀공자 스타일이라 여관을 가든 요릿집을 가든 뭇 여자들의 관심 어린 눈초리를 받는다. 어느 연말 모임에서 처음 만난 기생에게서는 나중에 혼자 오라는 은근한 속삭임도 듣는다. 이런 준이치에게 특별한 호감을 보이는 여자는 부유한 미모의 미망인 사카이 레이코다. 그녀는 자유극장에서 우연히 자신의 옆좌석에 앉았던 준이치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집으로 책을 빌리러 오라고 말한다. 책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준이치의 등 뒤로 하코네로 혼자 놀러 가니 시간 있으면 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다.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한 사카이 부인의 태도에 준이치는 심란하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 그러다 갑자기 마음을 굳혀 하코네로 서둘러 출발한다. 준이치는 차마 부인이 묶는 여관으로는 가지 못하고 근처에 묵다가 산책 나온 부인과 우연히 마주친다. 그녀 곁에 어떤 건장한 남자가 있는 것을 본 준이치의 마음은 불쾌해진다. 그날 저녁 부인의 방으로 초대되어 갔지만, 부인이 준이치를 대하는 태도에서 예전의 그 수수께끼 같은 미묘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시로와 준이치 둘 다 일상에서는 소심한 면을 보이며 겉으로는 유유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내면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도시에서 맞닥트린 새로운 인물들과 새로운 문물은 구시대와 신시대, 구사상과 신사상,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으레 일어나기 마련인 갈등을 빚어내면서 두 청년의 내면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 자극은 왕성하게 불타오르는 청년다운 신선한 지성과 끈기 있는 고찰로 이어지고 이를 거듭 분석하고 해석하는 두 청년은 내면의 성장을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사회적인 비판으로 이어진다.

『산시로』가 주로 산업화한 일본 사회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을 주로 하고 있다면, 『청년』은 사상계, 특히 문학계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 그 예로, 하코네에서 만난 화가 오카무라는 대화의 화제가 되는 작품에 대해 읽어보지도 않고 주변의 말만 듣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저속한 인간이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예에 대한 비난은 대개 이 오카무라 같은 사람이 말을 퍼뜨리는 것이며, 작품 그 자체가 사회의 배척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고, 비평가끼리의 공격적 비평에 사회는 뇌동하는 것이라고 준이치는 생각했다. ‘비평가끼리의 공격적 비평’은 파벌을 형성하여 순수한 비판 의식을 잃은 비평가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순수한 비판 정신을 발휘하여 보다 더 풍부한 문학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문단을 좌지우지하여 개인적 야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다.

이치는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거대한 근대화의 물결 앞에서 동요한다. 그를 보호하고 지탱해 주는 신념이 있지만, 거대한 도시와 거대한 사상가들 앞에서 자신은 제대로 된 소설도 발표하지 못한 미숙아일 뿐이다. 아직도 자신은 구습에 얽매이는 것 같아 불안하고 문학 지망생으로서 뭔가를 써야 하는 데 아무것도 쓰지 못해 조급하다. 이는 비단 준이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대인들도 불투명한 미래와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대적 사명 앞에서 불안에 떨기는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워지는데 과연 나는 그 변화에 맞추어 제대로 따라가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불안하고 뒤처지는 것 같아 조급해진다.

이것은 남들이 아는 것을 단순히 내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일까. 아니면 남들이 내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것을 가지고 뭔가 더 이득을 얻거나 내가 갖지 못한 좋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질투심에서 오는 실재적 불안일까. 아니면 그 둘 다일까.

어쩌면 ‘불안’은 산업 시대가 가져온 불치병인지도 모른다. 물질적 풍요가 가져온 대가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불안에 떤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다 되는 만만한 세상은 아니지만, 불안에 떨며 걱정하던 것이 모두 현실로 일어날 만큼 그렇게 잔인한 세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병적인 집착을 버리고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면 그동안 우리가 놓친 ‘새롭지 않은 새로운’ 것들에서 우리를 깜짝 놀랄게 할 뭔가를 발견할 때가 있다. 삶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은 것이다. 명상을 통해서든, 문학을 통해서든, 아니면 여행을 통해서든 그렇게 발견한 삶의 또 다른 의미는 삶의 지평선을 확장시키며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다면, 그래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면, 더는 병적인 불안에 떨 필요도 없다.

이 리뷰는 2016년 3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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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8일 금요일

[책 리뷰]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 ~ 미완의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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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

Original Title: 未完のファシズム: 「持たざる國」日本の運命 by 片山 杜秀
일본의 생산력이 가상적국 여러 열강을 좀처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격차에서 생기는 알력이야말로 1차대전 종결 직후부터 일본 육군을 계속 괴롭혀온 난제였으며, 현실주의를 어느 틈엔가 정신주의로 반전(反轉)시켜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완의 파시즘(未完のファシズム)』, p114)

그들은 정말 ‘승리’를 확신했을까?

두 알다시피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 오아후섬의 진주만에 있는 미군 기지를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다룬 영화 「도라! 도라! 도라!(Tora! Tora! Tora!, 1970)」에서 진주만 공격을 성공으로 이끈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본국에서의 금의환향 자리에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라고 진주만 공격을 회상한다. 제독의 우려는 실현되었고, 역시 모두 알다시피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참혹한 패망으로 끝났다.

당시 일본이 일찍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국력에서 아직은 영국이나 미국, 소련 등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니 터무니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아시아라는 불모지에서만 빛나고 근사해 보이는, 서구 문명이 봤을 땐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비틀거리는 아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의도와 전쟁 중에 보여준 무모하고 비상식적인 전투 방식을 통틀어 우리는 보통 ‘광기’였다고 말한다. 미치지 않고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정말로 그들 중 일부는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왜 그들은 그토록 ‘광기’에 휩싸였을까. 설령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왜 행동은 다른 이들의 ‘광기’를 그대로 답습했던가. 그것은 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이 집요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세뇌 때문인가.

그들은 일본인의 미의식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사쿠라’를 이용하여 병사의 죽음을 미화했다. 사쿠라가 지듯 쓰러지는 젊은 병사들은 아름다웠다. 그들의 육신은 전장에서 사라질지라도 영혼은 봄이 되면 사쿠라가 피듯 야스쿠니 신사에서 다시 환생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먹혀들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물질적이고 물량적인 면에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밀리지만 강력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돌격만으로 미국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1차대전으로 ‘물량전’이라는 대세를 경험한 일본 육군

타야마 모리히데(片山 杜秀)의 『미완의 파시즘(未完のファシズム: 「持たざる國」日本の運命)』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저자 가타야마 모리히데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파시즘은 메이지 헌법에 저지당한 총력전 체제로서 미완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바로 1차대전이 일본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운 저자의 의도다. 태평양 전쟁에서 보여준 일본의 거친 광기의 물살은 이미 전쟁 전부터 흐르기 시작했고, 그 원류는 1차대전을 평가하고 분석한 일본 육군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차대전은 일본, 특히 육군의 군사 철학에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차대전 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판 가른 뤼순 전투에서 일본은 시체의 산을 넘고 넘어 승리를 이루었고, 그 시체는 러시아 병사의 시체가 아니라 일본 병사였다. 보급과 군사 과학에서 앞서는 러시아를 이기려고 선택한 일본의 전략은 인해전술과 전근대적인 공격 정신 일변도였다. 그것은 당시 메이지 후반의 공업생산력이나 자금력이 러시아를 상대로 탄환이나 포탄을 마구 퍼부을 정도로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본이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연합군 측으로 가담해서 독일군을 상대로 치른 칭다오 전투에서는 이후 일어날 모든 전투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러일전쟁에서와는 다르게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군 점령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나서 보병이 뒤처리하는, 이른바 물량전의 위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 전쟁사의 한 획을 긋는 중대한 경험이자 발견이었고, 이런 1차대전의 경험을 통해 일본 육군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물량전, 총력전, 과학전, 소모전, 보급전이라는 것을 절실히 배웠어야 했다. 그리고 실제 몇몇 육군의 장교들은 그러했다. 1926년에 출간된 <구주전쟁총서>의 제5권 「세계대전의 전술적 관찰」에서 러일전쟁에 대한 부분을 요약한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근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전법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간신히 이겼을 뿐이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육탄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일본 육군의 공격 정신도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관찰』은 그렇게 대담하게 주장하고 있다. (『미완의 파시즘(未完のファシズム)』, p97)
중요한 것은 기계의 정밀도, 정신력이 좌우하는 여지는 좁아지며, 마침내는 소멸해버릴 것이다. (『미완의 파시즘(未完のファシズム)』, p98)
완전히 기계 전쟁이다. (『미완의 파시즘(未完のファシズム)』, p99)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과학력과 생산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일본 육군의 1차대전 학습 결산으로서 의 『관찰』은 그런 식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미완의 파시즘(未完のファシズム)』, p99)

끝내 전수되지 못한 1차대전의 가르침

기에서 바로 ‘가지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를 상대해야 하는 군인으로서의 딜레마가 생긴다. ‘가지지 못한 나라’ 일본의 국력으로 ‘가진 나라’이자 미래 가상의 적인 소련이나 미국 같은 나라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물량전을 치른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것이 장기화된다면 일본의 파국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앞으로 일본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해도 다른 국가들 역시 발전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영영 상대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군인이라면 상대가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전쟁이 발발한다면 현재 상황에 걸맞은 최고의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 미리 패배를 인정해 버린 채 전쟁에 대한 각오나 의지는 엿 바꿔 먹어 버린 군대라면 있을 필요조차 없다. 또한, 패배를 인정한다고 해도 전쟁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이런 난제에 빠진 일본 육군은 어느샌가 ‘정신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흔히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려는, 그런 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독일이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 보여준 타렌베르크 전투는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를 이길 수도 있다는 착각을 안겨주었다. 이 전투에서 독일은 13만 명으로 50만 명의 러시아군을 도륙하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포위섬멸전을 완성했다. 일본 육군은 이 전투를 통해 열세라도 기력과 창의, 궁리와 작전으로 속전속결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렇다면 굳이 병참도 필요 없다. 그래서 일본 육군에 정신주의와 속전속결 사상을 널리 퍼트린 『통수강령』과『전투강요』에서 1921년 판에는 있었던 ‘병참’이란 항복이 1928년 개정 성안에는 아예 쏙 빠졌다.

그런 식으로 『통수강령』과『전투강요』를 최종 수정했던 황도파들은 ‘소질이 우등한 적에게는 적용되면 안 된다. 일본은 장비도 좋고 보급력도 충분한 적과는 절대로 전쟁을 벌이면 안 된다.’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군인으로서의 체면과 위신상 대놓고 그런 문구를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군부의 패권을 계속 장악하는 한 전쟁 상대는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통수강령』과『전투강요』가 1936년 2 • 26 사건으로 황도파가 통제파에 패해서 실각하고 나서도 수정되지 않고 살아남아 그대로 미국에 적용된 것이 바로 태평양 전쟁이다. 심오한 무공은 오직 책으로만 전수될 수는 없다. 그 무공을 체득한 사부로부터 구전을 통해 무공의 오묘한 이치도 함께 전수받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그 무공을 완전히 터득할 수 있다. 즉, 통제파는 『통수강령』과『전투강요』의 구전으로만 전수될 수 있는 가르침은 받지 못하고 책에 적힌 글자 그대로만 믿고 따랐던 것이다. 그것은 ‘옥쇄(玉碎)’와 ‘반자이 돌격’, 그리고 ‘가미카제’로서 비참하게 연출되었다.

마치면서...

본이 2차대전에서 보여준 광기의 또 다른 원인을 『미완의 파시즘』은 육군 철학에서 찾고 있다. 오오누키 에이코(大貫 惠美子)의 『미의식과 군국주의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ねじ曲げられた桜―美意識と軍国主義)』(이향철 옮김, 모멘토)는 그 원인을 문화적인 면, 즉 ‘사쿠라’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면,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책은 군사적으로 풀어쓴 셈이다. 참고로 『미완의 파시즘』에서 ‘사쿠라’라는 단어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1차대전을 통해 배운 것을 어리석게도 헛되게 사용한 일본은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고 참혹하게 패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이오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현재 남한은 병력 감축 중이다. 이것은 현대전에 걸맞은 물량전, 과학전, 소모전, 그리고 국가의 모든 산업 및 생산 시설과 온 국민을 조직적이고 통제적으로 총동원하는 총력전으로 북한을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도 ‘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몇 년 전 예비군 훈련 때 받은 구식 총은 아무리 해도 발사되지 않는, 케케묵은 카빈총이었다. 우리가 육이오로부터 받은 유산이 겨우 카빈총으로만 끝난다면 제2의 육이오가 발발해도 그때처럼 북한의 전격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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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2일 토요일

[책 리뷰] 이상을 품는 것, 그것은 청춘의 특권 ~ 봄(시마자키 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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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품는 것, 그것은 청춘의 특권

Original Title: 春 by 島崎 藤村
쓸쓸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공상의 세계를 꿈꾸며 그는 머리를 창가에 대며 생각했다. “아,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봄』, p370)

자는 청춘의 고뇌를 어떻게 보냈는가? 혹은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시마자키 도손(島崎 藤村)의 『봄(春)』을 읽고 곰곰이 자문해본다. 그때 그 시절 무엇이 날 사로잡았었나, 고뇌라고 할 만한 고뇌가 있었던가, 어떤 꿈과 어떤 이상을 품고 살았던가. 나의 초췌한 뺨을 빈틈없이 몰아치는 초겨울의 건조하고 쌀쌀한 공기를 가르면서, 도서관에서 빌리지도 않을 이 책 저 책을 무심코 펼쳐 보이면서, 허망했던 지난날을 곰곰이 회상해본다. 그러나 딱히 이렇다 할 뭔가 떠오르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보낸 것은 아닐 텐데 하고 되새김질해보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은 관중이 빠져나간 축구장처럼 공허하다. 그 대신 『봄』에 등장하는 기시모토 스데키치를 청춘의 고뇌로 내세워본다. 비록 지금과는 상황이 다른 메이지 유신의 격동기에 살았던 기시모토지만, 그의 고뇌는 청춘이라면 한 번쯤 겪을법한 보편적 문제이며 청춘의 당면한 문제이다.

는 약혼자를 가진 여자를 사랑한다. 여러 여자에게 끌리는 자신의 무정함을 부끄러워한다. 사물 깊숙이 숨겨진 뜻을 사고한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격렬한 정신적 동요를 이겨내지 못한 그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집을 뛰쳐나와 방랑한다. 슬피 울면서 가슴 속의 고통을 잊으려고 한다. 까까중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법의를 걸치며 진짜 떠돌이가 되어 굶주림과 피로에 지치기도 한다.

방랑을 끝내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앞길의 방향을 정하지 못해 고뇌한다. 글쓰기로 정신의 동요를 잠재워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도기에 그림을 그리는 직공도 하루 만에 포기한다. 타인이 전심전력으로 일하는 모습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은 그러지 못한다. 집안은 기울고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삶의 갈림길에서 우물쭈물하는 자신이 다른 친구들에게 뒤처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한때 나폴레옹 전기에 감격해 울며 야심을 키웠던 그는 결국 많은 것들에 흥미를 잃는다.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다. 이젠 자신의 성실함과 정직함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청춘의 오만함은 결코 그에게 패배를 인정하게 하지 않는다.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끝까지 저항하고 버티는 그 강인함과 오만함이야말로 청춘의 고뇌이다. 그 고뇌 속에서 그는 변화하고 성장하며 성숙해진다. 모호했던 청춘의 공상은 서서히 현실로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그는 어른이 된 것이다. 그는 새로 얻은 학교 선생 자리를 찾아 열차를 타고 도쿄를 떠난다.

쓸쓸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공상의 세계를 꿈꾸며 그는 머리를 창가에 대며 생각했다. “아,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봄』, p370)

기시모토가 공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방황하다 결국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리면서 청춘의 고뇌로 얼룩진 인생의 봄은 그 쓰디쓴 행보를 마감한다. 하지만, 기시모토의 친구 중 일찌감치 결혼한 아오키는 혼자 세상과 싸우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청년이다. 그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타파하려고 고군분투하는 투쟁가이다. 그는 그 야심을 위해 한때 정치에도, 그리고 종교에도 몸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할 마지막 도구로 선택한 것은 ‘글’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한 사람의 힘으로 파괴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견고했다. 마침내 아오키는 우뚝 선 산처럼 요지부동인 현실의 철벽을 깨닫는다.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어 一 나는 세상을 부숴 버릴 작정이었는데 도리어 나 자신이 부서져 버렸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봄』, p164)

세상을 향한 혼자만의 고군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조금도 머리를 쉬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아오키는 결국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힘조차 모두 소비하고 만다.

본 근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이나 인문학 서적을 보면 당시 많은 일본 지식 청년들이 이상을 품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 맞추고 적용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다. 『봄』에 등장하는 청년들보다 한 세대 정도 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미의식과 군국주의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이향철 옮김, 모멘토)를 보면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로 선발된 수재들은 서구 문명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일본을 걱정하며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개인적 성취와 사회적 책임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시 젊은 지식인 사이에서 “모든 것이 파괴된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선 불사조”라는 문구가 유행할 정도로 이상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열정은 혈기왕성한 시절에 으레 치르는 잔병치레로 보고 넘어가기에는 심상치가 않았다. 심지어 어느 학도병은 일본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뜻에서 패전을 환영하기도 했다.

어쩌면 새벽이슬처럼 순수하며 우주처럼 원대한 이상은 청춘만이 품을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회로 첫발을 내디디며 현실에 오염되는 순간, 마음속에 품어 왔던 꿈은 물거품처럼 사그라지고,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낭만적이고 원대한 청춘의 이상은 현실이라는 극히 미시적인 세계로 좁혀지면서 세속적인 처세술로 전락한다. 그렇게 청춘의 무대는 막을 내리고, 이렇게 한 번 내려진 무대의 막은 다시는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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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6일 일요일

[책 리뷰]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그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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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레이첼 캌슨)’, 그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Original Title: Silent Spring by Rachel Carson
진실을 밝혀야 할 과학이 ‘이익과 생산이라는 현대적인 신을 섬기기 위해’ 타협점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과학계와 산업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카슨은 이렇게 물었다. “과학단체가 무언가 이야기할 때, 우리가 듣는 것은 진정한 과학의 소리인가 혹은 기업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리인가?” (『침묵의 봄』, p340)

식이 자라는 밭과 풍요로운 농작물 사이에 자리 잡은 목가적인 마을이 있다. 마을은 시골 인심만큼이나 넉넉한 폭을 가진 들길로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고, 길가를 장식한 다양한 나무와 꽃들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철마다 바뀌는 새들의 노랫소리에 사람들의 귀는 행복했으며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차갑고 맑은 물이 넘쳐 흐르는 하천에는 언제나 물고기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렇게 몇 해가 무난하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병이 이 지역을 뒤덮어버리더니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축들은 시름시름 앓다 죽었으며 농부들의 가족도 앓아누웠다. 의사들도 병의 정체를 알지 못해 당황했다. 그리고 마을과 그 주변에는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그 많던 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새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간질여주던 풍요로운 지저귐도 사라졌고,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엎질러진 물처럼 그곳을 뒤덮었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침묵의 봄(Silent Spring)』 첫 장에서 우화를 통해 표명한 ‘침묵의 봄’은 아마도 이런 ‘침묵’일 것이다. 봄이 와도 새들은 지저귀지 않는다. 장마철 한 차례 비가 오고 난 후 맞는 밤의 정적을 앙증맞게 깨트리던 카랑카랑하면서도 은은한 개구리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을로 들어서는 늦여름 밤에 아늑한 자장가처럼 우리를 포근하게 재워주던 찌르레기도 울지 않는다. 자연을 뒤엎은 정적. 그것은 앞으로 닥칠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알리는 폭풍 전야나 다름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레이첼 카슨이 걱정한 ‘침묵의 봄’은 아직은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용감하고 진실 어린 목소리가 당시 무분별한 화학방제로 말미암은 참혹한 자연파괴에 침묵하거나 외면했던 대중과 정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난 사람들이 간혹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한 사람이 역사를 바꿨다’라고 무언가를 치켜세우는 것을 지나친 과장이라며 반신반의했었는데, 레이첼 카슨과 그녀의 마지막 저서 『침묵의 봄』은 그런 나의 의심에 종지부를 찍는 ‘팩트’가 되었다. 그녀와 이 책은 진실로 그런 칭송을 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

류가 자연을 숭배하던 시절의 조상은 자연 앞에서 겸손했다. 그들은 자연이 돌아가는 자세한 작동 원리는 몰랐지만, 자연에는 조화와 질서가 존재하며 그 균형이 깨지지 않아야 자연이 건강하다는 것과 그래야 자신들도 건강할 수 있다는 자연의 섭리를 인지할 정도의 지혜는 충분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보다 보이고 만지며 느낄 수도 있으며 실제로도 삶을 지속시켜 주는 온갖 혜택을 주는 자연을 숭배한 것은 어찌 보면 매우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오만함으로 타락시켰다. 사람이 뭔가 좀 배우면 우쭐거리듯, 인류는 과학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그 위대한 힘 앞에 경건한 마음을 갖기보다는 촐랑대며 과학의 힘을 과시하기에 바빴다. 자연을 정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되먹지 못한, 그리고 가능하지도 않은 환상을 품었다. 그 결과 자연이 가르쳐 준 자연방제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을 조급한 마음과 과학에 대한 맹신, 그리고 눈앞의 이익에 굴복하여 무분별한 화학방제를 시작했고, 그 참담한 결과는 『침묵의 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첼 카슨 같은 선지자 덕분에 이 책이 출판될 당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신바람 나게 뿌려대던 DDT 같은 악명 높은 화학물질은 요즘에는 많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인류는 여전히 지구 생명의 역사는 생명체와 자연과의 상호작용의 역사라는, 그리고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생태계는 은밀하면서도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있다는 인류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산다. 이런 망각과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자연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인류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침묵의 봄’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 무서운 사실은 ‘침묵의 봄’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침묵의 봄’을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여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다 만약 그들이 과거의 기록이 담긴 미디어들을 접하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연은 ‘침묵의 봄’이 아니라 활력과 생동감이 넘치는 ‘생명의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를 원망할까?

이 리뷰는 2016년 3월 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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