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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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30.

[책 리뷰] ‘노론 바이러스’의 실체를 찾아 나서다 ~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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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바이러스’의 실체를 찾아 나서다

역사는 정체성의 핵심이다. 정체성은 개인과 집단, 민족의 뿌리다. 왜곡된 정체성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다. 누구든, 어느 민족이든 자랑스러운 과거도 있고 부끄러운 과거도 있다. 그것을 덧칠하거나 거짓으로 꾸미면 정체성을 찾기 힘들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열고, 진실을 모색해야 건강한 정체성으로 공동체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301쪽)

책을 통해 처음으로 ‘노론사관’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노론사관은 식민지사관의 연장선에 있는 실체 없는 유령들이다. 입으로는 식민사관을 극복을 외치지만 머리로는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런 노론의 후예임을 부정하는 노론의 후예들이 학문 권력을 형성해 권력을 틀어쥐고 학계의 금기 사항을 만들었다. 한 술 더 떠 우매한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에 젖어 있기도 하다. 그런 그들이 지배한 역사학계를 비판하고 나선 사람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이다. 하지만, 이덕일은 비판에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이런 이덕일에 대한 비판이 아닌 신랄한 비난과 인신공격에 나선 학자들이 있다. 바로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의 저자이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인 이주한이 노론사관의 사수자라고 지목한 서울대 국문과 교수 정병설, 성균관대 한문학 교수 안대회, 한신대 교수 유봉학, 전주대학교 언어문화학부 교수 오항녕이다. 내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지은이 이주한이 제시한 그들의 주장 중 몇 문장만 살펴봐도 내가 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지은이가 인용한 그들 주장의 원문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조금 아쉽긴 하다. 고로 그런 점을 고려하면서 간략히 살펴보자.

병설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 비판의 근거는 어이가 없게도 정병설이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100퍼센트 진실이라고 믿는 데 있었다. 아랫글을 한번 보자.

『한중록』은 자전적인 사실의 기록이다. 허구로 읽어달라고 쓴 글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 달라고 쓴 글이다. …… 어떤 사람이 자기 글을 진실로 믿어달라고 해도, 독자들은 순순히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중록』도 마찬가지다. 혜경궁은 자신의 글에 한 점 거짓도 없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 혜경궁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더 과하게 하고 있다. …… 혜경궁은 이렇게 강하개『한중록』의 진실을 주장한 것이다. …… 이런 항변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은 계속 후인들의 의심과 비판을 받았다. 혜경궁이 힘주어 진실이라고 주장할수록, 독자들은 글을 쓴 의도를 생각하며 의심했다. (정병설, 「한중록은 진실의 기록인가?」, 「권력과 인간」,네이버 카페 문학동네, 2011년 1월 5일)

글을 쓴 사람이 사실로 받아들여 달라고 쓴 글이면 의심이나 비판 없이 믿어야 한다는 게 정병설의 주장이다.

역사서나 자서전이든 시대의 기록이 담긴 글들은 그 기록을 남긴 목적이야 어찌 되었건 후대들이 자신의 기록을 믿어달라는 간절함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대로 다 믿어줄 거라면 역사가라는 학문은 필요가 없다. 그냥 사료수집이나 정리하는 서기 몇 명이면 충분하다.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한국전쟁을 예를 들어보자. 한국전쟁을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는지 기록한 문서가 딱 두 건이 있다고 치자. 북한 측 자료는 남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주장하고, 남한 측 자료는 북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다면 과연 우리는 이 두 주장에서 어떤 주장이 진실인지 알 수 있을까. 문서를 여자의 친필로 정성을 다해 작성하고, 아주 애절하게, 노태우 전 대통령의 후보 시절 유행어였던 “믿어 주세요” 같은 호소하는 문구가 들어가 있으면 그 문서가 진실인 건가?

사료 비판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다. 지은이의 말대로 그들은 사료 비판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인류의 문명은 인간의 끊임없는 의문과 호기심을 토대로 발전해 왔다. 의문을 가질 수 없다면 학문(學 배울 학, 問 물을 문)도 닦을 수 없다. 거기에 어떤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 외에는 다른 의견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에 빠진 사람이라면 학문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논쟁이나 토론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한국 최고 대학이라는 곳에 버젓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이다.

"외부에서 강제로 유입된 학문과 지식의 제도였기 때문에, 대학은 제도로만 존재했지 한국의 문화와 철학의 이념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서보명, 「대학의 몰락」)

"대학은 계급과 브랜드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호자가 돼 수익과 특권의 관리에 매달린다." (한겨레 신문, 2011년 6월 28일)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전태일 일기, 1969년 12월 31일)

병설의 다른 주장도 보자.

이덕일의 저술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세상이 알아주는 역사 저술가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독자의 감정에 영합한 데 있다고 본다. …… 종전의 이것저것 까다롭게 따지는 역사 저술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감동이다. 이런 감동을 만들어 대중에 다가가고자 했으니,그가 제시한 논거 하나하나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정병설,「길 잃은 역사 대중화」, 「역사비평」, 2011년, 봄호, 354쪽)

감동적인 역사책은 저질책, 그런 역사책을 읽는 대중은 우매한 것들, 이런 뉘앙스가 느껴진다.

감정은 인간에게는 이성보다 더 친밀한고 진화론적으로도 이성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시스템이다. 철학이 발견되어서 사람들이 이성을 맹신한 나머지 감정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판단도 내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지만, 불완전한 인간은 세상의 아주 극히 적은 일부의 정보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든 판단에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감정을 자극해 감동을 준 역사책은 가짜 역사책인가? 대중들이 어설픈 논리나 앞뒤도 맞지 않는 억지 주장에 감동하는가? 만약 극장에서 관객들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고 눈물을 흘릴 때, 바로 그 순간에 밖에 있던 누군가 극장에 입장한다면 새로 막 들어온 사람은 그 클라이맥스만 보고는 처음부터 영화를 보던 관객처럼 감동할 수는 없다. 이는 결정적인 느낌이 든 그 장면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장면의 앞뒤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흐름과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설득력 있게 매듭을 지어야 비로소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음악이나 영화, 책 등 문화나 예술 작품을 수시로 접해보고 깊이 감동해본 사람이라면 내 부족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은 대중이 하고 싶었던 말을 가려운데 긁어주듯 시원하게 말해 준다. 그리고 대중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리고 있었던 색안경을 제거해 준다. 이렇게 얻은 대리만족과 색안경 제거로 새로 얻은 탁 트인 시야는 책을 읽는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그래서 차근차근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것이 자신의 이론과 다르다면, 이덕일에게 인격적인 비난으로 공격할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의 반론을 펼쳐 이덕일처럼 대중을 감동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주장도 보자.

정조의 측근에서부터 북학과 서학이 대두하여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정조는 정학을 강조하며 반정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보수에서 혁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향이 엇갈리며 갈등하였지만, 이미 변화의 길로 들어선 조선 사회는 외부 세계와 소통하며 새로운 시대로의 대전환을 이루어갔다. 이 흐름은 정조의 서거 이후 전개된 19세기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면면히 지속되었다. 정조 시대 개혁을 이끌었던 세력이 분열하는 가운데 그들 중 일부가 세도가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조 시대 이래의 새로운 흐름도 확산되는 추세였다.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대-정조와 19세기」,신구문화사, 2009년,5쪽)

정말 위험한 주장이다. 정조시대 개혁을 이끌었던 세력 일부가 세도 정치 세력이 되어 정조의 개혁의 흐름을 확산시켰다고 한다. 그럼 그렇게 개혁이 잘 되어가던 나라였기에 노론의 이완용이 팔아먹어서 작위와 은사금까지 받을 수 있었던 건가? 더불어 유봉학은 학사,석사, 박사 모두 역사학으로 학위를 딴 이덕일 소장에 대해 “역사학자도 아닌 사람이 역사학자 행세를 한다”라고 인신공격까지 한다.

그리고 식민사관 역사의 일화도 보자.

다른 한번은, 분명치는 않으나, 민족주의 역사학인가,실증주의 역사학인가에 관하여 검토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교학부장 고윤석 교수도 포함된 네댓 명의 중년. 노년의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일제 때 경성 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末樹呆和〕선생님인데,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 (김용섭,「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지식산업사, 2011년,768쪽)

쓰에마쓰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편찬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고, 한국 주류 식민사학자들의 직계 스승이기도 하다. 김용섭의 다른 글에는 ‘이 00 선생’이 일본의 덴리 대학(군국주의 시절 군국주의를 지원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국 문화재를 가져갔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그곳에 있다.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경성제국대학 교수로도 재직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약탈해간 유물도 그곳에 있다.)에 가서 덴리교 도복을 입고 일본 민족주의 종교의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거기에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애”,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라는 기막힌 말도 등장한다. 조선총독부는 해체되었지만, 조선사편수회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로 살아남아서 전국의 사학과를 지배하고, 온 국민의 역사관을 지배해왔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노론사관의 다양한 주장에 대해 요목조목 꼬집은 시원한 논박과 역사가와 지식인의 사명, 식민사관의 뿌리와 역사가 나오니 꼭 읽어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책을 통해 역사와 역사학, 역사관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내 고정관념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고,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잊고 있었던 질문을 되새길 수 있었다. 책 전반에 등장하는 비난과 비판, 그리고 비판에 대한 비판의 명쾌하고 명석한 논리는 정당한 논쟁이 무엇인지, 그런 논쟁을 위한 준비물은 무엇인지 등 논리의 기본적인 요령을 일깨워주고 이것은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도 좋은 내용이 될 수 있다.

어찌 보면 기존역사관에 과감히 도전을 하고 나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대 이들의 인기를 질투하는, 남 잘되는 거 못 보는 기존 역사관 사수자들과의 힘겨루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에 제시된 이덕일을 비판하는 주장의 논리와 근거는 너무나 형편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과거를, 실증된 과거의 사실조차 부정하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거기에 얼마나 큰 이득이 숨겨져 있기에 깔끔하게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정당당하게 논박하고 나서지 않는 걸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그나마 의리와 명분은 지킬 줄 알았고, 잘못이 없더라도 누군가에게 탄핵을 받으면 관직에서 물러날 줄 아는 염치는 있었다. 그러다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그나마 있었던 염치나 의리도 사라졌고, 지금처럼 오직 이해관계에 따라 상대를 몰아붙였고, 결국 상대방의 목숨까지 요구하는 치졸하고 역겨운 굶주린 아귀들의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이미 성현의 가르침은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권력과 재산에 눈이 먼 그들은 관용과 배려, 타협의 정신, 즉 세상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겠다는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민주주의 기본이자 지식인의 필수 덕목인 관용과 타협의 정신이 배제된, 학자 같지도 않은 그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그냥 웃고 넘겨야 하는 일인가. 아직도 그들이 한국 학계의 주류라는 말은 큰 충격과 불안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고, 많은 학생이 그들의 밑에서 수학하고 있다니 아찔할 따름이다. 이런 소위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횡포에 적절하게 맞서고 우롱당하지 않으려면 대중들은 일단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도 한 사람의 책이 아니라 여러 학자의 책을 골고루 읽어야 이 책에 등장하는 일부 학자들처럼 독선과 독단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넓은 안목이 생긴다. 거기에서 지혜의 샘의 근원이 되는 분별력을 키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학교 다닐 때 모든 국서 교과서에 나왔던 이이 십만양병설의 진실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신봉승의 『조선정치의 꽃 정쟁』에서는 그저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지 않았다고만 나오고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90년대 판본, 알고 보니 최근에 다시 나온 것 같은데, 내용이 수정되었는지는 모르겠다)에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이이가 주장했다고 나온다. 나는 처음으로 백지원의 『조일전쟁』에서 김장생의 행장과 「선조수정실록」에서만 언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즉 김장생이 구상해 송시열이 구체화했고, 노론 후예 학자들이 국정 교과서에 실었다는 지은이의 주장이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으시면 꼭 읽어보시길.

이 리뷰는 2012년 06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오래전에 쓴 내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지금 이렇게 글을 옮기면서 예전 리뷰를 다시 흩어보니 마치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 같은 신선함이 언뜻 느껴지면서도 ‘참으로 조악한 글이로구나!’ 하는 한탄이 절로 내뱉어진다. 유치한 것은 둘째치고(뭐 이것은 요즘 글도 마찬가지지만)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요점이 없다(이것도 역시 나아진 것이 없으려나?).

아무튼,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읽을 무렵에는 조선사 관련 책을 좀 읽던 시기였고 그중에서도 이덕일 계열의 역사관에 특별한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이유는 남들 다 하는 것은 남들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싫고, 남들이 ‘YES’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옳더라도 왠지 ‘NO’라고 말하고 싶고, 다수가 따르는 주류보다는 소수가 따르는 비주류를 선호하는 청개구리 같은 반항심에 소심한 반사회적인 기질이 접목된 내 특유의 성질이 기존 사관을 뒤집어엎으려는 이덕일 사단의 역사관에 나름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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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5.

[책 리뷰] 조선정치의 꽃 정쟁(신봉승)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비교

같은 주제를 다룬 두 책 비교 리뷰

저 신봉승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의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을 읽고 개운치 않은 점과 속이 체한 듯 응어리가 남아있어서 혹시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이 있나 하고 찾아보다가 발견한 책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다. 앞의 책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고 뒤의 책은 90년대 후반에 집필된 책임을 고려해도, 대중역사교양서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이덕일 소장의 책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참고로 그의 다른 저서인 <사도세자의 고백> 은 기존의 역사관과는 상당히 다른 역사책이니 나처럼 비주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조선 정치의 꽃 정쟁> 보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가 더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음에도 이덕일 소장의 책을 읽고 속이 확 풀린 것은 아니다. 이덕일 소장의 책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역사는 알면 알수록 더욱 궁금해지는 것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돈도 가진 놈이 더 욕심을 부리고, 아는 거 많은 놈이 먹고 싶은 것도 많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방대하고 파란만장한 역사의 부침에 대한 호기심이 그 어찌 몇 권의 책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이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읽는 재미는 많은 역사소설을 저술한 경험이 다분히 녹아있는 신봉승 교수의 책이 이야기 중심의 구성이라 소설처럼 막힘없이 술술 넘어갔다. 거기에 약간은 붓이 절제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노학자로서의 여유와 슬기로움일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역사가 중에서 기존의 가치관을 혁파하는 부류에 속하는 이덕일 소장의 책에서는 패기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대중적인 역사서가 꽤 출판되는 요즘, 역사에 흥미 있는 독자에게는 읽을 자료가 많을수록 다양한 풍미를 음미할 수 있어 좋다. 음식은 많이 먹으면 탈도 나고 살도 찌지만, 지식은 먹어도 먹어도 오히려 배가 더욱 고파지는 경향이 있기에, 이러한 대중역사서 뿐만 아니라 다른 대중교양서들도 많이 출간되고 번역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책을 한두 권만 읽고 과거의 어떠한 정황이나 사건을 섣불리 판단한다거나 사실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란 학문이 원래 부족한 사료를 가지고 저자가 가진 지식과 판단력으로 과거사를 추리한 결과물이다 보니 역사가마다 다른 의견과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자료만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사실 인척 주장하고 고집하는 학자들도 있기에, 우린 여러 저자의 다양한 의견과 해석을 접함으로써 편견에 빠지지 않는 슬기로움을 얻고 더불어 사료를 습득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의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럼 두 책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붕당의 기원과 예송 논쟁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당(朋黨)의 기원은 중국 남송(11세기) 때 왕안석의 부국강병책을 둘러싸고 농민 중심의 개혁을 주장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과 이를 반대하고 계속 지주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한 사마광(司馬光) 중심의 구법당(舊法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는 비슷한 시기에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朋黨論)이 저술됨으로써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조선 붕당의 주축인 사림파(士林派)와 사림파를 탄압해서 사화(士禍)를 만들었던 훈구파(勳舊派)의 뿌리는 고려 말기 나타난 신흥사대부 세력이었다.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던 새로운 정치 세력은 고려를 타도하자는 급진 세력(역성 혁명파: 정도준, 하륜, 조준)과 고려 자체는 존속시키자는 온건 세력(온건 개혁파: 정몽주, 갈재, 이색)으로 나뉘었고, 새 왕조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 개혁파는 자신들의 토지가 있는 고향에 돌아가 학문을 연마하면서 중소 지주라는 자신들을 지위를 이용해 향촌 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힘썼다. 이들이 성종 때부터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사림파가 되었고, 조선이 개국할 때 정권에 참여한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정변을 통해 다수의 공신을 배출함으로써 집권세력이라 할 수 있는 훈구파를 이루게 되었다. 성종 때 주요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가 훈구파의 끈질긴 탄압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입때까지만 해도 같은 이념과 학통을 공유하는 하나의 정파였기 때문에 쉽게 재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쟁이 가속화되면서 공존의 틀이 붕괴하고 정치가 정책이나 민생에 대한 정쟁이 아닌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전개되면서 조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주범이 된다.

조선 붕당의 기원은 선조 7년(1574)에 이조정랑(吏曹銓郞) 자리를 놓고 동인 •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었던 시기다. 이조정랑은 정5품의 낮은 관직이었지만, 이조정랑은 청요직(淸要職)으로 불리던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대한 인사권과 후임 이조정랑에 대한 추천권이 있었기에 권력을 잡기 위한 요직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조정랑 오건이 다른 자리로 가면서 김효원을 추천하지만, 심의겸(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이 외척 윤원형(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 소윤, 대윤은 중종 첫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오빠인 윤임)의 식객이었다며 반대한다. 그러나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고 김효원의 뒤를 이은 정랑에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오르자 김효원이 심의겸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때 대체로 젊은 사대부들은 김효원을, 노장들은 심의겸을 지지했고, 결국 이들은 1575년 동 • 서인으로 분열한다. 선조 4년(1571) 영의정 이준경이 유차(鑵羕)를 올려 이이를 중심으로 붕당의 조짐이 있음을 선조에게 경고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이이는 이준경을 비난한다. 나중에야 이이는 붕당의 폐단을 깨닫고 남은 일생을 동 • 서인 사이를 중재하는 데 쓰는 실천적인 개혁 정치가로 남게 된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살아있던 시대에는 붕당이 있었어도 최소한의 공존의 틀은 지키고 있었다. 이이와 성혼은 같은 당파 및 학파에 속해 있었다고 하여 당론을 개인의 사상보다 우선시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학자답게 학문의 개방성과 상대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후 전개된 문묘 종사 운동은 철저히 당파적 입장으로만 전개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상대 당의 모든 것을 배척하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공존의 틀은 무너진다. 정당한 경쟁이나 공정한 룰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에는 대량 살육을 부른 보복 정치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대체 예송 논쟁이 무엇이었기에 이들을 피에 굶주린 괴물로 만들었나?

종 10년(1659) 5월, 끝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효종이 승하한다. 전통시대의 예는 오늘날 헌법 이론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제를 삼년복으로 할지 아니면 기년복(1년)으로 할지가 조정의 핵심 문제였다. 효종이 인조의 장자(소현세자)가 아니라 차자(次子, 봉림대군)였기 때문에 생긴 혼란이었다. 송시열은 아들로서는 다음 서열이기에 기년복을 주장했고 그의 의견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현종 15년(1674) 2월에 대비 인선왕후(효종비) 장씨가 57세로 승하하면서 시작된다. 자의대왕대비 며느리의 상복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또다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을 장자로 본다면 기년복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공복(9개월)을 입어야 했다. 송시열 등은 대공복을 주장하지만, 대구 유생 도신징이 대공복의 부당함을 상소하여 기해년의 국상 때는 국제(國制)를 따르고, 이번 갑인년의 국상 때는 고례(古例)를 따르는 모순을 지적한다. 만약 송시열의 의견을 따르자면,비록 효종이 왕실의 종통(宗統)은 이었으나,적통(滴統)은 인조의 적장자인 소현세자의 소생 경안군 석견에게 있다고 해석될 소지가 있다. 남인들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인조반정 이후 집권을 계속한 서인을 공격할 근거로 삼았다.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어 기년복을 선택해 남인이 정권을 잡게 하고 숙종 1년(1675) 8월 현종에 대한 자의대왕대비의 복제를 다시 의논할 때 윤휴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짐으로써 햇수로 16년에 걸친 예송 논쟁의 결말은 윤휴 등 남인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송시열,윤휴,허목 등의 논쟁은 순수한 학문적 논쟁으로 시작된 것이었어도 점차 논쟁이 격화되어 갈수록 효종의 적통에 관한 싸움으로 변질하면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이처럼 당시의 당쟁은 이념이나 정책을 떠나 정권 강화와 이념 문제 등 비생산적인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봉승 교수는 예송논쟁을 수준 높은 논전이라고 평가한다. 조일, 조청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성은 굶주리다 못해 고향을 도망쳐 나와 도적이 되어야 했던 그 고난의 시기에, 그 수준 높았던 논쟁의 결과로 백성과 조선에 얻어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아니라 양반천하지대본인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너무나 많다. 고로 신봉승 교수의 말을 곧이 고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당쟁을 바라보는 두 책의 서로 다른 시선

봉승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당쟁을 정쟁으로, 그리고 정치의 꽃으로 끌어올리려 하지만, 그의 글만 봐도 당쟁이든 정쟁이든 결코 곱게 봐줄 수는 없다. 조선의 역사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정쟁의 장면 좀 많이 실어주었으면 좋았겠지만, 두 책에서 피비린내나는 싸움만 구경한 것 같아 아쉽다. 지금의 시점으로 당시 조상의 언동을 보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던 장면이 너무나도 많았다. 널리 알려진 '문묘 종사'나, '예송 논쟁' 같은 이런 소모적인 싸움들은 제외하고, 우리 조상이 진정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지혜와 슬기를 엿볼 수 있는 깔끔한 정쟁의 장면을 소개한 책은 어디 없으려나.

반면에 이덕일 소장의 글은 당쟁의 부정적인 면을 애써 피해가고 덧칠하기보다는 과감히 파헤치고 드러내어 논박하면서 가려웠던 점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다. 그는 비주류 역사학자답게 당쟁의 부정적 영향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하지만, 역사는 추리이고, 해석의 학문이다. 부족하거나 미흡한 사료는 시대와 역사가에 따라 생각과 판단이 다원화되는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새로운 사료가 출현하면 주류의 흐름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학문이다. 고로 신봉승 교수의 글이나 다른 역사가의 책과 비교해서 보기를 권장한다. 한 권만 읽고 만족하여 독선에 빠진다면 책을 안 본 것만 못할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렇다 보니 두 책에서 같은 사건에 대해서 내용이나 해석이 달랐던 부분이 몇 개 있었다. 그 중 기억나는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로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들 수 있다. 선조실록에는 십만양병설은 없다. 선조실록 16년(1583) 1월 22일 기록을 보면 병조 판서 이이가 군대를 정비할 것을 상소한다는 내용이 있고,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에 의해 집필된 선조수정실록 15년(1582) 9월 1일 기록에 이이의 상소문 본문이 아니라 아래 사관의 평에만 등장한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자.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백지원 선생의 <조일 전쟁> 을 보면 십만양병설은 이이의 문인이었던 김장생의 행장에 처음 등장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서인들에 의해 기정사실로 되고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지금의 주류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십만양병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현실적인 개혁 정치가이자 누구보다 애민사상이 투철했던, 공납의 폐단을 없앤 혁신적인 세법이었던 대동법의 전신인 대공수미법을 주창한 이이가, 그 당시 경제 상황을 보나 인구를 보나 10만이라는 병사 육성이 가능하다고 봤을까? 아무래도 후예들이 이이를 조금 띄워 주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여곡절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대동법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이의 종통을 이었다는 김집이나 송시열은 대동법을 처음엔 반대했었다는 사실도 알아두자. 대동법은 근대적인 세법(가진 것만큼 많이 내는)이었기에 기존에 가진 것과 상관없이 똑같이 정해졌던 세법에 비교해 보면 양반이 당연히 찬성할 리가 없는 법이었다. 그나마 송시열이 봐줄 만한 건 대동법이 시행되고 나서는 백성이 평안하다고 시인하며 대동법을 찬성한 것이다. 이런 혁신적인 세법을 처음으로 과감히 시행한 왕이 광해군이었던 걸 보면 인조반정은 정말 명분 없는, 나라를 좀먹은 짓이었다. 아무튼,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대해 이덕일 소장은 내가 배운 국사 교과서 그대로 기록했고, 신봉승 교수은 새로운 학설을 받아들였다.

번째로 인조 16년(1638), ‘세자가 심양에서 사무역(紗貿易)을 하고 있다 하옵니다’, ‘시강원에서 많은 백랍과 망건 등을 주상 몰래 보내었고, 세자와 강빈은 그것을 팔아 도에 넘치는 사치를 하고 있답니다’라는,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에 대한 소문이다.

신봉승 교수는 당시 소현세자를 비난하는 소문에 대한 이렇다 할 변명은 없다. 하지만, 이덕일 소장은 청나라 조선 주재 대사관의 역할 외에 두 나라의 무역 기관이었고, 소현세자의 거처이기도 했던 심양관을 운영하는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사무역은 세자빈 강빈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세자에게 사적 축적이 아닌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개연의 여지를 독자들은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세 번째로 숙종 14년(1688) 10월. 희빈 장 씨의 산후를 위해 친정어머니 윤이례와 교군들이 입궁하다 건양문에서 문직갑사와 다투는 와중에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나서서 가마를 부순 다음 불까지 지르고 이들을 쫓아내는 장면인데, 신봉승 교수의 책에서는 교군들이 저지된 이유가 입궁에 필요한 통행증인 문패가 없어서라고 되어 있지만, 이덕일 소장의 책은 문패가 없었다는 내용이 없이 옥교가 그냥 들어오다 다짜고짜 저지된 것처럼 되어 있다. ‘문패가 있었다', '문패가 없었다.’의 차이는 작지 않기 때문에 더욱 궁금하다.

네 번째로 숙종 20년에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고 그 후에 희빈 장 씨가 사사되기 전까지 희빈 장 씨가 인현왕후를 향해 했다는 방술에 대한 일화가 이덕일 소장의 책에는 생략되어 있다. 희빈 장 씨를 동정한 것일까? 아니면 그 일화가 말할 가치도 없는 사실과 거리가 먼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숙종실록 숙종 27년 9월 28일 기록에 ‘인정문에 나아가 무녀의 딸 정 등을 친국하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신봉승 교수의 책에 언급된 희빈 장 씨가 고용한 무녀 오례의 이름이 나온다.

이상으로 기억나는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마치면서...

럽의 헨리 2세는 아들 3명이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도전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관용을 베풀었다. 누구처럼 마음에 안 든다고 친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이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국제 관계에서 갈등이 빚어지면 많은 국민의 죽음을 불러오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정책을,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거나 수상한 음모를 꾸미는 정적의 죽음보다는 타협과 관용 우선시한 자비로운 여왕이었다. 조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만 돌아도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고문만으로 자백을 받아 처형해 버리는 무자비한 나라가 아닌가. 이런 잔혹한 옥사는 중세의 종교 재판이나 마녀 사냥과 다를 게 없었다.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 모두 힘을 모아 국가를 회복시켜야 할 시기에 이로 말미암아 낭비된 국력은 글이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엔 세종대왕이 있었다. 언제나 손에서 책이 떠날 날이 없었던 세종대왕은 한 학문에만 집착하지 않았고, 문무에 걸쳐 골고루 인재를 배양하고 등용할 줄 알았기에, 성리학에 빠져들어 다른 학문은 멀리하고 결국은 자신들의 생각만이 옳다는 종교적 광신에 빠져든 후세들과는 융통성이나 포용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통해 불완전한 인간을 수양할 줄 알았다면 그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사상도 불완전하리라는 가장 기본적인 의구심도 떠올릴 수 없었던 조선의 유학자들. 그들의 쓸데없이 강직하기만 하고 타협과 관용을 모르는 편협한 성품은, 가끔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로 감동을 불러내기도 했지만, 그런 굽힐 줄 모르는 아집과 고집은 붕당의 공존 법칙을 무참히 깨버렸고, 광복 후 여운형 선생이 겪었던 것처럼 국익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타협을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우는 악습을 만들었고, 반대를 위한 반대로 무조건 상대 당을 죽이고 보자는 막장까지 가게 되었다.

이덕일 소장은 무참한 살육으로 치달은 당쟁의 원인으로 정치밖에 가질 직업이 없었던 사대부들의 처지를 언급한다. 문제는 성리학이란 학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받아들인 사대부들에게 있었고, 사대부들로 하여금 정치와 학문 이외에 다른 길을 갈 수 없게 하는 사회 구조에 있었다는 것이다. 소수였던 청백리 이들도 정치와 학문 외 직업은 가질 수 없었고, 정치를 업으로 태어난 양반 사대부들에게 정치는 권력은 물론 명예와 돈도 얻을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길의 종착점인 로마였다고 이덕일 소장은 말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지만, 사람은 익을수록 더욱 뻣뻣해지기만 하는 것이 세상 도리인가 보다. 군자의 도리를 외치고 글로 쓸 줄만 알았을 뿐,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던 우리 선비들. 언제나 말 뿐인 지금의 정치가와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역시 피는 못 속이는가 보다. 다양한 인간이 살아가는 것만큼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이 한 가지 사실만 모두가 잊지 않아도 이 사회는 꽤 괜찮은 소통과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다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독서야말로 세상에 산재한 다양한 인간상과 다양한 의견을 두루 접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통로다.

마지막으로 이런 책들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식민사관 중 하나인 ‘조선은 붕당 때문에 망했다’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와 그 진위를,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가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판단해 보는 것도 역사를 깊이 있기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리뷰는 2012년 06월 25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약간의 수정을 거친 다음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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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6.

[책 리뷰]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시각 ~ 조일전쟁(백지원)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시각

느덧 도서관 대출 인생 5년 차로 접어들었고, 그동안 조선시대와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조일전쟁’이라는 단어는 이 책을 통하여 처음 만나게 되었다. 스스로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어렵고도 긴 싸움에 뛰어든 저자 백지원의 소개로 다시 만난, 그동안 임진왜란이라고 알고 있었던 조일전쟁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이 책을 통해서 만나 보았다.

역사 새로 알기의 첫 출발점으로, 1592년에 일본의 조선 침략을 ‘임진왜란’이 아닌 ‘조일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을 보자. ‘난 亂’이라는 말은 ‘난리’, ‘아무개의 난’ 등 전쟁보다는 규모가 작은 국지적인 반란 등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해왔다. 1592년 일본의 침략은 단순히 조선 조정에 봉기한 반란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었으며, 당시 선조와 조정의 어처구니 없는 무사안일한 태도로 200만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와 한반도 대부분이 전쟁 중 초토화되는 물적 피해를 보았다. 그럼에도, 단지 ‘난’이라는 단어로 축소 왜곡한 것은 조정의 무능을 조금이라도 덮어두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면은 어느 세계의 역사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진 정부의 무능이나 잘못된 점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들은 은폐하거나 축소하고, 조금이라도 괜찮은 점은 과장 확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독자들은 역사서를 읽고 판단해야 한다. 단어 하나일 뿐이라고 우습게 보지 말자. 이런 표현 하나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면서 딱딱한 머릿속에 박힌 몇십 년 묵은 편견은 어떻게 바로잡겠는가?

번째로, 조일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연패를 거듭한 조선군과 조정은 이것에 대한 변명거리로 일본의 조총을 핑계로 댄다. 이것 역시 조선 지도층의 무능이 한몫한 것이다. 물론 일본의 조총이 우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무선의 화약 개발 이후 당시 조선은 화약 무기 면에서는, 특히 중화기 면에서는 절대 일본에 뒤지지 않는 전력이 있었다. 수군에서 절대 우위를 점할 수 있던 것도 함포가 장착된 판옥선으로 함포조차 없었던 일본 배를 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개인화기 면에서만 조총이 우세했던 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사거리 긴 조선의 각궁이나 중화기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조총이 개발된 이후로 몰락한 몽골 기마병들과 프랑스-영국 백년전쟁에서 증명되었듯이 조총 부대의 밥인 기마대로 무모하게 공격해서 전멸한 신립 등 전혀 준비가 안 된 도망 다니기 바빴던 지도층의 무능이 일본의 빠른 진격과 조선군의 처절한 패배에 한몫했음을 알고 넘어가자.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 지도층들도 그러했겠지만, 현재의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점 중의 하나가 당시 일본은 섬나라이니까 육군전력보다는 수군 전력이 월등히 앞설 것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 당시 일본의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공을 등에 업고 100여 년이 넘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생각해 보면 일본의 육군이야말로 아마 당시 최강이지 않았을까.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수들과 어렸을 때부터 칼과 창으로 단련된 무사들을 상대했을 조선군을 생각하면 정말 때를 잘못 만나 어육이 된 그들의 불행한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으리라.

번째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많이 부풀려진 이야기들을 얘기해 보자. 우선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정몽주 전 회장이 유럽에서 첫 수주를 따낼 때 한국 돈을 보여주어서 성공했다는 일화에 등장하는 철갑선인 거북선. 하지만, 조선의 기록 어디에도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적군이 배의 등 부문 위로 접근하지 못하게 못 등으로 무장했다는 기록뿐이다. 철갑선이었다는 얘기는 일본 측 기록인 <정한위략>에 등장한다. 아무래도 일본의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대판 깨지니까 우리가 조총 핑계 대듯이 거짓말을 좀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거북선은 거대한 만큼 기동력이 떨어져 칠천량해전에서 3~4척 있던 거북선이 전부 소실되고 나서는 다시 제작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 전투에서는 크게 효용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싶다. 또한, 조선의 첫 거북선은 태종 13년(1413)에 첫 건조 되었고, 이순신 장군은 그걸 고쳐서 실전에 배치했다.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 신화도 저자의 꼼꼼한 계산을 예를 들면 16전 13승 3패란 결과가 나온다. 이 중 3패는 보는 이의 판단에 따라서 무승부가 될 수도 있어 보이지만, 최소한 1패는 확실해 보이고, 따라서 연전연승 신화는 거품이다. 당시 일본 수군의 배에는 함포도 없었던 걸 떠올리면, 20문의 포가 장착된 판옥선을 대량 보유한 조선의 수군이 전력 면에서는 월등히 앞서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당시 서양의 레판토 해전이나 칼레해전의 규모 등을 비교해 보면 이들과 붙어도 전혀 꿀릴 것은 없었으리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에 대해 말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간계에 걸려든 선조와 조선 조정, 그리고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이순신 장군 자신의 행동 때문에 삭탈관직 되는 것이지, 원균 장군의 모함으로 그렇게 된 점이 아니라는 점과 이순신 장군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 승리 후 이순신 장군이 원균 장군이나 그의 부하 장수들은 거의 언급을 안 하고 모든 공적을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로 만들어서 올린 장계 때문에 둘 사이가 틀어졌다는 점 등 이 모든 면이 그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할 수는 있겠지만, 장군의 가치를 떨어트리거나 명예를 훼손시키지는 못한다.

영웅은 꼭 모든 전투에서 승리할 필요는 없다. 매번 패하다가도 그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전투에서 단 한 번의 승리로도 충분히 역사에 남을 영웅이 되고도 남는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그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이었다. 트라팔가르해전의 넬슨 제독과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처럼 명량해전의 승리 하나만 가지고도 이순신 장군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영웅이 된 것이다.

지막으로 저자는 조일전쟁을 극복해 낼 수 있었던 힘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의 업적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에 명의 원군과 의병의 활약, 즉 이 삼박자가 고루 활약을 해주었기에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절대 승리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을 떠올려 보라. 조일전쟁과 한국전쟁은 그런 면에서 유사한 점이 꽤 있는 것 같다. 두 전쟁의 최대 공통점은 정부의 무능한 정책으로 아무것도 몰랐던 죄 없는 백성만 피똥 싸며 고생했다는 것.

이와 더불어 불패의 정기룡 장군, 의병장 곽재우, 진주대첩의 영웅 진주 목사 김시민, 같은 숨겨진 영웅들의 활약과 선조와 그 간신들의 무능하고 비겁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의병장 김덕룡, 김명원의 무고로 참수된 신각 등 여러 인물의 상황과 전후 사정을 통해 조선 양반 사회에 뿌리내린 성리학의 고질적인 병폐인 명분만 내세우다 현실에서 괴리된 지도층의 사상과 행동 등의 문제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조선 사회뿐만 아니라 일본 전후의 사회 모습도 설명해 주고 있어 조선전쟁을 좀 더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미있고 쉽게 정독할 수 있는 괜찮은 대중 교양 역사서임은 분명하나, 아무리 무능하고 욕을 먹을 만한 짓을 했더라도 자꾸 등신, 등신 선조를 부르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런 식으로 좀 과격하고 험한 말로 이야기의 끝이나 중간에 아주 개인적인 언사를 내뱉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것 같아 속이 후련하기도 했지만,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들이, 특히 어린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이 책을 본다고 생각하니 민망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적인 술자리에서나 허용될 것 같은 그러한 거친 언사가 결국 이 책의 전체적인 질을 떨어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조일전쟁에 관련된 많은 내용이 폭넓게 포함되어 있지만, 전에 읽었던 다른 대중교양역사서처럼 전체적인 구성은 그리 깔끔하지는 못한 편이다. 군더더기가 좀 있다고 할까나. 그리고 한 맺힌 울분을 토하는 정의에 불타는 저자의 언사는 강단에서는 말발이 아주 잘 섰을 것 같다. 문제는 책도 그런 식으로 집필한 것이 아닐까? 독자들이 이 점을 고려해서 읽는다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 진부적인 말이지만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이 말이 왜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는 와 닿지 않는 걸까. 일본을 봐라. 국민의 독서량 좀 떨어졌다고 걱정이다. 우리는? 돈 버는 책이나 입사, 진급에 관한 책을 제외하고는 도통 책을 읽지 않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메이지 유신 이후 발 빠른 신문의 보급과 더불어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이 무려 20만 부나 판매되었다 한다. 이런 꾸준한 독서열이 오늘날의 경제 대국 일본의 원동력이다. 돈? 로또라도 당첨되면 하루아침에 부자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뛰어난 천재가 아닌 이상 하루아침에 수백 권의 지식을 습득할 수는 없다. 그렇게 보면 일본은 이미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앞서 있는 것이 된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TV, 스마트폰, 컴퓨터 등에 시간을 뺏기지 말고 독서에 관심을 둬라. 부모가 맨날 TV나 보고 자빠져 있는데, 자녀가 뭘 보고 배우겠나.

부모나 조상 세대들이 일본에 대해 악감정만 품고 옹졸하게 욕만 하던 시대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이제 욕은 그쯤에서 멈추고 그들보다 조금 더 배웠다고 자부하는 우리는, 비록 그 대상이 일본일지라도 그들에게서 배울 만한 점들은 모조리 배우고 다듬어 언제가 그들을 뛰어넘게 되는 날을 위해 튼튼한 기반을 다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용서하자는 말은 아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슬픈 과거를 직접 보고 겪었던 세대는 이미 흙이 되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교과서의 단 몇 페이지만이 배움의 전부였던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더라도 아직은 그들을 용서해 주어서는 안 된다. 용서하는 순간 과거는 잊히기 마련이고, 그들은 다시 과거의 비뚤어진 영광을 되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린 또다시 잊힌 과거를 떠올릴 만한 절대 반갑지 않은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워하고 증오하자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우리에게 기꺼이 선사했던 끔찍하고 피비린내나는 과거에 대해 만족할 만한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그들이 수긍할 만한 해명을 할 때까지 용서는 아직 때가 이르다. 그 거룩한 역사적 사명은 우리가 남긴 유산을 토대로 조금 더 많이 알게 되고,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이 리뷰는 2012년 06월 0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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