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좀비(Miss Zombie, 2013) | 이토록 비통하고 이토록 우울할 수가!
어느 날 데라모토 박사 가족에게 뜬금없이 배달된 화물 상자는 사람도 들어갈 만큼 크다. 그런데 그 안에는 정말 ‘사람’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다만, 당신과 나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좀비 바이러스에 걸린 젊은 암컷 좀비가 들어있었다.
박사는 좀비를 하녀로 부릴 생각이다.
채소를 먹이고 고기를 먹이지 말라는 둥 좀비를 다루는 방법인 상세히 적힌 설명서를 읽고 있는 데라모토 박사.
만약의 사태를 위해 설명서와 함께 권총도 들어있었다.
좀비에도 레벨이 있는 법. 데라모토 박사 댁으로 배달된 암컷 좀비 사라는 좀비 레벨 중 가장 낮은, 그러니까 가장 사람에 가까운 좀비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녀는 혼자 있을 때 뭔가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젊은 여성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거나, 소일거리로 영영 아물지 않는 상처를 슬프도록 천천히 꿰매곤 한다.
일급으로 얻은 채소 봉지를 들고 터벅터벅 퇴근하는 저녁이면 아이들의 돌팔매질에 어깨는 한없이 움츠러들고, 혹은 누군가 재미로 내리찍은 날카로운 뭔가가 등에 꽂히는 등 하루도 (좀비에게도 마음이란 것이 있다면) 마음 편할 날이 없는 사라에게 어느 날 대단한 일이 생긴다.
바로 데라모토 가의 외동아들 켄이치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고, 갑작스러운 슬픔에 이성을 잃은 시즈코는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켄이치를 사라에게 맡긴다. 즉, 좀비가 되어도 좋으니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사라는 켄이치의 목을 살짝 깨묾으로써 출근할 때면 아침 인사를, 퇴근할 때면 채소 봉지를 꼬박꼬박 건네주던 사모님의 은혜를 갚는다.
그러나 좀비가 되어 깨어난 켄이치는 어찌 된 일인지 다짜고짜 사라 품에 안긴다.
처음 며칠은 퇴근할 때마다 사모님 시즈코가 먹을거리와 함께 꽃이 든 봉지를 건네주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데라모토 박사가 이 일을 맡는다. 단지 음식을 건네주는 사람만 바뀐 것만은 아니었다. 친절한 미소가 음흉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처음엔 블랙홀처럼 깊고 어두운 동공을 가졌던 사라의 눈이 켄이치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이후로 차츰차츰 사람 눈동자 비슷한 형상으로 돌아오고, 교양 있고 친절한 사모님이었던 시즈코는 좀비처럼 험악한 인상으로 변해간다. 한때 비로드처럼 부드럽고 비단처럼 고운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사라의 살결이 사람들의 잔인한 호기심과 짓궂은 장난으로 인해 상처투성이로 변했듯, 시즈코의 마음은 질투와 시기로 인해 타락한다.
남자들의 성욕은 좀비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무분별하고, 여성의 질투심 역시 상대가 감정도, 마음도, 이성도 없는 좀비일지라도 사그라지질 않는다.
누가 좀비이고, 누가 사람인가! 좀비의 인간적 본성과 인간의 좀비적 본성 중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는가!
좀비처럼 느릿느릿, 그리고 이렇다 할 의미 있는 대사 없이 진행되는 「미스 좀비(Miss Zombie)」는 기존의 추하고 더럽고 징그럽고 잔인한 좀비물이 견고하게 쌓은 상식에 도전하는 문학적인 좀비 영화다.
흑백 필름의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색감에 잘 어울리는 단조로운 화면과 등장인물들 사이의 감정적 대립을 대화 없이 무음으로 처리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좀비 영화치곤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전개가 흉흉한 뭔가를 잔뜩 기대한 관객에겐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좀비 영화가 이토록 비통하고 이토록 우울하고 이토록 비극적일 수도 있음을 마음속 깊숙이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사라처럼 아름다운 좀비가 흔치 않듯) 흔치 않은 좀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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