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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26.

[책 리뷰]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 보이는 공허한 푸른 눈동자 ~ 어나더(아야츠지 유키토)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 보이는 공허한 푸른 눈동자

원제: Another by 綾辻行人

야츠지 유키토를 처음 만난 작품은 『십각관의 살인』이었다. 꽤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 한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정리를 좀 했다면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무튼, 기억나는 건 학생들이 무인도에 놀러 가서 십각관에 묵게 되고, 역시 본격 추리물답게 한 명씩 죽어나가는 살인사건이 중심 이야기였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무인도에서의 사건 진행과 동시에 육지에서도 추리가 진행되는 점이랄까. 뭐 대충 그러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도 본격 추리물로써 선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어나더』의 뚜껑을 열어보니 본격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미스터리 공포물에 가깝다고나 할까. 보통 추리나 범죄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서 작품 끝에 범인이 밝혀지듯이 소설 『어나더』에서도 딱히 범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엇비슷한 인물이 마지막에 밝혀지고 난 직후에는 굉장히 허무하고 실망이 컸다. 왜 실망했을까. 아무래도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은 『십각관의 살인』만 읽었기에 본격 추리물 작가로서의 인상이 깊이 남아있었고, 보통 추리소설의 ‘범인 찾기 놀이’가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찾는 ‘망자 찾기 놀이’로 대체되는데, 나중에 그 망자가 등장인물 중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드러나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작가가 숨긴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작가도 알고, 등장인물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독자에게만 정직하게 말하지 않았던 어떤 사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그 사실은 원래 작품 초반에 언급된 것이지만, 작가는 그 부분만 독자에게 살짝 가리고 대신 그 사실을 독자가 추리할 수 있게 단서들을 여기저기 숨겨놓았다. 사실 작품 후반부에 그 망자가 등장인물 중 누군가와 어떤 관계인지 드러나는 결정적인 문장만 보면 내가 그렇게 경솔하게 실망한 것을 그렇게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단순히 ‘어라, 이거 원래 앞부분에 나와야 했던 거잖아. 아, 속았다.’라는 생각만 하고 그 뒤에 숨겨진 깊은 뜻을 몰랐을 때는 실망과 짜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이런저런 단서와 내용을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늘어놓고 차분하게 되씹고 음미해 보면 그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오히려 작가가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곳곳에 숨겨둔 단서들을 떠올려 보는 순간,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온몸을 짜릿하게 관통하는 전율과 함께 그제야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돌덩이처럼 굳은 내 지성의 둔감한 깨달음을 통해 뒤늦게나마 이 작품의 묘미를 마음속으로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차 했으면 아무 감동 없이 그냥 책을 덮어버리는 바보스러운 짓을 해버릴 뻔했다. 고로 이 작품의 특징은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범인 찾기 놀이’가 그대로 ‘망자 찾기 놀이’로 계승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했으니 당연히 그 망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내주는 단서는 작가가 은근슬쩍 작품 곳곳에 심어 놓았다. 그런 것을 보고도 눈치채기는커녕 오히려 작가를 탓한 내가 바보였으리라. 눈치 빠른 독자들은 여기까지의 내 글만 보고 이 작품을 정독한다면 그 망자가 누구인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과연 어떤 이야기이기에 그러는지 궁금할지도 모르니 대충 전반부 정도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참고로 작품의 진행은 원래 열다섯 살 소년 사카키바라 코이치의 일인칭으로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보통 삼인칭 시점으로 진행하겠다.

1부 What? Why? (2부는 ‘How? Who?’이다. 제목은 줄거리를 관통하는 화살과도 같다.)

코이치는 중학교 2학년 때 생긴 왼쪽 폐의 구멍으로 3학년부터는 요미야마에 있는 외가에 신사를 지며 도쿄의 사립학교에서 요미야마키타(요미키타) 공립중학교로 전학을 와 다니기로 했다. 요미키타 중학교 졸업할 때쯤에는 인도에 출장을 가 있는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고 그 때는 다시 도쿄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로 진학할 예정이었다. 외가에는 코이치에게 무척 잘 해주는 외할머니와 최근 치매가 시작된 외할아버지, 그리고 코이치는 실물로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본 어머니를 빼닮은 이모 레이코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 가을부터 기르기 시작한 구관조 ‘레이’가 있었다. 코이치의 어머니는 15년 전 친정 요미야마에서 코이치를 낳고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그해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런지, 코이치는 어머니와 닮은 레이코 앞에서는 긴장되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레이코는 예전에 코이치 어머니가 쓰던 별실에 아틀리에를 꾸며 기거하고 있었다.

1998년 4월 20일. 코이치는 재발한 기흉(氣胸: 공기가슴증)으로 다시 요미야마에 있는 시립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데, 4월 26일 일요일 오전에 코이치에게 뜻밖의 방문객이 왔다.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의 남자 반장 카자미 토모히코와 여자 반장 사쿠라기 유카리가 앞으로 코이치가 다닐 3반을 대표해서 튤립 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온 것이다. 그들은 별 얘기 없이 시간을 보내다 병실을 나갔다. 나가기 전 느닷없이 카자미는 코이치에게 악수를 청했다. 코이치에게 악수를 하는 카자미의 손은 땀인지 모를 촉촉함이 전해져왔다. 나중에 학교에서 알게 되었지만, 병문안은 미카미 미술 선생의 제안이었다고 했다.

입원 팔 일째 월요일. 코이치는 드디어 드레나지의 튜브를 제거하고 오래간만에 병원을 산책했다.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의 엘리베이터에서 코이치는 요미키타 중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작고 가냘픈 체구에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지하 2층에 있는 자기 반쪽에 전해줄 물건이 있다며 가슴에 뭔가를 품고 지하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남긴 ‘미사키 메이’라는 이름은 그녀만큼이나 공허하게 코이치를 주변을 맴돌았다. ‘지하 2층에는 창고와 기계실, 영앙실 뿐일 텐데….’

5월 6일 수요일 아침. 드디어 전학 첫날을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코이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인도의 아버지에게서 격려전화가 온 것이다. 전날 밤에는 레이코 이모가, 이모 그리고 코이치의 어머니도 다녔던 요미키타 중학교에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었다. 코이치는 집을 나서기 전에 어제 이모가 가르쳐 준 가르침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첫째, 옥상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면 안으로 들어올 때 왼쪽 발부터 내디딜 것. 둘째, 3학년이 되면 학교 후문 밖 언덕길에서 절대 넘어지지 말 것. 셋째, 반의 결정사항은 반드시 지킬 것. 넷째는….

그때 “코이치!”하고, 외할머니의 기운찬 부름에 곰곰이 이어가던 회상을 끝마치고 코이치는 등교 준비를 해야 했다. 코이치의 첫 등굣길을 구관조 레이가 나름대로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레이의 늘 같은 외침, "어째서? 레이, 어째서?"

3학년 3반 담임은 국어 담당인 중년의 남자 쿠보데라 선생, 그리고 부담임은 미술 담당인 아리따운 미카미 선생이었다. 두 담임은 코이치에게 계속 뭔가를 얘기할 듯 보였지만, 끝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수업이 시작하고, 코이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나 조용한 수업시간. 딴 짓 하는 녀석들은 있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코이치는 교정에 접한 창가 맨 끝자리에 매우 낡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있는 미사키 메이를 보았다.

점심을 먹고 성실한 반장 스타일인 카자미와 경박한 기분파인 테시카와라의 안내로 학교를 둘러보는 중 이 새 친구 둘은 코이치에게 재앙이나 영, 초자연현상을 믿느냐고 물었다. 코이치는 공포 마니아이긴 했지만, 그런 걸 믿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하며 걷다가 10년쯤 전까지는 3학년 교실로 사용했다는 오래된 2층짜리 건물인 0호관 앞을 지났다. 두 친구는 2층은 안 쓰고, 1층엔 미술실, 제2도서실, 동아리 부실이 있다고 했다. 그때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메이를 발견한 코이치는 메이에게 달려갔다. 새로운 두 친구는 매우 난감해했다. 메이도 결코 반갑게 맞이하지는 않았다.

“어째서?……괜찮아 이렇게 하는 거? …… 조심하는 편이 좋아.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쌀쌀하게 말한 메이는 코이치 앞을 떠났다. 체육 시간에는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코이치는 쉴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운동장 북쪽 3층짜리 C호관 건물 옥상에 있는 메이를 발견하고 코이치는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코이치는 스케치북을 안은 메이에게 지난주 병원에서 온 일에 대해 물어봤다.

"그날은, 슬픈 일이 있었거든."

그러면서 메이는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말을 마치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계단으로 향한 메이의 첫 걸음은 오른발이었다.

다음날 목요일 5교시 미카미 선생의 미술 시간. 코이치는 뭉크를 좋아한다는 예쁘장한 남학생 모치즈키 유아를 알게 되었다. 낯가림은 심해 보였지만 이야기해보니 꽤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미술부원이기도 했다. 활동 정지 상태에서 올해 4월부터 부활한 미술부의 담당 선생인 미카미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모치즈키는 미카미 선생에게 반해있었다. 문득 코이치는 오전 수업 때는 있었던 메이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불안’에 대해 얘기하다 테시카와라는 갑자기 “3학년이 됐는데 하필이면 저주받은 3반이 되어버렸으니까.”라고 말했다. 복도를 걷다 오래된 제2도서실 입구의 작은 문틈 사이로 메이를 발견한 코이치는 테시카와라와 모치즈키의 만류를 무시한 채 제2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실에는 메이 혼자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인형 같기도 한 연필로 그린 아름다운 소녀가 미완성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6교시 시작 종소리와 함께 도서실 구석 사서용 책상 너머에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사서가 나타났다. 전에는 이 학교의 선생이었지만 지금은 사서로 있는 치비키는 수업에 가라고 울림이 좋은 낮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5월 9일 둘째 토요일은 학교가 쉬는 날이라 코이치는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결과는 아무 문제 없음이었다. 혹시나 해서 코이치는 입원 시절 친하게 지냈던 같은 공포 마니아인 미즈노 간호사에게 지난주 월요일 4월 27일 그날 이 병원에서 죽은 여자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간호사는 한동안 입원해 있던 젊은 환자가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며 조사하고 나서 휴대전화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코이치는 병원과 외가의 중간쯤 되는 곳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허기를 때우고 무작정 작은 번화가를 걸었다. 그러다 미사키초라는 마을에서 ‘요미의 해질녘의,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라는 색다른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 간판 아래에는 ‘들렀다 가세요. - 공방m’이라고 적힌 낡은 나무판자가 걸려 있었다. 호기심에 가게의 진열장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검은색 원형 테이블 위에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두 손으로 얼굴 쪽의 베일을 들어 올린 여성의 상반신이 있었다. 아주 기인한, 매우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의 소녀의 상반신만 있는 구체관절인형이었다. 그때 간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죽은 여중생이 있었는데, 그 소녀 이름이 미사키가 아니면 마사키일 거라고 전해주었다.

코이치는 다음 주 금요일 저물녘에 다시 미사키초의 그 이상한 가게를 찾아갔다. ‘이곳은 뭐 하는 곳일까?’, 가게 안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인형들이 있었고 주름 가득한 노파가 코이치를 맞아주었다. 노파는 반은 가게이고 반은 전시관이라 말하면서, 코이치는 중학생이라 반값 입장료 250엔을 내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른 손님은 없으니 천천히 둘러보라고 말했다.

가게에 흐르는 조명만큼 어두운 현악 곡조가 흐르고 있었다. 대부분이 아름다운 소녀 인형이었고, 인형들은 다양한 자세와 표정을 가졌다. 싸늘하고도 매혹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존재이면서도 사람과 닮은 미묘한 인형들을 뒤로 한 채 코이치는 지하로 가는 계단을 발견하고 조용히 내려갔다. 지하는 또 1층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저 멀리 속세를 벗어난 듯한 광경. 지하라서 그런지 냉기가 스며드는 차가움.

사실 여느 때처럼 오후 수업시간부터 종적을 감춘 메이를 하굣길에 발견하고 같이 있던 친구들의 핀잔도 무시한 채 코이치는 그녀를 미행했었다. 메이가 이번 주에는 결석을 많이 해서 코이치는 걱정되었다. 메이를 따라가면서 거리가 좁혀지면 말을 걸려고 했는데 전혀 그렇게 되지 못했고, 해 질 녘 메이를 놓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가게 앞이었다. 코이치의 앞에 서양식 커다란 관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메이와 머리 길이나 색깔만 다른 인형이 푸르스름한 얇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관 안의 인형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때 관 뒤에서 교복을 입은 메이가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여기에 가끔 내려오곤 한다고 말하면서 안대를 벗고 왼쪽 눈을 코이치에게 보여주었다. 관 속의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인형과 똑같은 눈이 메이의 왼쪽 눈 자리에 있었다. 오른쪽 검은 눈동자와는 달랐다. 그녀는 왼쪽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 보이기도 해서 평소에는 가려둔다고 했다.

메이와 1층으로 올라와 보나 노파는 보이지 않았고 음악도 멈춰 있었다. 메이는 2층은 인형을 만드는 공방이라며 키리카 씨가 그곳에서 인형을 만든다고 했다. 그녀는 지난번 병원에서 '전해줄 물건'이 인형임을 시인했다. 그러나 코이치가 인형을 가지고 간 곳이 영안실이었느냐는 질문에는 외면했다. 언니나 여동생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간호사가 전해준 얘기로는 죽은 소녀는 외동딸이라 했는데’. 메이는 자기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도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하면서 26년 전 요미야마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쇼와 47년, 1972년, 26년 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성인지 이름인지도 모르는 미사키인지 마사키인지가 있었어. 1학년 때부터 좋은 외모와 성격,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인기가 많았던 미사키가 3학년 1학기 때 비행기 사고로 급사하는 바람에 담임과 반 친구들이 모두 충격에 빠져버렸어. 그 아이의 죽음으로 반 학생들이 슬퍼하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가 이런 말을 꺼냈어. "그 애는 죽지 않았어. 봐, 지금도 저기 있잖아."라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친구들은 미사키의 책상을 보며 그가 살아있다고 믿기 시작한 거야. 물론 선생도 협력했고. 그런데 졸업식이 끝나고 교실에서 찍은 단체 사진에 미사키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웃고 있었데.

코이치는 메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교 괴담치고는 아주 치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는 시종일관 기묘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표정했다. 메이는 이 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하다며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지만, 외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코이치는 그 뒷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외가로 귀환해야 했다.

5월 20일 수요일. 교실 게시판에 다음 주 중간고사 일정표가 붙었다. 코이치는 6교시 끝나고 테시카와라와 카자미에게 어제 메이에게서 들은 26년 전 얘기를 꺼내 보았다. 두 친구는 당황하며 난감해했다. 지나가던 미카미 선생도 코이치가 26년 전 이야기의 그것이 시작되던 해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까 역시 동요를 보였다. 코이치는 외할머니에게도 물어보았다. 옆에 있던 외할아버지는 26년 전에 코이치의 어머니 리츠코는 지금의 코이치와 같은 중학교 3학년 3반이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1학기 때 일어난 미사키라는 학생의 사고에 대해서는 대답하는 것은 피하는 것 같았다. 침묵을 깨고 여전히 "어째서?"를 연발하는 구관조 레이의 짧은 외침만 들렸다. 코이치는 술에 취해 들어온 레이코에게도 ‘그다음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녀도 소문으로만 알았다며 역시 자세한 대답은 피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레이코는 코이치에게 타이밍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음날 목요일에도 역시 메이는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다음 주가 시험인데. 그러고 보니 코이치는 수업 시간에 메이가 지명되어 지문을 읽거나 문제를 푸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5교시 미술 수업을 위해 0호관으로 가다가 옥상에 메이의 모습을 발견한 코이치가 후다닥 달려가 옥상에 도착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테시카와라였다. 그는 코이치에게 없는 것을 상대하면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26년 전의 일은 다음 달 되면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카자와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말도 남겼다. 짜증이 난 코이치는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옥상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메이는 평소처럼 교실에 나타났지만, 그녀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테시카와라도 그 뒤로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주말 밤에 시립병원의 간호사 미즈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사키가 아니라 미사키이고 이름이라고 했다. 후지오카 미사키.

5월 26일 화요일 중간고사 마지막 과목인 2교시 국어시험 시간. 시작한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가는 학생이 있었다. 메이 같았다. 코이치도 답안지를 책상 위에 덮어놓고 나가려고 일어났다. 하지만, 메이가 나갔을 때와는 다르게 담임이 한 번 더 답안을 검토하라며 만류했다. 교실도 웅성거렸다. ‘메이가 나갈 때는 그냥 내버려두고 왜 나만?’

코이치가 교실을 나와 보니 메이는 복도 창가에 창문을 열어놓고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코이치는 간호사가 들려준 사실을 메이에게 물어보았다. 메이는 후지오카 미사키는 사촌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이어져 있었던 사촌이라고. 코이치가 “왜 그런 거야? 친구들이, 선생님까지도 어째서 너를 …….”라고 묻자 메이는 “없는 존재니까.”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메이는 코이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때 체육 담당인 미야모토 선생이 다급하게 3학년 3반으로 뛰어들어갔다. 쿠보데라 선생에게 뭔가 얘기했고 곧 여자 반장인 사쿠라기 유카리가 허둥대며 교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가까운 동쪽 복도에 있던 코이치와 메이를 보고는 멀리 서쪽 복도로 돌아 달려갔다. 미야모토 선생은 사쿠라기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때 요란한 소리와 짧은 비명이 복도에 울렸다. 코이치가 달려갔을 땐 이미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사쿠라기는 우산 중앙의 뾰족한 부분에 목을 깊숙이 찔린 채 계단에 쓰려져 있었다. 사쿠라기의 어머니와 이모가 찬 자동차가 원인 불명으로 가로수를 들이받아 이모만 살아남았고, 사쿠라기도 구급차에 실려 가던 중 어머니처럼 사망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 두 사람이 이번 1998년도 요미야마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관계하는 '5월의 망자'가 되었다.

6월 2일 토요일. 의사는 지난주 사고 목격 후 가벼운 기흉이 일어난 코이치에게 이상은 없지만, 체육 수업은 아직은 무리라고 좀 더 지켜보자고 진단했다. 그래서 일주일간 학교를 쉬어 3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코이치는 잘 모르고 있었다. 테시카와라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6월 5일 화요일. 비 오는 날 진료를 마치고 코이치는 약속대로 미즈노 간호사를 만났다. 미즈노와 코이치는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미즈노는 코이치와 같은 3반에 다니는 남동생 미즈노 타케루에게서 뭔가를 들었는데 자신의 남동생은 겁을 먹고 있었고 지난번 그 일은 단순한 사고로 보지 않는 것 같다고 코이치에게 말했다. 코이치는 간략하게 미즈노에게 그동안의 메이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설명했다. 메이는 코이치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26년 전 이야기도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미즈노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동생에게 물어보기로 코이치와 약속하고 다음 만남은 돌아오는 토요일이 좋겠다고 말했다.

코이치는 집에 가는 길에 그 가게에 들렸다. 지난번과 같은 분위기, 지난번과 똑같은 말로 코이치를 맞이하는 노파, 지난번과 똑같이 지하의 관 뒤에서 나타난 메이. 그런데 노파는 지난번에도 오늘도 "다른 손님은 없으니…."라고 말했었다. ‘다른 손님이 없다고?, 그럼 메이는?’

메이는 코이치에게 그것이 시작되어버렸다고 말하며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그리고는 관 뒤로 사라졌다. 코이치는 관 뒤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코이치는 다시 레이코와 마주 앉았다. 그녀도 3학년 때 언니와 같은 중학교의 같은 3학년 3반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5년 전의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3일 수요일. 아침부터 메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사쿠라기 모녀의 죽음을 화제로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책상엔 꽃도 없었다. 코이치가 보기에 모두 애써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는 듯했다. 테시카와라에게 전화로 불러내어 학교 안에 있는 연못 앞에서 만났다. 상황이 변해서 지난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태시카와라는 대화를 피했다. 그때 코이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즈노였다. 미즈노는 어제 동생은 자기 반에 메이란 여자애는 없다며 메이가 정말 존재하냐고 코이치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미즈노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전화통화가 힘들어졌다. 그때 굉음과 함께 미즈노의 놀라는 소리, 그 뒤에 이어진 크고 이상한 잡음, 마지막으로 들린 미즈노의 괴로움에 찬 신음.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다음 날 코이치는 미즈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레스토랑에서 헤어지면서, "서로 조심하자. 특히 보통은 일어날 리 없을 것 같은 사고에는 더."라고 말했던 그녀가 엘리베이터 사고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어릴 적부터 심장이 약했다던 3햑년 3반 남학생 타카바야시가 집에서 심장 발작으로 죽으면서, 이렇게 3학년 3반의 올해 '6월의 망자'는 두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코이치는 메이에게서 이 저주라기보다는 어떤 현상 같은 일의 26년 전의 ‘뒷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메이의 3학년 3반에서의 이상한 학교생활에 대한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닥칠 ‘꼭 지켜야 하는’ 3반의 결정사항에 대해 듣게 된다. 코이치도 이제 메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상 전반부 정도만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내가 마지막에 ‘망자’가 드러나는 순간에 ‘속았다.’라는 느낌을 받은 건 ‘이모가 들려준 요미키타에서의 마음가짐’의 네 번째 사항이 처음 언급된 작품의 앞부분에서는 외할머니의 방해로 그냥 넘어가고, 마지막 ‘망자’가 밝혀지는 순간에서야 작가가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의도적인 숨기기’였기에 순간적으로 ‘속았다.’라는 실망감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의도적인 숨기기’에는 책의 흥미와 전율을 증폭시킬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 ‘네 번째 사항’은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볼 수 있고, 독자는 ‘네 번째 사항’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유추해 보고 그와 관련하여 망자를 찾는 것이 『어나더』의 묘미였다는 걸 나는 좀 늦게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네 번째 사항’을 앞에서 공개했더라면, 망자를 찾는 독자에게 쉬운 힌트가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확실히 작품의 스릴과 긴장감은 ‘네 번째 사항’을 숨겼을 때에 비해 꽤 많이 떨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망자를 추리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는 작품에 숨어 있다. 나 같은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눈썰미가 매서운 독자라면 분명히 찾을 수 있으리라.

더불어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에 등장하는 3반 학생이나 3반 학생 근친들에게 연달아 나타나는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는 죽음의 배경에는 저주라고 부르기에는 그 원인이 되는 증오나 악의, 복수 같은 죽은 자의 원한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그 어두운 그림자에는 26년 전 3학년 3반에 있었던 어떤 일이 원인이 된다. 하지만, 그 결과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에는 저주 이상의 더 거대한 뭔가가 그들의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추리소설에 괴기소설 적인 요소가 보태진 것이라기보다는, 괴기소설에 추리소설 적인 요소가 더해진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렇게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는 본격 추리물적인 요소와 공포 미스터리, 그리고 어수룩하지만, 정감이 가는 중학생 코이치와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기묘한 소녀 메이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그 둘이 차츰 서먹함을 이겨내고 함께 뜻을 모아 저주 같은 어떤 ‘현상’ 풀어나가는 청춘물적인 요소가 혼합된 아주 다양한 맛과 느낌의 작품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여름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또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영화로도 나올 예정이라니,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메이를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본다.

이 리뷰는 2012년 08월 2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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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7.

[책 리뷰] 그가 ‘대학자’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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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학자’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

극과 극을 달리는 두 평가의 주인공

부에선 공자, 주자처럼 ‘자(子)’를 붙여서 조선 최고의 유학자이자 성인으로 추앙하고, 또 일부에선 ‘시열이, 시열이’하며 동네 개 부르듯 천대하는 조선시대 유학자 송시열(宋時烈). 왜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가 나오는 걸까.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는 효종(孝宗)을 도와 북벌을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로 송시열이 나온다고 한다. 2012년 지금의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북벌을 둘러싼 내막을 비롯하여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의 주인공 송시열의 일생과 그의 학문 및 사상에 대해 (주류 역사가들의 암묵적인 침묵으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추적한다. 그동안의 묵시적인 금기를 과감히 깨고, 생존했던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송시열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과감하게 파헤치는 이 책은 송시열의 진짜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첫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루한 나의 짧지 않은 후기와 이덕일 소장의 책으로, 그렇게 송시열에게로 잠깐이나마 눈을 돌려보자.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훗날 노론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송시열에 대한 궁금증은 이덕일 소장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어느 정도는 해소될 것이라 믿는다. 무더운 여름날 그늘진 계곡물에 발을 담글 때처럼, 그동안 간직해왔던 가슴속의 답답함을 이 책이 시원하게 쓸어내려 줄 것이다.

송시열의 어린 시절

책엔 송시열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과 역사적 배경이 등장한다. 그 중 위에서 언급한 북벌, 즉 송시열이 생각한 북벌의 진짜 속셈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자. 책 속에서 북벌에 관련된 부분만 간추려 보았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그는 선조 40년(1607) 11월 12일 충청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어린 송시열은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자(朱子)가 있고 나서 공자(孔子)가 있고, 율곡(栗谷)이 있고 나서 주자가 있으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어린 송시열은 학문 교재로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 무지몽매를 깨뜨려 버리는 데 요긴한 비결)을 선택해 학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서인계 사대부의 어린 아이 교육용 성리학 교과서이다. 율곡이 쓴 이 책의 서문을 보자.

"학문의 길에 막 들어선 이들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당혹해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공부의 바른길을 인도해 주려고 지은 것이다."

12살 송시열은 이 책을 읽고 성인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학문에 정진했다. 이이의 가르침으로 시작한 그는 훗날 거꾸로 주자를 통해 율곡을 바라보려 하였다.

"말씀마다 모두 옳으며 일마다 모두 마땅한 분이 주자이다. 총명과 예지(叡智)가 있어 모든 이(理)를 밝힌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못 할 것이다. 주자가 바로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주자가 이미 말하고 행한 것은 곧 따라서 행했지 일찍이 의심한 바가 없다.”

인조 11년(1633)에 송시열은 생원시에 장원 급제해 대과를 볼 기회를 얻었다. 그 해 10월 경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면했다. 2년 후 최명길의 추천으로 대군사부(임금의 적자인 대군을 가르치는 종9품 관직,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사부가 정1품, 세손을 가르치는 세손시강원의 사부가 종1품)에 임명됨으로써 관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송시열은 사부로서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을 만난다. 송시열의 나이 만 28세, 봉림대군의 나이 만 16세였다. 이 시기에 6개월 가르친 것이 노론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되어 송시열을 효종의 충직한 신하로 포장된다. 거꾸로 말해 이 둘의 관계가 그만큼 문제가 많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송시열, 그가 주창한 북벌의 진짜 의도는?

종 즉위년(1649) 다시 조정에 나온 송시열은 어머니의 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청하면서 ‘봉사(封事)’(밀봉된 상소)를 올려 자신의 소회를 피력했다. 효종 즉위년인 1649년이 기축년(己丑年)이므로 「기축봉사」라고 부르는 글이다.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10일에 사관은,

“올린 책자 가운데 조목별로 소회를 진달하면서, 대일통(大一統)으로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을 제일건으로 하였기 때문에 첩지(貼紙)하여 비밀로 했다 한다.”

라고 적고 있다. 공자의 대일통은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나라란 사상이었다. 고대 중국 주(周)나라 이외의 모든 민족은 오랑캐요 금수이므로 중국과 주나라를 따라야 한다는 사상이다.

송시열의 기축봉사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서 모두 주희가 남송의 효종에게 올린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를 본뜬 것이었다. 문제는 주희에게 대일통은 그대로 남송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자기 중심적 시상이지만 송시열에게 대일통은 조선 자신이 아니라 명나라를 높이는 타인 중심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사상 면에서 볼 때 송시열의 북벌론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명나라를 따르자는 대일통 사상이다. 송시열이 말한 군신의 의리는 인조의 삼전도 치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나라는 천자의 나라요 조선은 제후의 나라이므로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임금인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의 대일통 사상이다.

“우리 태조 고황제(高皇帝: 명나라 시조 주원장)께서는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 이성계)과 같은 시기에 창업하시고 즉시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으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충정(忠貞)의 절개를 지킨 지 3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불행히 지난번에 추한 오랑캐가 방자하게 온 나라를 삼켜서 당당한 예의의 나라가 다 비린내 나는 더러운 것에 더럽혀졌으니 그때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하로서 명 태조 주원장을 임금으로 섬긴 것이 변할 수 없는 군신의 의리라는 주장이 송시열의 의리론이다. 즉 그에 의하면 조선은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것이 삼강(三網)의 의리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치욕을 받은 사실보다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더 슬프게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실로 신종황제(神宗皇帝: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임금)의 은혜를 입어 거의 빈터가 된 종묘사직이 다시 있게 되고 생민(生民)이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 생민의 털 한 터럭에 황은(皇恩)이 미치지 않은 바 없습니다. 그런즉 오늘날 온천하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이 우리만큼 억울하고 분한 자가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광해군이 이런 분함을 잊고 강홍립을 시켜 전군(全軍)을 포로로 만들어서,천하 사람들이 우리나라도 오랑캐가 되어버렸다고 조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대행대왕(인조)께서 의를 주창하시고 반정(反正)하셔서 대의를 밝히시니 세상이 해와 달같이 밝게 되어,온 나라 사람들이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거듭 대행대왕께서 지성으로 위(명나라)를 섬기셔서 매양 은총과 칭찬을 받음이 종시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갑자기 북쪽 오랑캐의 협박을 당해 충성스러운 절개를 밝히지 못했으니 그 이후의 일은 신자(臣子)로써 차마 말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이 북벌론을 외칠 만하다. 북벌에 대한 그의 실제 생각을 「기축봉사」에서 보자.

오늘날 시세를 따지지 않고 강한 오랑캐를 가벼이 끊으면 원수를 갚기도 전에 화가 미칠 것이니 이는 역시 선왕(인조)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낮추시어 굴복하심으로써 종묘사직을 연장하신 본의가 아닙니다. ••• 이런 독한 마음을 잊지 마시고 그 원한을 차곡차곡 쌓으셔서 평소의 온화한 말 가운데에도 그 깊은 곳에는 분노가 더욱 쌓이게 하십시오. 또한, 부귀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언제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뜻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 그리고 이러한 굳은 뜻을 5년,7년,10년,20년이 지나도록 결코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우리 힘의 강약을 살피고 저 오랑캐 세력의 성하고 쇠함을 엿본다면,비록 창을 들고 저들의 죄를 따지면서 중원(中原)을 깨끗이 쓸어 신종황제의 망극하신 은혜를 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혹시 오랑캐와 국교를 끊고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혀서 우리의 의리를 지킬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

송시열과 대립하는 효종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이 말하는 북벌은 조선이 힘을 길러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가능한 북벌 의리는 청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명을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의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그것을 하려고,즉 청과 국교를 끊고 명을 섬길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이 송시열이 바랐던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송시열의 명분적, 제한적,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북벌론과는 달리 효종은 실제적 북벌을 추구했다. 효종은 재위 3년 군정의 문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중 이렇게 말했다.

“옛 사람은 '밭갈이는 사내종에게 묻고 길쌈 일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노비에 관한 말을 비록 문무지사(文武之士)에 대한 비유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文)이라 이름하였으면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할 뿐이며,무(武)라 이름하였으면 병법(兵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을 등용하는 도는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 데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오늘날 비변사의 낭청이 슬기로운 힘을 지닌 자를 뽑지 아니하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 보니 모두가 서생(書生)들 뿐이다. 그러나 급한 상황에 적을 상대할 때에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병폐이다.”

효종은 문약해진 군사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관은 문(文)을 숭상해야 하고,무관은 무(武)를 숭상해야 하는 법인데,오늘날은 그렇지 못하여 문관이 무관처럼 생기면 경멸을 받지만 서생(書生)처럼 생긴 무관은 세상에서 용납하게 되었다. 만일 무관이 말 달리기를 좋아하면 광패(狂悖)하다고 지목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지금의 무관은 선비와 같으니 어찌 싸움터에서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효종은 조선의 문치주의 때문에 나약해진 군사력을 증강하려고 관무재, 영장제도 등 여러 방편을 시도했다. 병조판서 박서의 임명과 박서의 뒤를 이은 원두표, 효종 4년 10월 무장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삼아 그 실행을 맡긴 것 등이 그랬고, 효종은 재위 7년 12월 임금이 직접 실시하는 인사행정인 친정(親政)을 실시하며 담당자인 이조판서 홍명하(洪明夏)와 병조판서 원두표에게 서북인의 등용을 명령했다. 효종 6년 9월에는 노량진 백사장에서 1만 3,000여 명의 조선군을 데리고 관병식도 거행했다. 하지만, 문신들은 이런 모든 군사적 행위에 반대했다. 심지어 어떤 신하들은,“청과 분쟁거리가 됩니다."라며 말리기도 했다. 청과의 강화조약 위반이라는 말이었다. 여기에 농민들이 농사도 짓고 군사훈련도 받고 성 쌓기,병장기 제조 등의 부역에 동원되어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는 곧 서인들의 북벌반대 구실이 되었다.

북벌의 포기를 종용하는 송시열

종 8년 송시열이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국을 논평했는데,그 신랄함이 다른 문신들의 상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 그런데도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8년이나 되었으나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위로는 하늘과 성고(聖考: 인조)의 뜻에 보답할 수 있고 아래로는 뭇 신하와 만백성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조그마한 공효도 전혀 없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하여 안에서는 소요가 일어나고 밖에서는 공갈과 협박을 하고 있어 위태로운 화가 조석 사이에 임박했습니다.”

이는 효종이 재위 기간 8년 동안에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송시열은 정유봉사 19개 항목에 걸쳐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나 그 핵심은 북벌보다는 양민(養民)에 힘쓰라는 것과 사대부를 우대하는 왕도를 기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백성을 기르고 병사를 양성할 것'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이 경우에도 결론은 효종이 왕실의 재산을 아껴서 병사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태조(太祖: 송의 조광윤)는 내탕고의 재물을 풀어서 호인(胡人)의 머리와 바꾸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만일 전하께서 한 푼의 돈이나 한 자의 베라도 모두 아껴서 병사를 양성시킨다면,지방 관아에 맡겨 아전들의 주머니에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 어찌 낫지 않겠습니까.”

「정유봉사」에서 송시열은 사실상 북벌의 포기를 종용한다. 그 논리 역시 주희에게서 따온 것이다.

“신은 살펴보건대,주자가 처음에는 효종(孝宗: 남송의 효종)에게 금(金)나라를 쳐서 중국 강토를 회복하는 의리에 대해 말씀드렸으나 20년 후에는 다시 이러한 말씀을 드리지 않고, 다만 ‘오직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먼저 동남 방면이 다스려지지 못한 것을 걱정하시면서 마음을 바루고 사욕을 극복하여 조정을 바로잡으소서. 그러면 거의 진실한 공효가 차츰차츰 이뤄질 것이고 엉뚱한 걱정거리가 생겨 원대한 계획에 해가 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주역(周易)』에 정통한 사람은 주역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참으로 강토 회복에 뜻을 둔 자는 결코 손뼉을 치고 칼을 어루만지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그때 효종이 이미 측근의 신하들에게 잘못 이끌려가는 데다가 안일에 젖어 있어 근본이 매우 염려되었기 때문에 주자가 이처럼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주자가 당초에 가졌던 마음이었겠습니까. 또한, 슬픈 일입니다."

이는 자신이 북벌을 돕지 않는 모든 책임을 효종에게 전가하는 말이다. 효종이 사대부를 우대하지 않는 데 대한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전하께서 대신을 공경하여 예법으로 부리는 도리를 아시지 못함은 아니지만, 지난번에 심하게 대신을 꾸짖으시고 돼지처럼 여러 관원을 꾸짖었다 하는데 그것은 주자가 매우 놀라 탄식할 바입니다.”

송시열은 효종이 군사력 강화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위에 있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나라는 임금의 것이 아니고 천하의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여기에서 천하란 만백성이 아니고 사대부를 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기해독대(己亥獨對)

시열과 송준길이 각각 이조판서와 대사헌으로 인사권과 탄핵권을 장악한 효종 9년 9월 이후 조정은 사실상 양송의 것이었다. 이때 효종은 송시열에게 비밀서신을 보내 북벌을 유도했다. 송시열은 상영릉문에서 조정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걱정이라면서 조정의 몇 신하들에게 북벌의 의사를 타진해 본 결과를 보고했다.

“허적(許積)은 큰일(북벌)에 대해서 힘을 낼 것을 다짐했습니다. 허적은 용감하지만 침착한 맛은 별로 없으니 그의 의사를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유계에게 말했더니 어려운 일이지만 마땅히 힘을 다해 죽음을 각오할 뿐이라고 말했으나 다만 기밀이 누설되어 화근이 닥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송준길은 국내 정치가 견고하지 못한 데 힘을 나누어 밖의 일(북벌)을 하다가 크게 실패할까 두려워한다면서 우리의 힘을 서서히 길러 적의 틈을 기다리면 안 될 이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유태는 전하의 뜻이 굳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전하의 뜻이 굳으면 순차적으로 일을 하는 방법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모호한 답변이었다. 유일하게 제시된 군사력 증강책은 약 17만여 명에 이르는 승려들을 군사로 차출하자는 것이었다.

효종 10년(1659) 3월 11일, 송시열의 요구로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의 자리를 가졌다. 바로 기해독대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大事: 북벌)를 논의하기 위함이다. 저 오랑캐(청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다. 예전의 한(汗: 청나라 황제 세조를 낮춰 부르는 말)은 그 형제들이 매우 번성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들었으며,예전의 한(汗)은 인재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용렬하다. 예전의 한은 오로지 무예와 전쟁을 숭상했는데 지금은 점점 무사(武事)를 폐하고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있다.”

독대를 요구한 명분에서 ‘대사’ 가 바로 북벌임은 송시열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효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랑캐의 지금 상황은 경이 언젠가 주자(朱子)의 말을 빌려 말한 ‘오랑캐가 중원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의 한이 비록 영웅이라고 하나 주색(酒色)에 깊이 빠져 있어 그 형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내가 군사(軍事)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언제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 포병 (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청나라 지배층은 만주족이지만 중하위 관료를 비롯한 백성 대부분은 한족이었다. 실제로 기해독대 15년 후인 현종 15년(1674) 에 한족 오삼계(吳三桂)가 군사를 일으켜 중국 남방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자,유생 나석좌(羅碩佐) 등이 북벌하자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효종의 이 계획은 조선군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시도해 볼만한 일이었다. 효종의 설명은 계속된다.

“저들은 방비에 힘쓰지 않아 요동(遼東)과 심양(潘陽)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 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저들이 우리나라의 조공품을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두고 있다. 이는 이 물건들을 다시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인 듯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붙잡혀 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어찌 내응(內應)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감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효종은 흉중에 감추었던 모든 계획을 말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송시열이 답할 차례였다.

북벌의 위한 결의를 잃지않는 효종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입니다. 하나 제갈량(諸葛亮)도 뜻대로 되지 않자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 차질이 생겨 오랑캐에게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하시렵니까?"

효종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경이 나를 시험하는 말이다. 나는 내 능력이 대사를 수행하는 데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리(天理)나 인심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데,어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 스스로 포기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으니 나는 나라가 망하는 불행한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자질이 그리 용렬하지 않은 데다가,나로 하여금 일찍이 환란을 당하게 하여 부족한 면을 채워주었고, 나로 하여금 일찍이 궁마(弓馬)와 진법(陳法)을 익히게 하였으며,나로 하여금 저들에 들어가 저들의 형세와 산천 지리를 익히 알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적지에 오랫동안 있게 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뜻이 우연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는데,앞으로 10년이면 내 나이 50이 된다. 10년 안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지기 (志氣)가 점점 쇠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경이 물러가기를 허락할 것이다. 그때엔 경이 물러가도 괜찮을 것이다.”

북벌을 논함에 하늘의 뜻을 운운할 정도로 효종은 북벌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효종은 몸의 기력을 빼앗기지 않고자 여자관계도 삼가는 자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임금이었다. 실제로 인선왕후 이외에 안빈 이씨라는 한 명의 후궁만을 두었을 뿐이다. 송시열의 종형 송시형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것을 염두에 둬서 효종은 송시열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때 터잡는 일을 핑계로 몇 명을 만나 은밀히 시험해 보았는데,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니,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져서 놀라기만 하니,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다. 저들이 모두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다.”

신하들에 대한 효종의 질타에 송시열은 정면에서 반박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버리지 못하시니 지기(志氣)가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으며,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심신(心身)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신다면,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은 신하들의 부패와 안일을 효종의 책임으로 돌렸다. 왕이 먼저 모범을 보이라는 말이다. 효종으로서 이는 모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송시열의 이런 말까지도 받아들였다. 북벌을 위해서는 송시 열의 지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이 옳다.”

효종은 이렇게까지 양보했다. 하지만, 송시열이 제시하는 대안은 치자(治者)의 근본도리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라는 뜻의 '수기형가(修己刑家)'이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 훗날 송시열이 반대 당파로부터 '수기형가' 네 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효종이 북벌을 강력하게 호소할 때 송시열은 정권을 위임받은 신하로서 북벌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었다. 실권을 계속 유지하려면 북벌을 소리 높여 드높여야 했지만, 송시열의 속마음에 북벌은 먼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 때문에 대립하고 갈등을 맺고 있을 때 효종이 급서했다. 효종 10년 5월 4일이었다. 4월 27일에 생긴 머리 위의 작은 종기가 원인이었다. 이때 효종에게 침을 놓은 인물이 어의 신가귀(申可貴)였다. 그런데 신가귀가 놓은 침이 잘못되어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왔으며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효종은 침 맞은 자리에서 피가 계속 솟아 나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종기에 침을 놓은 신가귀는 수전증,즉 손 떨리는 증세가 있는 의원이었다. 이 의문은 그대로 묻어둔 채 만 18세의 외아들 현종이 즉위하면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전 장렬왕후, 효종보다 5살 어린 조씨는 이때 만 35세) 조씨의 상복 착용 문제로 1차 예송논쟁 시작된다.

'주자학'이 아니라 '주자교'에 빠진 송시열

상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중 북벌과 관련해서 간략하게 살펴봤다. 독자는 혹시 송시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했는가.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다면 이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송시열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보기 드물게 83세까지 장수를 누리는 복을 누렸다. 정치적인 운도 말년을 제외하고는 잘 나갔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산림의 영수로서 존경받았고 많은 추종자를 만들었던 그가 무엇이 부족했으랴. 그렇게 겉으로는 (지금의 말로 표현하자면) 아주 잘 나갔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이 있었다면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어린 시절 꿈꾸던 성인 또는 군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중 필수라고 볼 수 있었던 ‘관대함’이었다. 학문을 닦는 학자로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수용하고 다른 학문을 살펴보고, 그 다른 학문을 하는 학자도 받아들일 수 있는 관대함이 그에겐 없었다.

위의 북벌에 대한 내용에서도 보았듯이 송시열은 시종일관 주자 타령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주자는 배우고(學) 물어야(問) 할 학문적 연구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할 완벽한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학문이 연구대상이 아니라 단지 믿고 따르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면 그건 바로 종교나 다름없다. 그렇게 광신도가 되어버린 송시열에겐 우정도 자신과 같은 학문적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때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백호(白湖) 윤휴를 만나 "혹시 우리가 정치하게 된다면,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라며 서로 통곡하며 우정을 맺기도 하고, 권시나 송준길에게는 “윤휴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앞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 내어 나를 놀라게 한다네.”라고 윤휴를 극찬하기도 했다. 이렇게 젊은 시절에는 학자다운 풍모를 보였던 송시열이 어쩐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외골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라고 외칠 수 있었던 윤휴의 사상적 자유를 송시열은 이해하지도 받아주지도 못했다. 반대로 송시열은 윤휴를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사문난적으로 몰아 결국엔 숙종 6년 5월, 윤휴가 서인들의 말도 되지 않는 누명을 받고 사약을 받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렇게 송시열에게 이단으로 찍힌 윤휴는 유언조차 허락받지 못했을 정도로 서인들에게 마지막까지 철저히 탄압받았다. 송시열과 서인들은 윤휴의 무엇이 두려웠기에 마지막 가는 길까지 곱게 보내주지 못했던 것일까.

윤휴의 죽음과 북벌

휴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으로 혼란스럽자, 숙종에게 오삼계와 대만의 정성공과 연계해 북벌을 단행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했던 진정한 북벌론자였다. 그는 누구처럼 말로만 북벌을 외친 것이 아니었다. 북벌대의를 실현하려면 백성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신분제 타파를 위해 호패법 폐지와 함께 지패법과 호포법 시행 등 대개혁을 주장했었던, 조선시대 중 보기 드문 깬 인물이었다. 물론 이런 대개혁은 양반 사대부들의 이익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윤휴는 이런 대개혁에 대한 열정을 죽는 그날까지 놓지 않았다. 만인과를 시행해서 북벌을 위한 무사들도 모았고, 대륙 정벌을 위해 병거(전차)를 만들자고 주장할 정도로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송시열과 한때 뜻을 같이한 친구였던 윤휴는 사상의 자유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몰려 그 큰 뜻을 제대로 한 번 펴지 못하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윤휴가 가진 사상의 자유와 윤휴의 대개혁이 가져올 신분제 폐지로 말미암은 자신들의 기득권 침해에 대한 걱정도 있었겠지만, 윤휴가 진정한 북벌대의를 가졌다는 것이 서인들에게 윤휴에 대한 불쾌감과 두려움을 가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상의 자유가 곧 사문난적

시열은 자신의 옛 친구이자 한때 자신이 극찬했던 인물마저 마녀 사냥할 정도로 주희의 사상에 의문을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언행은 주희 그 자체였고, 주희가 되살아나 조선에 온 것과 다름없었다. 다음의 일화는 보자.

어느 날 송시열이 안질과 각질에 걸렸는데,그는 주자도 같은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병을 번거로워하기보다는 영광으로 여겼다. 또한, 생일날 받은 선물을 상대에게 다시 돌려준 것도 주자를 따른 것이었으며, 약혼한 손녀가 혼사 전에 죽은 것 역시 슬퍼하는 한편으로 주자에게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이성무, 『재상열전』, 송시열 편)

상황이 이러했으니, 주자학에 대한 이단아들을 단순히 비난하고 비판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여야 성이 찼던 것이다. 효종 4년(1653)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현 죽림서원)애 송시열, 윤선거, 윤원거, 권성원 등 10여 명의 서인 학자들이 윤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을 때, 윤휴를 옹호했던 윤선거에게 송시열이 말했다.

“이미 난적(亂賊)이라고 말했으니 경솔하다는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대저 군왕이 춘추의 법을 펼칠 때 난신적자를 따르는 자[黨與: 당여]를 다스린다고 했으니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공은 윤휴보다 먼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친구에게도 서슴없이 협박하는 걸 보면 송시열이 배척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군자'보다는 '소인'에 가까웠던 노년

시열이 군자(君子)보다는 소인(小人)에 가까웠던 삶을 살았던 것을 보여주는 몇 편의 일화도 있다.

영의정 이경석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아직 별볼일없던 시절에 이들이 서울에 오면 자기 집에 재워주면서 일개 산림 처사에 불과한 두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어 선비를 공경하는 예의를 다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출세한 송시열은 이경석이 병자호란 때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이경석이 임금에게 궤장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궤장연서(几杖宴序)에 '수이강(壽而强: 편안하게 오래 살았다)’이라는 고사를 들어 이경석을 비꼬았다.

삼전도비문은 청나라의 강요와 인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국가의 생존을 위해 이경석이 어쩔 수 없이 지은 것이었다. 이경석은 효종 1년 청나라에서 조선이 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등 조약을 위반했다고 무력시위를 할 때 청 사신 앞에서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린 대범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경석은 청나라에 의해 극형에 처할 위기에 놓였지만, 효종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1년 후 이경석은 청 황제의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송시열이 이경석에게 가한 비난은 서인 쪽에서 편찬한 『현종 개수실록』의 사관마저 비판할 정도였다.

송시열이 윤선거의 아들 윤증의 부탁을 받고 지어준 윤선거 비문도 유명하다. 윤선거가 현종 10년(1669) 60세의 나이로 죽자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현종 14년에 송시열에게 비명을 지어주기를 요청해 약 반년 후 비문을 받았다. 그런데 비문의 내용이 정말 성의없었다.

"현석(玄石: 박세채의 호)이 윤선거를 극진하게 찬양하셨기에 나는 그대로 기술(記述)만 하고 창작하지는 않습니다."

비문은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한 글이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라리 비문 작성을 거절했지, 저런 식으로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윤선거의 제문에는 강화도에서 윤선거가 김익겸 등과 자결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에 대해 “아버지가 살아계시므로 감히 마음대로 죽을 수 없었다."라고 설명해서 이미 넘어간 일을 시를 지어가면서까지 비난했다. 물론 주희의 시를 베낀 거였다.

이렇게 주변에 많은 파문을 일으키고 큰 영향을 끼쳤던 송시열은 예송논쟁에서 효종의 왕통을 부인하고도 83세까지 살아남았다. 주희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단지 주희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와 실제적인 북벌대의를 외치고 국가와 백성을 위한 대개혁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윤휴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대개혁을 힘껏 반대했던 서인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백성의 나라도 아니고 왕의 나라도 아닌 바로 사대부의 나라였다. 그 나라에서는 임금과 사대부가 나란히 있었다. 그리고 백성은 언제나 그들의 발밑을 기어다녀야 했다. 비록 그들이 개혁가인 이이의 학통을 이었다고 하지만, 이이의 개혁 정신은 이미 엿 바꿔 먹은 지 오래였다. 그런 그들의 뒤에 거대한 정신적 지주로 군림해왔던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철저한 사대부 중심의 예(禮)만을 고집했고, 그 사상이 그대로 노론으로 이어졌고, 여전히 백성은 돌보지 않고 개혁은 무시한 채 결국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다. 이런 폐단은 여전히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크고 작은 세력들이 대립하여 정국을 흐리는 작금의 대한민국에 와서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송시열에게 국가와 백성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다.

그가 '대학자'인 이유

덕일 소장의 책은 그동안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라는 말대로 승리자의 권력과 영광에 가려 제대로 비추어지지 못했던, 역사의 지워지고 감추어진 부분들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이덕일 소장뿐만 아니라 최근에 대중역사서에서는 그런 흔적들이 조금씩 나타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래서 누구는 이덕일 소장이 이런 식으로 대중의 감정을 자극해서 인기몰이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100퍼센트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대중을 위한 역사서가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단순히 지배층의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중의 처지에서 바라본 지배층의 역사서가 드문 것이기도 하다.

내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을 읽어 보기 전에는 송시열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를 어떤 인물로 생각해야 할지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최소한 이황이나 이이에 버금가는 정도로 학문의 성취를 이루었거나 백성을 위한 개혁을 주장한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그런 인물이었는지 말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의문점을 없앤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송시열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송시열은 굉장한 인물이긴 했다. 학문적으로는 오직 주희밖에 몰랐기에 진정한 지식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성인을 꿈꾸었겠지만, 그의 일생의 말년은 군자(君子)보다는 소인(小人)에 가까운 삶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대학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덕일 소장의 말처럼 학문이 고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는 말이 정답이다. 그만큼 그는 지금까지 과대 평가되어왔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보고 송시열을 옆집 개 이름 부르듯 비하하거나 너무 과소평가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가부장제 지지자인 그가 보여준 부인에 대한 깍듯한 예우,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에 대한 우애 등은 비록 자신과 이념이 다른 타인들에 대해서는 군자와 같은 도리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에서 ‘수신제가’만큼은 인정해 줄만 하기 때문이다. 그가 타인과 다양한 학문의 세계에 조금 더 넓은 포용력과 관대함을 보여주었더라면 분명히 그는 진짜 ‘대학자’로 길이 남았을 인물이다.

마무리

시열이 그랬듯 성인이나 군자가 되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끼고 살아온 송시열을 보면 책을 많이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송시열의 행적을 보면 군자가 되는 것의 그 어려움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맹자를 천 번이나 외웠다던 그도 행동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역시 진정한 지식은 많이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의 이주한의 말처럼 무식보다 무섭고 피해야 할 것이 오로지 하나만 아는 일식이다.

마지막으로 송시열의 사사장면을 묘사한, 역시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장면으로 이 지루하고 두서없는 글의 끝을 마치겠다.

노론계 인사로 보이는 김재구의 조야회통(朝野會通)이 전하는 그의 사사 장면을 보자.

"우암 송시열은 직령의를 입은 후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이날 맘 한 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빛이 우암이 죽은 지붕 위에 뻗쳤다. 유명(遺命)으로 관(棺)은 덧붙인 관(附板: 부판)을 썼다.”

소론 나량좌(羅良佐)가 쓴 『명촌잡록(明村雜錄)』의 기술하는 상황은 앞서와는 정반대이다.

"정읍에서 사약을 받던 날 도사 권처경(權處經)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이것은 양전(효종과 명성왕후)의 어찰(御札)인데 감히 우러러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권처경이 '나는 사사(賜死)하라는 명만 받았으니 어찌 갖다 드리겠소’라고 거부하고 서리(書吏)에게 그 편지를 빼앗게 하여 그 자손에게 주었다. 송시열은 계교가 궁하자 다리 쭉 뻗고 바로 드러누웠다. 도사 권처경이 재촉했으나 종시 마시지 않으므로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
이 리뷰는 2012년 08월 17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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