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9

드라마 천행건(天行健, 2024)

드라마 천행건(天行健, 2024)

드라마 포스터
review rating

안 보면 후회하고 말 거야!

변법을 시행한 광서제

때는 청나라 말기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중국의 미래를 뒤흔들 엄청난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광서제의 무술변법(戊戌變法)이 103일 만에 끝나면서 개혁에 실패한 청나라는 제국주의의 침탈과 내부 혼란으로 존망의 갈림길에 처한다. 이때 청나라 심궁 문연각(文渊阁)에 숨겨져 있던 보물 지도가 도둑맞는다. 그 보물 지도엔 기원이 강희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남소림의 전설적인 보물 정단밀장(净坛密藏)을 찾을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각기 다른 세력들이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보물찾기에 뛰어든다. 청나라 조정은 다 쓰러져 가는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기친왕은 개혁과 역모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쑨원을 지지하는 동맹회는 혁명을 위해, 탁불범은 종파의 부흥을 위해, 일본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라도 가질 수 없다는’ 심보로.

드라마 「천행건(天行健)」은 양산형 게임처럼 매해 쏟아져나오는 ‘중드 홍수’에서 「장안12시진(长安十二时辰)」처럼 모래 속 진주 같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이야기, 연기, 배역, 고증, 소품, 세트, 로케이션 등 (내가 눈여겨보는 드라마 모든 감상 포인트에서) 빼어난 아름다움과 높은 작품성과 만족스러운 재미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재미는 있을망정 뭔가 독보적인 면이 부족한 한국, 일본 드라마와는 달리) 「장안12시진」처럼 오직 중국에서 중국인의 손으로만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다. 고로 드라마 좀 본다는 사람이라면, 안 보면 뜨거운 불길에 잿더미로 화하는 순간 후회할지도 모를 드라마!

대내 고수, 평범치 않은 조정 앞잡이 문삼도

대내 고수, 평범치 않은 조정 앞잡이 문삼도

청나라 조정을 위해 보물찾기 임무를 맡은 대내 시위 문삼도(门三刀) 역은 「비호외전(飞狐外传, 2022)」에서 훌륭한 무술 연기를 보여준 진준지에(秦俊杰)가 맡았다.

광서제의 변법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문삼도는 겉으로는 과묵하고 차갑게 보이지만, (왕지보, 탁불범과 함께) 세 명의 남자주인공 중 가장 따뜻한 마음을 소유한 정인군자다. 명민한 두뇌와 뛰어난 탐정 능력을 지닌 문삼도는 ‘보물 지도 도난’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12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다. 자신은 단지 황제의 뜻에 따라 변법에 임했다고 생각해 왔던 문삼도는 보물은 당연히 청나라 조정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격동의 상황에 직면하고 류림(黄昊月 분) 같은 혁명가와 알게 되면서 자신이 애써 지켜온 청나라 조정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로써 평범하지 않은 조정의 앞잡이가 된다.

천하제일검객, 융천검파 장문인 탁불범

천하제일검객, 융천검파 장문인 탁불범

변방의 무명 종파 융천검파(融天剑派)의 장문인 탁불범(卓不凡) 역은 팝 가수이자 배우인 리우위닝(刘宇宁)이 맡았다.

사부로부터 쇠퇴하는 종파를 천하제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을 짊어진 탁불범의 진짜 소망은 강호를 유랑하며 이름난 고수들을 한 명 한 명 격파해 천하제일검객 명성을 얻는 것이다. 그가 기친왕 휘하로 들어간 이유도 종파의 생계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보물과 함께 숨겨져 있다는 무공 비급을 위해서다.

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지고, 번쩍번쩍 이는 검날은 총알 세례에 부러지기 시작한 20세기 초 중국, ‘강호’라는 말이 통용되던 마지막 시기에 문파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운명을 일치시킨 마지막 강호인이 있다면 바로 탁불범이다. 탁불범은 처음엔 적으로써 문삼도와 대결을 펼친다. 그리고 여러 번 문삼도를 살려준다. 아마도 이땐 호적수를 아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두 사람은 예기치 않게 의기투합한다. 싸우면서 정이 들었을까?

청렴 우직한 포졸, 왕지보

청렴 우직한 포졸, 왕지보

청렴하면서 우직한 포졸 왕지보(王地保) 역은 배우 겸 모델 팡한첸(庞瀚辰)이 맡았다.

어렸을 때부터 과거 시험을 위해 선현의 글을 외워 온 왕지보는 갑작스러운 변법으로 과거가 폐지되자 인생의 목적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반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반은 생계를 위해 포졸이 되었다는 재밌는 사연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문삼도, 탁불범 등이 이미 발을 담그고 있던 ‘보물찾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왕지보는 자신보다 직급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문삼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중엔 조정의 명령에도 거역하면서 살인자를 쫓기 위해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는 고집스럽고 완고한 말단 관리다. 그는 조정이 구휼을 위해 내린 식량을 가지고 ‘줄까 말까?’ 하면서 백성을 농락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관리들을 비난하기는커녕 이것이 황제의 은혜라고 주장하는, 아직도 성현의 말씀만으로 세상을 바로 잡고 조정의 기강을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외골수이자, 강호의 의리나 세상의 인정 따위보다 조정에 대한 충성과 법도를 더 중히 여기는 짜증 나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왕지보 때문에 탁불범이 평생을 연연해 왔던 순결한 사랑은 풍비박산 난다.

세 쌍의 러브스토리

세 쌍의 러브스토리, 왼쪽부터 오란산, 곽금, 임안정

“인연이란 걸 너무 늦게 만나면 소용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반대였다. 너무 일찍 만나게 되는 것 역시 소용없는 것이다.”
“이번 생에 나는 하늘에도 융천에도 사부님께도 미안하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유독 너에게는 미안했어.”

탁불범이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이자 사부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가까이할 수 없었던 곽금(傅菁 분)을 생각하면서 독백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대사들이다. 드라마 「천행건」엔 추리하고 추적하고 암투를 벌이는 활극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탁불범과 곽금을 비롯해 왕지보와 임안정(陈思澈 분), 문삼도와 오란산(黄梦莹 분) 등 세 명의 남자주인공에 짝을 맞춘 세 쌍의 러브스토리도 등장한다.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에 러브스토리가 살짝 얹히면서 이야기는 더욱더 풍부해지고, 볼거리도 풍성해진다.

마치면서...

탁불범과 문삼도의 대결

드라마 「천행건(天行健)」은 단순히 보물찾기 이야기를 넘어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의 갈등과 대립과 화해를 통해 격동의 시대 속에서 무기력한 개인의 운명과 선택을 탐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문삼도(개혁), 탁불범(중도), 왕지보(보수) 등 당시의 젊은 세대를 반영하는 청년들이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고자 했던 이상과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중국에선 ‘청’이라는 오랜 전제군주국가를 무너뜨리는 격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선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아무튼, 초반부는 서스펜스와 리듬 있는 플롯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중반부에는 복잡한 캐릭터 관계를 통해 주제를 내세우고, 후반부에는 드라마틱한 전개로 감개를 자아낸다(한편으론 혁명 의식을 고취한다?). 사극의 엄숙함을 유지하면서도 경쾌하고 로맨틱한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한 것, 그리고 뛰어난 화면 구성과 거미줄처럼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얽힌 이야기는 관객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고 할까나. 한 편 한 편이 감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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