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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책 리뷰]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 푸드쇼크(로버트 앨브리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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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원제: Let them eat junk by Robert Albritton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과학 실험?

마 전 뉴스에서 한국인 혈액 속 수은 농도가 미국보다 3배 이상, 독일보다는 무려 5배나 높다는 조사결과가 보도되었다. 수은 같은 중금속들은 주로 수산물을 통해 흡수된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본의 아니게 먹게 되는 유해 물질은 비단 중금속 뿐만은 아니다. 바로 우리가 주로 먹고 마시는 라면이나 과자, 햄버거 또는 콜라 같은 가공 식품에서 흡수되는 화학물질 또한 인체에 쌓여 언제 터져 발병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천수를 누리겠지만, 재수 없으면 수십 년 후에 다른 화학물질들과 반응하여 암 같은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길거리에 흔한 패스트푸드 점포나 주위에 널린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가공식품들에는 맛과 모양을 위해서 다양한 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이런 화학물질들을 사람이 장기간 복용할 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확실하게 테스트 된 물질은 거의 없다고 한다. 환경보호기금의 정책 이사인 릭 스미스(Rick Smith)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통제받지 않는 과학 실험에 참여한 기니피그’다.

‘음식’을 둘러싼 부조리

리는 무엇을 위해 현대판 노예들, 스타크래프트의 일꾼 유닛과 다를 바 없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것이다. 이 대답에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디 밥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사람에게 있어 음식은 최고의 행복이자 먹는 사람의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번 돈을 가지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계속 먹는 걸까. 왜 우리는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음식까지도 소비자의 건강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냉혹한 시장경제에 맡겨야 하는 걸까? 왜 기업들은 소비자가 먹는 음식에 첨가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유독성 시험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걸까. 또한, 국가는 이런 상황을 왜 그대로 내버려두고, 인류의 번영에 이바지하기 위한 연구를 한다는 과학자들조차 소비자보다는 기업들에 편에 서서 담배를 옹호하는 걸까. 한편으로는, 한쪽에서는 어디를 가든 다양한 식품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사람들은 많이 먹고 그만큼 많은 음식을 버리고, 그들은 음식의 풍요로움 속에서 비만과 과체중으로 고생한다. 반면에 WHO(세계보건기구)는 전 세계 30억 명의 인구가 굶주림이나 다른 영양 불균형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정했고, 21세기에도 5초마다 5세 미만 어린이 다섯 명 중 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걸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화학비료와 농업 생산의 자본화와 집중화로 식량은 이미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하지만, 실제로 식량의 분배는 그렇게 공평치가 않다. 정작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들이나 노동자들이 배고픔과 영양 불균형, 각종 인체에 해로운 농약(선진 대다수 국가에서는 사용금지되었지만, 빈곤 국가에서는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때문에 질병에 시달리는 현실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건가.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버트 앨브리턴(Robert Albritton)의 『푸드쇼크(Let them eat junk)』는 넘쳐나는 식량 속에서 기아와 비만을 동시에 만들어 낸 자본주의 체제의 농업과 식량 공급에서의 불합리성과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이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비단 식량에 한해서만은 아니겠지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식량이다 보니 『푸드쇼크』에서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은 그냥 무심코 넘길 수가 없다. 또한, 크고 작은 동네 마트에서 할인해 파는 저렴한 식품이 눈에 많이 띄어서일까. 다른 나라에서는 5초마다 어린 아이가 굶어 죽는다고 하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사실들을 추려보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그것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태어난 걸 정말 복 받은 것 같다. 이 풍요가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로버트 앨브리턴의 주장은 단호하다. 그는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류의 번영에 필요한 식량체제의 기본 조건은 지구 생태에 미치는 훼손을 최소화하고, 미래 세대들을 위해 환경 건전성도 강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산되어야 하고, 이렇게 생산된 우수한 품질과 충분한 양의 식량이 각 개인에게 제공되어야 마땅하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가능성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식량체제의 기본 조건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가 소비자의 건강과 이익보다는 오로지 기업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현실의 문제점들과 그 원인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푸드쇼크』에는 자본주의의 무관심이 만들어 낸 정크푸드, 미래를 담보로 하는 지속 불가능한 현재의 식량 체제,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지는 지독한 자본주의, 식량이 무기가 되는 공포 정치,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기아와 비만, 설탕과 고기, 그리고 식품 첨가물에 중독되는 현대인, 농업 노동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 환경을 파괴하는 현재의 식량체제, 자유 민주주의보다 힘이 센 기업 등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리고 지배하는 공장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진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식량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단 • 장기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앨브리턴 나름대로 모색한다. 그러나 그의 대책을 보고 내 생각을 감히 말하자면, 그 방안이 현실적으로 정말 가능할지, 너무 이상주의적이지는 않은지, 하는 의문과 걱정이 앞선다. 그만큼 자본주의는 우리 뼛속 깊이 잠식해 있고, 사람의 욕심과 욕망 또한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깊숙이 잠재된 욕망까지 끌어내고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어 유행을 호도하고 상품을 판매하는 자본주의가 과연 쉽사리 신의 권위에서 내려올지 회의가 든다.

식품회사의 관심은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라 지갑이다

실 누구나 알다시피 기업이 이익을 좇는 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기업의 장단에 맞추어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소비자의 우유부단한 태도 또한 문제인 것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 소비자는 단순히 돈만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담보로 무분별한 소비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힘들게 공부하고 노력하며 돈을 벌지만, 결국에는 광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리함과 달콤하며 기름진 맛에 중독되어 장기적으로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가공식품이나 패스트푸드로 하루 세 끼를 채운다. 특히 식습관은 유전이 아니라 어렸을 때의 환경적 요인, 즉 양육으로 결정된다는 걸 아는 식품회사들은 어린 아이들에 대해 더욱 공격적으로 마케팅한다. 이에 대해 과연 부모들은 가족이 먹는 음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과연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을까. 우리나라도 비만이 증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비만을 단순히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정크푸드로 살 찌워진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배불러 보일지라도 영양상으로는 굶주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즉 정크푸드가 칼로리만 높고 영양적 가치는 형편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육체는 부족한 영양성분을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은 음식을 요구하고, 이런 악순환이 결국 비만을 불러온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행동에 반영하고 있는가.

식품 회사나 담배 회사는 질 낮은 식품 섭취나 흡연으로 발생할 수 있는 막대한 사회 비용은 전적으로 개인이 부담하게 한 채, 뻔뻔스럽게 소비자의 건강을 담보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고 있다. 요즘은 기업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해 자선사업도 하고 여러 단체에 기부도 하지만, 결국 이런 것들은 기업의 궁극적인 기업의 이익을 위한 고도의 지능적인 전략일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의 광고회사들은 광고가 사람의 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까지 하고 있다니, 예전 공산주의 사회에서 텔레비전을 국민의 세뇌 교육용으로 사용했듯이, 지금처럼 광고의 홍수 속에 사는 소비자가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는 기업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기 일쑤다. 많은 소비자가 사람의 살을 먹는 좀비가 아니라 자신의 지갑을 털어가면서, 부족하면 대출까지 받아 소비하는 자본주의적 좀비가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가능할까?

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냉전시대를 겪으면서 공산주의 때문에 만능해결책인양 과대 포장되어왔다. 당시 자본주의는 그 시대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거나 자본주의 외에 다른 체제는 생각해 본 적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버트 앨브리턴의 『푸드쇼크』를 읽고 나서는 그런 안이하고 보수적인 생각에 많은 파문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한다.

어떻게 보면 필요에 의해 자원이 분배되는 공산주의야말로 이론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건 분명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모두가 필요한 걸 똑같이 가질 수 있거나, 아니면 모두 못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공평한 사회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자신이 필요한 것만큼만 자원을 소유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죽을 때까지 다 쓸 수 없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계속해서 먹고 마시며 남의 것을 탐내며 계속해서 재산을 모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아무리 먼 미래라도 지금의 인류가 깨끗이 청소되고 신인류가 등장하지 않는 한, 이상적이고도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는 이미 사유의 쾌락에 물든 지금의 인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개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사람이 아직 사유의 개념을 알지 못했던 먼 옛날의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 가진 부족함과 어리석음, 모든 사람에게 잠재된 끊임없는 탐욕이 일으킬 재앙을 일찌감치 깨닫고 정의롭고 평등하고도 금욕적인, 여러모로 완벽한 존재인 신을 삶의 모습을 본떠 창조했지만, 그 신마저 정치와 권력, 그리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이용됐다. 이러하니 자본주의 체제 또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꼬집어 내어 비판만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후손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본주의가 가진 불완전함과 불평등을 인정하고 개선해나가려는 의지이다. 자본주의 초창기부터 이미 부의 재분배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제기되어 왔고,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이에 대해 점점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면서 개선하려고 노력해 왔다. 자본주의도 변화하고 진화하여 산업혁명 당시 초창기의 자본주의와는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일으킨 부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빈부의 격차는 국가 대 국가 간의 빈부의 격차 문제로 확장되었다. 착취 문제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국가 대 국가, 대기업과 빈민 국가 간의 전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아직도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목격한 착취의 현장이 그대로 선진국과 대기업, 조금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 묵인하에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있으며, 빈민 국가 아동들의 노예화도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값싼 음식, 값싼 소비자 의식이 지불하는 대가

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가 마트에서 싸게 사는 것만큼 누군가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있는가. 중국이나 아프리카와 남미의 농장들, 그리고 다른 개발도상국의 임금과 작업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역시 우리에겐 다른 나라일 뿐이다. 전태일의 비극적인 죽음을 벌써 잊었는가. 여러분도 1860년대 마르크스가 처음 썼던 "내가 죽은 뒤 지구가 멸망하건 말건(Apres moi le Deluge)!"이라는, 모든 자본주의자와 자본주의 국가의 좌우명에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닌가. 과거 공산혁명이 그러했듯이, 이 모든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이 안 된다면 언제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과 함께 이 지구를 다시 한번 혁명의 화염 속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때는 아마도 과거처럼 도시적인 시민혁명이 아니라, 착취당해온 국가들이 일제히 들고일어서는 혁명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번 상상이라도 해봤는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다음에 올 지금과 전혀 다른 시스템 위해 새워진 새로운 세상을. 조선시대나 중세 봉건 제도 아래에서 살았던 민중이 자본주의나 백성의 투표로 왕을 뽑는 민주주의, 신분제에서 해방된 사회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듯이, 우리 역시 또한 자본주의에 파묻혀 다음 세상에 올 새로운 체제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선구자적인 새롭고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올, 제2의 마르크스가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가 된다면 어떠한 시스템을 말하고 싶은가. 당신이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무엇인가. 당신이 꿈꾸는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인가.

나 같은 경제 쪽에 둔감한 사람에게는 『푸드쇼크』 초반부의 추상적인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부분 등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가볍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한 장 한 장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순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모두 잊고 있던, 아니 잊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에게 불쾌함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자 하는 독자라면 그쯤의 불쾌함과 불편함을 어찌 예상하지 못할까. 지나가면서 가볍게 읽기에는 쉬운 내용은 아니지만, 깊이 생각하며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소비 중심의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세상을 좀 더 냉철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식이 담겨 있다. 『푸드쇼크』를 읽고 나면 “변덕스러운 시장 가격에 식량 같은 기초 필수품을 맡겨놓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는 앨브리턴의 당찬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와 윌리엄 레이몽의 『독소』, 『식탁의 배신』과 파울 트롬머 『피자는 세계를 어떻게 정복했는가』와 함께 보면 좋을 듯싶다.

이 리뷰는 2012년 10월 27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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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0일 토요일

[책 리뷰] 친숙했던 그 모든 것이 지옥으로 가는 관문 ~ 버닝 와이어(제프리 디버)

숙했던 그 모든 것이 지옥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원제: The Burning Wire by Jeffery Deaver

래간만에 링컨 라임을 만났다. 링컨 라임 시리즈 8번째 『브로큰 윈도』까지 읽고는 그다음 시리즈는 아직 출판이 안 된 것 같아 다른 범죄 소설을 찾다가 보슈 형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고 나서는 라임은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다 기분 좀 전환할 겸 추리나 범죄 소설 중 ‘뭐 재미난 거 없나?’하고 도서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요 녀석이 빳빳한 새 지폐처럼 눈에 띄어 누가 가져갈세라, 그리고 전작에서 알게 된 라임의 명성도 있고 하니 일단 대출하고 보았던 것이다. 아직도 난 도서관에 갈 때 특정한 책 제목을 기억하고 가지는 않는다. 많은 장서 틈을 뒤지며 뭔가 새로운 작품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충동구매가 그렇듯 그때그때 기분 따라 책을 선택하는 기준도 많이 다르고 그러다 좋은 작품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과 짜릿함이란.

일단 도서관에 도착하고 나면 대출한 책들을 반납하고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신간도서,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 없고 미리 염두에 두고 온 책이 없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그날의 입맛에 맞는 책을 선택하게 된다. 주로 문학, 역사 쪽을 살펴보지만, 기분 내키면 사회나 경제, 과학(유전자나 고생물학) 분야도 본다.

아무튼, 그렇게 찾다가 링컨 라임 9번째 시리즈인 『버닝 와이어』를 만났다.

임 시리즈 9번째인 『버닝 와이어』에 등장하는 범행 무기는 이채롭게도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눈에 띄는 ‘전선’이다. 그래서 전압의 과부하를 이용한 ‘아크 플래시(arc flash)’가 자주 등장한다. 지난번에는 기업들이 수집한 개인정보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악용한 범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전기를 이용한 범죄로 개인정보를 이용한 범죄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대형 범죄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고, 그 피해자는 우리 모두 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은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개인정보와 전기를 악용한 범죄는 인간의 과학이 인류에게 편리함만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고, ‘과학이 곧 행복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옛날 옛적에는 자동차사고로 죽는 사람도, 총이나 폭탄으로 죽는 사람도 없었다. 과학은 인간의 호기심과 의문점을 충족시켜주고 편리함과 이득, 그리고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을지는 몰라도, 행복의 기반이 되는 인류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제프리 디버는 이렇게 라임의 8번째, 그리고 9번째 시리즈를 통해서 이런 과학의 지속적인 발전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에 대한 맹신이 가져올 수 있는 대재앙을 예견하고 예방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화창한 4월 봄날, 뉴욕 퀸스에 있는 앨곤퀸 전력 회사에 뜬 ‘치명적 오류’ 메시지. 그리고 연속해서 정지되는 변전소들. 결국, 맨해튼에 있는 변전소가 폭발하며 일으킨 아크 플래시는 근처 버스정류장에 있던 정류장 기둥에 섭씨 2,760도의 불꽃으로 꽂혔다. 그리고 버스에 타려던 승객 한 명이 숨졌다. 그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지만, 그게 치명상은 아니었다. 뜨거운 열기에 녹은 자그마한 쇠구슬이 산탄총에 맞은 것처럼 그의 온몸을 덮쳤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은 호텔에서의 엽기적인 테러 행위. 호텔 전체가 거대한 전도체가 되면서 호텔은 지옥으로 돌변했다. 회전문 손잡이, 연회장으로 통하는 놋쇠 문, 로비로 향하는 낮은 계단 난간, 엘리베이터 패널, 문 손잡이. 평소에는 친숙했던 이 모든 것이 지옥으로 가는 관문으로 돌변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자연스럽다.
전류를 멈추게 할 수도 있고,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전류를 속이지는 못한다. 일단 발생한 전류는 본능적으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며,가장 직접적인 경로가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면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하는 순간에 살인을 저지른다.
전류는 양심도 없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가 이 무기에 감탄하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과 달리,전류는 영원히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다. (본문 중에서)

문명이 조금이라도 있는 나라는 전부 사용하는 전기, 인간의 생활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전기, 그러나 편리함과 동시에 그 편리함을 느끼며 사는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다 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전기, 과학과 문명의 상징인 이 전기를 이용하여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범죄를 저지르는 녀석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를 잡고자 뉴욕의 그들이 다시 뭉쳤다. 자신은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기동성이 낮은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짜릿한 ‘도전’을 학수고대하는 법과학자 링컨 라임, 라임의 수제자이자 매력 만점 연인인 빨간 머리에 여전히 속도광인 아멜리아 색스 형사, 라임의 사무실에서만은 언제나 점잖은 ‘델레이표’ 진녹색 슈트를 입고 등장하는 변장의 귀재 프레드 델레이 FBI 요원, 라임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그 역시 자신만의 상징인 후줄근한 회색 정장을 소유한 배불뚝이 론 셀리토, 감식의 떠오르는 샛별이자 영원한 신참 론 풀라스키, 겉보기에는 가장 운동을 못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볼륨 댄스 챔피언인 최고의 감식요원 멜 쿠퍼.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위해 멕시코시티에 등장한 라임의 최대 맞수 시계공. 과연 이들의 불꽃 튀기는 두뇌와 자존심 대결은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전에 링컨 라임 시리즈의 첫 작품인 『본 컬렉터』 이후 차례대로 라임 시리즈를 보면서 첫 작품에서 뒤편으로 갈수록 작품에서 얻는 재미나 전율이 아주 조금씩 감소한다는 걸 느꼈었다. 계속 같은 작가가 쓴 같은 시리즈만 보니 익숙해지고 또 물려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계속 먹다 보면 질리기도 하거니와 처음 배고플 때 먹었던 그 만족감과 흥분은 역시 같은 요리로는 다시 맛보기는 무리이기도 할 것이다.

라임 시리즈 8번째 작품까지 읽고 그런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번 작품은 좀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기대했다가는 작품이 주는 재미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실망만 할 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판단은?

영리한 범인이 첫 번째 범행 현장에서 실수로 남긴 혈흔 등 약간은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고, 보통 모든 건물에 있는 피뢰침 등 접지 시스템을 어떤 방식으로 무력화시키고 호텔에서 감전을 이용한 테러를 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라임 시리즈 전부 다 그렇듯이 추리나 범죄, 스릴러 장르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당연히 『버닝 와이어』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여기에 전기에 대한 역사적 일화나 전기안전을 위한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 등 전기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도 보너스로 들어 있다. 그러니 삶에 지쳐 피곤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짧은 시간이나마 여유와 휴식, 그리고 링컨 라임만의 스릴감으로 말미암은 짜릿한 쾌감 등으로 상쾌한 기분 전환을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읽어보고 판단하길 바란다. 이렇게 잠시나마 다른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 우리 삶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는 건 독서에 취미가 있는 분이라면 다 알고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번 작품을 읽고 왠지 모르게 다음 10번째 라임과의 만남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과연 어떤 소재로 우릴 놀라게 할지….

이 리뷰는 2012년 10월 2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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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3일 토요일

[책 리뷰] 왜 김덕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을까? ~ 국역 정본 징비록(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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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덕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을까?

원제: 懲毖錄 by 柳成龍

유성룡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

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유성룡: 설득과 통합의 리더』를 읽고 나니 역시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말년에 조정에서 물러난 유성룡이 조선시대 가장 큰 전쟁으로 국가의 존망이 걸렸던 임진왜란을 되돌아보면서, 임진왜란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나라에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자 후예들을 생각하며 지은 책이 『징비록』이다. 이 뜻을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이렇게 밝힌다.

『시경(詩經)』(제19권 주송周頌 소비장小毖章)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患難)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라는 말이 있는데,이것이 바로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징비록』 「자서(自序: 스스로 적은 머리말)」)

그리고 『징비록』 「자서」에서 유성룡은 왜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우리나라에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또한, 선대 여러 임금님들[祖宗]의 어질고 두터운 은덕이 백성 속에 굳게 결합되어,백성의 조국을 사모하는[急漢] 마음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며,임금께서 중국(명나라)을 섬기는 정성이 명나라 황제를 감동시켜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한[存邢] 군대가 여러 차례 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징비록』 「자서」)

백지원의 『조일전쟁』에서 말하는 왜란 극복 삼대 요소인 명나라 원군, 이순신, 의병과는 약간 다르기 하지만 크게 틀리지도 않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전쟁을 그쯤에서나마 끝마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백지원이 말한 앞의 세 가지 요소보다, 유성룡이 말한 대로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등용, 곽재우나 유정 등 의병의 활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기적절했던 죽음(이왕이면 더 일찍 죽었으면 좋았을지도), 명나라와 후금과의 전쟁이 한창때가 아니라서 조선에 원군을 파병할 여유가 있었다는 것 등 당시 조선의 국운이 아직 다한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왕 하늘의 도움을 바란다면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의 운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나라가 망하는 꼴은 면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일본강점기가 약 3백 년이나 앞당겨지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탄생조차 못 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의병 활동을 말하면서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 이름, ‘김덕룡’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몇 가지 의문점 중 하나가 『징비록』에서는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징비록』 제1권, 제7장 민중의 분기와 의병의 활동’에서 공로가 있는 전라도 의병장을 소개하는데 김천일, 고경명, 최경회 이렇게 세 명만 나온다. 그래서 ‘왜 김덕령은 징비록에서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나름대로 초보적인 추리를 해보았다.

‘이몽학의 난’에 가담한 세 사람

단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충청도에서 발생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 도중 사망했다. 이는 압수된 이몽학의 문서 중에 기록된 김 • 최 • 홍씨 성이 누구냐는 질문에 반란에 가담한 한현은 '김덕령 • 최담령 • 홍계남'이라고 대답했다는 것과 이몽학이 세를 모으려고 김덕령과 공모했다고 선전한 것도 김덕령이 역모로 몰린 증거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한현은 곽재우와 고언백도 모두 자신의 심복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만 역모죄로 몰려 국문을 받았다. 고언백은 1609년 사망하고, 곽재우는 1617년 사망했다. 홍계남은 네이버 지식 백과에도 사망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았다. 우선 선조 30년(1597) 1월 24일 2번째 기사를 보자.

상이 이르기를,
“경주는 누가 지키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권응수(權應銖)와 김태허(金太虛) • 홍계남(洪季男) 등이 부산 산성(釜山山城)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30년 1월 24일)

그렇다면 홍계남은 김덕령처럼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지만, 그 일로 죽음까지는 이른 것 같지는 않다. 같은 해 5월 3일 5번째 기사를 보자.

이조가 아뢰기를,
“홍계남(洪季男)에게 증직(贈職)하는 것이 옳은가의 여부를 비변사와 의논하여 아뢰라는 일이 판하(判下)되었기에, 비변사에 의논하였더니 ‘홍계남이 전후에 세운 전공은 참으로 많으나 이미 당상관(堂上官)으로 특진되었으니 증직까지 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듯하다. 해조(該曹)에서 별도로 부의(賻儀)를 내리도록 하고, 또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고향에서 장례하게 하며, 그의 노모에게는 음식물을 제급(題給)하고 처자에게는 3년 동안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의병이라 일컫고 단 한 번의 싸움에 패퇴하여 그 사졸을 몽땅 잃은 자에게도 재질(宰秩)을 추증하였는데, 계남으로 말하면 흉적들이 가득히 있을 때에 우뚝이 충청우도(忠淸右道)의 보루(堡壘)가 되어 반쪽의 하늘을 떠받쳤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로인가. 옛사람들은 전사한 장수들에게 대부분 그 직질을 추증하였으니, 짐의 뜻은 증직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30년 5월 3일)

증직은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이다. 고로 실록의 기록만을 보면 홍계남은 선조 30년 1월 24일에는 살아 있었지만, 같은 해 5월 3일에 ‘증직’이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는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한현의 입에서 나온 5명 중 김덕령과 최담령만 역모로 몰려 국문을 받았고, 곽재우, 홍계희, 고언백은 역모에 연류되지도 않았고, 천수를 다 누린 것 같다. 이 살아남은 세 명 중 『징비록』에서 공로가 있는 의병장을 소개할 때 곽재우, 홍계희는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최담령이다. 김덕령과 같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고 죽지 않고 사면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 가담자 중 기인 기질이 엿보였던 최담령

덕일 소장은 『유성룡: 설득과 통합의 리더』에서 김덕령과 같이 최담령도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자.

김덕령(金德齡) • 최담령(崔聃齡) • 홍계남(洪季男) • 곽재우(郭再祐) • 고언백(高彦伯) 등이 무인되었다. 그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杖殺)당하거나 옥사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몽학의 난」)

이번에는 실록의 기록을 보자. 김덕령이 수백 번의 형장 신문에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지는 와중에서 최담령을 천거하고 죽은 기록이다.

“ …… 다만, 신이 모집한 용사 최담령(崔聃齡) 등이 죄 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
라고 했을 뿐 시종 다른 말이 없이 죽었다.
(중략)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은 항상 그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게 되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최담령(崔聃齡) • 최강(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

이번에는 선조가 죽은 김덕령을 대신하여 그의 군사를 거느릴 장수에 별장 최담령을 지목하는 기록이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 그(김덕령)의 별장(別將) 최담령(崔聃齡)은 내가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말도 해보았는데 용기가 뛰어났고 계략(計略)도 없지 않았으며 또 글을 조금 아는 데다가 발호(拔扈)하는 기상도 없었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김덕령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싶다마는, 지극히 어려운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니, 마땅히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하여금 그 사람을 불러다가 대신 거느리게 할 만한 인물이 되는지를 참작해 보아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또한 그가 거느리던 부하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도가 될 것이니, 비변사(備邊司)에 이르라.” (『선조실록』 29년 8월 25일)

최담령 역시 홍계남처럼 사망 연도는 미상으로 남아있다. 최담령은 김덕령의 친구로서 김덕령이 천거했다. 실록에서 권율이 이런 최담령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 …… 또 김덕령(金德齡)이 천거한 최담령(崔聃齡)이란 자는 체구가 남보다 크고 또 영기(英氣)가 있으며 7식(息)이나 되는 길을 하루에 가니, 이는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인재입니다.” (『선조실록』 29년 3월 4일)

7식이면 210리(里)이니 약 84km인데, 이를 하루에 갈 정도면 엄청난 경공술의 소유자이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사람이 직접 소식을 전하던 그 당시에는 발이 빠른 능력은 엄청난 재능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전시라면 더더욱. 더불어 권율이 말하는 최담령은 조금 특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상이 이르기를,
“(최담령은) 문장에 능한가?”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담령의 측근에게 물으니, 담령은 평소에 옷소매 속에다 병서(兵書)를 넣고 다닌다고 하였는데, 정작 담령에게 물었더니, 담령은 ‘한 글자도 모른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에는 문자를 많이 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 중에는 자기 재주를 감추어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오직 등용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김덕령을 내가 한번 보고자 했으나 그는 먼저 내려갔다. …… ” (『선조실록』 29년 3월 4일)

김덕령은 형과 함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김덕령의 친구도 글을 어느 정도 알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글자를 아는데 모르는 척했거나, 반대로 글자를 모르는 데 병서를 가지고 다녔거나, 어찌 되었건 특이한 인물이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 이후에 실록에서는 최담령은 더는 등장하지 않는다. 실록을 보고 판단하자면 최담령은 김덕령처럼 고문을 받아서 사망하거나 옥중에서 사망하거나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선조는 ‘사람 중에는 자기 재주를 감추어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마음에 드는 인물을 잘 감싸고 돌다가도 한 번 삐치면 국물도 없는 변덕이 심한 임금이었다. 그러니 선조 밑에 있던 신하들은 꽤 고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성룡도 조정을 떠나야 했다.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추문에 시달린 김덕령

무튼, 최담령은 약간 특이한 기질이 있어 보였어도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김덕령은 달랐다.

잡아다가 국문하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특명으로 석방시켰다. 덕령은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매를 쳐서 죽게 하였는데 죽은 자는 바로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이었다. 근수가 남쪽 지방을 순시하는 도중에 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해 주도록 타일렀고 덕령은 이를 승낙하였는데 근수가 돌아가자 즉시 그를 죽였던 것이다. 근수는 그가 약속을 어긴 것이 미워서, 덕령은 신의가 없고 학살을 즐겨서 장수 재목이 되지 못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때 논의가 분분해서, 덕령은 살인을 부지기수로 많이 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결국, 덕령을 나국하였는데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자 상(上)은 특별히 방면할 것을 명하여 위로하고 달래어 보내고 또 전마(戰馬) 1필을 주었다. 상이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일렀다.
“당초에 덕령을 지나치게 추장하여 한신(韓信)이 다시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이제 보니 하나의 돌격 장령(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할 뿐 대장을 삼기엔 가합하지 않다.” (『선조수정실록』 29년 2월 1일)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김덕령을 둘러싸고 마찰이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두 건의 살인죄를 일으킨 원인을 보면, 하나는 첩보 전달을 지체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였다는 이유다. 전시에서 첩보 전달은 군 전체와 더불어 나라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 이런 첩보 전달에 문제를 발생시켰다면 군법으로 다스려 상황의 경중에 따라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전시에 탈영 역시 사형감이다. 그런데 정작 탈영한 병사가 아니라 그 아버지에게 불똥이 튀었는데, 이것은 연좌제를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 김덕령으로서는 두 사건 모두 나름 변명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탈영한 군사의 아버지가 윤근수의 노비였다는 점이다. 이때 윤근수는 좌찬성 자리에 있었고, 형 윤두수는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다. 이 두 형제는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봉되기도 한다. 유성룡도 2등에 책봉되었다. 즉, 일개 의병장이 권세 있는 집안의 노비를 잡아 죽였으니 당연히 뒤탈이 없을 리가 없다. 이에 김덕령은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해서 임금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또한 김덕령 나름대로 억울한 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권율이 말하는 김덕령

조가 권율에게 김덕령이 어떠한 사람인지 물었더니 권율은,

“덕령은 본래 광주(光州)의 교생(校生)으로 용력이 뛰어나 쓸 만한 인재입니다. 그러나 늘 군율(軍律)이 엄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여, 휘하 사람 중에 범죄자가 있으면 귀를 자르거나 혹은 곤장을 치기도 하므로 휘하 사람들이 점차 도망한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29년 2월 19일)

김덕령은 용맹스런 힘은 뛰어났지만, 부하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어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위 글을 보면 범죄자에 대해서다. 즉, 김덕령은 군기를 엄하게 잡았고 군법을 어기면 덕을 베풀기보다는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위의 살인 문제는,

“극악한 왜적이 아직 소멸되지 않아 혹시라도 적절히 대처할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우선 방면하여 그로 하여금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게 하고, 서서히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도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선조실록』 29년 1월 8일)

토사구팽당한 김덕령

렇게 선조의 명으로 그 당시에는 넘어갔지만, 문제는 이몽학의 난이다. 이때 김덕령은 무고로 죽은 것이다. 『난중잡록(亂中雜錄)』의 병신년(선조 29, 1599)의 기록을 보자.

(김덕령은) 국운이 불행하여 죄가 아닌데 죽였도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의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정유년의 적이 어찌 전라 • 충청도에 쳐들어올 수 있었으랴. 당시에 뜻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에 뒤떨어졌던 왜적이 듣고는 그 진위(眞僞)를 알고자 하여 원수에게 통지하여 충용장군을 보기를 요청하니, 원수는, “집에 돌아가 상(喪)을 마친다.”라고 답하였다. 그가 죽은 것을 자세히 알고는 모든 적추(賊酋)들이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고 날뛰며, 기운을 내기를, “전라ㆍ충청도에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 병신년)

김덕령이 죽자 백성은 걱정하고 반대로 일본군은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김덕령은 현종 2년(1661)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후에도 숙종 때 병조판서 등 추증은 계속 이어졌다. 이는 김덕령의 죽음이 무고였다는 증거이다. 진짜 죄가 있다면 이몽학, 정여립, 이괄의 경우처럼 신원 된다는 것은 꿈도 못 꾼다. 그렇다면 유성룡은 김덕령이 국문을 당할 때 김덕령을 유죄라고 생각했을까. 실록에 유성룡의 뜻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덕령이 순순히 체포되어 하옥되었는데 상이 직접 국문하였다. 이에 덕령은 사실대로 답변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유명해진 까닭에 이시언(李時言) 등의 시기를 받았으며 조정 또한 그의 날쌔고 사나움을 제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의심하였으므로 기회를 타서 그를 제거하려고 많은 사람이 그를 놓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상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 묻기를,
“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
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은 아뢰기를,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상이 도원수를 시켜 덕령이 출병할 적에 태도가 어떠했는지 물었으며, 또 그의 부하인 최담령(崔聃齡)과 최강(崔堈) 등에게도 물었는데 모두 단서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

김택룡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이 편찬했다. 서인들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한 것처럼 꾸며 유성룡이 왜란을 자초한 인물인 것처럼 만들어 깎아내렸다. 위에 기록에는 김덕령을 죽일만한 증거나 단서는 없었고, 김덕령이 갑자기 유명해져 시기를 받았다고 나온다. 아마도 그 시기의 중심에는 자신보다 인기가 높은 인물을 질투하는 선조가 있었을 것이다. 선조와 그를 따르는 위정자들은 전란이 위급할 땐 김덕령을 써먹을 때까지 써먹다가 전란이 조금 가라앉는가 싶더니 그새 자신들 자리를 보전할 생각이 급급한 나머지 김덕령을 토사구팽한 것이다.

김덕령은 역모를 꾸민 죄인이라고 확신한 유성룡

인이 편찬한 선조실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유성룡은 김덕령을 좋게 보지는 아니한 것 같다.

“역적들의 옥사는 종사에 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시일을 지체하거나 끌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상의 하교는 지당하십니다. 다만,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는 부득이 갖가지로 캐물어 기어코 실정을 얻어내야 하는 것으로 이것 또한 큰 옥사를 신중하게 다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큰 옥사를 추국할 때는 반드시 공초한 말에 드러난 것으로써 증거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역적들의 공초에는 단지 ‘김종사(金從事)’라고만 했으니, 가리킨 것은 반드시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욱(彦勖)과 응회(應會)가 다 같이 성이 김(金)이고 같은 족속(族屬)이므로 구분하여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난처하게 되었기에 이렇게 취품(取稟)합니다.
…… 대저 역적들의 입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이 잡다하게 나온 사람으로는 김덕령이 제일이니, 이렇게 드러난 것에 의거하여 먼저 김덕령을 추국하는 것도 안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반복해서 헤아려보고 의논해 보아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기에, 감히 성상께서 재량하시기를 품합니다. …… ” (『선조실록』 29년 8월 14일)

유성룡을 비롯한 대신들은 김덕령을 추국할 단서가 마땅하지 않아 고민했다. 이에 선조가 답했다.

“김덕령의 일은 이미 뭇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이를 고찰하여 엄하게 추국해야지 전혀 단서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번의 큰 옥사에서 물어볼 만한 수종인(隨從人)들을 먼저 추국해야 하는 이유는, 실정과 행적을 모조리 얻어내어 이를 증거로 삼아 괴수를 추국할 바탕을 만들고자 하는 까닭에서이다. 옛적에도 이와 같은 옥사는 그 집의 노복(奴僕)과 비첩(婢妾)들까지도 모두 심문했다. 어찌 단지 공초한 말에 드러난 것만을 증거로 삼겠는가. …… ” (『선조실록』 29년 8월 14일)

‘어찌 공초한 말에 드러난 것만을 증거로 삼겠는가.’라는 이 말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공초에서 나온 증거로는 김덕령을 처형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성룡도 김덕령이 역모에 가담한 증거로 제시한 것은 죄인들의 공초에 나왔다고 한 것뿐이었다.

“김덕령은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여러 역적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적부터 역적을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문서를 기다려 본 다음에야 다스렸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역적의 공초에 나왔는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상황이 이러하니 반드시 살게 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차차 따져 물어 실정을 얻어내야 합니다.” (『선조실록』 29년 8월 4일)

이때만 해도 유성룡과 선조는 죽이 잘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심이 강한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 유성룡을 미련없이 내친다.

유성룡은 김덕령은 역모를 꾸민 죄인이라고 확신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 증거는 단지 공초에 김덕령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확실히 ‘김덕령’ 세 글자가 죄인들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다. 『선조실록』 29년 8월 14일 기록의 “이번 역적들의 공초에는 단지 ‘김종사(金從事)’라고만 했으니”라는 대신의 말이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물적증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범죄자의 입에서 한 번 이름이 거론되면 그걸로 그 사람은 끝장이었다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의병장 중 김덕령만이 선조의 눈에 나다

런데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의병장은 김덕령뿐만이 아니었다.

그(한현)는 자백에서 많은 무리를 끌어들였는데 당시의 명장 김덕령 • 곽재우 • 고언백 • 홍계남 등이 연루되었다. 상은 모두 불문에 부칠 것을 명하고 김덕령만을 잡아올 것을 명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9년 7월 1일)

김덕령만이 선조에게 걸려들었다.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 이빈(李賓)이 그를 절제(節制)하는 장수였는데도 또한 죽이려고 했었다니 그 죄 역시 크다.” (『선조실록』 29년 8월 4일)

선조는 다시 예전의 일을 꺼내 김덕령을 내친 것이다. 한때는 김덕령에게 호피((狐皮)와 말[馬]까지 주었던 선조였다. 필요할 때는 무슨 짓을 해도 못 본 척 넘어가다가도 필요가 없어지면 토사구팽(兎死狗烹) 하는 것이 선조의 특기다. 유성룡, 이순신도 그렇게 선조에게 버려졌다. 김덕령이 윤근수의 노비를 죽인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이미 김덕령은 죽은 목숨이었다. 단지 그때는 아직 일본군이 남아 있었고, 선조입장에서는 장수 하나가 급한지라 어쩔 수 없이 넘어간 것이었는데, 이몽학의 난과 더불어 선조 29년(1956) 5월에는 강화를 위해 명 사신 양방형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갔었고, 8월에는 심유경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 황신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강화의 기미가 보이자 이제는 눈엣가시였던 김덕령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여기에 유성룡까지 합세하였으니 김덕령은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실록에 있는 사관의 평을 들어보자.

인품이 일을 만나면 과연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정성은 있으나 또한 치우치게 자기 소견만을 고집하는 일이 있고 또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비평이 있었으며,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에 대하여도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다. (『선조실록』 37년 8월 10일)

당시에도 유성룡이 김덕령을 구제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지역감정의 시작은 유성룡?

런데 유성룡이 지금처럼 지역감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에 대해 의심이 가는 대목이 있다.

“호남은 인심이 본디 나쁩니다. 토적이 봉기하여 혹 왜적에 붙거나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산골짜기에 꽉 차 있게 되면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 ( 『선조실록』 27년 6월 26일)

당시 양호(호남, 호서) 지역이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도에 비해 인구도 많았을 것이고, 부(富)도 집중되었을 것이다. 전라도의 음식문화와 풍류문화가 발달한 이유도 로마의 부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전라도에 대지주가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 또한 이것은 착취당하는 백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을 책임져야 할 임금과 대신들, 평소에 호화를 누리던 양반들은 다 도망을 가버리니 인심이 좋을 리가 있을까. 오죽했으면 왜군에 붙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일본군이 패전한 이유 중 하나가 곡창지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 조선이 전라도만은 일본에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그렇게나마 끝마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라도를 지킨 이순신과 의병장들의 업적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징비록』에서는 전라도에서 활약한 공이 있는 의병장으로 김천일(전라도 나주), 고경명(전라도 광주), 최경회(전라도 능주) 등 이렇게 세 인물을 들고 있다. 여기서 김천일은 퇴계 이황에게서 수학했고, 최경회는 김천일과 같이 선조 26년(1593) 6월 진주성을 지키다 전사했던 인물이다. 고경명은 선조 25년(1592)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고경명이 전사하고 나서 고경명의 휘하였던 문홍헌 등의 남은 병력은 다름 아닌 최경회가 수습하였다. 참고로 그 유명한 논개(論介)는 최경회의 후처였다.

마무리

상으로 이 정도 선에서 살펴보면 유성룡이 김덕령을 전라도에서 활약한 의병장에서 제외한 것은 평소 김덕령의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고 본 점(좋게 보면 군기를 엄격하게 다스렸다고 볼 수 있겠다)과 증거야 어찌 되었든 송유진, 이몽학 등의 역적들과 연루된 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징비록』에는 송유진, 이몽학의 난에 대해서도 한 마디 언급도 없다. 민란 발생의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정의 무능을 조금이라도 감추고 싶었을까? 『징비록』은 전쟁이 다 마무리되고, 유성룡 또한 조정에서 은퇴하고 지었던 점을 고려해보면 유성룡은 죽을 때까지 김덕령을 역적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비록 김덕령이 평소 언행이 난폭하기는 했다지만 전시에 권율과 곽재우를 도와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했던 커다란 공이 있었으니, 확실한 증거도 없이 역모로 몰려 전사(戰死)가 아닌 장살(仗殺)로 인생을 마치게 한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설령 과거의 살인을 저질렀던 죄가 있었더라도 그가 전장에서 세운 혁혁한 공적이라면 충분히 사면도 가능했으리라.

이 리뷰는 2012년 10월 13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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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6일 토요일

[책 리뷰] 교묘히 숨겨진 ‘행정적 밀실’의... ~ 살인방정식(아야츠지 유키토)

교묘히 숨겨진 ‘행정적 밀실’의 트릭을 풀어라

원제: 殺人方程式 切斷された死體の問題 by 綾辻行人

『살인방정식』은 <관 시리즈> 로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던 아야츠지 유키토의 초창기 작품 중 하나이다. 또한, 얼마 전에 읽고 후기를 작성했던 『어나더』 역시 그의 작품이기도 하다. 다만 『어나더』는 작가의 최근 작품이고 본격 추리물 적인 요소에 공포와 괴기적인 요소, 그리고 약간의 청춘물적인 요소도 혼합된 이색적인 작품이다.

『살인방정식』은 <관 시리즈>처럼 본격 추리소설이지만, 엄밀히 말해 보통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밀실이 배경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행정구역 경계선이 되는 사카이가와강을 사이에 두고 신흥 종교 교단의 본부 빌딩(S시)과 맨션(M시)이 주요 배경이듯이, 어느 곳으로도 꽉 막힌 완벽히 밀폐된 밀실은 아니지만, 행정적이면서 개방된 색다른 밀실 트릭으로 봐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제목 그대로 정말로 물리학에 대한 ‘방정식’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벌써 겁을 먹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그림까지 곁들인 자세한 설명도 나오니 말이다.

여기서 잠깐 작품의 초반 이야기를 보자.

6월 12일(일) 새벽 3시, 미타마가미쇼메이카이의 교주 기데나 미쓰코는 자택에서 남편 기데노 고조에게 넥타이로 목이 졸려 쓰려지고 13일 조간신문에 「JR 요코하마 선에서 중년 여성 투신자살」이라는 제목으로 12일 오전 5시경 도쿄도 M시 **초 JR 요코야마 선 사카이가와 철교 부근에서 당일 첫 하행 보통 열차에 중년 여성이 치여 사망했다는 보도가 실렸다. 곧 그 여성은 기데나 미쓰코로 밝혀졌다.

아내의 죽음으로 교단 경영에만 몰두했던 회장 고조는 교주의 정식 후계자로 지명되고 그 과정인 90일 동안의 '안거(安居)' 기간에 들어갔다. 이 기간에는 일체 외부인의 출입이나 교주의 외출도 금지된다. 하지만, 고조는 아내가 살아있을 때부터 사귀어온 애인 3명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교단의 홍보부장이고 죽은 교주에게 쫓기고 있다고 주장하는 38살의 유미오카 다세코, 부티크를 경영하는 28세의 사이토 미야, 주점을 경영하고 아직 입적이 안 된 고조의 3살 아들이 있는 35세의 하마자키 사치 등 이렇게 세 명이었다.

8월 15일 밤 10시 30분, 교단 본부 빌딩 펜트하우스에 고조와 함께 있던 미야는 정사가 끝나자마자 고조가 볼일이 있다는 말에 평소처럼 밤을 새우지 못하고 건물을 나와야 했다. 미아는 샤워하고 나가면서 교주가 전화를 받는 것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느껴졌다. 미야가 나가고 또 다른 애인 유미오카, 그리고 사치와 전화를 끝내고 나니 밤 11시 10분이었다. 고조는 책상 서랍에서 편지를 꺼냈다. 지난달 초 이 옥상에서 '안거'를 시작하기 전에 집으로 배달된 편지다. 발신인이 없는 그 편지에는 “다음은 네 차례다.”라고 적혀 있었다. 두 달 전 그날 밤, 고조는 미야의 집을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와 아내 미쓰코를 넥타이로 목을 졸라 죽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리고 미야의 맨션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째서 미쓰코의 시체가 사카이가와 강 철교 앞 선로 따위에 누워 있었던 걸까.

건물 수위 아사다 쓰네오는 자정에 교주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창문으로 뒤에 강 쪽에 수상한 사람이 보이니 한 번 가보라는 것이었지만, 막상 가서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 3층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사무국장 노노무라 시로가 남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자정을 5분 넘긴 시각, 노노무라가 화장실 문으로 가다 1층과 옥상에서만 서는 직통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 램프가 4에서 3으로. 그리고 1에서 멈췄다. 교단 건물 동쪽 강 건너 있는 레지던스 K의 603호에서는 죽은 교주 미쓰코의 아들 기데나 미쓰히코와 그의 애인 미사키 에미가 있었다. 0:30분 그놈에게서 온 전화에 미쓰히코는 분노했다. 아버지이지만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는 그놈. 바로 고조였다. 미쓰히코는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 그놈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그놈이 전화해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요코하마로 오라는 것이었다. 미쓰히코는 에미가 타 준 커피를 마시고 자신의 차인 파란 골프를 타고 출발했다.

기시모리 노리야는 레지던스 K의 201호실에서 혼자 사는 T 대학 경제학부 학생이다. 그는 한 달 전 술에 취해 심야의 귀갓길에 사람을 치어 죽였다. 그리고 그 시체를 근처 잡목림에 버렸다. 일주일 후 시체는 발견되었지만, 그에게 경찰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고 있을 때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든 걸 보았다는 그 사람. 그 이후 기시모리는 자신의 의사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자유를 잃어버렸다. 목격자는 금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지금 새벽 2시 10분에 그의 전화가 왔다.

건물 현관문에서 조금 떨어진 길에 한 대의 검은 마크 II가 다섯 시간 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맨션 쪽을 살피는 두 남자가 있었다. 어느 정보에 의해 잠복 중인 두 남자. 두 사람이 잠복을 시작하고 나서 문을 출입한 것은 대학생 같은 청년이 운전한 파란 폴크스바겐 골프와 그 바로 뒤에 나간 젊은 여성이 운전한 빨간 스탈렛뿐이었다.

8월 16일(화) 오전 6시 10분, 도쿄도 M시 **초 82-2, 맨션 ‘레지던스 K’의 옥상에서 타살된 남성의 시체 발견되었다. 발견자는 동 맨션 관리인 모로구치 쇼헤이이다. 경시청 형사부 수사 제1과의 젊은 형사 아스카이 교와 그의 동료 M서 형사1과에 근무하는 오제키 히로유키가 긴급 연락을 받고 레지던스 K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 20분쯤이었다. 건물 앞에는 검은 마크 II가 있었다. 그 안의 인물은 두 형사에게 낯선 인물이었다. 건물을 지키고 있던 정복 경찰관은 다른 사건 때문에 잠복 중인 공안이라고 말했다.

카롤라를 주차하고 주차장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문은 자동 잠금 시스템에 의해 잠겨져 있었다. 현관 로비를 빠져나와 안의 엘리베이터와 계단 앞에는 다시 자동 잠금 유리문이 있었다. 옥상에는 요시노 게이스케라는 M서 형사가 발견자인 모로구티 쇼헤이라는 맨션 관리를 맡은 노인과 같이 있었다. 요시노는 그렇게 완벽한 신원 불명 시체는 없을 거라 말하며 밋밋한 동안을 찌푸렸다. 옥상 동쪽 끝 급수탑 옆에 머리가 없는 알몸의 남자 시체를 보고 교 형사는 무심코 비명을 질렀다. 처음 보는 머리 없는 시체다. 담배를 끊은 것 같았던 오제키 형사는 담배를 찾으러 내려갔다. 교 형사는 목이 없다는 충격에 주의를 빼앗겨 왼쪽 팔이 없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교 형사는 현의 경계인 강 건너 S시 4층 건물을 보았다. 이쪽보다 지면이 높아서 옥상 높이는 딱 이 맨션과 같은 정도다. 옥상에는 지름 10미터 정도의 흰 반구형 건축물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강 쪽의 벽은 창문은 없고 만다라라는 기묘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2층 복도 창문, 건물 북쪽, 맨션의 뒤뜰과 마주한 위치에 흰 봉지 안에서 머리가 발견되었다. 발견자는 201호실의 기시모리. 교 형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기시모리의 화장실에서 아침을 전부 쏟아냈다. 지난 6월 미쓰코 투신사건을 맡았던 오제키 형사는 머리를 알아보고 펜트하우스 직통 전화번호로 걸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오전 8시 반. 교 형사는 오제키 형사와 함께 본부 빌딩으로 향했다.

렇게 고조의 머리와 왼쪽 팔이 잘려나간 시체로 본격적인 사건은 시작된다. 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하는 사람은 전혀 형사가 적성에 맞지 않은 교 형사가 아니고 다분히 괴짜 기질이 있는 그의 형이다. 교 형사의 형은 철학과를 6년째 다니는 괴짜에 헤비메탈다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역시 추리소설의 명탐정들은 결코 평범한 법이 없는 것이 진리인가 보다. 이 두 형제와 교 형사의 아내 미유키, 이렇게 셋이서 교 형사의 집에서 홍차를 마시며 밤늦은 담소를 나누는 ‘아스카이 가(家)의 수사회의’가 이 작품의 추리 에너지이다.

다다 상관에게 늘 구박받는 어설픈 형사인 교는 아내 미유키 때문에 형사가 된 인물로 어찌 보면 현장수사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는 인물일 수도 있다. 초등학교 때 젊은 경시청 형사의 도움으로 인질에서 구출된 이후 경시청 형사와의 결혼이 꿈이었던 미유키는 교 형사의 망원경으로 별을 바라보는 꿈을 버리게 하였다. 교 형사는 채식주의자가 되어 버릴 정도로 시체와는 영 친하지 못해,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형사 중 가장 비위가 약한 형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아내 미유키는 언제나 태연스럽게 “순직은 각오하고 있어.”라고 말하니 이 두 부부의 미래가 자못 궁금해진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살인방정식』은 본격 추리물답게 단서는 곳곳에 숨어 있다. 특히 그 단서 중에서 살인 동기를 파악하는 것이 추리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고조의 시체가 건물 옥상에 있게 만든 트릭은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작품 앞 장에 나오는 「프롤로그(3) 범죄 계획」에 나오는 범행 도구들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고등학교 때 물리 공부를 성실하게 수행한 독자라면 더욱 쉽게 트릭을 파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살인 동기와 사카이가와강을 경계로 하는 S시와 M시.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힌트라면 힌트다. 특히 살인 동기는 『살인방정식』 등장인물 대다수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추리에 혼란을 가져오는 가장 큰 원인이다. 세심하게 잘 살펴보면 분명히 답이 보일 거로 생각한다. 바로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머리를 굴려 범인을 찾는 것이 본격 추리물의, 오직 본격 추리소설에만 있는 가장 큰 재미 아니겠는가.

훌륭한 본격 추리물 작품에 한 번 손을 대면, 쉽게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작가와 독자의 정직한 대결은 (그러나 결코 쉽게 보면 안 된다. 어느 곳에나 함정은 숨어 있다) 독자의 지적 기대감과 흥분을 일으키고 뒤탈 없이 깔끔한 만족을 준다. 이렇게 얻은 만족감과 쾌감은 독자를 바로 다음 작품 물색에 돌입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런 본격 추리물 작가로서 누가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 아리스가와 아리스, 시마다 소지, 우타노 쇼고 등등 이외에도 많은 작가가 있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작가는 이 정도뿐이다. 여기에 ‘본격 추리물’, ‘독자와의 대결’의 원조인 앨러리 퀸이 있다.

이 리뷰는 2012년 10월 0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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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책 리뷰] 조상의 삶을 아우르는 이야기들의 성채 ~ 청구야담(이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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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삶을 아우르는 이야기들의 성채

원제: 靑邱野談 작가 미상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반납한 『어우야담』

서관에서 처음으로 책을 빌려보기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대출한 책을 몇 장 펼쳐 읽지도 않고 반납했던 책이 있었다. 바로 야담집인 『어우야담(於于野譚)』이었다. 그때는 어떤 책을 읽어야겠다거나 어떤 장르의 책이 내 관심에 맞는다거나, 혹은 어떤 책을 읽고 싶다거나 하는 개념이 아직 확실하게 서지 않았었고, 그저 두껍고 오래된 책이면 다 좋은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대출하기 전에 내용을 한 번 흩어보지도 않고 그저 두께에 현혹되어 책을 빌렸으나, 『어우야담』의 두터운 책장을 넘기기에는 그 당시 나의 수준이나 호기심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던 것 같다. 도서관에서 지금까지 대출했던 권수가 어느덧 700권이 되어가고 있지만, 『어우야담』만이 유일하게 빌려놓고 읽지 못했던 책으로 옥에 티로 남아있다. 그 이후에는 교과서보다 더 지루하고 어려운 책들도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보게 되었으니, 『어우야담』이 약이 되었었나 보다.

한 번 실패한 전례 때문인지 한동안 야담집에는 손을 못 대고 있다가 그동안 조선시대 관련 책도 좀 보았기에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그리고 예전보다 더욱 진지해진 호기심과 지적 욕구도 일발 보태어 『청구야담』을 선택했다. 『청구야담』은 우리나라 최고의 야담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3대 야담집으로 『청구야담(靑邱野談)』과 더불어 『계서야담(溪西野談)』『동야휘집(東野彙輯)』이 있다.

야담이란?

렇다면 야담(野談)이란 뭘까. 그 뜻을 위키백과에서 찾아보았다.

야담(野談)은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흥미 있게 꾸민 이야기로 문학 장르로는 수필에 포함된다. 18세기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 20세기 전반 한국 사회에 유행했던 대중문화다. 일제강점기 20세기 초 야담운동으로 강당, 무대에서 구연하게 되고, 라디오가 전래되면서 대중오락으로 인기를 끌다가 1930년대 중반 이후 현대 소설의 발달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http://ko.wikipedia.org/)

여기서 야사(野史)는 민간(民間)에서 사사로이 기록한 역사를 말한다. 추가로 위키백과에서 야담집의 효시는 앞서 언급했던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환상적인 이야기까지

『청구야담』에는 수많은 다양한 주제의 야담들이 짧은 이야기로써 182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유명한 역사적 실존인물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혹은 조연으로 다수 등장하기도 한다. 유성룡, 김천일, 조태억, 박문수, 이경류, 한석봉, 이지광, 양녕대군, 정태화, 홍순언, 허적, 김석주, 이준경, 김여물, 이항복 등 이외에도 다수 있다. 나머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민간에서 전해지는 야사답게 김 아무개, 심생, 박공 등 대중없다.

다양한 등장인물만큼이나 이야기의 주제도 다양하다. 권선징악과 충효(忠孝), 보은(報恩), 그리고 여인의 정조나 수절을 강조한 이야기가 많았고, 그 외에도 기이한 인물들의 기행이나 귀신, 속임수나 기타 다양한 꾀를 내어 위기를 넘기거나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하고, 또는 은혜를 베풀기도 한 이야기, 남녀 간의 사랑,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현달한 선비, 꿈, 현명했던 부인들 등 실화처럼 여겨질 법한 이야기부터 꿈이나 영화에서나 볼 듯한 환상적인 이야기까지 가지각색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내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박서와 이완이다. 이 인물들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효종 2년(1651) 8월에 병조판서에 임명된 박서와 효종 4년(1653) 10월 훈련대장으로 임명된 이완은 효종의 북벌에 실질적으로 협력한 인물이었다는 점이 얼마 전에 읽었던 책들과 관련해서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특히 이완은 두 차례나 병조판서 임명을 거절하고 훈련도감을 없애자는 논의가 있었을 때에도 반대하면서 끝내 훈련도감을 지킨 지조 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청구야담』을 읽고 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데로 적은 지극한 사론일 뿐이니 너무 유념할 것은 없다.

마치면서

담집에 들어 있는 나무 반 토막도 안 되는 짧은 이야기 하나로는 많은 감동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작디작은 반 토막들이 모여서 거대한 성채를 이루었을 때 과연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을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청구야담』의 묘미는 작은 이야기들의 집합체인 거대한 이야기 성채를 들여다보면서, 우리 조상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꿈꾸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즉 한 그루의 나무보다 그런 나무들 모여 이루어진 그 숲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참고로, 요즘 (2012년)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조선시대 밀양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의 뿌리가 되는 이야기도 이 야담집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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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8일 토요일

[책 리뷰] 유교적 이상주의 사회가 그려낸 판타지 ~ 창선감의록(작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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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이상주의 사회가 그려낸 판타지

『홍루몽』과 비교되는 『창선감의록』

서관에서 뭐 색다른 것 없나 하고 살펴보다 오래간만에 한국 고전소설로 눈길을 돌려보았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나온 「한국고전문학전집」 중 ‘가장 많은 필사본으로 읽혔던 당대 최고의 인기소설’이라는 뒷면 표지 문구가 눈에 띄어 선택한 작품인 바로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 『창선감의록』은 아직도 작자가 누구인지, 또 창작 시기는 언제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베일에 싸인 작품이다. 다만, 창작 시기는 조선 후기 정도에 만들어진 작품인 것으로 짐작하는 것 같다.

문학이 일찍 발달해 작품 다수가 고전으로 전해져오는 유럽과는 달리 문학을 그리 권장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소설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하기에 『창선감의록』은 더욱 소중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중국 근대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홍루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래도 작품 길이가 훨씬 길고 등장인물만 500명이 된다는 『홍루몽』이 『창선감의록』보다는 훨씬 이야기 규모도 크고, 『창선감의록』에서는 별로 강조되지 않는 남녀 간의 사랑이나 질투 등 더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등장한다.

『창선감의록』이 중국소설 『홍루몽(紅樓夢)』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창선감의록』이 『홍루몽』을 모방해서 창작되었는지는 글쎄다. 두 작품의 창작시기도 비슷한 것 같고,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 가문의 장자가 아닌 차자(次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과 역시 그 차자가 출세해서 공적을 쌓아 가문의 부흥을 이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가보옥에게 임대옥과 설보채, 화진에게는 남채봉과 윤옥화 등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두 명의 미녀가 관계된다는 점 역시 같다.

그러나 (『홍루몽』은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각 작품의 주인공인 가보옥과 화진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가보옥은 많은 누나와 가문의 부귀공명에 둘러싸여 자라면서 학문을 등한시하고 풍류를 즐기는 한량이었다가 후에 집안의 몰락을 보고 출세를 결심하는 인물이고, 화진은 작품의 시작부터 부모에 대한 효와 형에 대한 우애, 그리고 공부에 대한 집념이 대단한 인물이다. 비록 두 작품에서 다른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점이 상당한 부분 존재하는 것과 조선시대가 중국의 문화적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고려해보면 『창선감의록』은 『홍루몽』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담고 탄생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선감의록』을 읽고 고전의 매력에 더욱 빠지고 싶은 독자에게는 『홍루몽』을 보면서,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역사와 허구를 절묘하게 조합한 시대소설

『창선감의록』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명나라 세종(世宗: 재위 1521~1567)이다. 이 시기 명나라의 역사적 중요 인물로는 엄숭(严嵩)이 있는데, 작품 속에서도 그 역사의 이미지 그대로 등장한다. 또한, 주인공 화진의 조상은 역시 실존 인물인 명나라 개국공신인 화운장군의 후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렇게 『창선감의록』은 실존 인물들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 역사와 허구를 절묘하게 조합해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인물의 등장뿐만 아니라 작품 속 인물들이 돌아다니거나 거주하는 장소나 지리까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효와 형제애가 강하고 총명하고 어진 화진이 심술궂은 어머니 심씨와 나약하고 어리석은 형 화춘, 그리고 화춘의 첩 음탕한 조씨와 화춘의 악독하고 방탕한 두 친구 범한과 장편이 온갖 음모로 화진과 그의 두 아내를 괴롭히지만,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 효행과 공적으로 허물어져 가는 화씨 가문과 나라를 다시 살리고 현명하고 예쁜 두 아내와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라고도 간단하게 말할 수도 있겠으나, 실제 사건의 흐름은 고전소설치고는 매우 복잡하다. 특히 인물 관계가 그러한데, 단순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펼쳤다가는 조금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친절하게 옮긴이는 책 앞장에서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등장인물 관계도까지 그려주고 있다.

유교적인 도가 실현된 이상사회, 그리고 ‘신민(新民)’과 ‘친민(親民)’

『창선감의록』은 다양한 창작 기법을 사용하는 근대나 현대의 소설과는 달리 작품이 말해주는 확고한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바로 충효(忠孝)를 행하는 사람은 복(福)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권선징악적인 유교 이념이 확실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유교적인 도가 실현된 이상사회를 완성하려는 작가의 의지에도 작품에는 당시 유학자들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화진이 처남 윤여옥의 꾀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져 성도로 유배를 가다가 만난 장수 유성희와 며칠을 같이 지내다 유성희가 화진과 헤어지면서 건넨 말을 보자.

“송나라 때 정이(程颐)는 촉 땅으로 좌천되었을 때 『이천역전(伊川易傳)』을 저술하여 주역의 이치를 크게 밝혔습니다. 장준(張俊: 금나라와 싸워 중원 회복을 도모했던 재상)과 범진(范鎭: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했던 북송의 신하)도 모두 촉 출신으로 남송 조정의 훌륭한 신하가 되었습니다. 선생께서도 촉 땅에 머무르신 일이 좋은 결과를 맺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우선 정이는 조선후기 신흥종교인 주자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학(大學)』이 원래 『예기(禮記)』의 42편이었을 때는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과 친한 데 있으며(在親民) 지극한 선에 지(止)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 善)."였다.
이렇게 원래 ‘백성과 친하다(親民).’로 되어 있던 원문을 정이, 정호 형제와 주희가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은 『전습록(傳習錄)』 「서애록(徐愛錄)」에서 주자학자들이 친민(親民)을 마음대로 신민(新民)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윤휴도 신민이 아니라 친민이 바르다고 생각했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신민(新民) 친민(親民)의 차이는 매우 크다. 역시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 나오는 윤휴의 말을 들어보자.

“친(親) 자를 정자(程子: 정호·정이 형제를 높여 부르는 말)는 마땅히 신(新) 자여야 한다고 했다. 민(民)은 자기 자신 이외의 천하를 말한다. 어진이(仁人)의 마음이란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자기가 영달하고 싶으면 남을 영달 하게 해주는 것이다. 신(新)은 잘못된 옛 습관을 고치고 선한 쪽으로 가게 하여 제각기 자기 밝은 덕을 밝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공자가 ‘자기 몸을 닦고(修己)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고 말한 것과 맹자가 이른바 ‘사람들 모두가 제각기 자기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모신다면(親其親長其長)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그 말이다. 혹자는,‘대인의 길은(大人之道) 어버이를 섬기고 백성을 사랑하는(親親而仁民) 것으로서 중국을 한 사람으로 여기고, 사해를 한 가정으로 여기기 때문에 친(親)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학독서기』)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위의 책에서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 소장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이의 학통을 이었다는 김장생과 그 이후 서인들은 이이의 개혁정신을 엿 바꿔 먹고, 오로지 예(禮)만을 강조한다. 서인들은 왜란 이후 야기된 백성의 신분상승 욕구를 신분제 제도의 강화와 철저한 통제를 통한 보수적이고 반개혁적인 방법으로 억압하려고 했다. 그래서 예송논쟁에 그렇게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송시열에 의해서 다져지고 완성되어 결국 주자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神)이 되었고 주자학은 종교가 되어 조선시대 후기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안석은 중국 송(宋)나라 때 신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개혁적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정치 사상가다. 백성을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본 정이의 업적을 높이 사고, 왕안석의 개혁을 반대했던 인물을 훌륭한 신하라고 하는 걸 보면 『창선감의록』의 저자가 누구였든 간에 백성을 위한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는, 송시열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시대’하면 떠오르는 그렇고 그런 고리타분한 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창작 연도로 짐작되는 조선시대 후기는 신분제 사회가 점차 무너져가는 격동의 시기였으니 이런 소설을 통해서나마 백성을 ‘신민(新民)’시켜 신분제 붕괴를 막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판타지적인 양념으로 고전이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

렇다고 작품의 전개가 경전처럼 딱딱한 것은 절대 아니다. 보통의 동양고전처럼 신선도 등장하고, 선녀도 등장하며, 죽은 사람도 살리는 마법의 묘약이나 예언적인 요소도 많이 나온다. 특히 조선시대 억압되었던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전생의 업보라든가 부처님께 공덕을 쌓으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화진의 두 부인 윤옥화와 남채봉이 화진의 집에서 시집살이하며 화춘의 첩 조씨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해 윤옥화가 흐느끼며 억울해하자, 남채봉이 윤옥화를 달래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자.

“언니의 바다같이 넓은 마음으로 어찌 이런 작은 일을 못 참나요? 우리가 이 집안에 들어온 것은 그냥 불가에서 말하는 전생의 업보 때문이에요. 숙명대로 있다가 운수가 다하면 떠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어사 부부가 청원스님 덕분에 10년 만에 딸 남채봉을 만나고 부부가 청원스님을 향해 거듭 감사들 드리자 청원스님이 사양하며 하는 말이다.

“두 부인께서 부처님께 공덕을 많이 쌓으셨기에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냥 관음보살님의 자비로운 뜻을 받들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제 덕택이라고 할 수 있나요?”

남어사 부인은 남채봉이 어렸을 때 청원스님에게 그림을 보시해 이렇게 부처님의 자비를 받은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그 시대에는 지나쳤다는 감이 있을 정도로 강조되었던 충효가 다시 시대를 돌고 돌아 지금에서는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그저 유행은 돌고 돈다는 속설이 우연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일까. 지나침은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부족함 역시 살펴야 할 부분이다. 과거에는 충과 효가 지나치게 강조되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나 부족하다. 아무튼, 이 작품을 읽고 동양의 고전문학에 흥미가 발동한 독자는 『홍루몽』, 『구운몽』 등도 곁들이면 안성맞춤일 것이다.

이 리뷰는 2012년 09월 0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약간의 수정을 거친 다음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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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일 토요일

[책 리뷰] 시대의 금기, 시대의 이단아 ~ 윤휴와 침묵의 제국(이덕일)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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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금기, 시대의 이단아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p9)

시대의 금기로 남은 이름, ‘윤휴’

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 이어 굳이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고 할 것 같지는 없지만, 내 나름의 이유는 있다. 물론 괜찮은 대중 역사서인 이덕일 소장의 책이라는 단순한 이유도 있었지만,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홀로 안다는 말이냐!"라며 (당시로써는) 도도하게 외치며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다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려, 즉 중세 마녀사냥처럼 이단으로 찍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개혁 정치가가 바로 윤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현실의 부조리와 부패의 썩은 부위를 바로 보고, 또한 과감히 메스를 들이대며 외과 수술을 시도하려는 개혁가나 혁명가를 사랑한다.윤휴의 비참한 죽음은 조선시대 당쟁에 관련된 책을 볼 때면 자주 접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런 책들은 다루는 범위가 넓다 보니 윤휴의 죽음 정도만 다루고 그 배경이나 사상적인 면은 생략하거나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갔기에 이 기회를 빌려 윤휴와 송시열과의 반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다.

윤휴는 송시열과는 달리 시종일관 실제적인 북벌을 외치고, 그 북벌을 위해 신분제 타파 등 대개혁을 주장하다가 서인과 숙종에 의한 음모에 휩쓸려 사사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인들은 윤휴가 어떤 말을 남길지 두려워 유언까지 금했다. 남인의 영수 허목이나 허적에게서조차 지지를 받지 못한 채 홀로 서인과 숙종에 당당히 맞서 북벌대의와 대개혁을 주장하고 이것을 자신의 생애 업으로 삼았던 인물이 바로 윤휴다. 진짜로 북벌대의를 주창했기에 그의 이름은 금기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북벌의 영광은 송시열이 차지했다.

서인과 노론에 의해 윤휴와 송시열, 두 이름 다 시대의 금기로 남았다. 하지만, 그 금기의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송시열에 대한 금기는 ‘감히 성인을 비난하려 하다니’라고 한다면, 윤휴에 대한 금기는 ‘감히 사문난적의 이름을 들먹이다니’라고 해도 무리일 것 같지는 않다. 윤휴에 대한 금기의 실체로 『윤휴와 침묵의 제국』 서문에는 믿기지 않는 얘기가 실려 있다. 어느 기자가 윤휴의 후손을 찾아갔는데, "여주에 사는 후손이 아직도 윤휴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라며 회고했다고 한다. 1990년대 말의 상황이었다. 그때 이후 10년 이상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3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윤휴에 대한 침묵에서 10년이란 시간은 큰 변화를 가지고 오기엔 그리 긴 것 같지는 않다.

송시열에 버금가는 학덕과 명망을 갖추었던 윤휴

난번에는 송시열을 만났으므로 이번에는 그 당시 유일하게 송시열에 버금가는 학덕과 명망을 갖추었던 윤휴를 우리는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고, 윤휴가 외친 북벌대의와 그 북벌대의를 위한 대개혁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역사책을 좀 보는 독자라면, 이 책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그런 책이다. 무조건 이덕일 소장과 윤휴가 옳다는 건 아니다. 윤휴에 대해 말하려는 책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단순하게 교보문고 홈페이지에서 ‘윤휴’와 ‘송시열’이란 단어로 검색해 봤다(2012년). 각각 3건, 17건의 검색 결과가 나왔다. 양란 이후 각종 폐단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 대개혁을 외쳤던, 그 시대에 유일하게 깬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 것이 현실이다. 교과서에는 뭐라고 나올지 안 봐도 대충 감이 잡힌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대의소(大義疏)」

휴는 송시열보다 10살 어렸다. 둘은 윤휴의 보은 삼사 외가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항복 후 송시열은 낙향하는 도중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인 복천사에 들려 윤휴를 만났다. 송시열에게서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은 윤휴는 송시열의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후로는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좋은 때를 만나 벼슬을 하더라도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p66)

먼 훗날 윤휴는 이 날 맹약을 한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리면서 친구들에게 무수한 절교장을 받는다. 그리고 숙종과 송시열이 배후에 있던 서인들의 공작 정치에 휘말려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니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맞긴 맞는가 보다.

윤휴는 현종 15년(1674) 7월 초하루에 아직 벼슬길에 한 번도 나가지 않은 만 57세 나이로 현종에게 밀소를 올렸다. 그것이 「대의소(大義疏)」였다. '큰 의리(북벌)가 담긴 상소'라는 뜻이었다.

오호라! 병자, 정축년의 일은 하늘이 우리를 돌봐주지 않아서 금수가 사람을 핍박해 우리를 회계산(會稽山: 월왕 구천이 오왕부차 에게 패전한 산. 여기서는 남한산성)의 치욕을 주고 청성(靑城: 삼전도)의 재앙을 주었으며, 우리 백성을 도륙하고 우리 의관(衣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당시 우리 선왕께서는 종사를 위해 한 번 죽음을 참으시고 만백성을 위해 수치심을 버렸습니다. 피를 흘리며 울음을 삼키고 수치를 머금고 마음을 어루만지셨습니다. (p47)
추악한 무리가 도둑질한 지 오래되어 중국의 원망과 분노가 일어나서 오삼계는 서쪽에서 일어나고 공유덕(孔有德)은 남쪽에서 연합하고 달단(몽골)은 북쪽에서 엿보고 정경(鄭經, 대만의 왕)은 동쪽에서 노리고 있으니 (……)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습니다. (p47)
우리나라의 정예 군사와 강한 화살(勁矢)은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여기에 화포와 조총까지 곁들이면 진격하기 충분합니다. 병사 1만 대(隊)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燕山: 북경)으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면서 바닷길을 터 정경과 약조를 맺고 함께 병립하면서 그 중심부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p49)
우리는 의려(醫閭: 중국 요녕성 북진에 있는 산. 의무려산)에 가로질러 웅거하고서 유주(幽州: 북경)와 심양을 압박하면서 천하에 명을 청한다면 제실(帝室)을 위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이나 진 (晉)나라 문공(文公)이 될 수 있습니다. (『현종실록』 15년 7월 1일, 『백호전서』 부록 행장 상(上)) (p49)

윤휴가 대의소를 올리기 약 7개월 전에 청 강희제 13년(1673)에 평서왕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다. 효종이 재위 10년(1659) 3월에 가졌던 송시열과의 독대에서 말한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때 조선이 오삼계와 대만의 정성공, 그리고 일본과 연합했더라면 역사는 다시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윤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춘추시대 첫 번째 패왕이었던 제나라 환공과 관중을 언급하며 그 연합군을 조선이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현종은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예송논쟁을 남인의 승리로 결말일 짓고, 영의정에 허적을 임명했다. 이렇게 현종이 의욕적으로 남인 정권을 세우려는 찰나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리고 숙종이 즉위했다.

출사를 사양하다

종은 윤휴를 거듭 불렀지만, 윤휴는 매번 사양했다. 그러면서 지난 7월의 밀소에 신왕에게 당부하는 내용을 추가해 작은 책자로 만들어 올렸다.

전하께서 옛날 진(晉) 양공(襄公)이 검은 상복을 입고 전쟁에 나아간 의리를 생각하시고 한(漢) 패공(沛公)이 의제(義帝)를 위하여 상복을 입은 일을 따르시어 (……) 죄악을 치는 군사를 일으켜 천하의 잔인한 오랑캐를 제거하시고 (……) 선왕조(先王朝)의 오래된 울분을 풀으시어 백성을 복되게 하시고 우리 조종(祖宗)에 광영이 있게 하신다면 오늘날 신민(臣民)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세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p139)
더구나 관문을 봉쇄하고 약속을 끊더라도 우리로서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자기 나라에서 전쟁을 치르게 자초하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가장 나쁜 계책으로서 경계해야 하고 시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p139)
신은 또 생각건대 지금 천하에 인민과 사직 및 험고한 산천을 소유하고 군병 및 형세를 지니고 있어 저 오랑캐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현재 오삼계(嗚三桂),정금(鄭錦)이 이미 군사를 일으켜 중국이 양쪽으로 갈라졌는데 우리가 발을 어느 쪽으로 옮기느냐에 따라 저들의 존망에 영향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보살펴 주고 천하의 인민이 기대하는 것이 우리 전하 말고 누구이겠습니까. (p140)

현종은 북벌 상소에 아무런 비답을 하지 않았지만, 숙종은 답했다. "상상의 내용은 이미 보았다. 속히 나와 직무를 수행하라." 그러나 윤휴는 아직 출사하지 않았다.

북벌대의를 위해 정치 무대에 나서다

인 허적과 서인 김석주의 연립 정권이 들어선 숙종 초 윤휴는 숙종 즉위년(1674) 12월 1일 다시 상소와 밀봉한 책자를 올렸다. 북벌의 방책을 보다 자세하게 담은 책자였다. 숙종이 윤휴의 책자를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에 허적은 받지 않으면 더욱 번거롭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으나, 권대운은 "형세(形勢)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자는 매우 옳지 아니합니다.”라고 윤휴를 비난했다. 그래서 윤휴는 북벌대의 실천을 위해 직접 정치 무대에 나서기로 했다. 숙종 1년(1675) 1월 9일의 일이었다.

윤휴는 성균관 정4품 사업(司業)의 자격으로 조정에 처음 들어갔다. 경연에서 옥당관(玉堂官: 홍문관원)을 불러 『강목(綱目)』을 강독하는 날, 만 14세의 소년 군주 숙종과 만 58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온 윤휴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날의 강연은 주제는 당연히 북벌이었다. 하지만, 숙종은 북벌에 관해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피했다. 다음날 주강에서도 강론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날의 기록을 담은 『숙종실록』은 윤휴의 무강거(武剛車) 사용 주장에 대해 김석주가 반대한 것이 주된 내용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백호연보』에는,

김석주도 절하고 아뢰었다.
“윤휴의 상소는 단지 내용이 강개(慷慨)할 뿐만 아니라 그 말 이 실로 의리에 지당한 것인데,신이 어떻게 그 내용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승지들이 모두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 수백 년 이래에 한 번도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p156)

라고 매우 고무적인 분위기로 기록하고 있다.

죽음을 부른 삼복 제거 사건’의 시작

종 1년(1675)년 3월 12일, 숙종이 허적과 오정위를 만나 외조부인 청풍(淸風) 부원군 김우명의 차자(前子)를 보여준 것이, 나중에 윤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서인들이 조작한 구실 중 하나가 되는 ‘조관(照管)’이라는 단어를 윤휴가 사용하게 되는, 이른바 ‘삼복 제거 사건’이 시작이었다. 차자는 삼복 형제를 맹비난하는 상소였다.

“또 복평군 이연(李極) 형제는 효종께서 친아들과 같이 생각하셨고, 선조(先朝: 현종)께서도 동기와 같은 은혜를 베푸신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은총이 융숭하자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점점 게을러터지고,금중(禁中: 대궐)에 출입하면서 추악한 소문이 밖에까지 들렸는데, 이것이 곧 선왕께서 깊이 근심하신 것이고, 자성께서 처치하기 어려워하신 것입니다……." 『숙종실록』 1년 3월 12일 (p171)

김석주는 권력 극대화를 위해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삼복(三福,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형제를 죽이고자 이 사건을 조작했다. 복평군 형제가 궁녀들을 임신시켰다는 주장까지 돌았다. 그러나 사건 관련 당사자들인 나인들과 복평군 형제들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낳았다는 자식도 못 찾았다. 숙종조차 삼복에 대한 공작 정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의 말을 믿고 골육의 지친(至親)을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서 광을 파고들어가고 싶으나 그럴 수 없다. 이렇게 억울하고 애매한 사람을 잠시도 옥에 잡아둘 수 없으니 모두 석방하도록 하라.” 『숙종실록』 1년 3월 13일 (p175)

삼복 사건이 무고로 돌아간다면 당시 법에 따라 김우명은 반좌율에 걸려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3월 13일 밤, 숙종이 김우명을 불러들이고 기다리고 있을 때, 김우명은 안 나타나고 숙종의 모후이자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가 울부짖으면서 나타나 삼복 사건에 간섭한다. 명성왕후가 억지를 부린 것이 효과를 발휘해 김우명이 유배를 가기는커녕 복창군, 복평군 형제와 삼복 사건에서 거론된 김상업과 귀례가 정배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 날 윤휴는 자리에 없었지만, 나중에 사연을 듣고 숙종에게 따져 물었다.

"듣건대 자성께서 나오시고 여러 신하가 입시하였다 합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조정은 예법이 있는 곳이므로 임금의 거조(擧措: 행동)는 여러 신하가 우러르는 바이고,후세의 법이 됩니다. 자성께서 직접 나오시고자 하시면 먼저 조정에 하교해야 하는데 여러 신하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입시한 뒤에 창황하게 어찌할 줄 몰랐으니 전하께서 여기에 대하여 조관(照管)하지 못하신 것이 있는 듯합니다(恐殿下於此,有不能照管者). 이것은 국조(國祖) 3백 년 이래로 없던 일입니다.” 『숙종실록』 1년 3월 17일 (p182, p183)

앞으로는 대비의 정사 관여를 엄금해 달라는 간신의 충고였다. 조선시대 때 대비의 정사 참여는 수렴청정이 아닌 이상 위법이었다. 숙종은 “마땅히 그 말대로 하겠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훗날 숙종은 변덕을 부려 윤휴를 죽이는 데 이 사건을 이용한다.

북벌대의를 위해 개혁을 논하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기를 지금 사대부들은 그 마음속에 이해가 엇갈리고 보고 들은 것이 지식을 가리기 때문에 의논이나 행동이 본심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민들은 비록 무식해도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 어둡지 않아 지극히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신령하고 정성을 다하면서 신의가 있습니다. (p200)
지금의 일도 사대부 중에는 빗나가는 의논을 하는 자들이 없지 않겠지만, 무릇 삼군(三軍)과 백성 마음만은 틀림없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원한다.”라고 할 것으로 신은 알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시작만 하면 백성은 크게 호응할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쓰러지는데 아래에서 틀림없이 더할 것입니다. 『백호전서』 권 5 「책자소」(p201)

윤휴는 북벌을 위해서는 백성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법이나 정책이 백성 중심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장한 법이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이었다. 지패법은 기존의 호패 대신에 신분 구별 없이 종이로 만든 새로운 신분증 제도를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지패법은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는 오가통(伍家統)법과 함께 시행해야 했는데,사대부들의 큰 반발을 받았다. 숙종 1년(1675) 9월 26일 비변사에서 오가작통의 사목(事目)을 확정했는데,“논의가 일치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다.”라는 기록처럼 많은 논란이 일었다. 이때 비변사에서 작성한 오가통의 사목은 모두 21조인데 몇 개만 살펴보면 이렇다.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에 따라 모으되,식구 수(家口)의 많고 적음과 재산의 빈부(貧富)를 논하지 않고,다섯 집마다 한 통 (統)을 만든다. 통 안의 한 사람을 선택해서 통수(統首)로 삼아 통안의 일을 관장하게 한다. 『숙종실록』 1년 9월 26일 (p203)
다섯 집이 모여 살면서 이웃을 만들어,논밭을 갈고 김 맬 때 서로 돕게 하고,출입할 때 서로 지키고,병이 있으면 서로 구호한다. 혹시 형세가 불편한 자가 있어 비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개,닭소리가 서로 들리게 해서 부르면 서로 응답하도록 하며,혹시 전과 같이 외딴집에서 떨어져 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숙종실록』 1년 9월 26일 (p204)
마을에 창고가 있는 것이 옛 제도이다. 각 리(里)와 각 통에서 각자 그 힘을 내어 재물과 곡식을 한 면 가운데에 합해 모아 놓으면,본읍(本邑)도 힘이 닿는 대로 이를 도와서 상평제(常平制)를 행하게 해서 혹 봄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거두면서 조적(耀糴: 원곡과 이자)으로 이식을 늘려서 흉년에 진휼하는 자본으로 삼는 것도 일에 합당하다. (p204)
통 안의 사람 중 남정(男丁) 16세 이상인 자는 반드시 신상 호구(身土戶口)가 있으니 어느 도(道),어느 현읍(縣邑),어느 면(面), 어느 리(里)에 살고, 맡은 직역(職役)과 성명, 나이 등은 어떻게 되는지를 두꺼운 종이에 써서 이정(里正)과 리(里)의 유사(有司)가 적고 관청에서 도장을 찍어 출입할 때에 주머니에 차고 다니게 한다. 『숙종실록』 1년 9월 26일 (p205, p206)

호포법이란 모든 호(戶)가 군포, 즉 병역세를 내자는 것이었다. 현종 15년(1674) 7월 양반 유생들에 게도 군포를 받자는 논의가 일었다. 그러자 대사헌 강백년이 강력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어렴풋이 들으니 조정에서 유생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려고 한다는데 법령을 반포하기도 전에 여러 사람이 의혹하고 있습니다. (……) 한가롭게 노는 선비에게 군포 한 필씩을 내게 함으로써 많은 군정(軍丁)이 도망가면 그 이웃이나 가족에게 대신 씌우는 폐단을 없애는 것은 대략 보면 편리하고 좋은 것 같지만 신은 이익은 아주 적고 손해는 아주 크다고 생각합니다. (p216)
왜 그러냐? 하면 국조(國朝) 3백 년이래 선비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 왔습니다. 그 사이에 (선비의) 이름을 빙자하여 군역을 면한 자가 없지는 않지만 구별하기가 어려워서 전부 선비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서로 섞어서 똑같이 군포를 받아들이게 되면 (선비들에게도) 군역을 정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p217)
전에 시행하지 않았던 일을 오늘날 갑자기 시행하면 반드시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니 일을 할 때 처음에 계획을 잘 세우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묘당(廟堂: 의정부)에 물으시고 또 밖에 있는 선비 출신의 정승(儒相)에게 의논하시고 여러 의견을 모아 절충하소서. 『현종실록』 15년 7월 13일 (p217)

그런데 윤휴가 주장한 것은 호포제를 바탕으로 한 구산제(口算制)였다. 이는 더 개혁적인 것으로 호포제는 양반 사대부도 모두 군포를 내자는 방안이지만, 구산제는 양반 개개인의 숫자를 조사해 모두 군포를 내게 하자는 법이었다. 윤휴는 이러한 법들의 주장과 함께 당시 가난한 백성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설명했다.

도망쳤거나 죽은 자도 모두 면제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씌우기 때문에 그 집이 이미 부서지고 그 사람의 뼈가 이미 썩었는데도 고아나 과부,외로운 홀아비 중에서 요행히 생존한 자에게 예전처럼 징수를 독촉하고,한 사람이 도망가거나 죽으면 그 해가 이웃까지 미칩니다. 『숙종실록』 3년 11월 21일 (p222)

허적과 김석주 등 서인과 탁남의 강력한 반대로 윤휴가 주장한 법은 시행조차 되지 않거나, 시행 후 바로 폐지되는 등 무산되었다.

차별 철폐를 주장하다

휴는 대부분의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서얼(庶孼),즉 서자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는 출사 직후인 숙종 1년(1675) 1월 23일 9개 항에 걸친 시국 현안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는데 그 8조에 서얼 허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울과 지방 높고 낮은 벼슬아치의 자제와 이미 출신(出身: 과거 합격)했거나 아직 출신하지 못한 양반의 서얼(庶孽)들을 총부(總府)에 배속시켜야 합니다. 사방의 특이한 재능을 지닌 자와 수령들이 쓸 만하다고 상서(上書)한 사람들을 모두 총부에 소속시켜 한(漢)나라 때 조서를 기다리던 금마문(金馬門)의 공거(公車)처럼 그들을 번(番)을 나누어 직위(直衛)하게 하고,또 그들의 도와 기예를 평가하여 기용하거나 내보내는데,그 중 뛰어난 자를 뽑아 조정의 낭료(郎僚)와 백리를 다스리는 수령으로 삼아 조종조 (祖宗朝)의 오위병(伍衛兵) 제도를 차츰 회복하도록 하소서. 『백호행장』상 을묘년 (p238)

당연히 대신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허적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나라 재상(宰相)의 자제는 좋은 집에 편안히 살면서 독서하는 것이 일이므로 비록 홍문랑(弘文郎: 홍문관 낭관)이라 해도 괴롭게 여기는데,하루아침에 총부랑(總府郎)이라는 이름으로 금군(禁軍)과 일체 (一體)로 하면 시끄럽고 어지러울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p239)

북벌대의를 위한 군사 강화

인 중에서도 윤휴의 개혁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이 있었다. 김상용의 손자인 김수홍이었다. 그는 숙종 1년(1675) 6월 15일 서얼 허통과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당론을 뛰어넘는 소신을 지녔던 당대에 매우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윤휴가 주장한 것들은 시행조차 되지 않거나, 시행되더라도 바로 폐지되었지만, 만과(萬科), 즉 만인과(萬人科)는 실행되었다. 숙종 2년에 시행한 만과는 그 급제자 수가 대단히 많았다. 훗날인 숙종 7년(1681) 2월 영부사 송시열의 사직 상소에는 만과의 급제자 숫자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나온다.

“무인 만과도 오늘날 처리하기 어려운 큰 폐단이 되었는데,그 숫자가 2만 명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모두 서울에 모여 조용(調用: 임용) 되기를 바라다가 그렇지 못하면 원망하고 또 원망하니 서울의 쌀값이 비싼 것도 이 때문이고,농민이 점차 줄어드니 이는 진실로 식자들이 깊게 염려하는 바입니다.” 『송자대전』16권「일을 논한 소차(論事箭)」 (p268)

숙종 2년에 치른 만과는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낸 무과 시험이었다. 상민들의 응시를 허용했기 때문에 많은 급제자를 낼 수 있었다. 상민들의 응시에 대해선 사대부뿐만 아니라 청남으로 분류되었던 미수 허목도 반대했다.

윤휴는 북벌을 단행하려면 이를 전담하는 군사 지휘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숙종 1년(1675) 9월 6일 숙종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는 자리에서 체부(體府) 설치를 요청했다. 체부란 체찰사부(體察使府)의 준말로서 군부의 총사령부를 의미했다. 허적이 도체찰사가 되고, 부체찰사부는 김석주가 되었다. 김석주는 병조판서에 어영대장까지 겸직하고 있었다. 윤휴의 체부 설치 요청은 ‘조관’처럼 훗날 윤휴에게 죽음의 한 원인으로 되돌아온다.

“경의 추상(秋霜)같은 대절(大節)과 백일(白日)같은 충성에 누가 감탄하지 않겠는가만,그 세력의 같지 않음이 하늘과 땅의 차이 같은데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우선 정지하고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그 실상을 먼저 하고 명분을 뒤로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숙종실록』 2년 1월 8일 (p287)

사라지는 북벌 의지, 실패한 개혁

휴의 바람과는 달리 숙종은 이미 북벌에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윤휴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윤휴는 자신과 노선이 같은 사람들은 쫓겨나고 자신이 제기한 개혁 정책들이 모두 무력화되는 현실에 불만을 표시했다.

> “오늘날 조정의 책벌(責罰)하고 전벌(剪伐: 나무를 뱀, 쫓아냄)하는 자들은 신이 일찍이 칭찬한 자들이며,그 어지럽게 개정하는 일들은 신이 일찍이 건백(建白: 의견을 올림)한 일들입니다. 신이 무슨 얼굴로 다시 조정의 말단에 서겠습니까?” (p294)

윤휴는 자신의 개혁 정책이 모두 폐기되면서 북벌에 대한 의지 또한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근일 국가에서 시행했던 오가작통제와 지패법은 진실로 역(役)을 균등하게 하여 폐단을 없애려는 계책입니다. 신도 참여했는데, 시행 반년에 원망하고 소동이 일어 다시 시행할 뜻이 없어졌습니다.” 『숙종실록』 2년 6월 21일 (p294)

오가작통법와 지패법은 실시하면서도 호포제는 극력 저지해 백성에게 되레 부담만 되고 만 것이다. 만과도 마찬가지였다.

"또 과거에 급제한 무사를 졸예(군졸)와 같이 봐서 강등시켜 대오(隊悟: 군졸부대)에 편성해 군문(軍門)에 속하게 하니(만과 응시를) 원망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쌀을 공부(公府)에 바치게 하여 그 재물을 빼앗으니 국가의 체통(國體)를 크게 잃었습니다. 체부(體府)와 만과(萬科)는 모두 신이 건백한 것이니 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 (p294, p295)

국가에서 장교를 뽑는다 해놓고 급제자들을 졸병으로 편입시키고 이들에게 군포를 거두었으니 사기를 친 셈이었다. 그러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백성은 윤휴를 원망할 수 있었다.

윤휴는 자신의 북벌대의를 위한 개혁들이 이루어지지 않자 여러 차례 사직도 한다. 그때마다 북벌과 개혁에는 관심도 없는 숙종은 윤휴를 구슬리고, 윤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조정에 들어오기를 반복하다가, 숙종 6년 5월 20일 서대문 밖 여염집에서 사약을 받고 운명을 마쳤다. 윤휴가 남길 말이 두려워 금부도사 홍수태는 유언도 거부했다. 야사에는 윤휴가 사약을 마시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p9)

이상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 윤휴가 주장한 북벌대의와 개혁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시대의 이단아이자 대개혁가

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어떤 인물이었기에 서인들이 무리하게 혐의를 조작해 가며 죽여야 했는가. 윤휴는 예송논쟁 때 송시열 등을 통해 드러났듯이 서인들이 생각하는 군약신강, 즉 ‘사대부의 나라.’를 정상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다. 윤휴는 북벌과 그 북벌을 뒷받침할 대개혁을 위해선 강력한 왕권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서인들과 허적 등 탁남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윤휴는 김석주가 부체찰사가 되자 숙종에게 이의를 제기했을 정도로 임금의 권력이 분산되는 것을 우려했다.

“김석주는 방금 대사마(大司馬: 병조판서)가 되었고, 어영대장(御營大將)도 겸직하고 있는데,이제 또 부체찰사까지 겸직한다면 권력이 너무 무거울까 합니다.” 『숙종실록』 5년 11월 3일 (p279)

당연히 숙종은 윤휴를 꾸짖었다. 그것도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이다.

정직한 윤휴는 서인들처럼 비열하게 뒤에서 음모를 꾸미지도 못했고, 이미 숙종이 윤휴에게 등을 돌렸을 때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너무 올곧았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순진했다. 이런 그의 기개 있는 진정한 선비 정신이 죽음을 앞당긴 건지도 모른다. 서인들은 자신들과 달리 실제적인 북벌을 주장하고, 북벌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 즉 신분제 타파 등 다양한 개혁 정책까지 주장한 윤휴가 당연히 곱게 보였을 리는 없었다. 탁남이나 서인, 즉 양반 사대부들에게는 윤휴의 생존 자체가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거대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감히 평등을 외치다니’, ‘감히 양반에게도 군포를 내라고 하다니’, ‘감히 건방지게 진짜 북벌을 외치다니’,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감히 주자를 논하려 하다니’였을 것이다.

윤휴는 다양한 경서뿐만 아니라 병서,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심지어 여성들에게도 학문을 가르쳤던 시대의 이단아이자 대개혁가, 쉽게 말해 그 당시로써는 상상도 못했을 엄청난 생각을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찍혔고, 많은 친구에게 절교당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나 다름없었다.

시대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렇다면 윤휴의 모든 언행이 옳았다고 보아야 할까? 아무래도 거기엔 무리가 있다. 윤휴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타협의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의 삶이라는 게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권력 다툼으로 치열한 조정에서 윤휴의 행동은 정치적 미성숙을 그대로 보여준다. 윤휴의 주장이 옳았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주장을 숙종에게, 그리고 서인들에게도 받아들이게 하려면 윤휴도 역시 그들처럼 자신만의 무리를 만들고 키워서 차분하게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긴 준비를 하기에는 윤휴의 등용기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거기엔 윤휴 자신이 임금의 부름을 오랫동안 외면한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만약 윤휴가 김석주를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만들고 더 많은 이를 끌어들여 서인들에 맞섰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기에는 불의를 참을 수 없는 윤휴의 성격이 김석주의 공작정치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윤휴가 주장한 정책들은 조선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과연 그 시대와 양반 사대부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면을 간과한 것도 사실이다. 조금은 윤휴가 양보해서 고지식한 서인의 입장도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작은 것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뜻을 위해서 역시 좀 더 일찍 조정에 나가서 자신의 주장에 힘을 보탤 수 있는 다른 힘있는 대신들이나 신진세력들을 포섭했어야 했다. 그리고 윤휴는 삼번의 난을 보고 시기가 좋은 점만 생각한 나머지 너무 급하게 밀어붙였다. 그래서 미쳐 준비가 안 된 서인과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도 더 심했을 것이다. 결국, 윤휴의 올곧은 성격과 성급함에 송시열처럼 자신의 주장에 집착하는 고집이 더해진 것이 언젠가 되돌아올 죽음의 부메랑을 완성한 격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윤휴가 북벌이 없었더라도 대개혁을 주장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만약 그가 그냥 포의로 남아 시골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고 조정에는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억울하게 사사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300년 동안 지속한 금기를 깨다

휴가 죽자 서인과 노론은 윤휴에게 동조했던 사람들은 무조건 비난하고 파묻고, 윤휴의 업적과 행적 또한 왜곡하고 날조했다. 그 결과 윤휴라는 이름은 금기가 되어 침묵의 감옥에 갇힌 채 300년 이상 묵과됐다. 그 감옥은 300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긴 세월에도 전혀 녹슬지도 않고 아직도 건재했지만, 다행스럽게도 300여 년 만에 그 침묵의 감옥에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면회를 청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덕일 소장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 역사란 그런 것이다. 시대에 따라 부침을 달리하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줄거리이지 또 해득하여 보는 사람의 재미이지 않은가. 이 세상에 불변의 진리는 없다. 모든 것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윤휴에 대한 역사적 위치, 그리고 윤휴의 사상적 가치에 대해 변혁이 와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시기다. 더불어 송시열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도 같이 이루어져야 공정할 것이다. 그 둘은 한때를 같이한 명망 있는 유학자이기도 하거니와 역시 한때를 같이한 친구였지 않은가.

이 책보다 몇 년 전에 출판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와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의 허적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물론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 두 책을 같이 보기를 권한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허적은 ‘화합형의 정치가’로 표현된다. 그러나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는 시종일관 윤휴의 북벌과 개혁을 반대하면서 김석주의 눈치만 살피는 것으로 나온다. 허적은 그렇게 김석주를 철석같이 믿다 배반당하는 순진하다 못해 미련한 인물로까지 보인다. 청남과 탁남도 서인들이 분류한 것일 뿐이지 실제로 청남과 탁남의 공통점은 예송논쟁에 대한 의견뿐이었다.

이러한 허적의 평가에 대한 변화가 이덕일 소장이 끊임없는 배움에 대한 갈증과 진지한 학문적 의문을 품는 학자의 기본을 지키고 있다는 증거라면 참말로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그에게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심정적 변화에 따른 변덕이라면 그것은 실로 역사학자로서 용서받기 어려운 추태일 것이다.

이 리뷰는 2012년 09월 01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약간의 수정을 거친 다음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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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6일 일요일

[책 리뷰]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 보이는 공허한 푸른 눈동자 ~ 어나더(아야츠지 유키토)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 보이는 공허한 푸른 눈동자

원제: Another by 綾辻行人

야츠지 유키토를 처음 만난 작품은 『십각관의 살인』이었다. 꽤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 한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정리를 좀 했다면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무튼, 기억나는 건 학생들이 무인도에 놀러 가서 십각관에 묵게 되고, 역시 본격 추리물답게 한 명씩 죽어나가는 살인사건이 중심 이야기였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무인도에서의 사건 진행과 동시에 육지에서도 추리가 진행되는 점이랄까. 뭐 대충 그러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도 본격 추리물로써 선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어나더』의 뚜껑을 열어보니 본격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미스터리 공포물에 가깝다고나 할까. 보통 추리나 범죄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서 작품 끝에 범인이 밝혀지듯이 소설 『어나더』에서도 딱히 범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엇비슷한 인물이 마지막에 밝혀지고 난 직후에는 굉장히 허무하고 실망이 컸다. 왜 실망했을까. 아무래도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은 『십각관의 살인』만 읽었기에 본격 추리물 작가로서의 인상이 깊이 남아있었고, 보통 추리소설의 ‘범인 찾기 놀이’가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찾는 ‘망자 찾기 놀이’로 대체되는데, 나중에 그 망자가 등장인물 중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드러나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작가가 숨긴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작가도 알고, 등장인물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독자에게만 정직하게 말하지 않았던 어떤 사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그 사실은 원래 작품 초반에 언급된 것이지만, 작가는 그 부분만 독자에게 살짝 가리고 대신 그 사실을 독자가 추리할 수 있게 단서들을 여기저기 숨겨놓았다. 사실 작품 후반부에 그 망자가 등장인물 중 누군가와 어떤 관계인지 드러나는 결정적인 문장만 보면 내가 그렇게 경솔하게 실망한 것을 그렇게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단순히 ‘어라, 이거 원래 앞부분에 나와야 했던 거잖아. 아, 속았다.’라는 생각만 하고 그 뒤에 숨겨진 깊은 뜻을 몰랐을 때는 실망과 짜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이런저런 단서와 내용을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늘어놓고 차분하게 되씹고 음미해 보면 그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오히려 작가가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곳곳에 숨겨둔 단서들을 떠올려 보는 순간,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온몸을 짜릿하게 관통하는 전율과 함께 그제야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돌덩이처럼 굳은 내 지성의 둔감한 깨달음을 통해 뒤늦게나마 이 작품의 묘미를 마음속으로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차 했으면 아무 감동 없이 그냥 책을 덮어버리는 바보스러운 짓을 해버릴 뻔했다. 고로 이 작품의 특징은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범인 찾기 놀이’가 그대로 ‘망자 찾기 놀이’로 계승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했으니 당연히 그 망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내주는 단서는 작가가 은근슬쩍 작품 곳곳에 심어 놓았다. 그런 것을 보고도 눈치채기는커녕 오히려 작가를 탓한 내가 바보였으리라. 눈치 빠른 독자들은 여기까지의 내 글만 보고 이 작품을 정독한다면 그 망자가 누구인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과연 어떤 이야기이기에 그러는지 궁금할지도 모르니 대충 전반부 정도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참고로 작품의 진행은 원래 열다섯 살 소년 사카키바라 코이치의 일인칭으로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보통 삼인칭 시점으로 진행하겠다.

1부 What? Why? (2부는 ‘How? Who?’이다. 제목은 줄거리를 관통하는 화살과도 같다.)

코이치는 중학교 2학년 때 생긴 왼쪽 폐의 구멍으로 3학년부터는 요미야마에 있는 외가에 신사를 지며 도쿄의 사립학교에서 요미야마키타(요미키타) 공립중학교로 전학을 와 다니기로 했다. 요미키타 중학교 졸업할 때쯤에는 인도에 출장을 가 있는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고 그 때는 다시 도쿄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로 진학할 예정이었다. 외가에는 코이치에게 무척 잘 해주는 외할머니와 최근 치매가 시작된 외할아버지, 그리고 코이치는 실물로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본 어머니를 빼닮은 이모 레이코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 가을부터 기르기 시작한 구관조 ‘레이’가 있었다. 코이치의 어머니는 15년 전 친정 요미야마에서 코이치를 낳고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그해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런지, 코이치는 어머니와 닮은 레이코 앞에서는 긴장되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레이코는 예전에 코이치 어머니가 쓰던 별실에 아틀리에를 꾸며 기거하고 있었다.

1998년 4월 20일. 코이치는 재발한 기흉(氣胸: 공기가슴증)으로 다시 요미야마에 있는 시립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데, 4월 26일 일요일 오전에 코이치에게 뜻밖의 방문객이 왔다.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의 남자 반장 카자미 토모히코와 여자 반장 사쿠라기 유카리가 앞으로 코이치가 다닐 3반을 대표해서 튤립 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온 것이다. 그들은 별 얘기 없이 시간을 보내다 병실을 나갔다. 나가기 전 느닷없이 카자미는 코이치에게 악수를 청했다. 코이치에게 악수를 하는 카자미의 손은 땀인지 모를 촉촉함이 전해져왔다. 나중에 학교에서 알게 되었지만, 병문안은 미카미 미술 선생의 제안이었다고 했다.

입원 팔 일째 월요일. 코이치는 드디어 드레나지의 튜브를 제거하고 오래간만에 병원을 산책했다.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의 엘리베이터에서 코이치는 요미키타 중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작고 가냘픈 체구에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지하 2층에 있는 자기 반쪽에 전해줄 물건이 있다며 가슴에 뭔가를 품고 지하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남긴 ‘미사키 메이’라는 이름은 그녀만큼이나 공허하게 코이치를 주변을 맴돌았다. ‘지하 2층에는 창고와 기계실, 영앙실 뿐일 텐데….’

5월 6일 수요일 아침. 드디어 전학 첫날을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코이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인도의 아버지에게서 격려전화가 온 것이다. 전날 밤에는 레이코 이모가, 이모 그리고 코이치의 어머니도 다녔던 요미키타 중학교에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었다. 코이치는 집을 나서기 전에 어제 이모가 가르쳐 준 가르침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첫째, 옥상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면 안으로 들어올 때 왼쪽 발부터 내디딜 것. 둘째, 3학년이 되면 학교 후문 밖 언덕길에서 절대 넘어지지 말 것. 셋째, 반의 결정사항은 반드시 지킬 것. 넷째는….

그때 “코이치!”하고, 외할머니의 기운찬 부름에 곰곰이 이어가던 회상을 끝마치고 코이치는 등교 준비를 해야 했다. 코이치의 첫 등굣길을 구관조 레이가 나름대로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레이의 늘 같은 외침, "어째서? 레이, 어째서?"

3학년 3반 담임은 국어 담당인 중년의 남자 쿠보데라 선생, 그리고 부담임은 미술 담당인 아리따운 미카미 선생이었다. 두 담임은 코이치에게 계속 뭔가를 얘기할 듯 보였지만, 끝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수업이 시작하고, 코이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나 조용한 수업시간. 딴 짓 하는 녀석들은 있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코이치는 교정에 접한 창가 맨 끝자리에 매우 낡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있는 미사키 메이를 보았다.

점심을 먹고 성실한 반장 스타일인 카자미와 경박한 기분파인 테시카와라의 안내로 학교를 둘러보는 중 이 새 친구 둘은 코이치에게 재앙이나 영, 초자연현상을 믿느냐고 물었다. 코이치는 공포 마니아이긴 했지만, 그런 걸 믿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하며 걷다가 10년쯤 전까지는 3학년 교실로 사용했다는 오래된 2층짜리 건물인 0호관 앞을 지났다. 두 친구는 2층은 안 쓰고, 1층엔 미술실, 제2도서실, 동아리 부실이 있다고 했다. 그때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메이를 발견한 코이치는 메이에게 달려갔다. 새로운 두 친구는 매우 난감해했다. 메이도 결코 반갑게 맞이하지는 않았다.

“어째서?……괜찮아 이렇게 하는 거? …… 조심하는 편이 좋아.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쌀쌀하게 말한 메이는 코이치 앞을 떠났다. 체육 시간에는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코이치는 쉴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운동장 북쪽 3층짜리 C호관 건물 옥상에 있는 메이를 발견하고 코이치는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코이치는 스케치북을 안은 메이에게 지난주 병원에서 온 일에 대해 물어봤다.

"그날은, 슬픈 일이 있었거든."

그러면서 메이는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말을 마치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계단으로 향한 메이의 첫 걸음은 오른발이었다.

다음날 목요일 5교시 미카미 선생의 미술 시간. 코이치는 뭉크를 좋아한다는 예쁘장한 남학생 모치즈키 유아를 알게 되었다. 낯가림은 심해 보였지만 이야기해보니 꽤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미술부원이기도 했다. 활동 정지 상태에서 올해 4월부터 부활한 미술부의 담당 선생인 미카미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모치즈키는 미카미 선생에게 반해있었다. 문득 코이치는 오전 수업 때는 있었던 메이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불안’에 대해 얘기하다 테시카와라는 갑자기 “3학년이 됐는데 하필이면 저주받은 3반이 되어버렸으니까.”라고 말했다. 복도를 걷다 오래된 제2도서실 입구의 작은 문틈 사이로 메이를 발견한 코이치는 테시카와라와 모치즈키의 만류를 무시한 채 제2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실에는 메이 혼자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인형 같기도 한 연필로 그린 아름다운 소녀가 미완성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6교시 시작 종소리와 함께 도서실 구석 사서용 책상 너머에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사서가 나타났다. 전에는 이 학교의 선생이었지만 지금은 사서로 있는 치비키는 수업에 가라고 울림이 좋은 낮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5월 9일 둘째 토요일은 학교가 쉬는 날이라 코이치는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결과는 아무 문제 없음이었다. 혹시나 해서 코이치는 입원 시절 친하게 지냈던 같은 공포 마니아인 미즈노 간호사에게 지난주 월요일 4월 27일 그날 이 병원에서 죽은 여자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간호사는 한동안 입원해 있던 젊은 환자가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며 조사하고 나서 휴대전화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코이치는 병원과 외가의 중간쯤 되는 곳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허기를 때우고 무작정 작은 번화가를 걸었다. 그러다 미사키초라는 마을에서 ‘요미의 해질녘의,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라는 색다른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 간판 아래에는 ‘들렀다 가세요. - 공방m’이라고 적힌 낡은 나무판자가 걸려 있었다. 호기심에 가게의 진열장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검은색 원형 테이블 위에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두 손으로 얼굴 쪽의 베일을 들어 올린 여성의 상반신이 있었다. 아주 기인한, 매우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의 소녀의 상반신만 있는 구체관절인형이었다. 그때 간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죽은 여중생이 있었는데, 그 소녀 이름이 미사키가 아니면 마사키일 거라고 전해주었다.

코이치는 다음 주 금요일 저물녘에 다시 미사키초의 그 이상한 가게를 찾아갔다. ‘이곳은 뭐 하는 곳일까?’, 가게 안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인형들이 있었고 주름 가득한 노파가 코이치를 맞아주었다. 노파는 반은 가게이고 반은 전시관이라 말하면서, 코이치는 중학생이라 반값 입장료 250엔을 내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른 손님은 없으니 천천히 둘러보라고 말했다.

가게에 흐르는 조명만큼 어두운 현악 곡조가 흐르고 있었다. 대부분이 아름다운 소녀 인형이었고, 인형들은 다양한 자세와 표정을 가졌다. 싸늘하고도 매혹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존재이면서도 사람과 닮은 미묘한 인형들을 뒤로 한 채 코이치는 지하로 가는 계단을 발견하고 조용히 내려갔다. 지하는 또 1층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저 멀리 속세를 벗어난 듯한 광경. 지하라서 그런지 냉기가 스며드는 차가움.

사실 여느 때처럼 오후 수업시간부터 종적을 감춘 메이를 하굣길에 발견하고 같이 있던 친구들의 핀잔도 무시한 채 코이치는 그녀를 미행했었다. 메이가 이번 주에는 결석을 많이 해서 코이치는 걱정되었다. 메이를 따라가면서 거리가 좁혀지면 말을 걸려고 했는데 전혀 그렇게 되지 못했고, 해 질 녘 메이를 놓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가게 앞이었다. 코이치의 앞에 서양식 커다란 관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메이와 머리 길이나 색깔만 다른 인형이 푸르스름한 얇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관 안의 인형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때 관 뒤에서 교복을 입은 메이가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여기에 가끔 내려오곤 한다고 말하면서 안대를 벗고 왼쪽 눈을 코이치에게 보여주었다. 관 속의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인형과 똑같은 눈이 메이의 왼쪽 눈 자리에 있었다. 오른쪽 검은 눈동자와는 달랐다. 그녀는 왼쪽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 보이기도 해서 평소에는 가려둔다고 했다.

메이와 1층으로 올라와 보나 노파는 보이지 않았고 음악도 멈춰 있었다. 메이는 2층은 인형을 만드는 공방이라며 키리카 씨가 그곳에서 인형을 만든다고 했다. 그녀는 지난번 병원에서 '전해줄 물건'이 인형임을 시인했다. 그러나 코이치가 인형을 가지고 간 곳이 영안실이었느냐는 질문에는 외면했다. 언니나 여동생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간호사가 전해준 얘기로는 죽은 소녀는 외동딸이라 했는데’. 메이는 자기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도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하면서 26년 전 요미야마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쇼와 47년, 1972년, 26년 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성인지 이름인지도 모르는 미사키인지 마사키인지가 있었어. 1학년 때부터 좋은 외모와 성격,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인기가 많았던 미사키가 3학년 1학기 때 비행기 사고로 급사하는 바람에 담임과 반 친구들이 모두 충격에 빠져버렸어. 그 아이의 죽음으로 반 학생들이 슬퍼하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가 이런 말을 꺼냈어. "그 애는 죽지 않았어. 봐, 지금도 저기 있잖아."라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친구들은 미사키의 책상을 보며 그가 살아있다고 믿기 시작한 거야. 물론 선생도 협력했고. 그런데 졸업식이 끝나고 교실에서 찍은 단체 사진에 미사키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웃고 있었데.

코이치는 메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교 괴담치고는 아주 치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는 시종일관 기묘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표정했다. 메이는 이 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하다며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지만, 외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코이치는 그 뒷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외가로 귀환해야 했다.

5월 20일 수요일. 교실 게시판에 다음 주 중간고사 일정표가 붙었다. 코이치는 6교시 끝나고 테시카와라와 카자미에게 어제 메이에게서 들은 26년 전 얘기를 꺼내 보았다. 두 친구는 당황하며 난감해했다. 지나가던 미카미 선생도 코이치가 26년 전 이야기의 그것이 시작되던 해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까 역시 동요를 보였다. 코이치는 외할머니에게도 물어보았다. 옆에 있던 외할아버지는 26년 전에 코이치의 어머니 리츠코는 지금의 코이치와 같은 중학교 3학년 3반이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1학기 때 일어난 미사키라는 학생의 사고에 대해서는 대답하는 것은 피하는 것 같았다. 침묵을 깨고 여전히 "어째서?"를 연발하는 구관조 레이의 짧은 외침만 들렸다. 코이치는 술에 취해 들어온 레이코에게도 ‘그다음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녀도 소문으로만 알았다며 역시 자세한 대답은 피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레이코는 코이치에게 타이밍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음날 목요일에도 역시 메이는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다음 주가 시험인데. 그러고 보니 코이치는 수업 시간에 메이가 지명되어 지문을 읽거나 문제를 푸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5교시 미술 수업을 위해 0호관으로 가다가 옥상에 메이의 모습을 발견한 코이치가 후다닥 달려가 옥상에 도착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테시카와라였다. 그는 코이치에게 없는 것을 상대하면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26년 전의 일은 다음 달 되면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카자와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말도 남겼다. 짜증이 난 코이치는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옥상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메이는 평소처럼 교실에 나타났지만, 그녀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테시카와라도 그 뒤로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주말 밤에 시립병원의 간호사 미즈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사키가 아니라 미사키이고 이름이라고 했다. 후지오카 미사키.

5월 26일 화요일 중간고사 마지막 과목인 2교시 국어시험 시간. 시작한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가는 학생이 있었다. 메이 같았다. 코이치도 답안지를 책상 위에 덮어놓고 나가려고 일어났다. 하지만, 메이가 나갔을 때와는 다르게 담임이 한 번 더 답안을 검토하라며 만류했다. 교실도 웅성거렸다. ‘메이가 나갈 때는 그냥 내버려두고 왜 나만?’

코이치가 교실을 나와 보니 메이는 복도 창가에 창문을 열어놓고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코이치는 간호사가 들려준 사실을 메이에게 물어보았다. 메이는 후지오카 미사키는 사촌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이어져 있었던 사촌이라고. 코이치가 “왜 그런 거야? 친구들이, 선생님까지도 어째서 너를 …….”라고 묻자 메이는 “없는 존재니까.”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메이는 코이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때 체육 담당인 미야모토 선생이 다급하게 3학년 3반으로 뛰어들어갔다. 쿠보데라 선생에게 뭔가 얘기했고 곧 여자 반장인 사쿠라기 유카리가 허둥대며 교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가까운 동쪽 복도에 있던 코이치와 메이를 보고는 멀리 서쪽 복도로 돌아 달려갔다. 미야모토 선생은 사쿠라기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때 요란한 소리와 짧은 비명이 복도에 울렸다. 코이치가 달려갔을 땐 이미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사쿠라기는 우산 중앙의 뾰족한 부분에 목을 깊숙이 찔린 채 계단에 쓰려져 있었다. 사쿠라기의 어머니와 이모가 찬 자동차가 원인 불명으로 가로수를 들이받아 이모만 살아남았고, 사쿠라기도 구급차에 실려 가던 중 어머니처럼 사망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 두 사람이 이번 1998년도 요미야마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관계하는 '5월의 망자'가 되었다.

6월 2일 토요일. 의사는 지난주 사고 목격 후 가벼운 기흉이 일어난 코이치에게 이상은 없지만, 체육 수업은 아직은 무리라고 좀 더 지켜보자고 진단했다. 그래서 일주일간 학교를 쉬어 3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코이치는 잘 모르고 있었다. 테시카와라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6월 5일 화요일. 비 오는 날 진료를 마치고 코이치는 약속대로 미즈노 간호사를 만났다. 미즈노와 코이치는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미즈노는 코이치와 같은 3반에 다니는 남동생 미즈노 타케루에게서 뭔가를 들었는데 자신의 남동생은 겁을 먹고 있었고 지난번 그 일은 단순한 사고로 보지 않는 것 같다고 코이치에게 말했다. 코이치는 간략하게 미즈노에게 그동안의 메이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설명했다. 메이는 코이치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26년 전 이야기도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미즈노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동생에게 물어보기로 코이치와 약속하고 다음 만남은 돌아오는 토요일이 좋겠다고 말했다.

코이치는 집에 가는 길에 그 가게에 들렸다. 지난번과 같은 분위기, 지난번과 똑같은 말로 코이치를 맞이하는 노파, 지난번과 똑같이 지하의 관 뒤에서 나타난 메이. 그런데 노파는 지난번에도 오늘도 "다른 손님은 없으니…."라고 말했었다. ‘다른 손님이 없다고?, 그럼 메이는?’

메이는 코이치에게 그것이 시작되어버렸다고 말하며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그리고는 관 뒤로 사라졌다. 코이치는 관 뒤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코이치는 다시 레이코와 마주 앉았다. 그녀도 3학년 때 언니와 같은 중학교의 같은 3학년 3반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5년 전의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3일 수요일. 아침부터 메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사쿠라기 모녀의 죽음을 화제로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책상엔 꽃도 없었다. 코이치가 보기에 모두 애써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는 듯했다. 테시카와라에게 전화로 불러내어 학교 안에 있는 연못 앞에서 만났다. 상황이 변해서 지난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태시카와라는 대화를 피했다. 그때 코이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즈노였다. 미즈노는 어제 동생은 자기 반에 메이란 여자애는 없다며 메이가 정말 존재하냐고 코이치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미즈노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전화통화가 힘들어졌다. 그때 굉음과 함께 미즈노의 놀라는 소리, 그 뒤에 이어진 크고 이상한 잡음, 마지막으로 들린 미즈노의 괴로움에 찬 신음.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다음 날 코이치는 미즈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레스토랑에서 헤어지면서, "서로 조심하자. 특히 보통은 일어날 리 없을 것 같은 사고에는 더."라고 말했던 그녀가 엘리베이터 사고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어릴 적부터 심장이 약했다던 3햑년 3반 남학생 타카바야시가 집에서 심장 발작으로 죽으면서, 이렇게 3학년 3반의 올해 '6월의 망자'는 두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코이치는 메이에게서 이 저주라기보다는 어떤 현상 같은 일의 26년 전의 ‘뒷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메이의 3학년 3반에서의 이상한 학교생활에 대한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닥칠 ‘꼭 지켜야 하는’ 3반의 결정사항에 대해 듣게 된다. 코이치도 이제 메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상 전반부 정도만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내가 마지막에 ‘망자’가 드러나는 순간에 ‘속았다.’라는 느낌을 받은 건 ‘이모가 들려준 요미키타에서의 마음가짐’의 네 번째 사항이 처음 언급된 작품의 앞부분에서는 외할머니의 방해로 그냥 넘어가고, 마지막 ‘망자’가 밝혀지는 순간에서야 작가가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의도적인 숨기기’였기에 순간적으로 ‘속았다.’라는 실망감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의도적인 숨기기’에는 책의 흥미와 전율을 증폭시킬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 ‘네 번째 사항’은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볼 수 있고, 독자는 ‘네 번째 사항’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유추해 보고 그와 관련하여 망자를 찾는 것이 『어나더』의 묘미였다는 걸 나는 좀 늦게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네 번째 사항’을 앞에서 공개했더라면, 망자를 찾는 독자에게 쉬운 힌트가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확실히 작품의 스릴과 긴장감은 ‘네 번째 사항’을 숨겼을 때에 비해 꽤 많이 떨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망자를 추리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는 작품에 숨어 있다. 나 같은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눈썰미가 매서운 독자라면 분명히 찾을 수 있으리라.

더불어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에 등장하는 3반 학생이나 3반 학생 근친들에게 연달아 나타나는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는 죽음의 배경에는 저주라고 부르기에는 그 원인이 되는 증오나 악의, 복수 같은 죽은 자의 원한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그 어두운 그림자에는 26년 전 3학년 3반에 있었던 어떤 일이 원인이 된다. 하지만, 그 결과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에는 저주 이상의 더 거대한 뭔가가 그들의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추리소설에 괴기소설 적인 요소가 보태진 것이라기보다는, 괴기소설에 추리소설 적인 요소가 더해진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렇게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는 본격 추리물적인 요소와 공포 미스터리, 그리고 어수룩하지만, 정감이 가는 중학생 코이치와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기묘한 소녀 메이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그 둘이 차츰 서먹함을 이겨내고 함께 뜻을 모아 저주 같은 어떤 ‘현상’ 풀어나가는 청춘물적인 요소가 혼합된 아주 다양한 맛과 느낌의 작품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여름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또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영화로도 나올 예정이라니,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메이를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본다.

이 리뷰는 2012년 08월 2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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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7일 금요일

[책 리뷰] 그가 ‘대학자’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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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학자’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

극과 극을 달리는 두 평가의 주인공

부에선 공자, 주자처럼 ‘자(子)’를 붙여서 조선 최고의 유학자이자 성인으로 추앙하고, 또 일부에선 ‘시열이, 시열이’하며 동네 개 부르듯 천대하는 조선시대 유학자 송시열(宋時烈). 왜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가 나오는 걸까.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는 효종(孝宗)을 도와 북벌을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로 송시열이 나온다고 한다. 2012년 지금의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북벌을 둘러싼 내막을 비롯하여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의 주인공 송시열의 일생과 그의 학문 및 사상에 대해 (주류 역사가들의 암묵적인 침묵으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추적한다. 그동안의 묵시적인 금기를 과감히 깨고, 생존했던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송시열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과감하게 파헤치는 이 책은 송시열의 진짜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첫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루한 나의 짧지 않은 후기와 이덕일 소장의 책으로, 그렇게 송시열에게로 잠깐이나마 눈을 돌려보자.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훗날 노론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송시열에 대한 궁금증은 이덕일 소장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어느 정도는 해소될 것이라 믿는다. 무더운 여름날 그늘진 계곡물에 발을 담글 때처럼, 그동안 간직해왔던 가슴속의 답답함을 이 책이 시원하게 쓸어내려 줄 것이다.

송시열의 어린 시절

책엔 송시열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과 역사적 배경이 등장한다. 그 중 위에서 언급한 북벌, 즉 송시열이 생각한 북벌의 진짜 속셈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자. 책 속에서 북벌에 관련된 부분만 간추려 보았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그는 선조 40년(1607) 11월 12일 충청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어린 송시열은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자(朱子)가 있고 나서 공자(孔子)가 있고, 율곡(栗谷)이 있고 나서 주자가 있으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어린 송시열은 학문 교재로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 무지몽매를 깨뜨려 버리는 데 요긴한 비결)을 선택해 학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서인계 사대부의 어린 아이 교육용 성리학 교과서이다. 율곡이 쓴 이 책의 서문을 보자.

"학문의 길에 막 들어선 이들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당혹해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공부의 바른길을 인도해 주려고 지은 것이다."

12살 송시열은 이 책을 읽고 성인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학문에 정진했다. 이이의 가르침으로 시작한 그는 훗날 거꾸로 주자를 통해 율곡을 바라보려 하였다.

"말씀마다 모두 옳으며 일마다 모두 마땅한 분이 주자이다. 총명과 예지(叡智)가 있어 모든 이(理)를 밝힌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못 할 것이다. 주자가 바로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주자가 이미 말하고 행한 것은 곧 따라서 행했지 일찍이 의심한 바가 없다.”

인조 11년(1633)에 송시열은 생원시에 장원 급제해 대과를 볼 기회를 얻었다. 그 해 10월 경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면했다. 2년 후 최명길의 추천으로 대군사부(임금의 적자인 대군을 가르치는 종9품 관직,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사부가 정1품, 세손을 가르치는 세손시강원의 사부가 종1품)에 임명됨으로써 관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송시열은 사부로서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을 만난다. 송시열의 나이 만 28세, 봉림대군의 나이 만 16세였다. 이 시기에 6개월 가르친 것이 노론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되어 송시열을 효종의 충직한 신하로 포장된다. 거꾸로 말해 이 둘의 관계가 그만큼 문제가 많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송시열, 그가 주창한 북벌의 진짜 의도는?

종 즉위년(1649) 다시 조정에 나온 송시열은 어머니의 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청하면서 ‘봉사(封事)’(밀봉된 상소)를 올려 자신의 소회를 피력했다. 효종 즉위년인 1649년이 기축년(己丑年)이므로 「기축봉사」라고 부르는 글이다.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10일에 사관은,

“올린 책자 가운데 조목별로 소회를 진달하면서, 대일통(大一統)으로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을 제일건으로 하였기 때문에 첩지(貼紙)하여 비밀로 했다 한다.”

라고 적고 있다. 공자의 대일통은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나라란 사상이었다. 고대 중국 주(周)나라 이외의 모든 민족은 오랑캐요 금수이므로 중국과 주나라를 따라야 한다는 사상이다.

송시열의 기축봉사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서 모두 주희가 남송의 효종에게 올린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를 본뜬 것이었다. 문제는 주희에게 대일통은 그대로 남송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자기 중심적 시상이지만 송시열에게 대일통은 조선 자신이 아니라 명나라를 높이는 타인 중심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사상 면에서 볼 때 송시열의 북벌론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명나라를 따르자는 대일통 사상이다. 송시열이 말한 군신의 의리는 인조의 삼전도 치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나라는 천자의 나라요 조선은 제후의 나라이므로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임금인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의 대일통 사상이다.

“우리 태조 고황제(高皇帝: 명나라 시조 주원장)께서는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 이성계)과 같은 시기에 창업하시고 즉시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으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충정(忠貞)의 절개를 지킨 지 3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불행히 지난번에 추한 오랑캐가 방자하게 온 나라를 삼켜서 당당한 예의의 나라가 다 비린내 나는 더러운 것에 더럽혀졌으니 그때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하로서 명 태조 주원장을 임금으로 섬긴 것이 변할 수 없는 군신의 의리라는 주장이 송시열의 의리론이다. 즉 그에 의하면 조선은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것이 삼강(三網)의 의리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치욕을 받은 사실보다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더 슬프게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실로 신종황제(神宗皇帝: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임금)의 은혜를 입어 거의 빈터가 된 종묘사직이 다시 있게 되고 생민(生民)이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 생민의 털 한 터럭에 황은(皇恩)이 미치지 않은 바 없습니다. 그런즉 오늘날 온천하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이 우리만큼 억울하고 분한 자가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광해군이 이런 분함을 잊고 강홍립을 시켜 전군(全軍)을 포로로 만들어서,천하 사람들이 우리나라도 오랑캐가 되어버렸다고 조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대행대왕(인조)께서 의를 주창하시고 반정(反正)하셔서 대의를 밝히시니 세상이 해와 달같이 밝게 되어,온 나라 사람들이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거듭 대행대왕께서 지성으로 위(명나라)를 섬기셔서 매양 은총과 칭찬을 받음이 종시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갑자기 북쪽 오랑캐의 협박을 당해 충성스러운 절개를 밝히지 못했으니 그 이후의 일은 신자(臣子)로써 차마 말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이 북벌론을 외칠 만하다. 북벌에 대한 그의 실제 생각을 「기축봉사」에서 보자.

오늘날 시세를 따지지 않고 강한 오랑캐를 가벼이 끊으면 원수를 갚기도 전에 화가 미칠 것이니 이는 역시 선왕(인조)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낮추시어 굴복하심으로써 종묘사직을 연장하신 본의가 아닙니다. ••• 이런 독한 마음을 잊지 마시고 그 원한을 차곡차곡 쌓으셔서 평소의 온화한 말 가운데에도 그 깊은 곳에는 분노가 더욱 쌓이게 하십시오. 또한, 부귀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언제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뜻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 그리고 이러한 굳은 뜻을 5년,7년,10년,20년이 지나도록 결코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우리 힘의 강약을 살피고 저 오랑캐 세력의 성하고 쇠함을 엿본다면,비록 창을 들고 저들의 죄를 따지면서 중원(中原)을 깨끗이 쓸어 신종황제의 망극하신 은혜를 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혹시 오랑캐와 국교를 끊고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혀서 우리의 의리를 지킬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

송시열과 대립하는 효종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이 말하는 북벌은 조선이 힘을 길러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가능한 북벌 의리는 청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명을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의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그것을 하려고,즉 청과 국교를 끊고 명을 섬길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이 송시열이 바랐던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송시열의 명분적, 제한적,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북벌론과는 달리 효종은 실제적 북벌을 추구했다. 효종은 재위 3년 군정의 문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중 이렇게 말했다.

“옛 사람은 '밭갈이는 사내종에게 묻고 길쌈 일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노비에 관한 말을 비록 문무지사(文武之士)에 대한 비유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文)이라 이름하였으면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할 뿐이며,무(武)라 이름하였으면 병법(兵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을 등용하는 도는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 데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오늘날 비변사의 낭청이 슬기로운 힘을 지닌 자를 뽑지 아니하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 보니 모두가 서생(書生)들 뿐이다. 그러나 급한 상황에 적을 상대할 때에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병폐이다.”

효종은 문약해진 군사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관은 문(文)을 숭상해야 하고,무관은 무(武)를 숭상해야 하는 법인데,오늘날은 그렇지 못하여 문관이 무관처럼 생기면 경멸을 받지만 서생(書生)처럼 생긴 무관은 세상에서 용납하게 되었다. 만일 무관이 말 달리기를 좋아하면 광패(狂悖)하다고 지목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지금의 무관은 선비와 같으니 어찌 싸움터에서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효종은 조선의 문치주의 때문에 나약해진 군사력을 증강하려고 관무재, 영장제도 등 여러 방편을 시도했다. 병조판서 박서의 임명과 박서의 뒤를 이은 원두표, 효종 4년 10월 무장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삼아 그 실행을 맡긴 것 등이 그랬고, 효종은 재위 7년 12월 임금이 직접 실시하는 인사행정인 친정(親政)을 실시하며 담당자인 이조판서 홍명하(洪明夏)와 병조판서 원두표에게 서북인의 등용을 명령했다. 효종 6년 9월에는 노량진 백사장에서 1만 3,000여 명의 조선군을 데리고 관병식도 거행했다. 하지만, 문신들은 이런 모든 군사적 행위에 반대했다. 심지어 어떤 신하들은,“청과 분쟁거리가 됩니다."라며 말리기도 했다. 청과의 강화조약 위반이라는 말이었다. 여기에 농민들이 농사도 짓고 군사훈련도 받고 성 쌓기,병장기 제조 등의 부역에 동원되어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는 곧 서인들의 북벌반대 구실이 되었다.

북벌의 포기를 종용하는 송시열

종 8년 송시열이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국을 논평했는데,그 신랄함이 다른 문신들의 상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 그런데도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8년이나 되었으나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위로는 하늘과 성고(聖考: 인조)의 뜻에 보답할 수 있고 아래로는 뭇 신하와 만백성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조그마한 공효도 전혀 없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하여 안에서는 소요가 일어나고 밖에서는 공갈과 협박을 하고 있어 위태로운 화가 조석 사이에 임박했습니다.”

이는 효종이 재위 기간 8년 동안에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송시열은 정유봉사 19개 항목에 걸쳐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나 그 핵심은 북벌보다는 양민(養民)에 힘쓰라는 것과 사대부를 우대하는 왕도를 기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백성을 기르고 병사를 양성할 것'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이 경우에도 결론은 효종이 왕실의 재산을 아껴서 병사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태조(太祖: 송의 조광윤)는 내탕고의 재물을 풀어서 호인(胡人)의 머리와 바꾸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만일 전하께서 한 푼의 돈이나 한 자의 베라도 모두 아껴서 병사를 양성시킨다면,지방 관아에 맡겨 아전들의 주머니에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 어찌 낫지 않겠습니까.”

「정유봉사」에서 송시열은 사실상 북벌의 포기를 종용한다. 그 논리 역시 주희에게서 따온 것이다.

“신은 살펴보건대,주자가 처음에는 효종(孝宗: 남송의 효종)에게 금(金)나라를 쳐서 중국 강토를 회복하는 의리에 대해 말씀드렸으나 20년 후에는 다시 이러한 말씀을 드리지 않고, 다만 ‘오직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먼저 동남 방면이 다스려지지 못한 것을 걱정하시면서 마음을 바루고 사욕을 극복하여 조정을 바로잡으소서. 그러면 거의 진실한 공효가 차츰차츰 이뤄질 것이고 엉뚱한 걱정거리가 생겨 원대한 계획에 해가 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주역(周易)』에 정통한 사람은 주역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참으로 강토 회복에 뜻을 둔 자는 결코 손뼉을 치고 칼을 어루만지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그때 효종이 이미 측근의 신하들에게 잘못 이끌려가는 데다가 안일에 젖어 있어 근본이 매우 염려되었기 때문에 주자가 이처럼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주자가 당초에 가졌던 마음이었겠습니까. 또한, 슬픈 일입니다."

이는 자신이 북벌을 돕지 않는 모든 책임을 효종에게 전가하는 말이다. 효종이 사대부를 우대하지 않는 데 대한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전하께서 대신을 공경하여 예법으로 부리는 도리를 아시지 못함은 아니지만, 지난번에 심하게 대신을 꾸짖으시고 돼지처럼 여러 관원을 꾸짖었다 하는데 그것은 주자가 매우 놀라 탄식할 바입니다.”

송시열은 효종이 군사력 강화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위에 있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나라는 임금의 것이 아니고 천하의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여기에서 천하란 만백성이 아니고 사대부를 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기해독대(己亥獨對)

시열과 송준길이 각각 이조판서와 대사헌으로 인사권과 탄핵권을 장악한 효종 9년 9월 이후 조정은 사실상 양송의 것이었다. 이때 효종은 송시열에게 비밀서신을 보내 북벌을 유도했다. 송시열은 상영릉문에서 조정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걱정이라면서 조정의 몇 신하들에게 북벌의 의사를 타진해 본 결과를 보고했다.

“허적(許積)은 큰일(북벌)에 대해서 힘을 낼 것을 다짐했습니다. 허적은 용감하지만 침착한 맛은 별로 없으니 그의 의사를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유계에게 말했더니 어려운 일이지만 마땅히 힘을 다해 죽음을 각오할 뿐이라고 말했으나 다만 기밀이 누설되어 화근이 닥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송준길은 국내 정치가 견고하지 못한 데 힘을 나누어 밖의 일(북벌)을 하다가 크게 실패할까 두려워한다면서 우리의 힘을 서서히 길러 적의 틈을 기다리면 안 될 이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유태는 전하의 뜻이 굳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전하의 뜻이 굳으면 순차적으로 일을 하는 방법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모호한 답변이었다. 유일하게 제시된 군사력 증강책은 약 17만여 명에 이르는 승려들을 군사로 차출하자는 것이었다.

효종 10년(1659) 3월 11일, 송시열의 요구로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의 자리를 가졌다. 바로 기해독대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大事: 북벌)를 논의하기 위함이다. 저 오랑캐(청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다. 예전의 한(汗: 청나라 황제 세조를 낮춰 부르는 말)은 그 형제들이 매우 번성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들었으며,예전의 한(汗)은 인재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용렬하다. 예전의 한은 오로지 무예와 전쟁을 숭상했는데 지금은 점점 무사(武事)를 폐하고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있다.”

독대를 요구한 명분에서 ‘대사’ 가 바로 북벌임은 송시열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효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랑캐의 지금 상황은 경이 언젠가 주자(朱子)의 말을 빌려 말한 ‘오랑캐가 중원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의 한이 비록 영웅이라고 하나 주색(酒色)에 깊이 빠져 있어 그 형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내가 군사(軍事)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언제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 포병 (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청나라 지배층은 만주족이지만 중하위 관료를 비롯한 백성 대부분은 한족이었다. 실제로 기해독대 15년 후인 현종 15년(1674) 에 한족 오삼계(吳三桂)가 군사를 일으켜 중국 남방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자,유생 나석좌(羅碩佐) 등이 북벌하자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효종의 이 계획은 조선군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시도해 볼만한 일이었다. 효종의 설명은 계속된다.

“저들은 방비에 힘쓰지 않아 요동(遼東)과 심양(潘陽)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 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저들이 우리나라의 조공품을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두고 있다. 이는 이 물건들을 다시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인 듯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붙잡혀 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어찌 내응(內應)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감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효종은 흉중에 감추었던 모든 계획을 말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송시열이 답할 차례였다.

북벌의 위한 결의를 잃지않는 효종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입니다. 하나 제갈량(諸葛亮)도 뜻대로 되지 않자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 차질이 생겨 오랑캐에게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하시렵니까?"

효종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경이 나를 시험하는 말이다. 나는 내 능력이 대사를 수행하는 데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리(天理)나 인심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데,어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 스스로 포기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으니 나는 나라가 망하는 불행한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자질이 그리 용렬하지 않은 데다가,나로 하여금 일찍이 환란을 당하게 하여 부족한 면을 채워주었고, 나로 하여금 일찍이 궁마(弓馬)와 진법(陳法)을 익히게 하였으며,나로 하여금 저들에 들어가 저들의 형세와 산천 지리를 익히 알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적지에 오랫동안 있게 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뜻이 우연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는데,앞으로 10년이면 내 나이 50이 된다. 10년 안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지기 (志氣)가 점점 쇠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경이 물러가기를 허락할 것이다. 그때엔 경이 물러가도 괜찮을 것이다.”

북벌을 논함에 하늘의 뜻을 운운할 정도로 효종은 북벌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효종은 몸의 기력을 빼앗기지 않고자 여자관계도 삼가는 자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임금이었다. 실제로 인선왕후 이외에 안빈 이씨라는 한 명의 후궁만을 두었을 뿐이다. 송시열의 종형 송시형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것을 염두에 둬서 효종은 송시열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때 터잡는 일을 핑계로 몇 명을 만나 은밀히 시험해 보았는데,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니,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져서 놀라기만 하니,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다. 저들이 모두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다.”

신하들에 대한 효종의 질타에 송시열은 정면에서 반박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버리지 못하시니 지기(志氣)가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으며,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심신(心身)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신다면,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은 신하들의 부패와 안일을 효종의 책임으로 돌렸다. 왕이 먼저 모범을 보이라는 말이다. 효종으로서 이는 모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송시열의 이런 말까지도 받아들였다. 북벌을 위해서는 송시 열의 지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이 옳다.”

효종은 이렇게까지 양보했다. 하지만, 송시열이 제시하는 대안은 치자(治者)의 근본도리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라는 뜻의 '수기형가(修己刑家)'이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 훗날 송시열이 반대 당파로부터 '수기형가' 네 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효종이 북벌을 강력하게 호소할 때 송시열은 정권을 위임받은 신하로서 북벌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었다. 실권을 계속 유지하려면 북벌을 소리 높여 드높여야 했지만, 송시열의 속마음에 북벌은 먼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 때문에 대립하고 갈등을 맺고 있을 때 효종이 급서했다. 효종 10년 5월 4일이었다. 4월 27일에 생긴 머리 위의 작은 종기가 원인이었다. 이때 효종에게 침을 놓은 인물이 어의 신가귀(申可貴)였다. 그런데 신가귀가 놓은 침이 잘못되어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왔으며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효종은 침 맞은 자리에서 피가 계속 솟아 나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종기에 침을 놓은 신가귀는 수전증,즉 손 떨리는 증세가 있는 의원이었다. 이 의문은 그대로 묻어둔 채 만 18세의 외아들 현종이 즉위하면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전 장렬왕후, 효종보다 5살 어린 조씨는 이때 만 35세) 조씨의 상복 착용 문제로 1차 예송논쟁 시작된다.

'주자학'이 아니라 '주자교'에 빠진 송시열

상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중 북벌과 관련해서 간략하게 살펴봤다. 독자는 혹시 송시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했는가.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다면 이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송시열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보기 드물게 83세까지 장수를 누리는 복을 누렸다. 정치적인 운도 말년을 제외하고는 잘 나갔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산림의 영수로서 존경받았고 많은 추종자를 만들었던 그가 무엇이 부족했으랴. 그렇게 겉으로는 (지금의 말로 표현하자면) 아주 잘 나갔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이 있었다면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어린 시절 꿈꾸던 성인 또는 군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중 필수라고 볼 수 있었던 ‘관대함’이었다. 학문을 닦는 학자로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수용하고 다른 학문을 살펴보고, 그 다른 학문을 하는 학자도 받아들일 수 있는 관대함이 그에겐 없었다.

위의 북벌에 대한 내용에서도 보았듯이 송시열은 시종일관 주자 타령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주자는 배우고(學) 물어야(問) 할 학문적 연구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할 완벽한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학문이 연구대상이 아니라 단지 믿고 따르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면 그건 바로 종교나 다름없다. 그렇게 광신도가 되어버린 송시열에겐 우정도 자신과 같은 학문적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때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백호(白湖) 윤휴를 만나 "혹시 우리가 정치하게 된다면,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라며 서로 통곡하며 우정을 맺기도 하고, 권시나 송준길에게는 “윤휴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앞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 내어 나를 놀라게 한다네.”라고 윤휴를 극찬하기도 했다. 이렇게 젊은 시절에는 학자다운 풍모를 보였던 송시열이 어쩐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외골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라고 외칠 수 있었던 윤휴의 사상적 자유를 송시열은 이해하지도 받아주지도 못했다. 반대로 송시열은 윤휴를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사문난적으로 몰아 결국엔 숙종 6년 5월, 윤휴가 서인들의 말도 되지 않는 누명을 받고 사약을 받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렇게 송시열에게 이단으로 찍힌 윤휴는 유언조차 허락받지 못했을 정도로 서인들에게 마지막까지 철저히 탄압받았다. 송시열과 서인들은 윤휴의 무엇이 두려웠기에 마지막 가는 길까지 곱게 보내주지 못했던 것일까.

윤휴의 죽음과 북벌

휴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으로 혼란스럽자, 숙종에게 오삼계와 대만의 정성공과 연계해 북벌을 단행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했던 진정한 북벌론자였다. 그는 누구처럼 말로만 북벌을 외친 것이 아니었다. 북벌대의를 실현하려면 백성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신분제 타파를 위해 호패법 폐지와 함께 지패법과 호포법 시행 등 대개혁을 주장했었던, 조선시대 중 보기 드문 깬 인물이었다. 물론 이런 대개혁은 양반 사대부들의 이익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윤휴는 이런 대개혁에 대한 열정을 죽는 그날까지 놓지 않았다. 만인과를 시행해서 북벌을 위한 무사들도 모았고, 대륙 정벌을 위해 병거(전차)를 만들자고 주장할 정도로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송시열과 한때 뜻을 같이한 친구였던 윤휴는 사상의 자유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몰려 그 큰 뜻을 제대로 한 번 펴지 못하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윤휴가 가진 사상의 자유와 윤휴의 대개혁이 가져올 신분제 폐지로 말미암은 자신들의 기득권 침해에 대한 걱정도 있었겠지만, 윤휴가 진정한 북벌대의를 가졌다는 것이 서인들에게 윤휴에 대한 불쾌감과 두려움을 가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상의 자유가 곧 사문난적

시열은 자신의 옛 친구이자 한때 자신이 극찬했던 인물마저 마녀 사냥할 정도로 주희의 사상에 의문을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언행은 주희 그 자체였고, 주희가 되살아나 조선에 온 것과 다름없었다. 다음의 일화는 보자.

어느 날 송시열이 안질과 각질에 걸렸는데,그는 주자도 같은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병을 번거로워하기보다는 영광으로 여겼다. 또한, 생일날 받은 선물을 상대에게 다시 돌려준 것도 주자를 따른 것이었으며, 약혼한 손녀가 혼사 전에 죽은 것 역시 슬퍼하는 한편으로 주자에게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이성무, 『재상열전』, 송시열 편)

상황이 이러했으니, 주자학에 대한 이단아들을 단순히 비난하고 비판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여야 성이 찼던 것이다. 효종 4년(1653)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현 죽림서원)애 송시열, 윤선거, 윤원거, 권성원 등 10여 명의 서인 학자들이 윤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을 때, 윤휴를 옹호했던 윤선거에게 송시열이 말했다.

“이미 난적(亂賊)이라고 말했으니 경솔하다는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대저 군왕이 춘추의 법을 펼칠 때 난신적자를 따르는 자[黨與: 당여]를 다스린다고 했으니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공은 윤휴보다 먼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친구에게도 서슴없이 협박하는 걸 보면 송시열이 배척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군자'보다는 '소인'에 가까웠던 노년

시열이 군자(君子)보다는 소인(小人)에 가까웠던 삶을 살았던 것을 보여주는 몇 편의 일화도 있다.

영의정 이경석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아직 별볼일없던 시절에 이들이 서울에 오면 자기 집에 재워주면서 일개 산림 처사에 불과한 두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어 선비를 공경하는 예의를 다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출세한 송시열은 이경석이 병자호란 때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이경석이 임금에게 궤장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궤장연서(几杖宴序)에 '수이강(壽而强: 편안하게 오래 살았다)’이라는 고사를 들어 이경석을 비꼬았다.

삼전도비문은 청나라의 강요와 인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국가의 생존을 위해 이경석이 어쩔 수 없이 지은 것이었다. 이경석은 효종 1년 청나라에서 조선이 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등 조약을 위반했다고 무력시위를 할 때 청 사신 앞에서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린 대범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경석은 청나라에 의해 극형에 처할 위기에 놓였지만, 효종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1년 후 이경석은 청 황제의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송시열이 이경석에게 가한 비난은 서인 쪽에서 편찬한 『현종 개수실록』의 사관마저 비판할 정도였다.

송시열이 윤선거의 아들 윤증의 부탁을 받고 지어준 윤선거 비문도 유명하다. 윤선거가 현종 10년(1669) 60세의 나이로 죽자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현종 14년에 송시열에게 비명을 지어주기를 요청해 약 반년 후 비문을 받았다. 그런데 비문의 내용이 정말 성의없었다.

"현석(玄石: 박세채의 호)이 윤선거를 극진하게 찬양하셨기에 나는 그대로 기술(記述)만 하고 창작하지는 않습니다."

비문은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한 글이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라리 비문 작성을 거절했지, 저런 식으로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윤선거의 제문에는 강화도에서 윤선거가 김익겸 등과 자결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에 대해 “아버지가 살아계시므로 감히 마음대로 죽을 수 없었다."라고 설명해서 이미 넘어간 일을 시를 지어가면서까지 비난했다. 물론 주희의 시를 베낀 거였다.

이렇게 주변에 많은 파문을 일으키고 큰 영향을 끼쳤던 송시열은 예송논쟁에서 효종의 왕통을 부인하고도 83세까지 살아남았다. 주희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단지 주희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와 실제적인 북벌대의를 외치고 국가와 백성을 위한 대개혁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윤휴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대개혁을 힘껏 반대했던 서인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백성의 나라도 아니고 왕의 나라도 아닌 바로 사대부의 나라였다. 그 나라에서는 임금과 사대부가 나란히 있었다. 그리고 백성은 언제나 그들의 발밑을 기어다녀야 했다. 비록 그들이 개혁가인 이이의 학통을 이었다고 하지만, 이이의 개혁 정신은 이미 엿 바꿔 먹은 지 오래였다. 그런 그들의 뒤에 거대한 정신적 지주로 군림해왔던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철저한 사대부 중심의 예(禮)만을 고집했고, 그 사상이 그대로 노론으로 이어졌고, 여전히 백성은 돌보지 않고 개혁은 무시한 채 결국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다. 이런 폐단은 여전히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크고 작은 세력들이 대립하여 정국을 흐리는 작금의 대한민국에 와서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송시열에게 국가와 백성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다.

그가 '대학자'인 이유

덕일 소장의 책은 그동안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라는 말대로 승리자의 권력과 영광에 가려 제대로 비추어지지 못했던, 역사의 지워지고 감추어진 부분들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이덕일 소장뿐만 아니라 최근에 대중역사서에서는 그런 흔적들이 조금씩 나타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래서 누구는 이덕일 소장이 이런 식으로 대중의 감정을 자극해서 인기몰이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100퍼센트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대중을 위한 역사서가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단순히 지배층의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중의 처지에서 바라본 지배층의 역사서가 드문 것이기도 하다.

내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을 읽어 보기 전에는 송시열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를 어떤 인물로 생각해야 할지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최소한 이황이나 이이에 버금가는 정도로 학문의 성취를 이루었거나 백성을 위한 개혁을 주장한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그런 인물이었는지 말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의문점을 없앤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송시열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송시열은 굉장한 인물이긴 했다. 학문적으로는 오직 주희밖에 몰랐기에 진정한 지식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성인을 꿈꾸었겠지만, 그의 일생의 말년은 군자(君子)보다는 소인(小人)에 가까운 삶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대학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덕일 소장의 말처럼 학문이 고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는 말이 정답이다. 그만큼 그는 지금까지 과대 평가되어왔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보고 송시열을 옆집 개 이름 부르듯 비하하거나 너무 과소평가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가부장제 지지자인 그가 보여준 부인에 대한 깍듯한 예우,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에 대한 우애 등은 비록 자신과 이념이 다른 타인들에 대해서는 군자와 같은 도리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에서 ‘수신제가’만큼은 인정해 줄만 하기 때문이다. 그가 타인과 다양한 학문의 세계에 조금 더 넓은 포용력과 관대함을 보여주었더라면 분명히 그는 진짜 ‘대학자’로 길이 남았을 인물이다.

마무리

시열이 그랬듯 성인이나 군자가 되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끼고 살아온 송시열을 보면 책을 많이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송시열의 행적을 보면 군자가 되는 것의 그 어려움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맹자를 천 번이나 외웠다던 그도 행동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역시 진정한 지식은 많이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의 이주한의 말처럼 무식보다 무섭고 피해야 할 것이 오로지 하나만 아는 일식이다.

마지막으로 송시열의 사사장면을 묘사한, 역시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장면으로 이 지루하고 두서없는 글의 끝을 마치겠다.

노론계 인사로 보이는 김재구의 조야회통(朝野會通)이 전하는 그의 사사 장면을 보자.

"우암 송시열은 직령의를 입은 후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이날 맘 한 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빛이 우암이 죽은 지붕 위에 뻗쳤다. 유명(遺命)으로 관(棺)은 덧붙인 관(附板: 부판)을 썼다.”

소론 나량좌(羅良佐)가 쓴 『명촌잡록(明村雜錄)』의 기술하는 상황은 앞서와는 정반대이다.

"정읍에서 사약을 받던 날 도사 권처경(權處經)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이것은 양전(효종과 명성왕후)의 어찰(御札)인데 감히 우러러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권처경이 '나는 사사(賜死)하라는 명만 받았으니 어찌 갖다 드리겠소’라고 거부하고 서리(書吏)에게 그 편지를 빼앗게 하여 그 자손에게 주었다. 송시열은 계교가 궁하자 다리 쭉 뻗고 바로 드러누웠다. 도사 권처경이 재촉했으나 종시 마시지 않으므로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
이 리뷰는 2012년 08월 17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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