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스(StageFright, Deliria) | 곡괭이, 칼, 드릴, 전기톱, 도끼, 또 뭐?
늦은 밤 극장, 배우와 제작진들이 대량 살인범에 대한 뮤지컬 예행연습으로 한창 바쁠 때, 주연을 맡은 알리시아는 연습 도중 삔 발목을 치료하고자 의상담당자 베티와 함께 몰래 극장을 빠져나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들이 방문한 곳은 일반 병원이 아니라 정신 병원이었다.
접수처의 깐깐한 간호사는 치료를 거부했지만, 다행히 지나가던 의사의 친절로 알리시아는 치료를 받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16명을 살해한 유명한 연쇄 살인범인 배우 어빙 윌리스를 구경하는 행운도 누리게 된다.
치료를 마친 알리시아와 베티가 차를 타고 다시 극장으로 돌아올 때, 그녀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차 안에는 한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이쯤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쿠아리스(Deliria, 1987)」는 외부로부터 우연히 묻어온 이방인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고, 그러다가 막판에 등장인물 중 외모가 가장 그럴듯한 여배우가 지긋지긋해질 무렵의 살인 행진을 마무리 짓는다는, 줄기차게 본 듯한 줄거리를 가진 공포영화다.
극장 안에선 사람들이 시시각각 비명횡사 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조만간 들이닥칠 죽음을 기다리며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극장 바로 옆에는 마치 경찰의 무능과 나태함을 조롱하듯 두 명의 경관이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들과 살인마의 광기가 휘몰아치는 극장 사이에는 천혜의 방음벽인 장대비가 가로막고 있기는 하다.
비를 좋아하는 처지에서 비를 이렇게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영화를 보면 조금은 우울하다. 물론 비는 미치광이가 휘두르는 광기에 픽픽 쓰러지는 희생자들의 비명을 집어삼키는 달갑지 않은 역할을 본의 아니게 맡게 된 것뿐이라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가 아니라 억울할 것이다. 지구의 생명 유지 장치 중 하나가 바로 비 아니었던가!
그런 생명 탄생의 신비를 간직한 비가 서미애의 단편 추리소설 「반가운 살인자」에서 살인극을 가려주는 장막으로 이용당한 것처럼 때론 범죄를 은폐시켜주는 요소로 활용된다. 요즘처럼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장마 때, 그동안 굶주린 빗소리를 만끽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전례 없는 폭우에 생고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평소에 품은 앙심을 해결하려는 모종의 계획을 품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혜택과 피해를 고루 준다는 점에서 공정하다.
어찌 되었든, 영화 「아쿠아리스(Deliria, 1987)」에는 광부도 아닌 것이 곡괭이로 함부로 사람을 찍고, 나무꾼도 아닌 것이 전기톱으로 사람 몸통을 반 토막 내거나 도끼로 목을 날려버리고, 인테리어 업자도 아닌 것이 드릴로 괘씸하게 사람을 뚫기나 하는 등 슬래셔 영화에 어울릴법한 다양한 도구(곡괭이, 칼, 드릴, 전기톱, 도끼, 그리고 또 뭐?)로 다량의 희생자를 용케 양산해 낸다. 그렇지만, 실제가 아닌 가상의 현실 속에서 무정한 살인자에게 무심히 죽어 나가는 참상에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특수효과가 엉성해서인지 그리 무섭지는 않다.
내 생각엔 살인자가 가면을 쓴 만큼 정신 병원에서 탈출한 미치광이가 아니라 극장 경비원 윌리로 설정했으면, 반전이라도 볼만했을 것이다.
아무튼, 때늦은 장맛비로 물 먹은 장판만큼이나 눅눅해진 정신을 뽀송뽀송하게 건조해 줄 그런 영화는 못 된다. 그러나 혹시 모르지 않을까? 다른 심미안을 지닌 고전 슬래셔 영화광이라면 더 재밌고 뜻깊은 감상도 가능할지.
날씨가 우중충하니, 글도 우중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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