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의 전성시대(Yeong-Ja's Heydays, 1975) |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했던 그녀들의 슬픈 연가
"난 하루라도 빨리 푹푹 썩어서 죽어버리고 싶은 여자야. 날 동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정말 날 생각해 준다면 날 이대로 내버려 둬. 가끔 놀러 와 주면 되는 거야" - 영자
"시끄러워" - 창수
운전사가 되어 돈을 벌고 싶은 영자와 양복점을 운영하는 것이 꿈인 창수가 우연히 만났을 땐 영자는 창수가 일하는 철공소 사장의 집에서 일하는 식모였고, 창수는 철공소 견습공이었다.
영자를 보고 첫눈에 반한 창수는 군대 가기 전 자신의 애타는 심정을 영자에게 고백하지만, 영자는 자신은 시골에서 돈 벌러 왔지 연애하러 온 것이 아니라며 퉁명스럽게 거절한다.
3년 후. 월남에서 돌아온 창수는 목욕탕 때밀이로 일하면서 수소문 끝에 영자를 찾아 가지만, 영자는 한쪽 팔이 없는 외팔이 창녀가 되어 괄시를 받고 있었으니….
하층민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생생하게 묘사한 원작(조선작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 리뷰 보기)과 결말은 판이하지만, 영자 역을 맡은 여배우의 열연과 '정성조와 메신저스'의 감미로운 OST, 그리고 창수와 영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어딘지 허전한 결말의 아쉬움을 넉넉하게 달래주는 영화. 사실 나는 영화 속에서 영자가 쓸쓸하게 지나가던 청량리 굴다리 바로 근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랑 학교에 가려고 굴다리를 지나 청량리 시장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살짝 걸친 날씬하고 예쁜 누나들이 곧잘 놀리곤 했는데, 그때 그 누님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나는 누나들이 그때 거기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데, 누나들은 내가 그때 누나들 앞을 종종 지나다녔다는 것을 기억할까?
아무튼, 뼈아픈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이 세상 모든 영자와 창수들의 전성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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