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데스노트(デスノート, 2015)
변함없는 인기, 변함없는 재미
원작 만화는 안 봤지만, 후지와라 다쓰야(藤原 竜也) 주연의 영화판 세 편은 모두 감상했고, 그저 그런 미국판도 봤으니, 최초의 데스노트 TV 시리즈라는 이유로 방영 전부터 뜨거운 논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이 드라마를 그냥 지나친다면 왠지 모를 죄를 짓는 것 같아 부랴부랴 감상해 버렸다.
영화판에서 후지와라 다쓰야가 연기한 야가미 라이토와 마츠야마 켄이치(松山 研一)가 연기한 L의 이미지가 꽤 강렬했던지 새로운 두 주인공(야가미 라이토: 쿠보타 마사타카, 窪田 正孝, L: 야마자키 켄토, 山崎 賢人)에 적응하면서 약간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이 두 사람의 연기가 앞의 두 사람 못지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데스노트’라는 소재 자체가 하염없는 호기심을 불러와서 그런지 초반의 망설임은 어느새 기대감으로 변해있었고, 덕분에 꽤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야가미 라이토
원작의 라이토는 천재형이라 하는데, TV 시리즈의 라이토는 “굶지 않을 정도로 벌고 큰 사고 없이 지낼 수 있으면 족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평범한 대학생이고, 평범한 대학생답게 꿈 또한 평범하게 공무원이다. 이렇게 원작 캐릭터 설정에 대대적인 변화가 가해졌다는 이유로 원작 팬들은 불만이 많았다고 하는데, 팬으로선 ‘데스노트’의 첫 TV 시리즈이니만큼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원작을 대폭 수정한 개작은 훗날 나와도 늦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원작의 주요 주제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라이토의 뒤틀린 정의감과 예측할 수 있는 L의 돌발적인 행동 등에 대한 세부적인 면은 영화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고 데스노트를 처음으로 사용한 라이토는 죄책감으로 인한 번뇌에 잠시 휩싸이고, 그러다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자를 죽였을 뿐이라고 자위하고, 그러다 막판엔 세상 모든 범죄자를 처단하는 신이 되고자 하는 야망으로 부풀어 오른다. 악을 멸하고자 악이 되어버린 야가미 라이토, 아니 키라는 정말 필요악인가?
평범한 대학생과 광기 어린 키라 사이를 오가는 쿠보타 마사타카의 섬뜩한 연기가 볼만한데, 그런데 왜 키라가 되었을 땐 건방지게 목소리를 내리깔지?
L
키라를 쫓는 외톨이형 천재 명탐정 L.
그는 초반부터 키라의 정체가 야가미 라이토임을 눈치채는 유일한 인물인데, 그런데도 라이토와 친구가 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L의 말로는 라이토가 생애 첫 친구라는데, 이 만남은 단순히 키라를 꾀어내기 위한 계책일까? 아니면 진짜로 우정의 발로인가? 이후 두 사람은 협력을 가장한 숙명의 대결을 펼치면서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데스노트’에서 미스터리적인 재미는 여타 추리소설처럼 누가 범인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범인이 이미 누구인지 시청자 앞에 드러난 상태에서 탐정과 범인의 지능적인 숨바꼭질 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L은 키라의 정체가 라이토라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고, 반대로 라이토는 L의 수사를 교묘히 역이용하면서 방해꾼 L을 제거할 흑심을 품고 있다.
이 두 사람의 두뇌 대결이 가관이긴 한데, L이 바둑 고수처럼 너무 많은 수를 내다보고 있고, 또 그것을 때때로 숨기고 있어 약간은 김이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인데, L은 죽어서도 말이 많다. 살아 있을 때부터 귀신처럼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그 버릇을 죽어서도 버리지 못하니 정령 L은 죽으나 사나 추리에 미친 탐정이다.
마치면서
키라가 제시하는 평화로운 세상은 모든 범죄자를 죽이는 것이다. 그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겐 귀가 솔깃한 이야기다. 사형 제도가 없어지는 추세이고, 웬만해선 사형을 선고하지도 않고 집행하지도 않는 현재의 사법제도를 고려하면 범죄자들을 그 즉시 죽인다면 그들이 출소해 다시 범죄를 일으킬 걱정이 없어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키라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제거하거나 절하시키는 위협이다. 국가를 지탱하는 공권력은 국민을 체포하고 심판하는 사법권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볼 때, 데스노트의 힘으로 적법한 절차를 무시한 채 사형을 멋대로 집행하는 키라는 공권력을 집행하는 사람들 처지에선 권력과 밥그릇을 위협하는 경쟁 상대다. 만약 정부가 키라를 인정한다면, 사법부는 필요가 없어지고 경찰은 키라의 끄나풀 정도로 전락한다.
정부에 대한 키라의 위협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정말 키라의 열망대로 모든 범죄자가 죽는다면, 키라의 다음 목표는 누가 될까? 그것은 바로 부패한 정치가와 관리들이다. 사실 세상에 끼치는 폐해는 한 명의 범죄자보다 한 명의 부패한 정치가가 훨씬 더 크다는 점에서 난 데스노트에 범죄자의 이름을 적기보단 몹쓸 정치가들의 이름을 먼저 적을 것이다.
여러모로 정부 입장에선 키라는 인정할 수 없는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런데 키라의 선언대로 범죄자가 다 죽는다고 평화가 올까? 내가 볼 땐 인류가 멸절하지 않는 이상 지구의 진정한 평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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