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염 진료담 | 야마모토 슈고로
무려 7번이나 리메이크되었던 드라마의 원작
야마모토 슈고로(山本周五郞)의 『붉은 수염 진료담(赤ひげ診療譚)』은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영화 「붉은 수염(赤ひげ, Red Beard, 1965)」의 원작이자 TV 시리즈로도 만들어졌던 연재소설집이다.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의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 미스터리 시리즈인 ‘미야베 월드 제2막’처럼 시대소설로 읽을 수 있는 『붉은 수염 진료담』은 (막부가 에도에 설치한 빈민 구제시설로 막부 말까지 140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고이시카와 양생소(小石川養生所)라는 무료 의료 시설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김용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중국에서 반복적으로 리메이크되는 것처럼 『붉은 수염 진료담』도 일본에서 TV 시리즈로 여러 차례 (무려 7번!) 리메이크되었다는 사실은 작품성 운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본인에게 미친 정서적인 파급력이 꽤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각다귀처럼 서로 물어뜯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간과 쓸개마저 내주는 에도시대 하층민의 진득한 인간성은 현대인의 텁텁해진 감성을 정화하고 무신경해진 감정을 아릿하게 파고드는 진솔한 감동을 자아낸다.
<고이시카와 양생소 우물(ZCU - 投稿者自身による著作物, CC 表示-継承 3.0, リンクによる)> |
국민 가수는 있는데 국민 작가는 없는 부끄러운 현실
그런데 갑자기 ‘김용, 야마모토 슈고로의 작품들처럼 한국에도 영화나 드라마로 여러 번 리메이크될 정도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문학들이 있었던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처럼 국민 작가로 손꼽히는 작가가 있었던가?’ 하는 탄식이 만성비염으로 공기도 겨우 드나들 정도로 협소한 콧구멍을 힘겹게 뚫고 흘러나온다.
(2022년 7월 기준) 구글에서 ‘한국의 국민 작가’로 검색하면 젤 첫 줄에 나오는 것은 부끄럽게도 나쓰메 소세키 관련 글이고, 그 바로 아래는 체코의 국민 작가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 글이다. 좀 더 밑엔 베트남의 국민 작가인 바오닌에 관한 글도 있다.
‘한국의 국민 가수’는 넘쳐나지만 정작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국민 작가가 단 한 사람도 언급되지 못한다는 것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것만 좋아하고 책 읽는 것은 싫어하는 민족성(혹은 문화?)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지 싶어 씁쓸하다. 국민이 책을 안 읽으니 국민 작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나처럼 책을 좀 읽는 사람조차 한국 문단에 대한 선입견을 품고 (그 증거로 내가 읽는 책 중 한국 작가의 작품은 매우 드물다) 있으니, 한국이 ‘노벨문학상’ 운운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다.
국민이 책을 안 읽으니, 책의 가치를 알 도리가 없다. 책의 가치를 모르니 글쓰기 교육은 등한시되고 글쓰기 환경은 또 얼마나 열악한가. 한국에서 좋은 작가가 탄생하길 바라는 것은 중국 축구계에 메시가 등장하길 기다리는 것과 매한가지다.
글쓰기와 독서는 창조력과 사고력을 키우는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이고 저렴하고 유일무이한 수업인데, 이것이 없으니 (아무 생각 없이 남이 하는 데로 따라 하고 보는 식의) 부동산 투기와 프랜차이즈가 성행할 수밖에 없고, 서민들의 삶은 끝없는 무한 경쟁에 휩쓸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소설 작가들
맺힌 한이라도 풀듯 토로한 별 시답지 않은 앞글은 잊어버리고, 『붉은 수염 진료담』이라는 소설을 알게 된 것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흑백』 끝에 실린 ‘편집자 후기’를 통해서다.
일본에는 괴담이나 전설을 바탕으로 삼아 서민들의 생활을 그리는 작가들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고, 대표적인 작가로 오카모토 기도, 야마모토 슈고로, 후지사와 슈헤이 등이 있는데….”(미야베 미유키, 『흑백』, 「편집자 후기」 중에서)
언급된 세 사람 모두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로 유명한 작가들인 만큼 시대소설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대충 보아 넘기지 말고 간단하게 메모 정도는 해 둘 필요가 있는 작가들이다.
오카모토 기도 같은 경우는 괴담, 후지사와 슈헤이 같은 경우는 무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야마모토 슈고로의 경우는 하층민부터 다이묘까지 다양한 층의 세태를 다루고, 역사소설부터 탐정소설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쓰는 등 작품 성향의 폭이 넓은 편이지만, 그중에서 『붉은 수염 진료담』처럼 극빈층을 다룬 작품들이 (여러 번 TV 시리즈로 리메이크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작품이 뒤늦게나마 [국내 미출간 소설] 시리즈로 나온 것은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세 작가의 작품 성향은 제각각이므로 입맛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겠지만, 사실 세 작가의 작품 중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은 얼마 되지 않고 그 얼마 안 되는 것조차 대부분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냥 손이 닿는 대로 인연이라 생각하면서, 혹은 감지덕지하게 여기고 담담하게 읽어나가자.
가난했지만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던 사람들
『붉은 수염 진료담』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흥미롭게도 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제2막’ 중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와 유사한 면이 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오치카가 고향을 떠나 주머니 파는 가게인 에도의 숙부 집으로 거처를 옮긴 이유는 영혼이 부서질 정도의 비극적인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붉은 수염 진료담』의 주인공) 야스모토 노보루(やすもと のぼる)가 나가사키에서의 자랑스러운 유학 생활을 마치고 명성과 부가 약속된 오메미에이(御目兄医, 쇼군을 돌보는 의사) 자리가 아닌 빈민 구제시설 ‘고이시카와 양생소’로 입소하게 된 이유도 마음의 상처를 돌보기 위해서다. 둘 다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서 비롯된 불행한 과거를 떨쳐내고자 환경을 바꾼 셈이지만, 오치카는 자발적으로 상경했던 것에 반해 노보루는 반강제적으로 입소하게 된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 전개 방식도 비슷하다. 오치카는 ‘흑백의 방’에 초대된 한 손님 한 손님으로부터 기기괴괴한 괴담을 들으면서 눈물과 피로 얼룩진 상처뿐인 과거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게 되고, 노보루는 양생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으면서 구태의연했던 자세와 의사로서 명성과 부를 쌓겠다는 출세욕과 자만심을 버리고 새로운 자세와 새로운 의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기회와 지혜를 얻는다.
이렇게 주인공들만 놓고 보니 둘 다 일종의 정신적 성장 소설인 셈이다.
하지만, 독자가 읽으면서 느끼게 될 감정이 요동치는 정도와 감정이 소비되는 양의 차이는 꽤 크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는 유복한 상인의 삶을 중심으로 현실로부터 괴리된 일어날 법하지 않은 괴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는 휴식을 취하듯 두 다리 뻗고 마음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반면에 『붉은 수염 진료담』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멀미라도 하는 듯한 심한 감정의 기복을 느끼기에 십상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마치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앞에 두고 짜장면을 먹을 때나 느낄법한 매스꺼운 거북함 때문에 때아닌 곤욕을 치를 수도 있으리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모두 『붉은 수염 진료담』에 등장할 정도의 극빈층이 국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바나나 우유에 첨가된 바나나만큼이나 극히 낮아졌다. 내가 여기에 한사오궁 수준의 문장력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비 오듯 쏟아지고 만들고, 가슴 한구석을 공중화장실의 방치된 변기처럼 꽉 막히게 할 정도로 빈곤하고 궁핍한 삶에 대해 처절하고 절절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약간의 연민 정도는 자극할망정 과거처럼 그것을 나의 일처럼 여기면서 진심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는 말이다. 세상이 좋아져서인지 이제 한 • 일 두 나라 사람에게 가난은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은근하게 이야기되는 괴담만큼이나 내 눈앞에선 일어나지 않을법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많은 사람이 가난했고, 또한 그랬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서로 도우려 하고, 한 접시의 소금과 한 숟가락의 간장도 함께 나눠 먹는 두터운 인정(人情)을 후손들에게 남겨줄 수 있었다. 그들 주위엔 동병상련의 동지들이 심산유곡의 나무들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가난해도 외롭지는 않았고, 아무리 구차해도 빌어먹지는 않을 수 있었다. 미야베 미유키가 에도시대를 계속 쓰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인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 그리고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정말로 있었다.
한편으론 그들은 마치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입증하듯 사람의 추악한 면도 정직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웅덩이에 모인 쓰레기 같은 삶에서조차 흙탕물을 잘바닥거리며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차이를 드러내고, 쥐꼬리만 한 것들을 사이에 두고 선망과 질투와 허식과 오만함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등 사람으로서 가진 욕망 • 욕구 역시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붉은 수염 진료담』을 읽고 나면 “사람만큼 존귀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듬직한 것도 없지만, 또 사람만큼 비루하고 더럽고 우둔하고 사악하고 탐욕스럽고 추잡한 것도 없다”라는 붉은 수염 의사 니이데 교조의 뼈 아픈 통찰에 고개를 마냥 주억거리면서 ‘사람이란 이다지도 나약한 존재구나’ 하는 철학자라도 된 듯한 똥폼도 잠시나마 잡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붉은 수염 진료담』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본인의 사랑을 꾸준하게 받아왔구나, 하는 부러움과 질투의 끊임없는 장탄식에 호흡이 잠시 곤란해지기도 한다.
순문학이냐? 상업소설이냐?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 앞에 서서 기성의 권위에 저항하는 니이데 교조의 신념 중 하나는 매색(賣色)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냐 하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는 한, 욕망을 채워줄 조건이 태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대 사회는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동물의 고유한 본성인 성욕과 식욕을 두고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성욕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쌍방 합의에 따른 계약이라 할 수 있는 매음이 악덕이라면, 식욕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매매인 음식점도 악덕이다. 불필요하게 식탐을 자극하기만 하는 먹방은 (자위행위에 열렬한 도움을 주는) 포르노보다 못한 저질 방송이다. 뭐,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사실 이 길고도 재미없는 글을 여기까지 읽을 정도로 근성과 지성을 겸비한 방문객이라면, 먹방 따위에 탐닉하는 무뇌충은 아닐 테니.
끝으로 야마모토 슈고로의 작품은 통속소설에서 탈피하여 순문학에 도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고, 잘 만든 상업소설일 뿐이라는 평가도 있다. 순문학이냐? 상업소설이냐? 하는 상반된 평가는 최인호에 대한 한국 문단의 태도와도 엇비슷하다. 독자가 순문학과 상업소설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는 제각각이겠지만, 야마모토 슈고로의 작품을 이제 겨우 한 권만 읽은 나로서는 『붉은 수염 진료담』을 순문학으로 치켜세우기엔 뭔가 좀 부족한 것 같고, 그렇다고 고만고만한 상업소설로 깎아내리기엔 아깝기도 한 것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런 논란이 무색하게 야마모토 슈고로 본인은 “문학에는 '순‘도 없고 ’불순‘도 없으며, ’대중‘도 ’소수‘도 없다. 단지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뿐이다”라는 신념으로 일관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듯 나오키상 등 요청받은 문학상을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야마모토 슈고로 사후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만들어졌으니 잘된 일인지 아니면 잘못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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