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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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8.

[책 리뷰] 피해자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형사가 있다면? ~ 신참자(히가시노 게이고)

만약 피해자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형사가 있다면?

원제: 新參者(Newcomer) by 东野圭吾(Keigo Higashino)
"… 하지만, 형사가 하는 일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잡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신참자』 중에서)

상 깊게 감상한 드라마 『신참자』의 원작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이 도서관 책장에 보란 듯 진열된 것이 눈에 띄어 나 역시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하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과장됨 없이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럽고 따뜻한 감동과 산뜻한 기쁨을 얻었다면 당연히 원작소설에도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원작소설의 작가가 다름 아닌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일단 재미는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이 아닌가. 다작의 작가이면서도 매 작품 인기를 끌고 많은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일단, 드라마를 본 지 얼마 안 되었기에 페이지는 굳이 서둘지 않아도 가볍게 넘어갔다. 작품을 초반만 읽어도 전체적인 흐름이나 내용이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정도로 드라마는 원작에 충실했다. 특히 책에서 등장하는 가가 형사에 대한 묘사를 보면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아베 히로시의 완벽한 연기와 그를 주연으로 뽑은 캐스팅 실력에 놀랄 따름이다. 책 속에서 가가 형사는 캐쥬얼한 차림에 더부룩한 머리카락, 윤곽이 뚜렷한 얼굴, 인상이 남는 울림 좋은 목소리, 하얀 이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 등의 가가 형사를 묘사한 문장을 읽고 독자가 상상 속에 떠올린 이미지와 모델 출신답게 다부진 몸매, 그리고 단호한 인상을 준 아베 히로시와 완벽하게 매칭이 된다. 지금도 드라마 속에서 탐문 수사를 벌이며 만나는 사람마다 선보이는 아베 히로시의 밝은 미소가 눈앞에서 떠나질 않고 아지랑이 피듯 어른거린다.

라마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원작이 주는 감동을 더욱 배가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몇몇 장면은 수정하고 몇몇 장면은 추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매 편 드라마의 마무리 장면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애의 재확인 장면이다. 가족들은 오랜 시간 대화의 단절로 쌓인 묶은 때처럼 거칠고 두터운 오해를 가가 형사의 은밀한 중재 덕분에 없애고 따뜻한 가족애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런 마음 따뜻한 가가 형사는 다른 동료와는 달리 수사에 대한 독특한 그만의 신념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직접 가가 형사의 말을 들어보자.

“ … 하지만, 형사가 하는 일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잡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가가 형사는 굳이 파헤쳐 밝히지 않아도 될 참고 조사인 가족들의 숨겨진 말 못할 사연까지 추적하고 수사한다. 그리고 친구 집 마실가듯 때로는 케이크 등 먹을거리를 들고 참고인 집을 찾아가 마냥 푸근해 보이는 미소로 그들을 상대한다. 하지만, 그 부담 없고 다정한 미소 뒤에는 상대방의 모든 걸 투시하는 듯한 예리한 매의 눈이 숨겨져 있다. 따라서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은 가가 형사 미소 앞에서라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다.

최대한 참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감정적인 동요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그 가족들 사이에 쌓인 오해로 말미암은 케케묵은 감정을 화해시킴으로써 당사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 가족애의 재확인을 목격한 시청자나 독자 역시 감동하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가가 형사와 아버지와의 갈등, 경시청에서 근무하는 조카 등에 관한 책에는 없는 배경과 인물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좀 더 가가 형사를 현실적인 이미지로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한다. 특히 매일 붕어빵 가게 앞에서 줄만 서고 끝내 먹어보지를 못하는 가가 형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 이렇게 독특한 개성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아니면 애교 있는 고집스러움을 넘어 억척스럽게 자신만의 규칙을 지키는 철저한 모습이야말로 그의 비밀스러운 수사력의 힘이 아닐까.

부분의 다작 작가가 그러하듯이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문체가 특히 뛰어나거나 문장 하나하나가 예술적 감각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건조하면서도 일본 음식의 특징처럼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그의 문장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책 앞에 있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이 있다. 반대로 평론가들을 위한, 독자가 읽기에는 난해하고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작품이 꼭 좋은 책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래서 그런지 노벨 문학 수상작들을 보면 적당히 난해하고 적당히 읽기 쉬운, 그 절묘한 경계에 있는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오래전부터 추리소설로 명성을 날려온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품마다 이야기 전개에 적절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이야기로 독자들을 매료시켜왔다. 쉽게 말해 한 번 손에 들면 끝장을 보고야 말게 하는 것이 그의 소설이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의 작품이 주는 감동은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그가 작품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고자 하는 예리한 통찰력 있는 메시지다. 그런 관점에서 드라마와 책의 『신참자』가 주는 메시지는 단호하다. 바로 ‘가족’이다. 현대 사회가 겪는 고질적인 문제점인 가족 간의 소외나 소통의 단절이 가져올 비극을 이혼한 40대 중반의 미쓰이 미네코 살인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외아들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의 꿈을 이루려고 가출하자 자신도 젊은 시절 못 이룬 번역가로서의 꿈을 떠올리고 제2의 인생을 위해 남편과 합의 이혼하고 자립에 나선다. 그녀는 그저 소박하게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의 중년 여성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의문의 교살을 당하고, 가가 형사의 독특하지만, 사려 깊은 그만의 ‘치유’가 시작된다.

요즘은 이런 ‘메시지’가 담긴 추리소설을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순하게 ‘추리소설은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다.’라는 과거의 낡은 고정관념을 넘어 작가가 바라본 사회가 가진 보편적인 문제점을 파헤치고 해결해보고자 하는 노력을 담아 추리소설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새로운 추리소설의 한 갈래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족’을 강조하면서 꿈을 위해 도전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도 심어 놓았다. 1장 ‘센베이 가게 딸’에서는 미용사를 꿈꾸는 나호, 2장 ‘요릿집 수련생’에서는 어린 시절 생선초밥집에서 일하는 주방장의 모습에 반해 요릿집에 들어온 슈헤이, 4장 ‘시계포의 개’에서는 어렸을 때 태엽이나 기계로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의 세밀함에 감동하여 견습 시계 수리공이 된 아키후미, 그리고 연기를 위해 극단에 들어간 미네코의 아들과 그녀 역시 번역가로서의 꿈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현실적이자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행운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고 그저 꿈은 ‘꿈’으로만 간직하며 공상으로만 만족하거나, 어렵게 실천으로 옮겼지만 커다란 운명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의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반면에 어떠한 장애나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오직 그날을 위해 오랜 세월 기회를 엿보며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을 간직한 사람도 있다.

꿈을 향한 희망찬 도전을 앞에 두고 운이 좋은 사람은 전폭적인 가족의 지원을 받기도 하겠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만 되는 일은 별로 없다. 바로 여기에서 가족 간의 갈등이 온다. 어찌 보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고우키와 미네코의 독단적인 행동이 미네코의 죽음을 불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길이 현명한 판단일까. 가족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힘들고 긴 여행을 떠나느냐, 바로 여기에서 가족 간에만 얽힌 딜레마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오직 그 가족만이 풀 수 있다.

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꿈을 품지 않은 사람을 어찌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 꿈을 향해 가는 절대 쉽지 않은 긴 여정에 있다. 단순히 집을 나가고 남편을 떠난다고 꿈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로 말미암은 가족 간의 갈등 또한 역시 단순하게 외면하거나 도망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우발적인 행동은 오히려 작품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가가 형사는 살해당한 미네코와 그녀의 남편 나오히로를 떠올리며,

“ … 결국, 두 분 모두 이혼 후에 얻은 것은 가족이었던 겁니다. 가족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죠. 가족이라는 끈은 아주 단단한 겁니다. …”

라고 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은 진부한 말이지만,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살아가다 보면 정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네코는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살해한 범인에게도 피는 물보다 진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신참자』는 소설보다는 드라마를 먼저 추천한다. 아베 히로시의 깔끔한 연기도 볼만하지만, 드라마의 각색 또한 괜찮았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2013년 03월 2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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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4.

[책 리뷰] 혁명 폭력에 맞물린 한 가족의 비운 - 두 도시 이야기(디킨스)

추천하는 책

혁명 폭력에 맞물린 한 가족의 비운

원제: A Tale of Two Cities by Charles Dickens

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18세기 말에 벌어진 프랑스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지만, 혁명 전체를 조명하지는 않았다. 파리 생탕투안 교외의 어느 한 술집에서 점화된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과 이 거대한 폭풍에 휩쓸린 마네트 박사 가족의 비운을 담은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요 줄기이다. 그리고 그 비운의 시작은 과거 알렉상드르 마네트 박사가 바스티유 옥에서 겪는 18년 동안이라는 긴 독방생활이다.

작품의 시작은 1775년 11월, 태어나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박사의 딸 루시가 긴 독방생활에서 풀려난 박사가 옛 하인이자 이 작품에서 혁명의 중심이자 도화선이 되는 생탕투안 교외의 술집 주인인 드파르주에게 의지하며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텔슨 은행 직원이자 박사의 재산관리인이었던 로리 씨와 함께 런던에서 파리로 오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작가는 이 당시 파리 민중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었는지를 파리 생탕투안 교외의 좁은 거리에 커다란 포도주 통이 깨지면서 포도주가 땅 위로 흘러나오자 그 술 웅덩이에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민중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오므려 포도주를 떠서 홀짝거렸고 … 깨진 사금파리로 바닥에 고인 포도주를 떠 마시는가 하면, 심지어 머릿수건을 풀어 포도주에 담갔다 아기 입안에 짜 넣어주는 아기 엄마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가 흘러내려 가지 못하게 흙으로 작은 둑을 만들었고 … 포도주가 밴 통 조각을 손에 넣고 핥아먹거나 포도주가 배어 썩어 문드러진 눅눅한 통 조각을 질겅질겅 씹는 사람도 있었다. 포도주가 흘러내려 갈 배수 시설은 없어도 사람들이 포도주를 모두 마셔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술이 스며든 진흙까지 몽땅 떠가는 바람에 이런 풍경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청소부가 다녀갔다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믿기 어려운 기적 같은 모습이었다. (『두 도시 이야기』 1부 5장에서)

심한 가난과 굶주림은 민중에게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자존심과 수치심도 잊게 하였다. 이렇게 혁명 전 민중의 삶은 이미 피폐해질 만큼 피폐해졌고, 그들은 더는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었다. 박사는 딸과 로리 씨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왔고, 시간은 금세 5년이 흐른다.

이 당시 런던의 모습은 겉으로는 매우 평화로워 보인다. 템플 바 옆에 있는 텔슨 은행의 구식적인 건물과 역시 구식을 고집하는 그들의 업무방식, 그리고 크고 작은 모든 범죄에 사형이 남발하는 모습은 그 당시 런던 빅토리아 시대가 매우 보수적으로 안일하고 나태한 생활에 빠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폭풍 전의 고요함으로 긴장감이 도는 파리와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며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혁명 탓에 자신들의 이익에 손실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영국 귀족들의 시대착오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망명한 귀족, 찰스 다네이가 첩자활동을 했다는 고발로 런던에서 재판이 일어난다. 피고인의 충직한 하인이었다던 클라이와 피고인의 친구였다고 자청한 바사드가 다네이를 배신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 간의 사이가 오래된 불화로 말미암은 견원지간 사이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다네이는 사형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죄로 풀려난다. 훗날 프랑스혁명에서 죄가 있건 없건 의심을 받아 고발당하고, 귀족이었다는 죄로 수많은 사람이 정당하지 못한 절차와 적법하지 못한 판사와 검사들에 의해 무수히 목이 잘려나가는 상황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작가는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불안과 혼란에 휩싸인 파리와는 달리 런던은 다네이의 재판을 통해서 최소한의 법치주의는 지켜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처럼 작품 중간마다 두 도시, 즉 파리와 런던을 간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을 독자는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 다른 중요한 장면으로 이 두 도시에서 일어난 폭도들의 서로 다른 뒤끝을 보자.

우선 런던에서 일어난 로저 클라이의 장례 행렬에 발생한 폭도들의 뒤끝을 살펴보자.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후 여름 별장들 몇 채를 무너뜨리고 울타리를 뜯어낸 것도 모자라 호전적인 사람들은 무기까지 뽑아들었다. 이윽고 경비대가 출동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을 들은 군중은 뿔뿔이 흩어졌다. 경비대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폭도들은 으레 그런 식으로 해산을 했다. (『두 도시 이야기』 2부 14장에서)

이번에는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풀을 먹으면 되지 않느라고 말했던 일흔이 넘은 풀롱 노인이 숨어 있다 발각되어 시청으로 끌려와 생탕투안 주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다.

… (풀롱은) 자비로운 밧줄에 다시 묶어 공중으로 끌어올렸고,최후에는 풀을 잔뜩 입에 문 머리통이 창끝에 매달렸다. 생탕투안 주민들은 그 모습을 보며 춤을 추었다.
… 사람들을 모욕한 대가를 치른 늙은이의 사위가 오백 명의 강인한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로 입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사람들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생탕투안 주민들은 종이를 펼쳐 그의 죄목을 적은 다음 그를 포획했다. 풀롱과 저승길에 동행하도록 군대의 심장부에서 그자만 도려내어 머리와 심장에 창을 꽂았다. 그날 사람들은 전리품 세 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두 도시 이야기』 2부 22장에서)

런던의 폭도는 역시 최소한의 법치가 이루어지는 국가답게 경비대가 출동했다는 소문만으로도 겁을 먹고 해산하지만, 생탕투안 드파르주 술집에서 터진 민중의 분노는 거침없이 퍼져 나갔고, 그들은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무장한 군인들조차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끊임없이 치솟는 분노와 증오는 어디서 온 것일까.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해야 할 인간은 바로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은 무서울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작품 속 시대에는 더는 잃을 것이 없었던 가난한 민중으로부터 그 어느 혁명보다 과격했던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수 있었던 것이고, 자본주의화 된 현대의 국가에서는 그런 과거에 일어났던 혁명이 발생하기 어려운 이유도 다름 아닌 ‘가진 것이 옛날보다 많아 잃을 것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가난과 굶주림, 핍박에 고통받고 지쳐 구석에 몰릴 대로 몰린 그들은,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게 되고 결국 죽음의 문턱에 서서 꺼져가는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희생하여 죽음조차 불사하는 투쟁의 선봉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들에게는 굶어 죽으나, 귀족에게 맞아 죽으나, 아니면 투쟁하다 죽으나 매한가지이다.

작가는 작품 중간마다 프랑스혁명의 잔인함과 폭력성을 작품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거기서 압권은 3부 2장 ‘숫돌’ 장면이다. 자신의 옛 하인 가벨의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고 파리로 건너온 다네이는 결국 신(新)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고, 이 소식을 듣고 파리로 달려온 박사 가족은 텔슨 은행 파리지점에 잠시 머무른다. 그리고 그들은 창문을 열고 숫돌이 있는 뜰을 내다본다.

숫돌은 손잡이가 두 개인데, 남자 두 명이 각각 나눠 잡고 미친 듯이 돌렸다. 그럴 때면 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머리칼이 뒤로 넘어가 세상에서 가장 사납게 변장한 최악의 야만스러운 얼굴보다도 더 섬뜩하고 잔인해 보였다. 거짓 눈썹과 거짓 수염이 연신 휘날렸고 오싹한 얼굴은 온통 피와 땀투성이였으며 소리를 지를 때면 흉측하게 뒤틀렸고,짐승 같은 광기와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눈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았다. … 여자들은 그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포도주를 들고 있었고,그들은 칼을 가는 동안 술을 마셨다. 피가 뚝뚝,포도주가 뚝뚝 떨어지고, 숫돌에서 불똥이 튀어 주변 대기는 온통 핏방울과 불빛으로 가득 찼다. 그 무리 중에서 피로 얼룩지지 않은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 사악하게도 여자들에게서 훔친 레이스와 실크,장식 띠 따위도 걸쳤는데,속속들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날을 세우려고 가져 온 손도끼와 칼,총검,검 따위도 모두 피로 붉게 물이 들었다. … . (『두 도시 이야기』 3부 2장에서)

이처럼 프랑스 민중을 향한 작가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뿐만 아니라 작가가 표현한 프랑스 귀족의 무능함과 잔인함은 프랑스혁명에서 수없이 처형당한 귀족들에게 동정과 연민보다는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한다.

생탕투안에서 폭발해서 시작된 혁명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혁명의 이름으로 재판 같지 않은 재판으로 학살을 자행하는 민중의 잔인함이 이 작품을 흐르는 배경음악이라면 이 민중의 표적이 되는 프랑스 귀족이자 마네트 박사의 사위, 그리고 이상적인 처녀로 묘사되는 아름다운 루시의 남편인 찰스 다네이는 그 배경음악 앞에서 그저 줄의 당김에 따라 흐느적거리는 마리오네트이다.

다네이는 프랑스혁명을 거론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게 되는 착취와 억압, 야만적인 행위로 비난받는 악덕 귀족 이미지를 가졌던 아버지나 숙부와는 다르게 민중이 겪는 고통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개선하고자 하는 의욕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네이는 런던으로 망명하기 전 민중과 함께 할 기회를 루시와의 사랑 때문에 놓치고, 남은 재산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하인 가벨에게만 맡기는 등 순진하고 나약한 이상주의자이다.

“선생님 … 비참한 사람들을 동정하면서 제가 그들을 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들한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 스스로 자제하도록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 (『두 도시 이야기』 2부 24장에서)

… 바위에 부딪힐 때까지 항해를 해야 하리라. 그는 바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미완인 상태로 떠나왔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잘 설명하면 프랑스에서도 기쁘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선량한 사람들에게 종종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선행에 대한 낙천적인 환상이 떠올랐다. 심지어 자신이 잔인하고 격렬해지는 분노에 찬 혁명을 바르게 인도하는 환영을 보기도 했다. (『두 도시 이야기』 2부 24장에서)

위에서 보다시피 다네이는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순진하게 표면적으로만 드러나 보이는 귀족의 착취와 민중의 가난함으로만 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고 작위를 포기하면 선량한 그들과 같이 평등해질 줄 알았다. 그는 수십 년 이상 응축되어 오다 폭발하기 시작한 민중의 분노를 특별한 대책도 없이 자신의 설득만으로 삭일 수 있다는 아이 같은 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 다네이는 성난 민중을 그저 먹을 것에 굶주린 무지하고 선량한 동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중을 배부르게 해주고 심술이 난 아이 달래듯 민중을 타일러 폭동을 가라앉히면 자신은 영웅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그는 하인 가벨이 주인이 다네이를 대신해 감옥에 갇히자, 그를 구원하기 위해 혼자 파리로 가는 길에서도 고급 옷차림으로 말을 타는 등 여전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이런 다네이의 행동은 귀족에 대한 동정과 연민보다는 반감만 더욱 부채질만 하는 꼴이다. 특히 이 작품의 열쇠 같은 존재이자 잠재된 미래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카턴이 이런 악독했던 귀족 형제의 후손인 다네이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카턴은 자신의 희생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다네이에게조차 잊힌 비극적인 인물이다.

사랑하는 루시를 위해 루시의 남편 다네이 대신 희생을 하는 카턴은 이 작품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어릴 적에는 수재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성장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쓰게 된 그는 스스로 인지하고 있듯이 방탕한 생활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이런 카턴의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이 있다.

… 뛰어난 능력과 선량한 심성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쓰지 못하며, 자신을 파먹는 해충인지 알면서도 그 해충이 자신을 먹어치우도록 보고만 있는 남자였다. (『두 도시 이야기』 2부 5장에서)

하지만, 카턴의 숨겨진 뛰어난 능력은 예지를 통해 드러난다.

런던 소호에 정착한 박사의 집은 길모퉁이에서 소리가 울려오는데, 이 길모퉁이에서 들려오는 형체가 없는 소리는 파리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함의 메아리라고도 볼 수 있다.

거리는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에 서둘러 귀가하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길모퉁이에는 신기하게도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지만, 아직 누구의 발도 보이지 않았다.
“전 가끔 저녁에 여기 앉아 몽상에 잠겨요. …” - 루시.
“ … 저는 가끔 저녁이면 여기에 혼자 앉아서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어떨 때는 저 메아리가 우리의 삶을 짓밟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로 들려요.” - 루시.
“이 발소리가 모두 우리를 향해 오는 건가요, 마네트 양? 아니면 우리 사이를 뚫고 지나갈까요?” - 다네이.
“그들이 내 쪽으로 오게 해 드리죠!” - 카턴. (『두 도시 이야기』 2부 6장에서)

그리고 루시에게 카턴이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 … 아가씨와 아가씨를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 저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만약 제 경력으로 도움이 되어 드릴 일이 있거나 희생할 기회나 능력이 된다면 기꺼이 아가씨와 아가씨가 사랑하는 분에게 희생할 것입니다. … 당신이 사랑하는 생명이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꺼이 목숨을 바칠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두 도시 이야기』 2부 13장에서)

카턴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영국에서는 정신적으로 착취당하는 별볼일없는 존재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작가에 의해 프랑스 귀족을 위해 사랑의 희생을 단행하면서 한 가족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 자신이 잘못 걸어왔다고 생각한 인생길의 씁쓸한 마침표를 찍는다.

품을 읽고 나면 프랑스혁명은 피에 굶주린 무지하고 잔인한 인민들이 오랜 세월 쌓인 증오와 분노로만 가득 찬 듯하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는 굶주린 사자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들의 사냥을 위한 준비된 면책권이었다. 옛 귀족들이 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 박애는 어디에도 없었다. 찰스 디킨스는 프랑스혁명을 그저 억압받은 민중에 의한 폭동으로 보는 것 같다. 한국의 광주민주화운동처럼 프랑스혁명 역시 보는 이에 따라 평가와 해석에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러나 찰스 디킨스는 불편한 진실을 보려 하기보다는 잔인한 폭도들의 부정적인 면만 보여주면서 혁명의 의미를 고의적으로 빛을 잃게 하여 퇴색시키는 것 같다. 2부 6장에서 “박사의 딸은 고국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보잘것없는 걸로도 그럴듯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 점은 프랑스인의 가장 유용하고 훌륭한 특징이었다.”라는 작가의 풍자는 그가 프랑스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은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카턴의 죽음만 봐도 그러한 생각이 짙게 든다. 다네이는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형을 받아도 항변할 수 없는 위치였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서 당시 셀 수 없이 기요틴의 제물이 된 몰락한 프랑스 귀족 대신 희생되는 사람이 방탕한 영국인인 카턴이라는 설정은 작품 속 프랑스혁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영국의 관대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혹시 변호사 스트라이버에게 지식을 착취당하는 카턴이라는 괴짜스러운 인물 뒤에는 한때 변호사 사환으로 일했던 찰스 디킨스의 꿈과 몽상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프랑스혁명이 보여준 잔인함은 피의 바다를 이루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그 당시 귀족들이 『두 도시 이야기』 등장하는 식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넘어서, 초야권이라든지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지 하는 문제는 너무 과장의 소지가 있으므로 제대로 파악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당시 어느 나라를 가든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자행된 횡포는 어느 정도 있었으니 말이다. 책 끝에 첨부된 리처드 맥스웰의 작품해설을 봐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생시몽이 지은 회고록의 축약판인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전』을 예전에 읽어 보긴 했지만, 역시 가물가물한 기억 때문에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다음 도서관에 도착해서 잊지 않는다면 프랑스혁명에 대한 책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책 장을 덮는다.

이 리뷰는 2013년 03월 0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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