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 이 영화 없이 판타지를 논할 수 없다
<이렇게 보니 호빗의 앙증맞은 몸이 조금은 어색하다> |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 후 DivX 열풍이 불면서 영화 감상 방법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비디오 • DVD 대여가 아닌 인터넷 다운로드로 DVD급의 고화질 영화 감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당시 DivX로 코딩된 영화들의 유통 경로는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eMule이나 웹하드의 맨살 같은 공유 클럽이 대부분을 차지했었다. 덕분에 난 지금까지 수천 편(적어도 4천 편 이상)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고, 그렇게 20여 년 동안 감상한 영화 목록은 고스란히 엑셀 파일에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수천 편의 영화 중 예전에 봤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도 아니고 즉흥적인 기분에 의해서도 아닌 명확한 의도와 유쾌한 의지를 품고 잊을세라 꾸준히 찾는 영화는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 스타워즈, 에이리언, 인디애나 존스, 터미네이터, 이블 데드, 그리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그렇다.
<나도 한 필의 말이 되어 달리고 싶다> |
앞에 열거한 영화들은 ─ 최소한 나에겐 ─ 봐도 봐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재미가 고밀도로 농축된 명작 중의 명작들이다. 특히 반지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은 만약 내가 오늘 횡사한다면 극장에서 본 마지막 영화가 될 녀석이기도 하다. 말이 나온 김에 「왕의 귀환」의 명장면을 언급하자면 단연코 미나스 타리스 전투일 것이다. 쓸어도 쓸어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악의 무리를 아라고른이 데리고 온 사자(死者) 부대가 호랑이가 질겁해 얼어버린 먹잇감을 덮치듯, 혹은 미세먼지가 도시를 덮치듯 악의 무리를 뒤덮고 쓸어버리는 장면은 짜릿한 승리감과 후련한 통쾌함의 멋진 앙상블이다.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명장면이지만, 재밌게도 원작(『반지의 제왕 | 고품격 판타지』)에서는 미나스 타리스에 도착하기 전에 아라고른이 저주를 풀어주기 때문에 영화 같은 일어나지 않는다(원작은 영화보다 더 재밌다!).
<인류는 이런 전쟁을 숱하게 치러왔다. 왜?> |
아무튼,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많은 사람에게 군더더기 없는 감동과 만장일치의 재미를 보장하는 이유는 절대 악과 선의 대결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 아닐까 싶다.
동정의 여지가 없는 사악한 세력을 궤멸시키는 데는 갈등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바퀴벌레를 죽이는 것조차 양심의 거리낌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오크의 냄새나는 칙칙한 목덜미를 단칼에 베이어버리는데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공중으로 툭 튀어 오른 오크의 머리통을 회심의 미소로 바라보며 환호성을 내지를 것이다.
가책의 부담 없이 마음 놓고 죽일 수 있는 절대 악을 인류의 오랜 미덕인 선량함이 갖은 시련과 우여곡절 끝에 쳐부순다는 설정은 보편적인 도덕심을 갖춘 모든 사람의 죽은 듯 지내오던 정의감을 한순간이나마 깨워주는 마음속에서 터지는 폭죽 같은 것이다. 불꽃 축제를 지켜보는 것 같은 맑고 순수하고 웅장한 감동이다.
<용기와 충성의 본보기 샘은 해피엔딩을 누릴 자격이 있다> |
무협이라는 장르엔 김용(金庸)이 있다면, 판타지라는 장르엔 J.R.R. 톨킨(Tolkien)있다는 말에 딴지를 걸 만큼 무식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난 불모지였던 장르를 개척한 두 선구자를 역사의 뒤안길에 묻을 만큼 뛰어난 ─ 작품을 운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게을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아직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이 포문을 연 이후로 서점엔 두 사람의 아류작처럼 보이는 소설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음에도 말이다. 그만큼 대작이라는 말이며, 그 대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 「반지의 제왕」 역시 일부러 몇 번을 다시 꺼내 볼 정도로 내 삶 속에 깊이 스며든 명작이다. 소설이나 영화나 이렇게 뼛속 깊이까지 각인되는 작품은 일생에 걸쳐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가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이후 일라이저 우드(Elijah Wood)가 출연한 다른 영화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호빗 이미지가 화면 속에 겹쳐지는 통에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할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반지의 제왕」 이후 출연한 작품들에서 주목할만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의 호빗 이미지는 비석에 새겨진 음각의 비문처럼 견고했다.
전쟁의 참혹함과 처참함을 이 정도로 살벌하게 표현한 영화도 드물다. 전투 시작 전의 그 긴장감 때문에 내 손바닥은 올챙이가 헤엄칠 정도로 땀으로 흠뻑 적는다. 하지만, 전쟁의 영광과 그 당위성을 이렇게 장렬하게 표현한 영화도 드물다. 사우론에 대항하는 전쟁은 친구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그밖에 소중하게 여겨온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물줄기 같은 작은 의지와 용기들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마침내 절대 악을 파도가 나룻배를 삼키듯 집어삼킨다는, 보는 이의 감정을 꼼짝없이 들끓게 하는 요소들로 만만의 채비가 되어 있다. 정말로 시원하고 통쾌하고 짜릿하다.
내용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 배경도 이에 못지않다. 아직도 지구에 이런 대자연이 살아 있나 하는 감탄과 안심으로 탄복하게 할 정도로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장관도 도시라는 암흑 속에 갇혀 사는 우리의 정서를 퍼뜩 환기시킨다.
아이에겐 꿈과 희망을, 어른에겐 동심을, 노인에겐 추억을, 남자에겐 모험심을, 여자에겐 낭만을 산타할아버지의 큼직한 선물 보따리라도 터진 것처럼 인심 좋게 퍼주는 이 영화를 놓치는 일생일대의 실수는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노파심에서 몇 자 적어본다는 것이 또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다. 조금은 늦게 찾아온 겨울이랄 지라도 어김없이 해는 저물기 마련이지만, 나의 글발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늘어나기만 하는 식탐처럼 옹졸하게도 쉽게 줄어들지 기미가 없으니 고질병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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