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요한 하위징아 | 문화를 태동시킨 놀이
Original Title: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by Johan Huizinga
순수한 탐욕은 거래도 하지 않고 놀이도 하지 않으며 노름도 하지 않는다. 과감하게 나서고, 모험을 걸고, 불확실성을 견디고, 긴장을 참는 것, 이런 것들이 놀이 정신의 본질이다. 긴장은 게임의 중요성을 배가(倍加)하고, 긴장이 커질수록 놀이하는 사람은 자신이 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p116)
‘생각하는’ 사람? 아니 ‘놀이하는’ 사람!
현생 인류의 분류학상 학명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가 추천한 인류 지칭 용어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즉, 이 말은 인류가 ‘놀이하기’를 통해서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람의 놀이 행위를 중요하다고 본 것인데, 놀이가 문화에 영향을 얼마나 미쳤는지, 또는 그렇지 않았는지를 떠나서 사람은 다른 영장류와는 달리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에 집착할 뿐만 아니라, 때론 ‘동심의 세계’를 잊지 못해 그 세계에 다시 빠져들어 어린이가 되고 싶어 하는 경향을 보면 놀이가 사람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인류의 특징을 가리켜 어느 책에선가 ‘유아성숙’이라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다른 영장류처럼 완전하고 성숙하고 털이 풍성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아이의 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한 채로 어른이 된다는 뜻인데(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털이 없다?), 어찌 되었든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에 집착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두뇌를 자극하고 육체를 단련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놀이의 특징
놀이가 원시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즉 문화보다 먼저 앞서 존재함으로써 문화를 태동시켰다는 조금은 낯선 하위징아의 이론에서 정의하는 놀이의 특징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고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p41)
‘자발적’이라는 단어에서 ‘축구 사역’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축구 사역’이란 말은 군대에서 계급이 낮은 장병이 선임자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 축구 시합에 참여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때의 축구는 즐거운 놀이가 아니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이자 노동이다. 놀이의 자발성은 (요즘 젊은이들에겐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어렸을 때 ‘술래잡기할 사람 여기 붙어라~’라고 소리쳐 동네 애들을 불러모아 놀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이다. 놀이는 ‘실제’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p42)
‘술래잡기’, ‘딱지치기’, ‘다방구’ 등의 놀이가 진행되는 공간 역시 참여하는 사람들만 이해하고 관계되는,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임시적인 또 다른 현실이다. 이러한 점은 온라인게임도 마찬가지다.
놀이의 형태적 특징과 관련하여 모든 학자는 무사무욕(disintere-stedness)을 들고 있다. (p43)
온라인게임을 즐기며 아이템 현금거래로 손을 뻗는 순간, 즉 과도한 현금을 게임에 쏟아붓는 순간 게임은 일상 아닌 것에서 일상으로 돌아와 현실이 된다. 그리고 과도하게 진지해진다. 즉 놀이의 순수성을 잃은 것이다. 이것은 막대한 자금의 이적료와 후원자가 오고 가고 경기 결과를 두고 내기를 하는 상업적인 현대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놀이는 그 장소와 시간에 있어서 ‘일상’생활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처럼 따로 떨어져 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 놀이의 세 번째 특징이다. (p45)
보통 ‘술래잡기’를 시작할 때 어느 거리까지 숨어도 되는지 규칙이 정해지며, ‘다방구’를 할 때도 술래를 피하고자 마을을 벗어나면서까지 마냥 도망가지는 않는다.
게임의 규칙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고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 사회는 게임을 망치는 자보다는 게임을 속이는 자에게 훨씬 관대하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전자(게임을 망치는 자)가 놀이의 세계를 아예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p48)
주지하다시피 규칙이 없으면 놀이는 순조롭게 진행할 수가 없다. 일반적인 현대 스포츠에서도 엄격하게 경기 규칙이 정해져 있고, 이를 심판하는 주심이 경기에 참여한다. 그리고 게임을 속이는 자, 게임의 규칙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벌칙을 주지만 누구나 감당할만한 가벼운 벌칙이다. 심지어 우루과이 국가대표 축구선수 수아레즈처럼 상대편을 이로 무는 행위도 규칙대로 징계를 받을 뿐이지 축구선수로의 자격을 발탁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승부 조작이나 관중 난입 등으로 게임을 훼손하고 망치려는 자들은 선수자격 박탈이나 경기장 영구 입장 금지 등의 중징계를 받는다.
긴장의 요소는 놀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한다. 문제를 파악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노력을 가져온다. (p47)
이런 점 때문에 어린아이에게 적절한 놀이는 지적 능력과 인성을 향상시킨다. 그리고 어른에게는 스트레스 해소와 기분 전환에 도움을 준다. 또한, 요한 하위징아가 언급한 놀이의 특징들을 내가 어린 시절에 즐겨 놀았던 놀이에 비추어보면 얼추 들어맞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심’을 죽인 ‘진지함’은 더는 놀이가 아니다!
요한 하위징아는 순수했던 원시 시대 놀이-의식(意識)은 다양한 놀이 형태와 의례 속에서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표출되었으며 리듬, 조화, 변화, 교대, 대조, 클라이맥스 등을 바라는 인간의 생래적 요구가 충분히 개화(開花)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문화를 생산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놀이-의식에 명예, 위엄, 우월함,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이 결부되고, 주술과 신비 의례, 영웅적 동경, 음악 • 조각 • 논리의 예시(豫示)는 고상한 놀이 속에서 형태와 표현을 얻으려 했으며 이러한 열망의 사회적 형태는 경기와 경주, 공연과 전시, 춤과 무용, 행렬, 가면극, 토너먼트, 철학, 시 등으로 표출되었고 말한다.
놀이의 형태로 발생했고, 태초부터 놀이되었던 문화는 장엄함을 과시하는 기사도 놀이와 정교한 궁정 연애 놀이 등의 놀이 정신으로 충만했던 중세시대에도 그 명목을 이어갔으며, 르네상스와 휴머니즘 시대에는 전체적인 정신적 태도에 놀이의 태도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뛰어놀 수 있는 이상적 공간을 만들자는 낭만적 계획 그 자체가 하나의 놀이 과정이었던 낭만주의 시대까지 문화는 놀이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의식, 교육적 열망, 과학적 판단이 문명의 지배 요소가 되었던 19세기 산업 시대를 거치면서 문화가 순수한 놀이 정신을 잃어버림으로써 문명은 전체적으로 더 진지해졌고, 그래서 진지함을 대표 철학으로 삼는 현대 문화는 ‘놀이되는’ 것을 중단했으며, 진정한 놀이가 되려면 어른이 동심으로 돌아가 놀이하는 그런 게임이 되어야 한다고 요한 하위징아는 충고한다.
마치면서...
눈부신 기술과 과학, 거대한 자본과 소비가 현대 문명을 이끄는 지금은 원시 시대에 놀이가 인류의 문화를 잉태했듯이 문화가 놀이를 잉태하면서 문화와 놀이가 서로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첨단시대다. 여기에 약간의 상업성을 배제하지 않고 공간과 시간적인 제약에 쫓기는 한국인의 숨 가쁜 현실을 참작한다면, 많은 사람이 즐기는 온라인게임은 게임에 참여하는 사용자의 의도와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는 과거의 놀이를 대체하는 현대식 놀이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요한 하위징아가 정의한 놀이의 특징대로 규칙이 있고, 특정한 환경적 제약(인터넷, 컴퓨터)을 가지며, 일상생활과는 전혀 다른 가상의 현실을 제공하고, 컴퓨터를 조금이나마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유롭게 참여하고 나갈 수 있고,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사람을 완벽하게 몰두하게 한다. 그리스의 경기처럼 경쟁적 요소도 있지만, 선악의 구별이 없으며 도덕의 바깥에 있다. 보통은 물질적인 이득과는 관계가 없다. 또한, 길드나 인터넷 카페 같은 사회적 집단의 형성을 촉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놀이적 특징에도 온라인게임을 순수한 놀이로 즐기려면 도박처럼 중독되지 않고 게임 시간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참여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이것은 “중요한 건 승부가 아니라 게임이다”라는 네덜란드 속담처럼 순수하게 게임을 게임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의 시민이나 중세의 귀족처럼 여가가 많지 않은 바쁜 현대인에게 틈나는 대로 간편하고 빠르게 즐길 수 있는 컴퓨터 게임이 전 세계 수많은 사용자를 끌어당긴 것은 ‘놀이하는 사람’으로서의 인류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아마도 요한 하위징아는 이 정도까지 전자기기를 활용한 게임 문화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정하고 순수한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반 중 하나임을 증명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지금은 문화와 문명을 이끄는 원동력으로써 놀이의 힘이 원시 시대만큼 강력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은 ‘놀이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으며 그러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놀이’와 ‘놀이하는 사람’은 인류를 상징하는 여러 대표 아이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폐쇄적이고 비운동적인 온라인게임이 다른 건전한 놀이 문화를 제치고 득세하는 것은 그리 반가운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주거 지역에서는 아이나 어른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안심하고 뛰어놀만한 안전하면서도 넉넉한 공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과 기껍게 여러 사람과 어울려 허심탄회하게 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웃과의 소통 부족을 방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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