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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0일 일요일

[책 리뷰] 사형된 혁명 전 과거에 대한 편집증적 향수 ~ 사형장으로의 초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사형된 혁명 전 과거에 대한 편집증적 향수

원제: Priglasheniye na kazn'(Invitation to a Beheading) by Vladimir Nabokov
“시계의 숫자판은 비어 있지만 30분마다 간수가 옛 바늘을 지우고 새 바늘을 그려 넣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렇게 색칠된 시간에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계 소리는 보초가 내는 것이고,그래서 그는 보초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사형장으로의 초대』 중에서)

소련 문학 몇 작품을 읽다 보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긍정적인 체제로 표현한 작가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한 작가도 만나게 된다. 앞의 작가에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막심 고리키가 대표적으로 할 수 있고, 그 반대편에는 『수용소군도』의 솔제니친, 『우리들』의 예브게니 자미아틴, 그리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구덩이』 등이 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롤리타』로 유명한 러시아 망명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 역시 자신의 가족이 망명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인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가져온 이질적인 사회 풍조에 대한 불만이 드리워진 작품이 아닌가 싶다.

명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혼자만 투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은 작품의 주인공 친친나트의 감옥 생활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상상, 그리고 내적 불만 표출을 위한 글쓰기가 주요 일과이다. 그에게는 현존하는 모든 사물이나 인물들이 ‘무의미한 환영, 불쾌한 꿈, 쓰레기 같은 헛소리, 악몽의 잡동사니’이다. 그래서 이러한 허구의 세계에서 탈출하려면 ‘이론적으로 잠에서’ 깨어나야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형집행인 므슈 피에르의 도움으로 죽음을 통해 그는 마침내 허구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자신이 꿈꾸던 모든 자유가 보장된 세계로 나가게 된다.

작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친친나트는 구소련 사회의 무엇이 그렇게도 불만이었을까.

부유한 귀족 출신의 작가는 혁명이 가져온 가문의 몰락과 공산주의 사회가 가져온 전체주의적인 삶, 즉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보다 집단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집단화되고 획일화된 사회가 가져온 경직된 분위기와 사회적 냉대 속에서는 더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 더불어 혁명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과 작가의 아버지가 러시아 극우파에 암살당한 사실도 그에게는 크나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아쉬워하지 않았고 ‘과거’에 대한 이해 자체도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렇게 그는 과거에 애착과 미련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가 잊지 못하는 과거는 혁명 이전의 러시아이다. 즉 그는 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부유한 귀족 계층의 입장을 고스란히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귀족이 볼 때 노동자와 농민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어서 벌거벗은 투명한 존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는 자유보다는 당장 눈앞의 끼니와 추위에 대한 걱정이 더 중요했다는 사실을 부유한 귀족 출신의 작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영글지 않은 예술에 대한 섣부른 욕구는 때로는 배부른 자의 오만과 허영으로 보일 수 있다. 같은 귀족 출신인 톨스토이 백작과는 사뭇 다른 관점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바라본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며 외롭고 고달픈 오랜 망명 생활에서 오는 억울함과 지친 몸과 마음을 러시아 혁명 이전의 과거를 기억하고 되살리는 것을 넘어, 글쓰기로 재가공을 완성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한다. 그가 러시아 어를 버리고 영어를 선택하며 미국 작가로서의 길을 선택했지만, 죽는 그 날까지 정착하지 않고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호텔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결국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향을, 혁명 이전 러시아를 애타게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독자가 쉽게 읽으면서 즐겁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다. 그래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어쭙잖게나마 후기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도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설을 보고 조금은 특이하게 작가의 귀족 출신을 작품과 연결지어 본 것이다. 아무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그러한 특별한 과거가 있었기에 과거와 기억, 그리고 상상을 재가공하여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불행한 과거는 친친나트의 사색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뭔가를 알고 있다. 나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표현하기가 너무 어렵다! 아니, 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친친나트의 고뇌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유럽으로 망명하기 전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렇게 정당하게 표출하지 못하고 쌓이고 쌓인 억압된 재능은 작가에게 심적 부담과 표현의 갈증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러한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간수의 열두 살 딸인 말괄량이 소녀 엠마치카는 서른 살의 유부녀 친친나트의 품에 안기며 자신과 같이 감옥을 탈출한 다음 결혼하자고 고백한다. 훗날 『롤리타』를 예상한 심오한 한 수였을까.

이 리뷰는 2013년 10월 2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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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책 리뷰] 역사 속 화가의 미스터리에 추리 소설적 상상력을... ~ 샤라쿠 살인사건(다카하시 가츠히코)

역사 속 화가의 미스터리에 추리 소설적 상상력을 접목시킨

원제: 寫樂殺人事件(The Case of the Sharaku Murders) by 高橋克彦(Katsuhiko Takahashi)

본 우키요에(일본의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에 서민 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회화의 한 양식, 두산백과)의 권위자 니시지마 교수의 유일한 경쟁자이자 재야 우키요에 학자인 사가 아츠시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경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살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던 어느 날 니시지마 교수 밑에서 우키요에를 연구하는 츠다에게 사가의 처남을 통해 우연히 화집 한 권이 들어온다. 그런데 그 화집을 살펴본 츠다는 그 화집 안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샤라쿠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도슈사이 샤라쿠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여 10개월 동안 14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추어진 우키요에 화가였다. 츠다는 샤라쿠의 최고 권위자인 니시지마 교수의 동의와 격려 속에서 직접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던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일본 미술계를 떠나 전 세계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학설을 자신이 발표하기에는 학계에 전혀 이름이 없었던 츠다는 결국 샤라쿠의 최고 권위자인 니시지마 교수의 설득에 넘어가고 츠다는 자신이 그동안 조사하고 발견한 모든 것의 결정체인 논문과 함께 화집, 그리고 새 학설 발견의 명예와 영광 모두를 교수에게 양보한다.

그런데 화집 발간을 얼마 앞두고 한창 주가를 올리던 니시지마 교수는 저택에서 일어난 화재로 화집과 함께 세상을 떠나고 경찰은 조사결과 지난번 사가의 경우처럼 자살로 처리한다. 그러나 지난번 사가의 사건부터 의문을 품고 니시지마 교수 사건까지 따라온 오노데라 형사와 츠다는 서로 협력하여 두 우키요에 권위자의 잇따른 죽음에 의문을 품고 그 뒤에 숨겨진 치밀하게 계획된 복수와 비열한 배신의 거대한 그림자를 추적하면서 조금씩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드러난 진실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과 충격의 시한폭탄이었는데… .

리소설 『샤라쿠 살인사건』은 일본 에도 시대 실존했던 일본을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이자 지금도 여전히 정체불명인 도슈사이 샤라쿠의 정체를 추적하는 주인공 츠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일본 에도 시대 문화와 그 당시 정치에 낯선 한국 독자에게는 조금은 버거울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샤라쿠 살인사건』의 뒷부분에는 추리소설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색인과 페이지 곳곳에 많은 양의 각주가 들어 있다. 보통의 추리소설을 생각하며 머리를 식힐 겸 가볍게 책장을 펼쳤다가는 큰코다칠 수도 있다. 참고로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샤라쿠 살인사건』은 일본의 주간문춘 선정 20세기 걸작 미스터리 베스트 8위에 오를 만큼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이 중에서 내가 읽어 본 것은 2위 화차(1992, 미야베 미유키, 한국과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된 두 편을 모두 보았지만, 아직 책은… .), 4위 점성술 살인 사건(1981, 시마다 소지), 7위 이유(1998, 미야베 미유키), 17위 내가 죽인 소녀(1989, 하라 료) 정도뿐이다.

마도 단순히 추리소설의 재미를 넘어서 일본 최고의 우키요에 화가인 샤라쿠의 정체를 추리소설 소재로 삼은 점과 그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기존의 여러 학설에 대한 작가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명쾌한 반론, 그리고 『샤라쿠 살인사건』의 주인공 츠다를 통해 새로운 가설로 샤라쿠의 베일을 벗겨 내려는 참신한 시도 등이 크게 주목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지만, 그럼에도 역시 전혀 예상 못 한 마지막 반전은 역시 추리소설이 독자에게 제공해야 할 기본적이자 필수적인 조건은 완벽하게 갖추어졌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초반에는 샤라쿠에 대한 학설을 조금 비중 있게 다루다 보니 전개도 느슨하고, 나처럼 에도 시대와 우키요에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는 조금은 고역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상파에 영향을 미쳤다는 우키요에에 대해서 이 기회에 대충이나마 배운다고 위로하며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하면 그 뒤에 기다리는 작가가 준비한 보상은 앞의 모든 지루함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샤라쿠의 실제 작품은 네이버 지식백과 또는 구글 이미지에서 ‘토스사이 사라쿠’나 ‘샤라쿠’ 등으로 검색하면 감상할 수 있다.

이 리뷰는 2013년 10월 1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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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2일 토요일

[책 리뷰] 밑바닥 인생의 진솔한 토로 ~ 고역열차(니시무라 겐타)

추천하는 책

밑바닥 인생의 진솔한 토로

원제: 苦役列車 by 西村 賢太
뿌리가 그런데다 후천적으로 다른 사람과 사귀는 일에 일종의 체념과 두려움 같은 것을 지닌 채 인격 형성기를 지내버린 그에게는 어차피 백 명의 친구보다 한 잔의 술이 훨씬 더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오로지 물질적인 것에서 곤란을 느낄 따름이었다. (『고역열차』, 47쪽)

벽 일찌감치 동트기 전에 집에서 간단하게 몸을 풀고 집을 나와 한강 둔치에 있는 생태공원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보면, 요즘 같은 아침저녁으로 쓸쓸한 계절에는 그제야 희미하게 날이 밝기 시작하고, 아파트 후문에 있는 사거리 한 모퉁이에는 허름한 복장에 운동화나 작업화를 신고 배낭을 멘 아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문을 보는 사람, 멀거니 서 있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등 그들의 가지각색의 모습에서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일용할 양식을 위한 일터로 데려다 줄 차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들을 조금 치켜세우면 우리 사회의 밑거름이 되는 기초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대접이나 관심을 못 받는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쉬고 편하게 잠을 자는 집과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지어 주었고, 우리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도록 반듯한 길과 쭉 뻗은 도로를 닦아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가 필요한 상품을 날라다 주었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과 전기, 그리고 가스를 집까지 공급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지어주었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것, 발을 디디는 곳, 어디 하나 빠짐없이 그들의 땀과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해, 그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가 문득 이런 감상적인 생각을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니시무리 겐타의 『고역열차』를 읽고, 그들의 황량한 뒷모습에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간타가 아침 일찍 회사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그날그날 바뀌는 작업 장소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야마 가타이로부터 시작되어 『인간실격』의 다자이 오사무로 완성된 일본 특유의 사소설(私小說)의 전통을 이었다는 니시무라 겐타. 그래서 그의 작품 『고역열차』는 그가 중학교 졸업 후 집을 나와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온 처절한 삶의 황량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게 작가의 치부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방끈 짧았던 작가의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그대로 담은 『고역열차』는 독자에 따라서는 불쾌감과 동시에 거부감을 안겨줄 수도 있는 진솔한 작품이다. 솔직히 한낱 실마리 같은 희망하나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하루살이 같은 고달픈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거기에는 행복한 결말도 없고 더는 떨어질 곳도 없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표지 안쪽에 실린 한 성격 할 것 같은 작가의 사진을 보면, 순탄치 않음을 넘어 작품의 제목 그대로 작가의 험난한 인생을 고역스런 열차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달려온 고행 같은 삶의 흔적이 느껴진다.

작가의 체험을 소재로 한 소설로서는 막심 고리키의 단편집 등 다수의 작품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작품들과 니시무라 겐타의 『고역열차』 분위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니시무라 겐타의 소설에는 꾸밈이나 과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독자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희망도 없다. 아니 애써 희망을 품으려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진정한 밑바닥 하루살이 인생이 아니겠느냐는 식이다. 『고역열차』를 읽는 내내 나는 40년 넘은 으슥하고 허름한 공동주택을 혼자 떠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나사 한두 개를 넘어서 수십 개는 빠진 듯한 축 처진 어깨와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듯한 유령 같은 몰골로 복도에서 마주치는 말이 없는 주민들, 재래식 공동화장실에서 공동주택 구석구석으로 풍기는 방문자에게 충격을 넘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끔찍한 악취. 그래서 그럴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꼭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제대로 뒤처리를 하지 않은, 뒤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다.

래도 난 『고역열차』를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을 보고 그나마 내 삶은 다행이라 여기는 나약한 자의 염치없는 감상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작품 속의 주인공 간타가 외줄 타기 같은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패배자의 인생이라고 낙담하면서도 구차스럽게나마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이 나태하고 우유부단으로 점철된 나의 게으르고 염치없는 삶보다 훨씬 값져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읽지 않고 도중에 포기한다는 것은 왠지 작가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죽을죄를 저지르는 것 같은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조금은 험상궂어 보이는 작가의 사진 때문일까. 꿈에서라도 작가가 날 찾아와 흠씬 두들겨 패줄 것 같았다. ‘포기할 거면 애초에 시작하지를 말지 뭐하러 읽었느냐.’라고 꾸짖으며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툭하면 시비를 걸고 짜증도 잘 내지만 그런 불량배기질을 끝까지 밀어붙일 배짱이 턱없이 부족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소심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간타의 처량하고 쓸쓸한 뒷모습에서 진정 내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책을 덮고 후기를 다 쓴 지금도 영 뒤가 개운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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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5일 토요일

[책 리뷰] 풀어야 할 ‘오해’, 풀지 말아야 할 ‘오해’ ~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노리즈키 린타로)

풀어야 할 ‘오해’, 풀지 말아야 할 ‘오해

원제: 生首に聞いてみろ(THE GORGON'S LOOK) by 法月 綸太郎

‘일본의 조지 시걸’이라고 불리는 전위 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가 오랫동안 공백을 깨고 회고전을 준비하던 준 지병인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미모의 외동딸 에치카를 라이프캐스팅 기법으로 모형을 뜬 전신 석고상이었고 이 작품은 21년 전 에치카의 어머니이자 조각가의 전처인 리쓰코가 에치카를 임신했던 모습을 모델로 한 ‘모녀상’ 시리즈의 완결판이었다. 그런데 이 ‘에치카 조각상’의 얼굴 부분이 절단되어 묘연히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각가의 동생 아쓰시의 부탁으로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가 조각상 도난 사건에 끼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치카마저 실종된다. 그리고 그녀의 절단된 머리만 가와시마 이사쿠의 추모전이 열릴 예정인 미술관으로 보내지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석고상 머리 도난 사건은 예고 살인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16년 전 조각가 부부와 리쓰코의 동생 유코 부부들 간에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각관계와 유코의 자살이 에치카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걸까.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조각가가 완성한 석고상의 머리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은 작가의 이름인 노리즈키 린타로이고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인 주인공의 아버지는 경찰관이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이 같고, 탐정의 아버지가 현직 경찰관! 이쯤 되면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독자와의 대결’로 유명한 본격파 추리소설 작가의 거장 ‘엘러리 퀸’이다. 참고로 ‘엘러리 퀸’은 필명이고 실제 작품을 쓴 작가는 프레데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이고 두 사람은 사촌 형제 사이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 또한 엘러리 퀸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하니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마니아에게는 마냥 반가운 작품이다. 그뿐만 아니라 엘리리 퀸의 수사 방식, 즉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이곳저곳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실수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하나하나씩 잘못된 단서들을 제거해나간 끝에 결국 정제된 하나의 또렷한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 또한 다름이 없다. 거기에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는 일반 대중이 가까이 가기에는 조금은 먼 조각이라는 예술의 세계, 그중에서도 조각가가 석고상의 ‘눈’을 표현하는 어려움과 조각으로 표현한 ‘눈’의 의미에 대해 조각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 있어 한층 독자의 지식을 넓힐 기회도 주고 있다.

래도 추리소설 하면 역시 트릭을 빼놓지 않을 수 없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는 독자가 무심코 읽고 지나갈 수도 있는 페이지 여기저기에 복선이 깔려 있다. 그리고 나중에 사건 주변 인물들 간에 뒤엉킨 오해가 서서히 밝혀지고 풀리면서 독자는 무심코 흘려보낸 복선을 떠올리고 전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복선을 관통하는 핵심은 작가도 인정하듯 ‘오해’다.

조각가는 21년 전 ‘모녀상’ 시리즈를 만들 때만 해도 잉꼬부부로 소문났던 사랑하는 아내 리쓰코에 대한 오해와 라이프캐스팅으로 만든 석고상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인 ‘눈을 감은’ 석고상을 뛰어넘고자, 허용되지 않은 예술적 탐미를 이겨내지 못하고 악마와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아내를 잃고 동생과도 절교한다. 하지만, 악마는 결코 그 일을 잊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고 나서 하나뿐인 딸 에치코도 결국 ‘악마와의 계약’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비록 그가 며칠 차이로 딸보다는 먼저 죽지만 말이다.

보통 오해가 풀리면 그동안 오해의 대상자와의 쌓이고 묵은 앙금도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일도 있다. 조각가 이사쿠는 사망하는 해 초반에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동생과 극적으로 화해한다. 그 결과 16년 전 헤어진 아내에 대한 오해도 풀리자 이사쿠는 예술가적인 독창적인 기질로 16년 전의 진실을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에는 절대 평범하지 않은, 어찌 보면 조금은 비뚤어진 방법으로 세상에 알릴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모녀상’ 시리즈의 완결판인 ‘에치카 석고상’이다. 그리고 그 진실의 핵심은 바로 ‘에치카 석고상’의 도난된 머리에 있었다. 이사쿠가 오해를 안고 그대로 죽었더라면 딸 에치코만은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만약’은 독자를 안타깝게 한다. 보통 우리는 오해를 푸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감정이 더욱 불거져 서로의 감정이 더 악화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도 있듯 때로는 지나친 호기심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도 세상사는 지혜일 것 같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일반적인 추리소설로서 좋은 작품인 건 분명하지만, 진정한 본격 추리물로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완성된 트릭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16년 전 유코 자살 사건의 개연성이 좀 찝찔했다고나 할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적을 수는 없지만, 노리즈키 린타로가 “본격 미스터리의 경우, 리얼리티와 트릭이 서로 경쟁을 벌이죠.”라고 말했듯이 트릭의 완성을 위해 사실성을 조금 감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래도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주요 단서들이 16년 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증거들이 물질적인 증거보다는 정황증거일 경우가 좀 있다 보니, 매우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완성된 추리일지라도 그것들을 가리키는 단서들과의 연결고리들은 좀 느슨한 감이 없지 않나 하는 시건방진 생각을 해보면서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지루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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