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4

드라마 녹정기(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드라마 리뷰 |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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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드라마 리뷰 |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건녕 공주의 핍박에 울상을 짓는 위소보>

영웅문, 소오강호 등 이미 한 번 이상 원작을 읽었음에도 원작을 각색한 드라마를 즐겨보게 되는 이유는 미녀를 감상하는 아주 약간의 흥취보단 우직하게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설 자리를 잃은 약삭빠른 현대사회에서 나날이 희귀해지는 올망졸망한 의협심을 자극하는 힘 있는 이야기와 지존을 갈망하다 아무것도 결실을 맺지 못한 채 한 줌의 재로 화할 고만고만한 운명을 짊어진 뭇 남성들의 비애를 어루만져주는 주인공의 화려한 일대기 등이 꿈자리에서나마 대장부다운 기를 펴주기 때문이다.

무협지 대부분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뿌린 대로 거둔다.’ 같은 피를 뿌리는 통쾌한 복수식의 정의구현을 앞장세움으로써 부조리와 부당함을 인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타락한 사회에 순종해야 하는 비루먹을 고충을 타고 난 우리의 민망한 인생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망각의 지혜를 선물한다.

또 다른 녹정기 드라마, 「드라마 녹정기(鹿鼎记, 2008)

드라마 리뷰 |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온순한 증유 역을 맡은 종릴리(钟丽丽)>
드라마 리뷰 |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왈가닥 건녕 공주 역을 맡은 탕이신(唐艺昕)>

그러나 「녹정기(鹿鼎记)」는 이전의 김용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 리뷰에서도 말했듯, 천고 제일 꼬마 망나니 위소보를 앞세운 ‘녹정기’는 정직하고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보다는 적당히 비열하고 적당히 교활하고 적당히 악독한 사람이, 그리고 적당히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속세의 잔인한 세태를 풍자한다. 잘 먹고 잘살려면, 위소보 말대로 양심은 눈곱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김용의 이전 작품 같은 호탕하고 호기로운 맛은 전혀 없음에도, 그리고 이미 소설을 읽었음에도 왜 드라마까지 감상해야 하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오직 망나니 위소보의 잘난 일곱 마누라 때문이다.

드라마 리뷰 |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순진한 목검병 역을 맡은 관신(关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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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방이 역을 맡은 왕지쉬안(王祉萱)>

어떤 여인은 간드러지도록 화사하고, 어떤 여인은 온순하고, 어떤 여인은 활발하고, 어떤 여인은 단정하면서도 수려하고, 어떤 여인은 차가운 기품이 있고, 어떤 여인은 톡 쏜다. 이 일곱 빛깔 무지개 같은 일곱 미녀를 어떤 특색을 지닌 여배우들이 어떤 식으로 소화할 것인가!

하는 엉큼한 호기심이 이가 갈리도록 질투 나면서도 한편으론 진정한 인생의 승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소보를 우러르는 동기가 되어 대체로 평안 무탈한 심정으로 드라마 감상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드라마 리뷰 |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뇌쇄적인 홍 부인 역을 맡은 주주(朱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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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쏘는 아가 역을 맡은 궈양(郭泱)>

광대 같은 과장된 표정, 눈알 굴리기,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말발 등 위소보 역을 주성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익살스럽게 잘 소화해 낸 장이산(张一山)의 연기가 볼만하다. 내가 볼 땐 장이산을 역대 최악의 위소보로 평가하는 또우반(豆瓣)의 평점이 조금은 못마땅할 정도다.

어쩌면 장이산에 대한 가혹한 비판은 원작을 읽지 않은 소치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원작에서 위소보는 고작해야 중학생 정도 나이에 뻔뻔스럽고 비열하고 얌체 같은 짓을 천연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작은 이모뻘 되는 여자조차 희롱하고 강간하는 그런 파렴치한 개망나니다.

물론 그것을 전 국민이 보는 드라마로 그대로 옮겨올 수는 없을 것이고, 그래서 각색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이 순화되었다고는 해도 (당연히 강간 장면은 생략되었고, 위소보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여 성공하는 예도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캐릭터를 연기하기는 쉽지 않다. 역대 녹정기를 감상하지 못한 나로서는 장이산이 최고의 위소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망나니가 되고자 들인 노력은 치하하고 싶다.

드라마 리뷰 |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순종적인 쌍아 역을 맡은 귀여운 양키루(杨祺如)>
드라마 리뷰 | 녹정기(鹿鼎记, 2020) |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일곱 빛깔 일곱 마누라의 위력!>

드라마는 2005년 개정된 원작을 각색한 것으로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텍본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용 작품 중 가장 긴 소설이라 그런지, 아니면 내 기억력과 관찰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드라마만 가지고선 어느 부분이 어떻게 개작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건 나의 경우이고, 김용 소설을 달관한 애독자는 셜록 홈스가 되어 원작과 개작과 각색의 차이를 간파해 보는 것도 독자적인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원작을 읽었기 때문에 (원래 그런 것인지 한국어판 편집 과정에서 잘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간혹 띄엄띄엄 건너뛰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고, 초중반까지는 이야기가 진득하게 잘 나아가는 듯하다가 중후반부에 가서는 배우들이나 스텝들이나 모두 지쳤는지 후다닥 마무리하려는 듯한 서두름이 느껴진다(전반부보다 후반부에 생략된 이야기가 더 크다. 특히 후반부 핵심인 나찰국과 관계된 거의 모든 이야기가 생략되었다). 어쩌면 시청률이 저조해 예상보다 일찍 끝내야 했던 비극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드라마 녹정기에서 중요한 것은 위소보의 일곱 빛깔 무지개의 일곱 마누라를 음미하는 음침한 상상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위소보의 일곱 마누라 중 단 한 명만 얻어도 염복을 누린다고 땅땅거릴 수 있고, 둘을 얻으면 염복이 터졌다는 질시를 얻게 될 것이고, 셋 이상을 얻으면 질투에 눈이 먼 남자에게 분명 살해당할 것이다. 라고 해도, 뭇 남성들은 위소보처럼 제대로 염복을 누릴 수 있다면 내일 당장 죽어도 좋다고 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비참함을 그대는 알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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