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6

침묵의 언어 | 언어로서의 시간과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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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언어 | 에드워드 홀 | 언어로서의 시간과 공간

‘코리언 타임’ 역사가 말하는 문화 충돌

내한국 전쟁 전후 미국인은 한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약속 시각에 늦게 도착하는 행동이나 그 버릇을 이르러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좀 더 자세한 뜻을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면,

이 말은 한국 전쟁 때 주한 미군이 한국인과 약속을 한 뒤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오는 한국인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한국인은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시간관이다.'라고 하여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위키백과, 「코리안 타임」)

당시 한국 국민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닐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없어 미국식 시간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인이 한국인은 약속 시각에 늦게 도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불만을 토로할 수는 있을망정, 문화적 배경을 먼저 살피지 않고 무조건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자문화 중심주의적인 부당한 편견이다.

그 후 이러한 미국인의 오만한 비난이 약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빨리빨리’라는 구호 아래 필사적으로 일궈낸 고도성장과 미국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으로 어느새 「코리안 타임」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5분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하는 ‘코리안 타임’이 정착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웃지 못할 역사가 어느 문화 사이에나 존재하는 문화 충돌의 한 예임을 간파한다면,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시간 문화가 미국의 의도대로 ‘신속’ ‘정확’하게 미국식으로 정착된 점을 깨닫는다면 씁쓸한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국가적인 장기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한국 특유의 주먹구구식 행정이, 남아시아인들이 수천 년 이상의 ‘장기간’을 바라봤던 것과는 달리 고작 10년이나 20년 앞을 바라보는데 급급한 미국의 너무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시간개념이 도입된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나 같은 경우 약속장소에 보통 10분 이상 일찍 도착하도록 노력하기 (약속장소 근처에 서점이나 도서관처럼 시간을 쉽게 보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한두 시간 정도 일찍 나갈 때도 있다) 때문에 아무 연락 없이 5분 이상 늦게 도착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한다. 특히 습관적으로 그러한 사람은 더더욱 싫어한다. 아마도 이러한 점은 미국식 시간개념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이며 그만큼 우리의 문화가 많이 서구화, 좀 더 정확하게는 미국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의 언어, 공간의 언어

‘코리안 타임’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시간개념을 가진 문화 간의 충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그들보다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흔히 범하는 오류가 이유 없이 자신들 문화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경향이다. 그들은 진지하게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더 잘 사니까 그들도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맞추어야 한다는 지배적인 오만함을 품고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편견에서 문화 충돌이 발생하지만, 그들은 근본적인 원인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산업화하지 않은 나라들의 국민이나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당찮게 ‘미개인’이라고 부른다.

좀 더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을 존경하는 뜻에서, 또는 약속의 중요함을 인정하는 의미로 약속장소에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나간다. 그러나 마음 내키지 않는 약속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만남은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일이 태반이며,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 모욕을 주고자 한다면 일부러 30분 이상 늦게 도착하기도 한다. 일부러 늦장을 부리는 예는 여자가 마음에 안 드는 남자의 간청에 못 이겨 억지로 만날 때를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에서 시간이 말하는 언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늦게 도착한 사람이 어떠한 변명을 하든 우리는 늦게 도착한 이유에 대해 별의별 의심을 떠올리게 된다. ‘저 사람이 날 물 먹이는 건가?’, ‘그녀가 나와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내가 뭘 잘못했나?’ 등등. 이루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시간이 말하는 언어는 꽤 진실하다.

이처럼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도구는 언어가 전부는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시간의 언어 외에 또 다른 ‘침묵의 언어(The Silent Language)’로써 공간의 언어도 있다.

보통 대학교 강의실에서 자리는 자유롭게 앉을 수 있다. 그러나 학기 초가 조금 지나면 그러지 못한 광경을 볼 수 있다. 학생들은 대부분 전날 앉았던 자리를 찾아가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누가 어디에 앉는지 대충 정해진다. 그러다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면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불쾌해진다. 서양처럼 방이 많은 저택에는 아버지의 고유하고 신성한 자리로서 서재가 존재한다. 또한, 작업실 역시 아버지, 또는 남자들의 공간이다. 자신의 방도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다. 한국 같은 경우 현대화되고 단순화된 주거 설계 때문에 구분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예전 전통 가옥에서 부엌은 여자들만의 공간이었고 반대로 사랑방은 남자들만의 공간이었으며 이 공간을 서로 침범한 남녀는 칠칠치 못하다고 어른들의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남향, 북향집을 선호했으며 미국에서 공간은 좌표체계로 구분하는 데 비해 한국은 지역(洞)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공간의 종류와 상황, 또는 상대방과의 거리에 따라 목소리의 강약뿐만 아니라 대화 내용도 다르다. 이것들 모두 공간의 언어다.

The Silent Language by Edward T. Hall

속박으로서의 문화, 이해로서의 문화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 1959년 발표한 『침묵의 언어(The Silent Language)』는 시간과 공간의 언어를 포함한 일련의 행동 속에 복잡하게 숨겨진 비언어적인(nonverbal) 맥락을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형태로 파악하여 언어로 풀어쓴 책이다. 에드워드 홀은 문화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상호연관된 일련의 복잡한 활동이며, 문화도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그 기원이 깊이 묻힌 활동”이라고 요약했다. 부연하여 “문화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거대한 폭과 깊이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차원들을 지니고” 있다며 그 차원을 공식적 • 비공식적 • 기술적 세 차원으로 명명하고, 이들 차원으로부터 개별체, 고립요소, 양식으로 분석하여 문화의 성격에 관한 통문화적 연구를 완성했다. 이렇게 학문적 설명을 들이대니 다소 딱딱해 보이지만, 모든 문명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모델로 삼은 것과 홀이 경험했던 체험이나 다양한 사회의 문화적인 예,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적 특성을 사이사이 곁들임으로써 좀 더 쉽게 풀어쓴 점은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도 상당한 문화적 이해력을 쌓을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홀은 문화가 사람에게 제공하는 숨겨진 통로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 사람은 그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곧 문화는 사람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감옥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홀은 사람은 자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활동하고, 생활하고, 숨 쉬고, 자신의 독자성을 개발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문화를 이용하려면 그것에 관해 훨씬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문화 연구의 궁극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이 외국 생활과는 무관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이유는 자신을 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다른 사람의 문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삶의 세부사항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주고 대조와 차이라는 충격을 통해서 삶에 관한 관심도 촉발될 수 있으며, 이것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여태껏 지각되지 않았던 영역들을 탐구하는 새로운 영역 개척으로 이어져 지적 능력의 퇴화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이 책에서 밝히는 홀의 모든 체험과 예는 미국인을 기준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미국으로(꼭 미국이 아니더라도) 여행하거나 이주, 또는 유학이나 출장 가는 사람에게는 좀 오래된 책이기는 해도 미국 문화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문화의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언자로서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나처럼 국외여행과는 별로 인연이 닿지 않은 사람이라도 홀이 말한 것처럼 자신을 알고자, 그리고 이웃과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알기 위해서라도 문화는 고찰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홀은 아이들이 문화를 배우는 방식에 대해서도 개괄하고 있으므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만한 내용도 들어 있다.

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 언급한 태초의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우린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화에 순응하면 안정적인 삶은 보장되지만, 일면으로는 교과서적인 단조롭고 권태로운 기계적인 삶이 될 수도 있다. 반면에 문화에 반항하는 일탈적인 언동이 성공한다면 유명인사가 되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이끄는 역동적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심하면 정신병자 취급당할 수도 있으며 최악에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화를 세심하게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가 사는 문화를 우리가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정에는 ‘문화’라는 색안경이 자신도 모르게 간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홀의 저서처럼 문화를 세심하게 구분하고 파악할 수 있는 이론서를 통해 문화적 이해력과 통찰력을 높이는 것이다.

문화를 커뮤니케이션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장은 실용적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간에 겪는 대부분의 문제점들은 왜곡된 의사소통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의에 의존하지만 그 선의조차도 의사소통 과정에서 이해되지 못함으로써 소용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침묵의 언어(The Silent Language)』,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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