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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30.

[책 리뷰] 모든 것을 초월한 지고한 사랑 ~ 유정(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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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초월한 지고한 사랑

Original Title: 유정(有情) by 이광수
선생님, 죽은 뒤에도 의식이 남습니까. 만일 의식이 남는다 하면 죽은 뒤에도 이 아픔과 괴로움을 계속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까. 죽은 뒤에는 오직 영원한 어두움과 잊어버림이 있읍니까.죽은 뒤에는 혹시나 생전에 먹었던 마음을 자유로 펼 도리가 있읍니까. 이 세상에서 그립고 사모하던 이를 죽은 뒤은 자유로 만나보고 언제나 마음껏 같이 할 수가 있읍니까. 그런일도 있읍니까. 이런 일을 바라는 것도 죄가 됩니까. (『유정』, 「65」)

질투와 오해의 앙상블이 빚어낸 비극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유정(有情)』은 한평생을 성실한 교육가로 살아온 중년의 최석이 친구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자 10년 넘게 자식처럼 키워온 남정임을 향한 뜻밖의 열정을 발견하고는 사회의 도덕적 관념에 어긋나는 그 열정을 이겨내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담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이다.

최석은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아내와 여덟 살 난 딸 정임을 맡게 되지만, 친구의 아내 장씨는 최석이 기미년(1919)에 옥에 들어간 사이 죽고, 정임은 최석의 집으로 옮겨와 살게 된다. 그러나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정임은 최석의 큰 딸이자 정임과 동갑내기이면서도 얼굴은 못나고 공부도 별로인 순임에게 질투와 시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때문에 정임은 구박과 천대를 받으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눈칫밥 속에서 살게 되고, 최석 또한 순임에게서 옮아붙은 아내의 시기심과 질투 때문에 자주 부부싸움을 하는 등 가정불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가정불화는 고등 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정임이가 동경으로 유학하러 떠나고 나서야 끝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임이가 각혈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보를 받고 급하게 최석이 동경으로 떠나면서 잠시 잠들었던 아내의 질투심이 슬슬 깨어나는 듯하더니 최석의 아내가 심어놓은 밀정인 정임의 룸메이트가 정임의 일기장과 더불어 정임이 병원에 입원한 사연은 각혈이 아니라 낙태 때문이라는 청천벼락 같은 소식을 전해오고, 이 소식을 들은 최석의 아내는 질투심에 휩싸인 난폭한 짐승으로 돌변한다. 그녀는 창피도 무릅쓰고 동네방네에 대고 남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다. 이로 말미암아 최석과 남정임은 도덕상 추호도 용서할 수 없는 사회의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다.

정임의 일기장은 적막하고 절망적인 슬픔이 흐르고 있었으며, 오직 ‘그이’, 즉 최석을 향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불보다 더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최석의 아내가 오해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의 여자가 남자를 향한 육욕적인 저속한 사랑이 아니었다. 훗날 순임이가 깨닫듯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사랑. 오라비에 대한 누이의 사랑, 사내 친구에 대한 여자친구의 사랑, 애인에 대한 애인의 사랑, 이 밖에 존경하고 숭배하는 선생에 대한 제자의 사랑까지, 사랑의 모든 종류가 포함되어” 있는 순결하고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최석과 정임의 일이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학생들로부터는 ‘에로 교장’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된 최석은 십오 년간의 교육자 생활을 마감하고 유산을 가족들에게 고루 남겨준 다음, 마지막으로 동경으로 가서 정임을 만나고 나서는 홀로 시베리아로 떠난다. 그리고 얼마 후 최석은 조선에 있는 친구 N에게 그동안의 사연을 구구절절 담은 편지를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에서 부친다. 편지를 읽고 최석의 진실함을 확신한 N은 최석의 아내와 맏딸 순임을 설득하고, 마음이 움직인 모녀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한탄한다. 그리고 아직 완쾌되지 않음에도 죽기 전에 최석을 한 번이라도 보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에 온 정임과 어느덧 사람이 된 순임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최석을 찾아 무작정 시베리아로 떠난다.

소설 속 자유연애, 자유결혼을 몸소 실천했던 이광수

원 이광수는 아직 구시대적 관습이 아직 뿌리 깊게 남아있을 20세기 초 조선에서 남녀평등과 자유연애, 자유결혼 그리고 동성애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그의 생애를 통해서도 체현했다. 중매로 만난 백혜순과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낀 이광수는 백혜순과 합의 이혼하고,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 결혼함으로써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실현한 것이다. 자신이 경험하기도 했던 애정 없이 결혼한 구시대적 결혼 관습의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는 작품 『무정』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형식의 친구 김병국 부부와 신우선 부부의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의무감으로 연명해나가는 불행한 가정생활을 통해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자유 사상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지지를 받았겠지만, 중장년층에게는 도덕적 타락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도덕과 사회적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사랑만을 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정임은 자유연애의 끝이자 최고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려면 사회의 구속과 비난도 감수하는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남자가 자유롭게 만나 연애하고, 부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결혼한다는 이광수의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은 스승과 제자, 중년 남자와 젊은 처녀, 유부남과 처녀의 금지된 사랑 등 도덕적으로 용납받지 못했던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최석은 친구의 딸 정임을 친자식으로 여기고 기르고 가르치지만, 훗날 정임의 일기장을 통해서 정임이 자신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를 깨달으면서 깊은 번뇌에 빠진다. 평생을 교육자로서 윤리적으로 성실하게 살아오고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일절 가까이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중년 나이임에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 자신도 몰랐던 뜨거운 열정이 잠자고 있었고, 그것이 비로소 정임을 통해 깨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정임까지 불살라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 것 같던 그 지옥 불처럼 뜨거운 열정을 감당할 수 없었던 최석은 그 열정을 저지하기 위해 홀로 광활한 시베리아로 떠난다.

최석은 열차를 타고 바이칼호로 향하던 도중 F역 근처에서 자신처럼 도망 온 조선인 R을 만난다. R 역시 최석과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생이었고 그의 아내는 그가 가르치던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사회적 비난과 멸시를 피해 먼 시베리아로 도망을 와 죽을 각오로 황혼에 빛나는 두 별을 쫓아 무덤까지 만들었지만, 황량한 벌판을 정처 없이 떠돌며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떠오르는 해에 감흥을 받은 두 사람은 마음을 바꾸어 살기로 작정하고 부부가 되었다. 이에 대해 최석은 ‘그 두 별 무덤이 정말 R과 그 여학생과 두 사람이 영원히 달하지 못할 꿈을 안은 채로 깨끗하게 죽어서 묻친 무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R 부부의 변심에 대해 불만과 환멸을 느낀다. 자신의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면서 죽을 각오까지 한 최석에게 비윤리적인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받아들인 R 부부의 삶에 대한 애착은 구차스럽고 비열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광수의 조선 비판의 연장선에 있는 ‘헬조선’

지막으로 소설 『유정』에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입각한 조선 비하성 글이 몇 장면 나오는데, 그중 한 장면을 살펴보자.

바이칼호로 향하던 최석이 F역에서 만난 조선인 R은 간도를 개척한 선친의 말을 담는다.

네. 내 선친은 혹 아실는지요. 선친의 말씀이 그러신단 말씀야요, 조선사람은 속이 좁아서 못 쓴다고. 정감록에도 그런 말이있다고 ─ 조선은 산이 많고 들이 좁아서 사람의 마음이 작어서 큰일 하기가 어렵고, 큰 사람이 나기가 어렵다고. 언만치 큰 사람이 나면 서로 시기해서 큰일 할 새가 없이 한다고 ─ 그렇게 정감록에 있다드군요. (『유정』, 「46」)

위키백과 이광수를 보면,

이광수는 늘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게으름, 나태함, 안일함, 위선, 허례허식 등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와 일본처럼 근면함, 성실성, 진솔함,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몸에 익히고 생각을 바꿔야만이 독립의 첫 걸음을을 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요령과 술수, 시기심, 거짓말 등이 만연하다며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않고는 독립을 이룩할 수 없으며, 독립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없으리라고 봤다. (『위키백과』, 「이광수」)

이러한 견해에 대해 글의 논지나 맥락을 살피기보다는 현대의 난폭한 댓글 문화처럼 지나치게 감정적으로만 반응하면 마녀사냥이 이루어지기 쉽다. 여기에 ‘친일파’라는 감투까지 더해지면 본뜻이 와전될 수밖에 없다. 지금에 와서 이광수의 일생과 그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다시 살펴보면 그가 왜 그 정도로 심하게 조선을 비하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제때 병을 고치지 못해 평생 고생했으며, 고아로 자라면서 이광수의 생모 충주 김 씨가 세 번째 부인이라는 점을 들어 서자로 취급당하고 무시당했고, 1919년 1월부터 국내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했지만 무시되었고, 국내에 보내는 선전 홍보물을 통해 국내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무지한 자들만 못하다, 배움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며 안이한 지식인들에 대해 분노하였다. 여기에 생활고가 겹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에 무관심한 민중들의 무기력한 현실을 접하면서 실망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실망과 분노가 쌓이고 쌓여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민족개조론으로 마무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는 우리가 사는 데 너무 지치고, 사회에 너무 절망한 나머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비하하는 것과 이치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광수가 평가했던 조선인의 천박한 모습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감정적으로 동요된 사회에 직격탄을 던진 이광수의 용기가 무모했다면 무모했으리라. 하지만,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참된 용기를 이해하고 받아줄 아량이 부족한 사회에서 활약했다는 것 역시 그의 비극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 여전히 한국에서는 돈이 최우선이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돈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며 누구나 부를 획득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지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도 지켜지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온갖 부패와 부정이 판을 칠 수밖에 없고 약자는 더욱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비록 지금은 이광수가 살던 때보다 눈부신 경제 발전은 이루었지만, 그에 걸맞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수준 높은 의식이 빠진, 그야말로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매단 격이 된 우리 사회는 어느 교수의 말마따나 질이 나쁜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발악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국민의 정신적 성장이 경제 성장에 밀려 제자리걸음에 머물렀다. 그리고 배가 부른 지금, 그 누가 귀찮게끔 책을 가까이하겠는가. 책을 읽지 않는 민족,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민족, 그것은 기계화된 삶의 지름길로 가는 첫 관문이지 않을까?

지금의 우리 삶도 이광수의 눈으로 봐도 여전히 개탄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여운이 드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리뷰는 2015년 9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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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4.

[책 리뷰] 미래에도 지금처럼 에너지적인 삶이 가능할까? ~ 에너지 디자인(바츨라프 스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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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도 지금처럼 에너지적인 삶이 가능할까?

Original Title: Energy at the Crossroads: Global Perspectives and Uncertainties by Vaclav Smil
겉치레가 에너지 절약을 이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화려한 제품을 위해 에너지가 더 많이 나간다. (『에너지 디자인』, p420)

우린 이미 에너지의 노예

류 초창기 가축, 나무 등의 재생에너지를 시작으로 최초의 기계적 장치인 물레방아, 풍차를 지나 산업혁명을 이끈 석탄과 화석연료 시대의 거두 석유를 거쳐 21세기를 조금 넘어선 지금은 천연가스로의 에너지 전환이 상당 부분 이루어지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인류 문명은 과거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류가 대책 없이 소비한 화석연료로 말미암은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때문에 그 번영이 한낱 물거품이 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다시 한번 재생에너지로의 에너지 전환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에너지 디자인(Energy at the Crossroads: Global Perspectives and Uncertainties)』의 저자 바츨라프 스밀(Vaclav Smil)이 현대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속성은 바로 우리가 누리는 문명이 화석연료에 크게 의존하는 고도의 에너지 집약형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경제 및 사회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에너지원을 소비한다. 약속한 시각에 울리며 주인을 깨우는 똑똑한 알람 시계 소리에 깨어나는 이른 아침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자장가 삼아 잠드는 야심한 밤까지,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는 와중에도 더위를 식혀줄 에어컨이나 선풍기, 일용할 양식을 언제나 신선하게 보관해주는 ‘쿨한’ 냉장고에 이르기까지 365일 24시간, 아니 단 1초라도 우린 에너지의 혜택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에너지 없는 문명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에너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에너지의 노예’나 마찬가지다.

에너지가 주는 각종 혜택과 편리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하기조차 싫지만,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인류 문명이 파멸로 치닫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시작한 기후변화와 기후재앙 속에서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비관적인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쉽게도 미래적인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여러 난관에 부딪혀 있다. 상용화된 재생에너지 기술 중에서 일반 대중이 마땅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저렴하면서도 기존 에너지 체계를 효율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적당한 기술이나 상품이 별로 없다. 현재의 화석연료 발전소를 대체할 만한 가장 유력한 재생에너지로는 풍력 발전이 거론되지만, 풍력 발전은 지역과 시간에 따른 발전량 차이가 상당히 커서 전략적으로 기존의 발전소를 대체하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다. 댐을 이용한 수력발전은 농업 및 생활용수 제공과 홍수 예방 기능의 장점도 있지만, 수중 생태계 파괴와 저수지에서의 온실가스 발생 등의 환경 문제가 있다. 또한, 대량의 이주민 발생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은 댐 건설로 발생한 실향민의 고통은 문순태의 소설 『징』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몇 세대 동안은 현재처럼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에너지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이 앞으로 석유나 천연가스가 고갈되지 않고 얼마 동안 현재의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바츨라프 스밀이 무수히 많은 예로써 제공한 에너지와 관련한 기술적 예상의 오류와 장 • 단기 유가 예측의 실패 사례들이다. 내가 중 • 고등학교 때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석유는 앞으로 30~40년 후면 고갈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금도 역시 30~40년 후이다. 마찬가지로 전기 자동차가 처음 선보였을 때도 10년 안에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자동차가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할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그로부터 대략 20여 년이나 지난 지금도 역시 10년이다. 핵에너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화석 발전을 대체할 가장 유력한 에너지로 호평을 받았지만, 현재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과 폐기물 처리 문제 때문에 잘해야 현상 유지이거나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사양길을 걷고 있다.

마냥 기댈 수만은 없는 화석연료

렇다면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량에 대한 지금의 예측 역시 크게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더불어 나무에서 석탄으로, 그리고 석유로의 전환과 천연가스의 개발은 자원 고갈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료가 값싸고 질 좋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앞으로 혁신적이고 친환경적인 에너지로의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석유와 천연가스는 고갈되기도 전에 소비 감소로 이어지면서 점차 사라지거나 지금의 석탄처럼 일부 산업에서만 간신히 명목을 유지해나갈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1985년 이후 낮은 석유 가격에도 상대적으로 낭비가 심한 미국에서조차 석유 집약도가 감소한 것에서 보듯, 세계 경제의 석유 집약도가 감소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미 석유에서 천연가스로의 에너지 전환은 시작했다. 만약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의 고갈로 가격이 올라가면 여러 국가와 에너지 회사는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는 사회 전체에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그렇다고 화석연료는 낭비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바츨라프 스밀의 말대로 지금처럼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시대가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시대가 인류 문명이 존속하는 기간 내내 지속할 수는 없을 것이며, 화석연료가 일으킨 환경 문제는 이미 전 지구적 문제로 확대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는 미래에도 충분할 것이라는 주장만 믿고 아무 대책 없이 낭비하다 화석연료가 정말로 고갈의 조짐을 보이거나 지구온난화가 터닝포인트를 넘어 가속되면 낭패 중의 낭패다. 반대로 수십 년 아내로 화석연료가 고갈할 수 있다는 비관론에 맞추어 현재의 풍요로움을 버리고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여기서 지구에 사는 모든 문명인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면서도 누구나 수용 가능한 대책을 제시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하나가 제시된다.

‘미래에도 지금처럼 적절한 에너지와 함께하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역시 결론은 하나다

너지 전환 효율을 높이면 될까? 하지만 역사적으로 에너지 전환 효율이 높아질수록 에너지 사용량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면서도 에너지 사용에 일정한 제약을 가해야만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량을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바츨라프 스밀의 단순 명확한 주장처럼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구온난화가 많은 과학자의 우려만큼 지구 기후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혹은 기후변화의 불확실성을 인정한다 해도 에너지 소비량 자체를 줄이는 ‘후회하지 않는’ 전략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일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에어로졸의 배출이나 발생, 광화학 스모그와 산성 강하물, 수질오염, 토질 악화 등을 줄임으로써 생태계는 복원되고 그에 따라 감소한 생물 다양성도 복구될 수 있다. 생태계가 복원되고 생물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지구의 자연환경이 불로장생의 묘약을 먹은 도사가 회춘하듯 짙고 푸른 녹색의 생동감 넘치는 행성으로 되돌아가기를 사람들 대부분이 바란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점에서 에너지 소비 감소 정책은 우리의 후손에게 후회와 실망보다는 잘했다는 생각을 더 들게 할 것이다. 또한, 이런 정책이 장기적으로 경제적 이익도 가져다줄 것이라고 바츨라프 스밀은 예상한다.

마치면서...

부할 수 없는 에너지 제국의 비참한 노예가 되어버린 인류 문명의 에너지 역사서가 바로 『에너지 디자인』이다. 지난 100여 년간의 에너지 산업의 성공과 실패와 다가올 미래의 에너지 산업의 변혁, 현재 진행 중인 화석에너지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에너지가 환경과 삶의 질에 끼치는 광범위한 영향, 에너지 산업에 대한 정량적 예측에 대한 반론과 규범적 실천계획, 불확실한 화석연료의 미래, 비화석 연료의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에너지 절감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에너지와 인류 문명 사이의 역학 관계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에너지와 에너지 정책이 문명뿐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과 그 복잡한 역학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에너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얻음과 동시에 긍정적인 미래 에너지 사회를 그려볼 수 있다. 다양한 도식과 많은 예제를 활용함으로써 입문자를 배려한 점이 상당히 돋보이지만, 그냥 무턱대고 읽기에는 전반적으로 꽤 난이도가 있는 교양서적이므로 차분하게 볼 것을 권장한다.

이 리뷰는 2015년 9월 2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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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8.

[책 리뷰] 러시아판 ‘전설의 고향’ ~ 마녀의 관(니콜라이 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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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판 ‘전설의 고향’

Original Title: Вий by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
그놈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리가 2개 있었다. 대갈장군에다 몸집은 짤막했고, 안쪽다리가 밖으로 지독하게 굽었다. 흙투성이 손과 발은 나무 밑동처럼 울퉁불퉁했다. 양쪽 눈까풀은 축 처져서 발아래까지 늘어졌다. (『마녀의 관』, p66)

학을 맞아 집으로 긴 여행을 떠난 키예프 마을 수도원 학생인 하리야와, 브루트, 고로베이치는 어느 날 할멈이 혼자 사는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다. 그런데 할멈은 보통 할멈이 아니었다. 바로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마녀였던 것이다. 이날 밤 브루트는 마녀 할멈의 하늘을 나는 말(馬)이 되어 할멈을 등에 태우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간신히 기도를 통해 마녀 할멈의 저주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기도의 힘으로 약해진 할멈의 등을 타고 밤 공간을 가로질러 질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비친 지쳐 쓰러진 마녀의 얼굴은 쭈글쭈글한 할멈이 아니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키예프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진다. 키예프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넓은 땅을 가진 지주가 있었는데, 그 지주의 외동딸이 어느 날 산책하러 나갔다가 어찌 된 셈인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금방 죽을 듯이 겨우 집으로 돌아왔고 그 아가씨는 ‘나는 이제 곧 죽을 거예요. 키예프 신학교에 호머 브루트라는 학생이 있을 테니, 내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는 그 사람을 불러서 기도를 드려 주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작품은 니콜라이 고골이 1835년에 발표한 『아라베스크』 이어 발표한 우크라이나의 미르고로드를 배경으로 하는 문집 『미르고로드』에 나온 단편 소설이다. 원제목은 비(러시아어로 Вий, Viy Vij)라고 한다. 비이는 고골이 창조한 괴물이나 요정 같은 불가사의한 생명체로서 작품에는 흙의 요정으로 등장한다(흙의 요정 비이에 대한 묘사는 이 리뷰 앞부분에 있는 인용문 참조).

슬라브 민담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지만, 리그베다 위키의 지적대로 한국의 전설의 고향과 진배없다. 언뜻 보면 단순한 공포 단편 소설 같지만, 고골의 이후 작품인 『감찰관』, 『죽은 혼』, 『외투』 등의 사회 풍자적인 성격에 비추어보면 학장과 지주의 강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굴복한 브루트, 마을 사람을 해치는 마녀가 지주의 딸임을 알면서도 수군거리기만 할 뿐 지주 앞에서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 등 부와 권위에 짓눌린 민중의 모습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브루트는 자신을 말(馬)처럼 올라탄 마녀의 저주에서 기도를 통해 해방된다. 그리고 지주의 강압에 못 이겨 죽은 마녀의 관 옆에서 밤을 지새울 때도 신의 가호로 그린 자신을 둘러싼 작은 원(圓) 안에서 그럭저럭 목숨은 부지한다. 하지만, 마지막 날 흙의 요정 비이에 의해 원과 기도의 보호는 파괴된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고골은 현실에서는 악마가 신보다 우세하며 인간의 운명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지만, 이후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악마의 영향을 극복하고 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등 변화된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종교에 심취한 고골의 사상을 반영해 주고 있다.

국어 번역판 『죽은 혼』(을유문화사, 옮긴이 이경완)의 해설을 보면 고골은 1834년 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학과 조교수 직을 맡아 바라던 대로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사 이야기로 일관해 좋은 평가를 얻지는 못했다고 하는데, 이런 상상력은 다음 해 발표한 문집의 「비이」를 시작으로 잇따라 발표한 『광인일기』, 『코』, 『죽은 혼』, 『외투』 등 그의 독특한 환상적인 작품 세계를 완성하는 데 큰 몫을 차지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죽은 혼』의 해설에서 고골의 죽음을 얘기한 부분을 보면 그의 사인은 의학적으로는 기아, 티푸스 혹은 우울증으로 규정되어 왔지만, 그의 영혼이 유탈 이체한 상태에서 생매장되었다는 주장이 20세기 초에 제기되어 유력한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니, 『죽은 혼』, 『외투』, 『코』 등 그의 대표작들에서 풍기는 기괴함과 환상적인 면이 그의 죽음까지로 이어진 듯하다. 참고로 이 소설은 박진성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마녀의 관」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이 리뷰는 2015년 9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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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3.

[책 리뷰] ‘자연인’으로서의 시작은 ‘공존’ ~ 인간 불평등 기원론(장 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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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으로서의 시작은 ‘공존’

Original Title: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by Jean-Jacques Rousseau
이 설명으로부터 당연히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없으나 우리의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발전으로부터 그 에너지를 얻어 성장하며, 마침내는 소유권과 법의 제정에 의해 항구적이 되고 합법화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중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부당함을 고발한 반항아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Diacours sur l`origine de l`negalite parmi leshommes)』에는 불평등의 기원뿐만 아니라 루소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 인류의 정신적 발달과 감정의 변화, 자연상태에서 사회화 상태로의 전환, 사회와 법률의 기원, 정치적인 사회의 성립과 폐해, 진정한 자유의 가치, 이성과 본성의 관계,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린 언어의 발달 등 다소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는 루소의 관념과 사색이 담겨 있다. 루소는 본문에서 밝혔듯이 이 모든 설명을 가설과 추리로만 해결했으며 생물학적이나 고고학적 등의 과학적 증거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당시의 과학적 발전 수준으로는 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루소는 모든 문명의 혜택을 버리고 불평등을 거의 느낄 수 없으며 영향도 거의 없는 자연상태에서 살았던 자연인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도 자연인에서 지금의 문명인으로의 자연스러운 진화는 인정하지 않았다. 루소는 자기완성 능력이나 사회적인 미덕 등 인류 문명의 여러 가지 기술과 발전이 자연인의 타고난 능력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으며, 문명의 진보를 위해서는 외부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자연인에서 현재의 문명인으로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암시나 다름없다. 루소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신’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인류는 원시 상태로 남았으리라는 것이다.

루소가 진화를 인정하지 않고 신의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어느 한 편으로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불평등의 부당함과 폐단을 과학적 자료의 지원 없이 혼자만의 사색과 추리로 정확하게 지적했으며, 그 최초의 기원을 인류의 원시 상태로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문명의 발전과 불평등의 심화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힌 셈이다. 한편, 「원주」에서 다양한 인간을 연구하려면 현지 조사를 우선해야 한다는 루소의 주장은 인간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여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인간이던 인간은 모두 같은 정념과 같은 악덕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러 민족의 특징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던 당시 철학자들의 불합리함을 반박함으로써 문화의 상대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루소의 사상은 훗날 인류학의 토대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예고?

런 논지를 제쳐두고라도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정말로 위대한 점은 곧 일어날 ‘피’의 대혁명을 예견한 점이다. 당시 절대군주의 억압과 부패한 귀족 밑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던 민중의 고통을 몸소 느끼며 불의에 분노하고 있었던 루소는 이 불평등의 마지막 종착점이 전제정치라고 말하면서 이 괴물(전제정치)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전제군주만을 갖게 되었으며 풍습이나 미덕도 사라졌고, 성실이나 의무도 없으며 남은 것은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라고 전제정치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그리고 이 귀착점에서 한 바퀴 돌아서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해지는 사회로 돌아갈 것인데, 그 길은 새로운 변혁들이 일어나 정부를 완전히 해체하거나 이것을 합법적인 제도로 접근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 변혁에는 폭력을 동반한 혁명도 정당하다며 루소는 사후에 있을 프랑스 대혁명을 예견한다. 독재자를 죽이거나 퇴위시키는 폭동도, 독재자가 신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제멋대로 처리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행위이다. 힘으로 지탱한 정부는 그것을 타도할 수 있는 것도 힘뿐이다. 한마디로 힘으로 일어선 정부는 힘으로 쓰러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난한 시민의 아들로 태어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전제정치의 억압과 방탕하며 나태한 귀족들 아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약자로 평생을 방랑 속에서 고독하게 보낸 루소는 글의 힘으로 그 불평등을 타파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했을뿐더러 당시로써는 혁명적이자 반항적이고 도발적인 자신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그는 방랑자에 도피자라는 꼬리가 하나 더 붙으며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자연인을 예찬한 루소는 끝없는 박해를 피해 그 자신도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고독한 자연인’, 자연이 명령한 간소하고 일정한 고독한 생활양식을 지켜나가는 최선이자 최소의 삶으로 회귀하여, 인류의 악덕을 버리고 그 지식도 버림으로써 태고의 원시적인 순진성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마치면서...

전히 일부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결국엔 모두에게 풍요로운 삶과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향하고 있다. GDP 상으로 부자가 된 나라들은 지구행복 지수상으로는 매우 낮은 수치를 기록한다. 루소의 말대로 자연에 폭군처럼 군림해온 인류는 인류의 생존이 걸린 기후변화라는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빈부 격차와 기아는 전염병처럼 확산하고 있다.

설령 루소가 갈망했던 자연인이 된다 하더라도 루소가 생각했던 것처럼 완벽한 고독과 문명으로부터의 이탈은 어려울 것 같다. 루소의 말처럼 자연에 폭군처럼 군림해온 인류 덕분에 자연인이 살아갈 터전이 될 자연 대부분은 이미 문명에 잠식당하고 심각하게 오염되었으며, 곧 있으면 기후변화가 익숙한 자연의 생태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토지 사유, 경작 등 자연에 대한 미미한 착취로 시작한 불평등은 강탈에 가까운 착취가 이루어진 산업화 이후로는 해소되기는커녕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고착화 되었다. 고로 무모하게 생태계의 한계를 시험해 보지 않으며 지구상의 다른 생명처럼 자연과 공존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필요한 만큼만 분배되는 사회야말로 불평등 일부나마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지 않을까. 이 어려운 문제를 인류가 해결할 수 있다면 이것과 무관하지 않은 또 다른 인류의 고질적인 문제들인 기후변화, 에너지, 물 부족, 기아 등의 문제들도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인류는 준엄한 자연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자연을 위한 최상의 선택이 인류 스스로가 멸종되어버리는 일이라는, 인류사의 모든 근원을 뒤집어버리는 뼈 아픈 성찰을 씹어 삼켜야 할지도 모른다.

이 리뷰는 2015년 9월 13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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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6.

[책 리뷰] 언어로서의 ‘시간’과 ‘공간’ ~ 침묵의 언어(에드워드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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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서의 ‘시간’과 ‘공간’

Original Title: The Silent Language by Edward T. Hall
문화를 커뮤니케이션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장은 실용적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간에 겪는 대부분의 문제점들은 왜곡된 의사소통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의에 의존하지만 그 선의조차도 의사소통 과정에서 이해되지 못함으로써 소용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침묵의 언어(The Silent Language)』, p252)

‘코리언 타임’ 역사가 말하는 문화 충돌

한국 전쟁 전후 미국인은 한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약속 시각에 늦게 도착하는 행동이나 그 버릇을 이르러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좀 더 자세한 뜻을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면,

이 말은 한국 전쟁 때 주한 미군이 한국인과 약속을 한 뒤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오는 한국인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한국인은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시간관이다.'라고 하여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위키백과, 「코리안 타임」)

당시 한국 국민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닐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없어 미국식 시간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인이 한국인은 약속 시각에 늦게 도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불만을 토로할 수는 있을망정, 문화적 배경을 먼저 살피지 않고 무조건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자문화 중심주의적인 부당한 편견이다.

그 후 이러한 미국인의 오만한 비난이 약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빨리빨리’라는 구호 아래 필사적으로 일궈낸 고도성장과 미국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으로 어느새 「코리안 타임」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5분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하는 ‘코리안 타임’이 정착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웃지 못할 역사가 어느 문화 사이에나 존재하는 문화 충돌의 한 예임을 간파한다면,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시간 문화가 미국의 의도대로 ‘신속’ ‘정확’하게 미국식으로 정착된 점을 깨닫는다면 씁쓸한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국가적인 장기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한국 특유의 주먹구구식 행정이, 남아시아인들이 수천 년 이상의 ‘장기간’을 바라봤던 것과는 달리 고작 10년이나 20년 앞을 바라보는데 급급한 미국의 너무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시간개념이 도입된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나 같은 경우 약속장소에 보통 10분 이상 일찍 도착하도록 노력하기 (약속장소 근처에 서점이나 도서관처럼 시간을 쉽게 보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한두 시간 정도 일찍 나갈 때도 있다) 때문에 아무 연락 없이 5분 이상 늦게 도착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한다. 특히 습관적으로 그러한 사람은 더더욱 싫어한다. 아마도 이러한 점은 미국식 시간개념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이며 그만큼 우리의 문화가 많이 서구화, 좀 더 정확하게는 미국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의 언어, 공간의 언어

‘코리안 타임’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시간개념을 가진 문화 간의 충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그들보다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흔히 범하는 오류가 이유 없이 자신들 문화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경향이다. 그들은 진지하게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더 잘 사니까 그들도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맞추어야 한다는 지배적인 오만함을 품고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편견에서 문화 충돌이 발생하지만, 그들은 근본적인 원인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산업화하지 않은 나라들의 국민이나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당찮게 ‘미개인’이라고 부른다.

좀 더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을 존경하는 뜻에서, 또는 약속의 중요함을 인정하는 의미로 약속장소에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나간다. 그러나 마음 내키지 않는 약속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만남은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일이 태반이며,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 모욕을 주고자 한다면 일부러 30분 이상 늦게 도착하기도 한다. 일부러 늦장을 부리는 예는 여자가 마음에 안 드는 남자의 간청에 못 이겨 억지로 만날 때를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에서 시간이 말하는 언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늦게 도착한 사람이 어떠한 변명을 하든 우리는 늦게 도착한 이유에 대해 별의별 의심을 떠올리게 된다. ‘저 사람이 날 물 먹이는 건가?’, ‘그녀가 나와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내가 뭘 잘못했나?’ 등등. 이루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시간이 말하는 언어는 꽤 진실하다.

이처럼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도구는 언어가 전부는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시간의 언어 외에 또 다른 ‘침묵의 언어(The Silent Language)’로써 공간의 언어도 있다.

보통 대학교 강의실에서 자리는 자유롭게 앉을 수 있다. 그러나 학기 초가 조금 지나면 그러지 못한 광경을 볼 수 있다. 학생들은 대부분 전날 앉았던 자리를 찾아가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누가 어디에 앉는지 대충 정해진다. 그러다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면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불쾌해진다. 서양처럼 방이 많은 저택에는 아버지의 고유하고 신성한 자리로서 서재가 존재한다. 또한, 작업실 역시 아버지, 또는 남자들의 공간이다. 자신의 방도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다. 한국 같은 경우 현대화되고 단순화된 주거 설계 때문에 구분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예전 전통 가옥에서 부엌은 여자들만의 공간이었고 반대로 사랑방은 남자들만의 공간이었으며 이 공간을 서로 침범한 남녀는 칠칠치 못하다고 어른들의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남향, 북향집을 선호했으며 미국에서 공간은 좌표체계로 구분하는 데 비해 한국은 지역(洞)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공간의 종류와 상황, 또는 상대방과의 거리에 따라 목소리의 강약뿐만 아니라 대화 내용도 다르다. 이것들 모두 공간의 언어다.

속박으로서의 문화, 이해로서의 문화

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 1959년 발표한 『침묵의 언어(The Silent Language)』는 시간과 공간의 언어를 포함한 일련의 행동 속에 복잡하게 숨겨진 비언어적인(nonverbal) 맥락을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형태로 파악하여 언어로 풀어쓴 책이다. 에드워드 홀은 문화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상호연관된 일련의 복잡한 활동이며, 문화도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그 기원이 깊이 묻힌 활동”이라고 요약했다. 부연하여 “문화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거대한 폭과 깊이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차원들을 지니고” 있다며 그 차원을 공식적 • 비공식적 • 기술적 세 차원으로 명명하고, 이들 차원으로부터 개별체, 고립요소, 양식으로 분석하여 문화의 성격에 관한 통문화적 연구를 완성했다. 이렇게 학문적 설명을 들이대니 다소 딱딱해 보이지만, 모든 문명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모델로 삼은 것과 홀이 경험했던 체험이나 다양한 사회의 문화적인 예,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적 특성을 사이사이 곁들임으로써 좀 더 쉽게 풀어쓴 점은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도 상당한 문화적 이해력을 쌓을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홀은 문화가 사람에게 제공하는 숨겨진 통로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 사람은 그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곧 문화는 사람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감옥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홀은 사람은 자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활동하고, 생활하고, 숨 쉬고, 자신의 독자성을 개발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문화를 이용하려면 그것에 관해 훨씬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문화 연구의 궁극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이 외국 생활과는 무관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이유는 자신을 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다른 사람의 문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삶의 세부사항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주고 대조와 차이라는 충격을 통해서 삶에 관한 관심도 촉발될 수 있으며, 이것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여태껏 지각되지 않았던 영역들을 탐구하는 새로운 영역 개척으로 이어져 지적 능력의 퇴화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책에서 밝히는 홀의 모든 체험과 예는 미국인을 기준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미국으로(꼭 미국이 아니더라도) 여행하거나 이주, 또는 유학이나 출장 가는 사람에게는 좀 오래된 책이기는 해도 미국 문화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문화의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언자로서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나처럼 국외여행과는 별로 인연이 닿지 않은 사람이라도 홀이 말한 것처럼 자신을 알고자, 그리고 이웃과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알기 위해서라도 문화는 고찰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홀은 아이들이 문화를 배우는 방식에 대해서도 개괄하고 있으므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만한 내용도 들어 있다.

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 언급한 태초의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우린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화에 순응하면 안정적인 삶은 보장되지만, 일면으로는 교과서적인 단조롭고 권태로운 기계적인 삶이 될 수도 있다. 반면에 문화에 반항하는 일탈적인 언동이 성공한다면 유명인사가 되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이끄는 역동적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심하면 정신병자 취급당할 수도 있으며 최악에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화를 세심하게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가 사는 문화를 우리가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정에는 ‘문화’라는 색안경이 자신도 모르게 간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홀의 저서처럼 문화를 세심하게 구분하고 파악할 수 있는 이론서를 통해 문화적 이해력과 통찰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 리뷰는 2015년 9월 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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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5.

윈도우 7 사용자 폰트 DPI 조절(축소)

윈도우 7의 디스플레이 설정에서 텍스트 크기(폰트)에 대한 사용자 dpi 조절은 100%(96dpi)에서 확대만 되고 축소는 안 된다. 그러나 레지스트리를 이용하면 dpi를 줄일 수 있다.

HKEY_CURRENT_CONFIG\Software\Fonts

의 LogPixels 값을 변경해 주면 되는데, 폰트 사이즈 95%는 91(10진수), 90%는 86(10진수) 값을 넣어주고 로그아웃/로그인하면 된다.

아래 스샷은 dpi 사이즈 100%일 때와 95%일 때의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Adobe Premiere Pro CC)에서의 마우스우클릭 메뉴를 비교한 것이다. 100%일 때는 모든 메뉴를 보려면 스크롤을 해야 하지만, 95%일 때는 한 화면에 메뉴가 모두 표시된다. 이렇게 필자처럼 해상도가 낮은 모니터에서 적절하게 사용하면 약간의 해상도 올림 효과를 볼 수 있다.

이 리뷰는 2015년 9월 5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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