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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6일 일요일

[책 리뷰] 추리 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한 ~ 김정일 최후의 도박(후나바시 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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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한

Original Title: The Peninsula Question: A Chronicle of the Second Korean Nuclear Crisis by Yoichi Funabashi
지금은 핵이 사람을 배신하지 않고 그를(김정일) 배신하지 않는 궁극의 무기가 된 것일까. (『김정일 최후의 도박』, p617)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이유

마도 난 정치인이 좋아하는 부류의 국민일 것이다. 왜냐하면, 투표는 꼬박꼬박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정치 뉴스나 사회여론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왜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굳이 발명해본다면 심심치 않게 터지는 부정과 부패, 정치인들의 가없는 아귀다툼, 가진 자건 못 가진 자건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는 질이 좋지 않은 민족성 등이 나를 이 더럽고 야만적인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소외하게 만든다. 여기에 그동안 읽어온 역사서와 고전이 나에게 ‘정치’란 ‘두루 다스려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막연한 이상을 품게 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이상주의적인 ‘정치’ 관념이 추구하는 본질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같다고 할지라도 염치고 체면이고 타협이고 관용이고 할 것 없이 개인적 야심을 추구하고 어떻게든 실속을 챙기려는 이해득실로 넘치는 현실의 정치와는 괴리감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난 이런 괴리감 때문에 딴 나라 세상의 일을 보는 듯한 상대적 거리감을 한국 정치에서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면서도 의도적으로 정치 쪽 책은 피했다. 왠지 읽고 나면 ‘기분만 더 우울해지고 정치에 불신감만 더 증폭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미리 겁을 먹기도 하고,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라고 미리 짐작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사히 신문 칼럼니스트 후나바시 요이치(船橋 洋一)가 쓴 『김정일 최후의 도박(The Peninsula Question: A Chronicle of the Second Korean Nuclear Crisis)』은 그러한 소심한 우려가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더불어 이 책은 북한 핵을 둘러싼 한국, 북한,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사이의 팽팽한 외교 문제와 6자회담을 둘러싼 내막과 허실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를 다루고 있으므로 한국 사람에게는 진지한 관심과 아슬아슬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다.

웬만한 추리 소설보다 재밌는 실화

한의 핵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인 국제적 골칫거리이며 우리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이다. 또한, 잊을만하면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수작을 부리는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필요 충분한 실마리가 이 책 『김정일 최후의 도박』에 담겨 있으므로 그동안 정치/외교 쪽 뉴스를 꾸준히 접해온 안목 높은 독자에게는 기억력을 다져보는 복습의 시간이다. 더불어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6자회담 전후와 회담 중에 벌어진 각국 외교관들 사이의 웃지 못할 비화는 또 다른 흥밋거리다. 그리고 나처럼 정치/외교 문외한에게는 이 기회를 통해 기초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다.

이런 교육적이고 다소 상투적인 장점을 빼더라도 후나바시 요이치의 책은 훌륭한 범죄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으며 긴장감 역시 웬만한 추리 소설에 뒤지지 않는다. 덕분에 책상 앞에 정좌하고 앉은 난 스탠드 불빛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삼아 각지고 잘 빠진 몸매를 뽐내는 글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덕분에 놀라운 집중력을 오래간만에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시종일관 책이 뿜어대는 흥미와 긴장감의 오라에 휩싸여 온몸을 찌르르 흩어가는 쾌감과 전율에 압도되어 즐거운 비명을 내심 마음껏 지를 수 있었다.

이처럼 놀라운 감흥을 안겨주는 이 책이 정말 실화인지 의심할 수도 있지만, 후나바시는 한국 • 미국 • 중국 • 일본 • 러시아의 전 • 현직 관리 158명과 재야 전문가들을 만나 직접 인터뷰했으며, “모든 형태의 대화를 통해 당사자분들께 물은 얘기를 중심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평가 • 해석해 한반도 제2차 핵 위기의 현대사를” 썼다는 후나바시의 후기와 책 뒤편에 수록된 「인터뷰 명단」은 그러한 의심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후나바시의 북한 핵을 둘러싼 각국 입장의 다층 다각적인 충실한 분석은 논픽션에선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인 객관성을 확보하는데 충분했으며, 이런 점은 그의 설명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재미있으면서도 어딘가 아찔한 외교 비화들

북아시아의 국제 정치 변화 속에서 북한과 주변국들의 관계와 그들의 외교적 성공과 실패를 치밀하고 날카롭게 분석한 이 책에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동안 사정으로 일반에 공개할 수 없었던 비화도 들어 있다.

2002년 북일 정상회담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일본 외교관과 물밑 작업을 했던 끝까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신비에 쌓인 인물인 북한 측 외교관 ‘미스터 엑스’의 이야기, “처음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째부터는 한국과 일본을 반드시 참여시키겠다.”라는 파월 국무장관의 의중은 읽었지만, 외교 기밀에 속하기 때문에 대화 내용을 국회에서 밝힐 수 없어서 2003년 4월 북 • 미 • 중 3자회담에 한국이 빠진 것에 대한 의원들에 질문 공세에 시달렸던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2003년 4월 3자회담에서 북 • 미 양국 대표단만 남겨 두게 해 거기에서 실무 협의를 하도록 시나리오를 몰래 꾸민 중국 측의 눈물겨운 노력, 2003년 8월 제1차 6자회담 도중 미국 대표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전날 북 • 미 양자 협의에서 북한 대표 김영일 외무성 부상이 “핵 억지력과 운반 수단의 물리적 입증을 할 용의가 있다.”라고 위협한 것을 폭로하자 김영일이 “핵 억지력을 증강하고, 핵 억지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나아가 그것을 실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라고 되받아쳤을 때, 듣고 있던 러시아 대표 로슈코프 외무부 차관이 옆자리의 부하직원에게 “자네가 담당하고 있는 나라(북한)는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소곤거린 걸 로슈코프의 실수로 켜져 있던 마이크를 통해 그 속삭임이 회의장으로 흘러나가는 바람에 전체 회의가 완전히 난장판이 됐다는 이야기 등 재미있으면서도 어딘가 아찔한 외교 비화들이다.

마치면서...

사적 변혁기를 맞이하는 동북아 정세라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잠시 벗어나 오랜 역사를 함께 했던 한민족의 통일적 안목으로 좁힌다고 해도 북한의 핵 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할 우리의 숙명이자 과제이다. 비록 후나바시 요이치의 이야기가 많은 사실을 말해주며 현재의 긴박한 상황을 확인해 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끝내 풀리지 않는 북한의 핵 문제와 독재 체제는 의문투성이다가 신뢰하기도 어렵다. 현재로서는 그러한 의문이 완벽하게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통일도 어렵다.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2001년 1월 상하이 시찰을 마치고 단둥에서 신의주로 건넜을 때 돌연 신의주에서 하차해 잠시 상념에 잠겼다고 한다.

단둥에서 신의주로 건넜을 때 돌연 신의주에서 하차했다. 밤인데도 공장을 방문했다.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만들겠다는 결의를 그런 형태로 보였던 것일까. 빌딩 위에서 압록강 저편 단둥의 야경을 보았다.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둥 쪽을 잠시 지켜본 다음 몸을 돌려 북한 쪽을 보았다. 온통 칠흑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김정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 어둠을 응시했다. (『김정일 최후의 도박』, p598)

평소 개혁 개방에 비판적이었던 김정일은 성공을 과시하는 빛과 자신의 실패를 분명히 드러내는 어둠이 빚어내는 극명한 대조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군 시찰을 할 때면 장병은 전원 총에서 탄약을 빼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을 정도로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체제의 독재자였던 그는 그 어둠 속에서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인민을 굶주리면서까지도 그토록 핵을 고집하도록 했을까.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원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으로 미국과 한반도 주변국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했던 것일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소원은 열차를 타고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2000년 남북공동선언에는 경의선 철도 사업이 포함되었다. 2001년 8월 북 • 러 정상회담에서 나온 공동 성명에도 시베리아 철도와 남북 종단 철도를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때는 서울에서 런던행 기차표도 발매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그 ‘열차’를 탈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열차’를 못 타는 것까지는 괜찮다. 우리의 후손이 언제가 그 ‘열차’를 탈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그 정도는 참고 견딜 수 있다. 아니 참고 견뎌내야 한다.

나는 소망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토록 간절하게 열망했던 그 열차를 타고 김정일이 빛과 어둠의 대조 속에서 쓸쓸하게 단둥의 야경을 바라보던 그 자리에 서는 것을.

이 리뷰는 2015년 7월 2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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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19일 일요일

[책 리뷰] 2만 명의 목격자 그리고 2만 명의 용의자! ~ 미국 총 미스터리(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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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명의 목격자 그리고 2만 명의 용의자!

Original Title: The American Gun Mystery by Ellery Queen

“이 얼마나 아름다운 범죄란 말인가.”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절묘하고, 대담하고, 처형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미국 총 미스터리』, p146)

2만 명의 목격자가 지켜보는 로데오 경기 중에 발생한 살인 사건을 다룬 『미국 총 미스터리(The American Gun Mystery)』는 ‘독자에의 도전’으로 유명한 엘러리 퀸(Ellery Queen)의 국명 시리즈 중 여섯 번째 작품으로 당연히 ‘독자에의 도전’이 등장한다. 다소 오만한, 그러나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는 엘러리 퀸과의 한판 대결에서 나는 언제나 참패했었고 이번 작품에서도 기적 같은 이변은 없었다.

늘 그래 왔듯이 결말 즈음에는 엘러리의 논리정연한 사건 해설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설 속에 눈에 안 띄게 숨어 있던 ‘단서의 조각’들을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고, 충분히 총명한 독자가 엘러리 퀸과의 승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 리뷰에 작은 힌트를 포함했으니, 공명정대한 승부를 원하는 독자라면 후다닥 웹브라우저 창을 닫고 나가야 할 것이다.

가 앞에서 ‘단서의 조각’이라고 꼬집어 강조한 것은 결단코 작품의 흥미를 격감시킬 수 있는 결정적 단서나 힌트를 제공하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단서를 수집하고 파악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조언을 하기 위함이다.

뜬금없이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 『침묵의 언어(The Silent Language)』에서 미국인의 시간 개념을 설명한 것을 인용하자면,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흔히 그렇듯이 시간을 일들의 연결 고리로써 이용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에 연이어 한 사건이 발생하면 후자를 전자에 귀속시켜서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을이 살해된 직후에 그 근방에 갑이 나타났다면 미국인은 자동으로 갑과 을을 연결하지만, 두 사건이 발생한 시간의 격차가 너무 클 때는 쉽게 연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미국은 국가적인 장기계획을 세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홀은 평했다.

이건 비단 미국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건과 그와 연결된 사건이 시간상으로나 공간상으로도 연속으로 비슷한 지역에서 일어난다면 누구나 쉽게 그 연결 고리를 파악할 수 있지만, 두 사건 사이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어질수록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는 어려워진다. 그래서 명철한 두뇌를 가진 형사나 탐정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불규칙적으로 분포된 조각들에서 각각의 의미를 찾아 서로 조합하고 꿰어맞추어 하나의 완성된 단서나 증거를 찾는 능력이 뛰어나다.

『미국 총 미스터리』에서 의미가 명확한 하나의 완성된 단서를 얻으려면 서로 떨어져 있는 사건과 관련된 조각(문장)들을 찾을 수 있는 관찰력과 이들을 서로 연결하여 의미가 있는 단서나 증거로 완성할 수 있는 추리력이 필요하다. 즉, 소설 속에 사건 추리에 의미 있는 단서들은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난 퍼즐처럼 분리되어 페이지 곳곳에 버젓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이 조각들을 찾아낸 다음 퍼즐을 풀듯 하나하나 맞추어 하나의 의미 있는 단서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 힌트를 하나 주자면...
      힌트를 하나 주자면 64, 92, 95페이지에는 하나의 의미 있는 단서를 위한 조각들이 나뉘어 있다. 이 단서를 찾아낸다면 벅 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각에 잠길 때면 코안경을 벗어서 렌즈를 열심히 문질러 닦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엘러리의 장난스러우면서도 매우 진중한 모습은 엘러리 퀸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이다. 추리 소설의 고전이자 일본 본격파 추리 소설의 원조 격으로서 한 자리를 차지한 엘러리 퀸의 미번역 작품들을 만나본다는 것은 추리 소설 마니아로서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리뷰는 2015년 7월 19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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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12일 일요일

[책 리뷰] 일본을 일으키고 침몰시키기도 한 ~ 사무라이의 나라(이케가미 에이코)

The Taming of the Samurai by Eiko Ikegami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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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일으키고 침몰시키기도 한 사무라이

Original Title: The Taming of the Samurai by Eiko Ikegami
사무라이 명예문화의 본질은 논리적이고 정서적으로 상호연관은 있지만, 각각 분명히 다른 상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화복합체였다. 그것은 다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의미 자체는 명예의 정서 내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다면적인 문화복합의 중심에는 평판에 민감한 의식이 있었고 이것이 차례로 개인의 자기인식이나 자존심 속에 깊게 내면화되었다. 따라서 사무라이 명예문화는 광범위한 정서와 관념을 포함하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나라』, p350)

서양인의 눈에 미친 일본인의 모순

구의 눈으로 본 ‘일본의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민에게 무엇보다도 집단주의 사고방식과 현상유지의 태도를 중시하고, 개인주의와 대담한 혁신은 저평가하도록 장려하는 사회가 공업화와 기업경영에서 어떻게 현재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 (『사무라이의 나라』, p26)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에서 일본인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국화와 칼』, 「제1장 연구 과제 – 일본」, 을유문화사, 김윤식 • 오인석 옮김)』

그러면서 서양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의 행동을 모순적이라고 보았다. 애초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베네딕트가 일본인을 모순적이라고 평가한 것은 다소 성급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본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도 일본 문화의 기저에 흐르는 ‘수치’와 ‘명예’, 그리고 ‘의리’의 문화복합체를 예리하게 통찰했다.

일본의 수수께끼를 풀다

양인이 보기에는 모순덩어리로 보이기까지 하는 일본인, 같은 동양인인 내가 보기에도 특정 상황에서는 엄청난 집단성을 보이면서도 일상적인 삶에서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또 다른 독특한 개인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일본인을 보면, 우리와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같은 한자 문화권에다가 우리처럼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형성하여 서구 문화의 이질감을 일찌감치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한 그들의 문화적 적응력과 포용력은 정말 놀랍다. 한때 잠시나마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패전의 쓰라린 상처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음에도 유유히 극복하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그들의 저력은 확실히 높게 평가할만하다.

그 저력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지금의 일본을 만들었는가. 서양인의 눈으로는 모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수수께끼 같은 일본 문화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을 푸는 열쇠는 바로 현대 일본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사무라이 문화’이다. 이케가미 에이코(池上 英子)는 『사무라이의 나라(The Taming of the Samurai)』에서 ‘일본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일본 근대의 국가형성 一 중세봉건 사회에서 보다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의 이행 ᅳ 과정을 고찰한다. 그 결과 일본 사회에서 사무라이의 명예 개념은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역사적으로 합류한 결과로 생긴 것이며, 이 개념의 문화적 발전이야말로 경쟁과 협조라는 현대 일본의 독특한 문화적 혼합을 만들어 낸 사회적 과정으로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결론짓는다.

‘할복’에서 ‘명예’를 추구하기까지

리는 사무라이 하면 가장 먼저 그들의 강렬한 명예욕이 떠오른다. 지나가다 칼집만 얼핏 스쳐도 치욕으로 여겨 바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건 혈투로 승부를 내야 직성이 풀린다.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불굴의 투지로 싸움에 임한다. 문학이나 영화의 소재로도 많이 쓰이기도 했던 복수나 결투, 할복 등 폭력으로 명예를 쟁취하는 난폭하면서도 절도 있는 사무라이의 모습은 이방인인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된 사무라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기계적인 계약이나 세간의 평판 때문이 아닌 인격적 • 정서적 유대감으로 주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사무라이의 충성스러운 모습은 눈물겨운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사용한 폭력은 자립과 개인성을 추구하던 그들의 불타는 정열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자립과 개인성이야말로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무라이 문화의 근본을 지배한 속성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할복자살은 죽음까지도 스스로 결정한다는 확고부동한 자립성의 최상위 표현이었다.

혼란스러웠던 전국(戰國) 시대까지만 해도 폭력은 사무라이가 명예를 획득하는 주요 수단이었으며 폭력 행사 기술의 숙련 정도는 그들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이런 점이 그들을 다른 사회집단과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상하 관계 원리를 기반으로 재편성된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에서는 사무라이들이 사사건건 휘두르는 폭력은 쓸데없는 정치 사회적 긴장만 가져왔다. 쇼군은 사무라이끼리의 사소한 충돌을 규제하고 주군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해 ‘공의(公議)’를 강조했다. 무력이나 그동안 존중해 온 관습이자 상식인 ‘도리’에 의해서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된 사무라이들은 때론 거칠게 반항도 해보았지만 결국은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새로운 명예문화를 이끌어갔다. 그들은 바쿠후 궁정에서 명예 서열을 높이고자 고군분투했으며 어떤 격한 상황에서도 인내하는 것이 무사의 새로운 미덕으로 떠올랐다.

도쿠가와 국가의 통합적이며 분권적인 시스템 아래에서 사무라이들은 ‘통제’와 ‘변화’에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유연한 그들의 개인의식은 정치 사회적인 요소와 국가적 요구에 끊임없이 반응해 사무라이 문화를 지속적으로 재편성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 엘리트층의 경쟁적인 개인성과 질서 바른 순응성이 공존하는 도쿠가와 양식의 문화복합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상민들이 양반들의 특권적인 문화를 동경하며 무리하면서까지도 양반들의 관혼상제를 모방하려고 애썼듯 일본 상류층의 사무라이 문화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서서히 피지배층으로 전파되었으며, 현대 일본의 독특한 명예 문화로 이어졌다.

일본 아이들은 패스하고 우리 아이들은 슈팅한다!

‘사무라이’에 대한 책이라고 하면 무사들의 대활약이 난무하는 흥미진진한 책으로 오해하기 쉽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 따라서는 일본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 사무라이의 사회적 역할과 그 역동적인 사무라이 문화의 변화 과정을 역사 사회학적으로 기술한 『사무라이의 나라』는 굉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소 학술적인 면이 강한 내용은 일반적인 교양서적으로 여기고 보이에는 다소 책장을 넘기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물론 중간마다 그 유명한 ‘4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 등 역사적 예증을 거친 부분은 다소 그러한 부담감을 벗어날 수 있는 짬이 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확실히 보통의 교양서적보다는 다소 난이도가 있으며 두께 역시 만만치 않다. 그래서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는 했다. 사무라이 명예문화를 악용한 군국주의자들 때문에 우리와 더불어 많은 동아시아 민족들이 피를 본 것만 떠올리면 다소 사무라이 명예문화를 예찬하는 듯한 뉘앙스가 조금은 껄끄럽다. 그럼에도, 이 책을 끝까지 놓지 않은 이유에는 일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금은 웃기게도 책 앞부분에 쓰여있는 「역자 서문」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축구 지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본 아이들에게 공을 주면 둥그렇게 늘어서서 패스 연습부터 하고, 우리 아이들은 다 잘 아시겠지만 바로 골대로 가서 슈팅부터 한다. (『사무라이의 나라』, p16)

최근에도 이러한 경향은 여지없이 나타난다. 일본의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패스 축구는 이미 일본 축구의 특성이 되었다. 그에 반해 히딩크 감독 아래에서 달성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한국 축구는 그 어느 색깔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축구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축구 이야기를 꺼낼 만큼 잘 알지도 못하지만, 어찌 보면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상의 비교를 통해 나타나는 양국 간의 차이는 극명하다. 두 나라 다 한자 문화권이며 유교와 불교를 수용했지만 19세기 말, 근대화라는 범세계적인 대세에 적응한 결과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매우 대조적이다. 도쿠가와 시대에 유학자는 현실을 유교에 억지로 꿰어맞추려고 무리하기보다는 거꾸로 유교를 현실에 맞도록 재편성했다. 반면에 조선에서 유교는 진정으로 백성과 나라를 위했던 백호 윤휴 같은 개혁가는 처형당할 정도로 매우 교조적으로 뿌리내렸다. 그 결과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과는 달리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망국의 치욕을 겪었다.

퇴행하는 사무라이 문화

무라이 하면 굉장히 고집 세고 성질 급한 호전적인 무사를 떠올리기 쉽다. 사무라이 시대 초기에는 한때 ‘도당(徒黨)’으로 불리기까지 했을 정도로 사무라이들이 저돌적이고 난폭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를 끝까지 고집했다면 지금의 일본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사무라이 문화의 핵심은 ‘순응’과 ‘변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상황이 그들에게 호의적이건 그렇지 않건 일단은 순응하면서도 사무라이 문화 기저에 흐르는 개인성과 자립성을 추구하는 정열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적 긴장에 끊임없이 노출되었음에도 결국엔 그 긴장을 변혁의 밑거름으로 끌어올렸다. 그 변혁의 힘은 메이지 유신과 패전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또한, 사무라이 명예 공동체는 경쟁과 협력이 서로 어우러지는 역동적인 문화 공간이기도 했다. 명예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사회적 평가로 결정되기 때문에 ‘세간’에 드러내지는 명예문화를 유지하려면 묵시적으로라도 사무라이들 간 공동의 협의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높은 명예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에서도 사무라이 명예 공동체의 조직력은 유지되었다. 이렇게 경쟁과 협력이 냉정하게 조화를 이룬 사무라이 명예 공동체의 특이성은 서구인에 비친 현대 일본인의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진정한 사무라이 정신은 칼(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세상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여 자립하려는 그 열정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럼에도, 혼란스러웠던 전국 시대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맞이한 평화로웠던 도쿠가와 시대에 맞게 문화적 재설정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사무라이의 본질은 무사다. 전쟁이 없었던 시대에도 그들은 항상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님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적 신분을 과시했다. 그러나 평화로웠던 도쿠가와 시대에는 칼을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좀이 쑤셨던 것일까. 그들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사무라이 문화의 예견된 부작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무라이 문화가 일부 지배층에 의해 오용되면서 진정한 사무라이 문화는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케가미 에이코는 “자신의 육체와 생명을 스스로 지배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도덕적 행동과 결단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사무라이 명예문화가 태어났다.”라고 말했듯 패전 후 모르쇠로 전쟁 책임을 회피해 온 일본에 남아있는 사무라이 문화는 진정한 사무라이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날조되고 조각난 사무라이 문화의 명백한 부작용이며 오용이다. 일본이 다시 한번 진정한 사무라이 문화를 꿈꾸고 싶다면 일단은 깨끗하게 과거 청산부터 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스스로 치욕과 불명예를 맞아들이는 것이자, 한편으론 명예스럽게 일생을 살다 갔던 진짜 사무라이 무사들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시아와 일본의 역사 인식 차이의 엄청난 괴리감을 극복하고 진정한 탈아시아적 평화를 추구하려면 일본을 지배했던, 그리고 지배하고자 하는 사무라이 정신의 사회정치학적 변천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세밀한 일본 이해하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 리뷰는 2015년 7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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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5일 일요일

[책 리뷰] 설령 지옥일지라도 민중의 삶은 결국 피어난다 ~ 삼대(염상섭)

three generation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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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지옥일지라도 민중의 삶은 결국 피어난다

Original Title: 삼대 by 염상섭
원삼은 서방님이 이번에 횡액에 걸려 고생하고 나온 상급으로 한밑천 대서 장사나 시켜 주시려나 하고 신이 났다. 원삼의 처는 또 원삼의 처대로 이 아가씨가 우리댁 작은 아가씨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짐작도 혼자 해보는 것이다. 필순을 딸같이 귀엽게도 생각하던 터이라 몸조리하는 동안 시중을 들기도 아니꼽다거나 싫을 것도 없거니와, 저희 내외는 전방이나 아주 맡게 되고 이 색시는 작은아씨로 들어앉고 하면 얼마나 재미있고 좋을까 싶었다. (『삼대』, 「백방」 중에서)

1932년에 발표한 염상섭의 장편 『삼대』는 작품의 주인공이자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앳된 청년 조덕기를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 조상훈, 할아버지 조의관 등 일제강점기 속에서 각기 다른 신념과 주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3대 사이의 갈등을 다룬 시대소설이다. 한국 근대소설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유명한 작품이기에 중심 내용은 일부러 피해가고 여기에서는 그 외 변변치 않은 나의 소감을 몇 자 적어본다.

작품의 배경은 1920년대로서 3·1 운동 이후 일본이 기존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서 좀 더 부드러운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꾼 덕분에 훗날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가혹한 식민지 수탈이 정점으로 치닫기 전까지는 조선 민중들로서는 그나마 가장 무난했던 삶을 살았던 시절이다. 조덕기가 필순과 함께 장사를 시작하는 것을 기회로 행랑살이에서 벗어나 제살이를 할 수 있다는 달콤한 희망에 젖는 원삼 부부의 모습(Original Title 바로 아래 인용문 참조)은 식민지 사회에서도 나름대로 원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의 소소하지만, 한편으로는 구시대적인 애처로운 희망에서 비록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민중 대부분에겐 독립보다는 밥, 즉 개인적 삶의 안정이 더 중요했음을 엿볼 수 있다.

금 당장 눈앞의 급한 불을 끄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민중들과는 달리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등 신사상의 급물살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지식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애썼고 동시에 어설프게나마 사회 개혁 방면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다방면으로 활동하게 된다. 덕분에 김병화 같은 ‘마르크스 보이’도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격동기는 사상적 차이에서 오는 대립과 충돌도 있었지만, 의외의 합일점도 있었다.

조덕기는 온건한 사회주의자 김병화가 필순네 가족과 사상적 차이가 있음에도 충돌 없이 구순히 지내는 이유를 필순에게 묻는다. 이에 필순은 “허기야 일치점은 있거든요. 구차하니 서로 동정하는 것이죠. 피차에 배를 졸라매구 앉았으니 의견이 틀린다고 말다툼할 기운두 없어 서루 사폐를 알아주는 건가 봐요. 그런 점은 가정적이나 사회적이나 일반일 거예요…….”라고 답하면서 “사실이죠.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이나 확실히 그 점에 가서는 일치점이 있지요.”라고 덧붙인다. 굶주림 앞에는 양반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1920년대 중반에 오면 국내의 민족운동이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크게 양분되며 일종의 대립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앞선 필순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잃은 암울한 상황에서도 하나의 목표를 위해 굳게 단결되지 못한 지식층과 생업에 바쁜 민중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무관심은 필순 아버지처럼 독립투사들의 비극적인 생을 잉태하기도 한다.

필순은 반생을 감옥으로 끌려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매 맞아 돌아간 아버지를 떠올리며 “어떻게 된 세상이 이래요?”라며 개탄한다. 이에 조덕기는 “훈련이나 조직이 없는 사회이고서야 그따위 일이나 저지를 수밖에! 그야말로 무를 수 없는 횡액이요 값없는 희생이죠!”라고 마주 한탄한다. 조덕기가 말한 ‘훈련이나 조직이 없는 사회’는 단결되지 못한 사회, 조부와 부친의 실없는 반목처럼 배려와 관용과 대화가 없는 사회, 나라를 잃어 제 갈 길을 바로 가지 못하는 민중들의 방황으로 가득한 사회라고 말한다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일까.

제강점기를 말하면 나라를 잃은 참담함에 울분을 토하는 애국지사들과 일제식민지 정책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는 민중들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은 살아가기 마련이다. 마음속이야 어떤 각오를 했건 간에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그것이 부당하고 이겨내기 어려운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하며 제 갈 길을 간다. 이것이 사람 사는 곳의 순리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의 근대화 물결 속에서 우리 민중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며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것은 그 당시 발표된 소설에서 근삿값을 찾아볼 수 있으며, 염상섭의 『삼대』는 그런 면에서 뛰어나고 섬세한 관찰력으로 작품 인물들 간의 다층적인 갈등을 풍부한 어휘력을 바탕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한국 근대 문학의 정수이자 고전으로 남을 문화유산이다.

이 리뷰는 2015년 7월 5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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