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3

새벽의 황당한 저주(Shaun of the Dead, 2004)

movie review | Shaun of the Dead,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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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황당한 저주(Shaun of the Dead, 2004)

마지못해 불혹을 뛰어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지천명에 들어서는 좀비영화광들에게 ‘추억 되새김질’ 영화로 손색없는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새벽의 황당한 저주(Shaun of the Dead)」, 요 작품이다.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의 눈꺼풀에 기둥을 괴어서라도 보여주고 싶은 정도로 사이먼 페그(Simon Pegg)의 진심 어린 병맛 코디디 연기가 일품일 뿐만 아니라 좀비영화의 감칠맛인 ‘혼란’과 ‘파괴’ 중 ‘혼란’에 치중한 작품이라 (잔인한 장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류에 비해) ‘징글징글한’ 같은 부담감은 다소 덜하다.

평범한 런던의 전자제품 판매원 숀(사이먼 페그)과 숀의 게으르고 찌질한 룸메이트 에드(닉 프로스트)의 오늘이 내일 같고 어제가 그제 같은 공허한 삶에 일본의 오염수 방류처럼 황당하게 찾아든 좀비 대재앙은 징그러움에 소름 돋기도 전에 유쾌한 혼란으로 시청자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비 온다고 빈대떡만 부치지 말고 간접 일탈의 소소한 황홀함을 안주 삼아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자. 한마디로 제대로 궁상을 떨어보자는 것.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은 좀비들은 뭐하며 시간을 보낼까?

일상, 사랑, 우정, 그리고 생존

movie review | Shaun of the Dead, 2004

숀이 전자제품 판매장으로 출근하는 런던의 출근 버스 장면은 현대인의 노곤한 일상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땐 좀비 바이러스가 런던을 정복하기 전이지만, 출근하는 시민들의 막 무덤에서 기어 나온 듯한 괴팍한 표정은 조금 있으면 닥칠 좀비 대재앙이 가져다줄 일상의 파괴를 자못 기대하는 듯하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고만고만한 인생, 생각이 많을수록 고민과 걱정거리만 늘어나는 야박한 인생, 그럴 바엔 차라리 좀비가 되어 무념무상의 도를 강제 체험하겠다는 자포자기적 심보일지도 모르겠다.

movie review | Shaun of the Dead, 2004

어떤 영화라도 빠지면 안 될 양념 중 하나가 로맨스다.

숀과 리즈(케이트 애쉬필드)의 관계 역시 출근 버스 광경과 별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후줄근하다. 백수 룸메이트 에드와 숀과의 미적지근한 연애에 불평 • 불만 가득한 리즈는 결국 마지막 통보를 하기에 이르고, 숀은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정이 이러하니 리즈의 최종 선택은 남자의 심금에 불을 지르고 비수를 꽂는 그 단호한 한마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movie review | Shaun of the Dead, 2004

일상엔 아무 도움도 안 되지만, ‘생존’ 앞에선 나름 덩칫값 하려고 드는 에드.

원래 ‘찌질한’ 역을 맡은 인물은 영화 초반엔 온갖 욕을 얻어먹을 추잡한 짓을 자랑스레 하다가도 후반에 ‘찌질이라도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있다!’ 식의 소소한 인생 반전 극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에드도 그런 장하고 대견한 반전을 보여줄 수 있을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상황에서 에드는 자신을 대하는 숀의 변함 없는 우정을 어떻게 되받아칠 것인가?

movie review | Shaun of the Dead, 2004

숀이 안전한 장소로 지목한 술집 윈체스터로 기차 놀이하듯 줄을 지어 가는 숀 일당은 좀비를 피해 어딘가로 피신하는 이본 일당과 맞닥트린다.

원래 주인공 패거리와 비교되는 다른 패거리는 비극적인 파멸을 겪으며 주인공의 선택이 현명했음을 과시하는 제물로 이용되곤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본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연히 특별히 의미하는 바는 없다. 그냥 내 예상을 빗나갔다는 것.

마치면서...

movie review | Shaun of the Dead, 2004

사랑을 갈구하고 우정을 믿어 의미치 않는 숀은 시계태엽처럼 돌아가는 지루한 일상에 뭔가 변화가 오기를 꿈꾸지만, 그에겐 금기처럼 작용하는 일상의 틀을 깰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숀, 그렇게 네가 바라던 것을 줄 터이니 어디 신나게 한판 놀아보렴’이라는 신의 염병할 계시라도 내린 것처럼 닥친 ‘좀비 대재앙’. 그리고 그로 인해 믿어 의심치 않던 일상의 통쾌한 파괴와 생존의 짜릿함. 평범한 인물 숀의 혼란스럽지만, 그럭저럭 일관성 있는 독특한 생존기.

어쩌면 숀이 꿈꾸는 일탈은 현대인의 잠재의식 속에 남모르게 뿌리 박힌 일상 탈출 욕망과 쪼금은 일맥상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면서 떨어져 나간 배꼽을 찾느냐 혈안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동병상련의 애틋함을 견디지 못해 쓰디쓴 술로 공허한 삶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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