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사부, 나도 사부, 우리 모두 사부 | 야마모토 슈고로
시대소설을 빙자한 성장소설?
『사부(さぶ)』는 내가 읽은 야마모토 슈고로(山本周五郞) 소설 중 세 번째 작품이자 『붉은 수염 진료담(赤ひげ診療譚)』과 더불어 누적 판매량 100만 부가 넘는 야마모토 슈고로의 대표작 중 하나다. 하지만, 세 권 중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은 100만 부 이상 팔린 두 작품이 아니라 인간 행위에 대한 유별스러운 관심과 애착, 그리고 익살스럽고 여유로운 문장력이 인상적이었던 『계절이 없는 거리(季節のない街)』였다. 고로 야마모토 슈고로를 처음 접하면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세 권을 모두 읽을 계획을 세운 성실한 독자라면, 성찬 중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나중에 먹듯 『계절이 없는 거리』를 가장 마지막에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사부』가 딱히 내 마음에 차지 않은 이유는 시대소설을 빙자한 성장소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재력과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이 기고만장하게 날뛰는 그악한 현실 속에서 이렇다 할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괄시당하고 혹사당하는 하층민들이 유대감, 우정, 사랑에 의지하며 지옥 같은 삶에서 평범한 일상을 회복해 나간다는 줄거리는 다소 진부하더라도 (공정과 상식을 엿 바꿔 먹은 작금의 한국을 한탄하는 울분 가득한 독자들에겐) 충만한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킬 만한 작풍이지만, 무고한 죄를 짊어지고 부당한 폭력에 난도질당한 청년 에이지(栄二)의 영원히 부글부글 끓을 것 같았던 복수심이 부랑자 수용소에서의 절실한 경험을 통해 모래성이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조금씩 조금씩 형체를 잃어가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그라져 가는 것이, 그러면서 그와 동시에 소박한 삶을 사랑하는 평범한 시민으로 복귀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성장소설이다.
마치 세븐스(Mar. 7th)의 “사부, 나 깨달았어!” 같은 유쾌 발랄 화기애애한 ‘사부 & 제자’ 이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맞서기보다는 분수에 맞는 삶을
성장소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불붙은 마른 장작처럼 활활 불타오르는 에이지의 복수심을 보면서, 대량살인마 구마타로(실화를 바탕으로 한 마치다 고의 범죄소설 『살인의 고백(告白)』의 주인공)가 그랬던 것처럼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처참하고 화끈한 끝장을 내심 기대했었는데, 그것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허무하게 스러졌다는 것이, 그리고 에이지가 결국엔 세상과 타협하여 새 출발 한다는 교훈적인 마무리는 현실적이다 못해 고리타분하다.
그런 인생 설교를 감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나이를 먹은 것일까? 하루살이 같은 인생에 이골이 난 나머지 염세주의자가 된 것일까? 아니면 뻔뻔해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경망스럽게도 반사회적인 결말을 잔뜩 기대한 나의 불찰도 있겠지만, 부조리와 부당함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현실에 만족할 줄 알고, 더불어 자신의 분수에 맞는 삶을 찾으라는 봉건 시대적인 민족성이 엿보이는 것 같아 유치한 맛도 있다.
사실 에이지가 겪었던 부당함은 정도와 형태의 차이는 있을망정 여전히 현대사회에서도 많은 사람을 절망과 비관의 나락으로 밀어붙이는 사회적 병폐이기도 하다. 만약 에이지가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고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라는 격언대로 끝끝내 복수를 강행했더라면 그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런 일을 감행할 용기도 배짱도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크게 헤칠 만큼 모질지도 못하므로 에이지의 통쾌한 복수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독자의 무능함과 비겁함을 은근하게 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유한 타인을 보면서 부유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처럼 에이지의 복수를 보면서 그러질 못하는 자가 받게 될 비참함과 수치심은 상당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야마모토 슈고로는 에이지가 제 살을 깎는 복수에 인생을 허비하게 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게 한다. 현실적인 선택이지만, 그것이 바로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밖에 없는 하층민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속을 박박 긁는 말이지만, 세상은 절대 만만하지 않고 우리 삶 역시 절대 우리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그때마다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길을 선택할 뿐이다,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훈을 되풀이하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우리가 울분을 느끼는 족족 후지산 폭발하듯 우당탕 터트려 버렸다면 지금과 같은 평온한 세상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이야기에서도 나름의 감흥을 끌어낼 수 있는 야마모토 슈고로의 교묘한 필력이 새삼스럽다.
불평불만 삼키고 묵묵히 일하는 당신은 ‘사부’
소설 제목은 ‘사부’지만, 몇몇 사건을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은 사부(‘사부님 제자님’ 할 때 그 師傅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 ‘사부’)가 아니라 그의 하나뿐인 절친 에이지다. 사부는 조연 격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의 반 푼 몫도 못 하는 희미한 존재감을 가진 인물로서 말이다. 그렇다면, 왜 소설 제목이 ‘사부(さぶ)’일까?
사부는 마음이 약하고 이렇다 할 재능도 없다. 또한, 사부는 둔하고 우직하다. 둔하고 우직한 사람이 그렇듯 사부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며 ‘무능’이라는 허물을 메우듯 매사 참을성 있게 착실하게 임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다 할 지혜도 능력도 없는 사부를 얕보고 무시할 뿐만 아니라 사부의 장점을 악용하여 부려 먹고 혹사시킨다. 그런 악덕 업자 같은 부류엔 부모 형제도 예외일 수 없다. 정말이지 부랑자 수용소의 누구 말처럼 살아 있는 말의 혀를 뽑아갈 것 같은 야박한 세상이다. 반면에 에이지는 머리도 좋고 솜씨도 좋고 얼굴도 잘생기고 행동력도 강한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그런 강인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모진 풍파를 겪고 방황하지만, 끝끝내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팔딱 일어나 용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야무진 에이지 눈엔 굼벵이인 데다가 무슨 일이 생겨도 타인을 탓하기보다는 자책하기 바쁘고, 한편으론 대책 없이 선량하기만 한 사부가 마음에 찰 리가 없다. 에이지는 늘 자신에게 의지하려 드는 사부가 한낱 어린애처럼 구는 한심한 어른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에이지는 깨닫게 된다. 부랑자 수용소에서 평범한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 마음의 모순, 삶의 괴로움과 고단함을 절실하게 배운 에이지는 세상에서 명장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는 적건 많건 모두 사부 같은 사람이 뒤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지어진 아파트를 보고 브랜드를 칭찬하거나 기억할지언정 그 아파트를 짓는데 몇 년의 삶을 고스란히 바친 인부들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기 마련이고, 어느 사회를 가던 그런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사부는 그들을 대표한다.
인내와 체념을 미덕으로 신봉해야만 그나마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버려진 영혼처럼 희미했던 사부의 존재감이 안드로메다의 기계 몸이라도 얻은 것처럼 명확하고 강인한 존재감으로 재탄생하던 그 순간만큼은 무한한 위안으로 다가올 것 같다. 특히 전쟁의 패배가 안겨준 충격과 슬픔과 상처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상실당한 일본인들에게 사부의 부활과도 같은 존재감 회복이 안겨줬을 감동과 희망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이것이 스테디셀러의 발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으론 그것은 태평양 전쟁에 희생된 민족이 결코 이 작품에 100% 감응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시카와섬 인족기장은 그림 중의 우측 중단 약간 위에 있다 (출처: 手厚い“更生”施設、松平定信の「人足寄場」)> |
230여 년 전에 실제 존재했던 부랑자 수용소
읽는 내내 감탄했던 것은 에이지의 성장도 아니고 사부의 존재감 회복도 아니었다. 바로 에이지의 인생 학교가 된 에도의 부랑자 수용소다. 『붉은 수염 진료담』에선 빈민구제시설로 기능했던 고이시카와 양생소(小石川養生所)라는 무료 의료 시설이 흥미를 끌었다면, 일종의 부랑자 수용소로 기능했던 인족 기장(人足寄場)이 지금으로부터 230여 년 전인 1790년에 설립되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랐다.
『사부』에서 설명한 그대로 이시카와지마에 설립된 갱생 시설인 인족 기장은 무숙자나 부랑자는 물론, 재범의 우려가 있는 사람 등을 남녀 불문하고 수용해, 먹여 주고 재워주며 치료도 무료로 해줄 뿐만 아니라 직업 교육도 병행하고 임금도 주는 매우 현대적인 복지 시설이었다.
봉건 전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 주는 이런 점 때문에 에도라는 도시를 알면 알수록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당시의 에도가 세계적으로도 경제 수준이 높았던 도시 중 하나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도시가 부유하지 않고서는 이런 복지 시설을 운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세심한 대까지 신경을 썼던 그들의 의식 수준도 높이 살만하다. 다만, 에도의 풍요로움이 모든 백성의 고른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농민에 대한 가혹한 착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야마모토 슈고로의 시대소설과 미야베 미유키(宮部 みゆき)의 시대소설(특히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을 놓고 보면 하나는 에도의 음지를, 하나는 에도의 양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두 작가의 작품을 포개 놓으면 좀 더 온전한 에도가 신기루처럼 펼쳐진다. 훌륭한 시대소설을 찾는 독자에게 이만한 선물도, 이만큼 적절한 조합도 없을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에 글을 쓰고 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올여름이 살그머니 물러나는 시기인 지금 어느덧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달을 품어 희뿌옇게 밝은 구름에서는 지상 인간들의 슬픔과 탄식과 기쁨의 덧없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은 은밀한 따스함이 느껴지고, 습기를 품은 공기에서는 용기가 없는 겁쟁이라서 부당함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따위 일에 내 소중한 인생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하소연 비슷한 잠꼬대들이 축축하게 느껴진다. 당신도 사부이고 나도 사부이지만, 그래서 뭐 어떻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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