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루(听雪楼, 2019) | 애증, 복수, 원한, 그리고 쿨럭쿨럭
<감정 없는 눈빛 표정이 압권인 소억정> |
내가 지금까지 감상한 장편의 무협 드라마는 김용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들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편식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간혹 일어나는 무협 드라마에 대한 갈증은 잊을만하면 리메이크되는 김용 원작 드라마만으로도 충분히 해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고두고 읽어도 질리지 않는 김용 소설의 작품성이 워낙 뛰어난지라 이것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 역시 아무리 못 만들어도 보통은 넘을 수밖에 없다. 혹은 드라마의 완성도나 재미가 기준 미달이 되더라도 원작에 대한 변함 없는 사랑과 관심 때문에 어지간하면 끝까지 보게 마련이다.
고로 나의 무협 드라마 편력 기준엔 알게 모르게 ‘무협 드라마는 김용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만 한 것이 없다’라고 살짝 각인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여기에 합당한 의문을 제시하며 금기를 깬 것이 「강호 명탐정 간부지(侠探简不知)였다.
이렇게 금기가 깨지자 무협 드라마에 대한 억눌린 호기심과 탐욕은 베를린 장벽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봇물 터지듯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래서 내친김에 다른 무협 드라마를 찾게 되었고, 그런 특별한 것도 없는 사연을 품고 간택된 드라마가 「청설루(听雪楼)」다.
<시가 절로 읊어질 것 같은 정취를 자아내는 청설루> |
─ 听雪楼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 하얀 눈으로 정갈스럽게 뒤덮인 청설루의 고풍스러우면서도 그윽한 아취가 향기처럼 은은하게 풍기는 자태는 보는 이의 정서에 울림을 남기고도 나오는 빼어난 경치다. 청설루 저택들의 입체적이면서도 복잡하지 않고 원형을 중시한 독특한 디자인 역시 매혹적이다.
원 왕조 시대의 중국 화가 양유정(楊維禎)이 말한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구가 되고 붓이 닿기만 하면 글이 될 것 같은, 혹은 중국 옛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차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아취를 자아내던 아집(雅集)을 열기에 더할 나위 없는 그런 장소다.
<미모, 무공 모두 맞수인 서정용과 명하> |
그러나 드라마는 모질게 작심이라도 한 듯 ‘雪’이 연상시키는 깨끗하고 순결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내달린다. 삼국지의 나라답게 배신, 음모, 이간질 등 추잡한 계략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끝없는 복수의 집념과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원한의 굴레가 보는 이의 정서를 초췌하게 만든다. 검에 피 마를 날이 없는 날이 없듯, 많은 사람이 개인들 간에 얽히고설킨 복수와 원한이라는 독기 서린 거미줄에 걸려드는 바람에 병장이 돌리는 예초기에 베어지는 풀처럼 무참히 죽어 나간다.
집요한 ‘복수’와 ‘원한’으로 얼어붙은 정서를 ‘로맨스’가 다소 풀어주는 듯하지만, 로맨스에 빠질 수 없는 화학조미료 같은 독한 양념인 ‘증오’와 ‘질투’가 곧 해동되는 듯한 정서를 다잡는다.
<올해 최고의 발암 캐릭터 지소태> |
드라마는 편을 거듭할수록 비루한 이야기로, 그리고 막판으로 갈수록 막장 이야기로 흘러가지만, 초중반은 그렇지 않았다.
보통의 남자라면 미모의 여자 캐릭터에 홀리는 재미도 드라마 감상 포인트 중 하나다(여자라면 그 반대일 것이다). 하지만, 「청설루(听雪楼)」는 절대영도 같은 냉담함과 미세한 감정의 요동조차 허용치 않는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상대의 계략을 꿰뚫는 명민한 두뇌를 갖춘 소억정(萧忆情, 친쥔제秦俊杰)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나의 흐리멍덩한 혼을 살짝 빼놓는다. 그랬기에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달는 와중에도 끝끝내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무시하고 것도 아니고 멸시하는 것도 아니면서도 무심하게 바라보는 듯한 눈빛 표정이 압권인 소억정은 같은 남자로서 참으로 부러운 캐릭터다. 소억정의 타고난 한증만큼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한증은 현명신장에 당한 장무기가 그랬던 것처럼 구양진경으로 치료하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골이 날 정도로 들은 소억정의 기침 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하다.
초중반까진 오롯이 소억정에 대한 갈망과 그의 손바닥 안에서 펼쳐지는 첩보 놀이 같은 두뇌 플레이 때문에 드라마를 감상했다면, 그 이후로는 명하(明河, 안젤라 유안袁澧林)의 눈물이 나도록 안쓰러운 처지 때문에 보게 된다.
<왜 난 이 장면에서 배꼽을 잡았을까?> |
어떤 장르임에도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당은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인데, 「청설루(听雪楼)」의 대표적인 악당이 바로 배월교(拜月教) 교주 명하다.
어미를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독한 여자로 나오는 명하는 위태로운 지위를 지키려고 혈안이 된 나머지 명분 없는 권력을 지키려고 공포 정치를 펼친 독재자들처럼 시종일관 악랄한 술수로 청설루와 맞선다. 악당이 하는 짓이라면 응당 분노를 일으켜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명하의 잔인한 행동은 처절한 발악처럼 보여 보면 볼수록 안쓰럽기만 하다. 여기에 이룰 수 없는 사랑까지 더해지니 억장이 무너진다.
이외에도 성질머리가 좋지 못한 시청자를 위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소태(池小苔, 린유안林源)라는 ─ 내가 선정한 2020년 최고의 ─ 발암 캐릭터가 시청자의 분노를 활활 지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소태의 민폐는 그저 큰 심호흡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약소한 것이 아니다. 보이는 곳에 경전이나 성경을 두고 분노가 욱하고 치밀어 오를 때마다 기도문을 외우던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손이 닿는 곳에 최소 절반 이상 채워진 소주병이라도 두어야 지소태로 인한 화병을 다소 누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절대 빈말이 아니다.
그리고 지소태의 활약이 주춤해질 때 그 배턴을 잇는 것이 바로 석명언(石明烟, Gigi Jess Dong董慧)이다. 쥐방울처럼 생긴 것이 감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소억정 앞에서 날뛰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하니 정말이지 피를 토하고 싶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울컥 피를 토하는 장면이 웃길 정도로 많이 나온다. 뭐만 했다 하면 자랑이라도 하듯 너도나도 피를 토하는 것이 나중엔 질릴 정도다.
드라마가 길었던 만큼 글도 길어지고 말았다. 내 취향에서만 본다면 로맨스적인 요소를 과감히 배제하거나, 아니면 김용 소설처럼 좀 더 작은 비중으로 가져갔더라면, 더 재밌게 봤을 드라마지만, 요즘 드라마에 남녀 간의 운우지정을 빼놓는다면 팥소 없는 팥빵으로 팥빵 장사를 해보겠다는 객기나 다름없으니 본전도 못 뽑을 것이다.
끝으로 드라마 「청설루(听雪楼)」는 Cang Yue(沧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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