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역 귀신(Ogsuyeog gwisin, 2022)
과자에 대한 복수, 영화에 대한 여정
<영화에선 이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데, 믿어져?> |
오늘 밤은 왠지 그랬다. 무더위가 미친개처럼 날뛰는 한여름도 아닌데, 잠이 안 온다. 잘 안 먹던 스낵을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뱃속은 더부룩하다. 잘 익은 수박만 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수북이 담긴 스낵을 마치 너희들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있다는 듯 잠시 째려본다. 녀석들은 자신들이 피고석에 선 것을 알 리 만무하지만, 영악하게도 묵비권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구수한 향기와 짭짤한 맛으로 날 유혹한 녀석들에 대한 응징으로 모두를 내 위액으로 철저하게 녹여버리자. 그러려면 적당한 영화가 필요하다. 연쇄살인마가 칼로 시체를 조각낼 때 클래식 음악을 곁들임으로써 기세와 운치를 더하는 것처럼, 손으로 스낵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단순 무식한 행동에 ‘영화 감상’이라는 운치를 더함으로써 그럴듯한 ‘문화생활’로 포장할 수 있으니.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옥수역 귀신이라면 믿어지려나?
강 건너 역에 숨겨진 괴담
<이런 폐역사, 진짜 있으려나?> |
알고 보니 작가 호랑의 웹툰이 원작이란다. 하지만, 지금껏 웹툰이라곤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웹툰 쪽은 문외한이니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공포영화는 그저 재밌으면 그만이니까.
우리 집 강 건너에 있는 역에서 전철을 타면 직행할 수 있는 친숙한 역에 이런 괴담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짜릿한 상상에 겨울 한파 같은 차가운 뭔가가 뼈만 앙상한 등짝을 살짝 훑고 지나가는 것 같다. 오싹하다.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 닫은 것처럼 스산한 기운이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영화는 보면서 몇 번 느낀다.
시답잖은 평은 무시하고
<이 장면을 보고 '링'을 연상시키지 못하면 그것 또한 바보 같은 일> |
몸에 난 자국을 긁는 건 '부산행'을, 사람의 등에 올라탄 아이는 ‘주온(呪怨)’을, 우물은 ‘링(リング)’을, 저주를 누군가에게 옮기는 것은 ‘주(咒)’를. 이 장면은 저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는 등의 시답잖은 말들이 좀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모든 공포영화에선 ‘우물’은 등장하면 안 되는가? 이런 평들은 그저 깎아내리기 위한 트집일 뿐이다. 찌라시보다도 못한 수준 낮은 평 때문에 「옥수역 귀신」을 외면한다면, 그거야말로 악플러들의 바람이며 얕은꾀에 넘어가는 얕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실 공포영화 좀 봤다는 사람치곤 ‘우물’을 보고 링을 연상시키지 못하면 그것이 더 바보다.
과거의 비밀을 밝혀라
<피부과 의사의 진찰 기록 같은 염습사의 부검 기록> |
오래된 전철역에서 일어나는 이유 불분명한 사망 사고들. 그리고 사고 현장이자 지하 깊숙한 외부인 출입 금지에서 목격되었다는 아이.
알다시피, 영화는 저주와 원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저주를 다룬 영화들이 그렇듯, 그 저주의 근원은 사람과 사회에서 잊힌 오래전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가십 매체 기자인 김나영(배우 김보라)이 풀어나갈 과제이자 영화의 줄거리이다.
마치면서
<사장에게 통쾌한 복수 후 흐뭇하게 직장을 떠나는 김나영> |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어져 가는 이야기, 간간이 등장하는 무서운 장면, 반전과 통쾌한 복수극 등 꽤 많은 흥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한 번 재생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 말게 하는 그런 영화다. 상영 시간이 짧은 것도 있지만, 끌어들이는 재미가 있으므로 체감 감상 시간도 짧다. 주인공 김나영을 괴롭힌 언론사 사장에 대한 복수가 다소 싱겁게 끝나는 등 아쉬운 요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저예산 영화에 이 정도 재미와 공포라면 충분히 별 4개는 줄 만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결말은 매우 슬프다. 원한의 주체가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옥수역은 1980년대 완공된 역사이고, 그 시절이라면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을 법한 그런 시절이다. 3호선보다 훨씬 이전에 개통된 1 • 2호선 같은 경우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고도 남을법한 그런 시절이다. 아마 찾아보면 비슷한 일이 유물처럼 무수히 발굴될지도.
아무튼, 슬프다. 오늘 인천 제부도에서 영아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출산율 저하는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야 하는 것인데, 그것조차 제대로 못 하는 대한민국. 100년 후,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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