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 하드(Die Hard) | 낙상과 액션 영화
<낙상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Die Hard 2)>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생전 나무 같은 것은 타본 일이 없고 타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내가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는지 인류가 원숭이의 친척이란 것만 믿고 만만하게 철봉에 덤볐다가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지상에서 무려 1.5M 남짓한 허공에서 낙상한 것만으로도 119를 부르고, CT를 찍고(다행히 뼈는 이상 무), 며칠 휠체어 신세 지고, 사고 후 2주가 넘는 오늘까지 집에선 약간 덜 손상된 좀비처럼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출할 땐 지팡이를 챙겨야 할 정도로 고생스럽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퍼뜩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액션 영화에서 밥 먹듯 일어나는 낙상에서 고통을 못 느끼는 기계 인간처럼 벌떡 일어나 신나게 뛰어다니는 일은 (마약을 한 사발쯤 퍼먹었다면 가능할까?) 역시 영화에서만 가능하리라는 것!
<그의 악몽 같은 하루는 우리에겐 달콤한 시간(Die Hard 1)> |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악당을 소탕하는 쾌감을 버릴 수 없다!(Die Hard 2)> |
아무튼, 사고 직후 강한 진통제로 혼미해진 정신은 이렇게 평생 다리 병신으로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우울증 삽화 비슷한 증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럴 땐 책도 필요 없다. 불안과 걱정에 시름시름 앓는 마음을 달랠 줄 최고의, 그리고 저렴한 처방은 시원하고 통쾌한 액션 영화를 감상하는 것! 육체의 고통은 진통제로 다스렸다면, 마음의 고통은 영화로 다스린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이하드(Die Hard)」 시리즈를 정주행했다. 요즘은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명작영화를 여러 에피소드로 전개되는 드라마를 감상하듯 한 번에 몰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인디아나 존스」, 「프레데터」 등등. 이 모든 것이 초고속 인터넷과 클라우드 덕분이리라.
<그를 구경하는 건 재밌지만 그와 함께하는 것은 최고의 불행(Die Hard 3 With a Vengeance)> |
<마찬가지로 그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도 불행?(Die Hard 4 Live Free or Die Hard)> |
호랑이가 허리에 쌈지를 대롱대롱 달고 다니던 시절만큼 먼 옛날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옛날, PC로 영화를 나 홀로 감상하는 고적한 취미가 전무후무하던 시절, 공중파 TV에서 크리스마스나 명절 특집 영화로 단골처럼 등장한 것이 「다이하드(Die Hard)」(그리고 「나 홀로 집에(Home Alone)」)였을 정도로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다이하드’의 인기는 최고였다.
최고였던 만큼 ‘다이하드’는 1988년 1편 이후 자동차를 가장 많이 부순 영화 5위(132대, 2019년 기준)에 매겨진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A Good Day to Die Hard)」 2013년 작에 이르기까지 무려 25년 동안 잊을만하면 후편을 내놓으며 장수의 길을 걸어왔다. 이 영화가 삼켜버린 대중의 지루한 시간을 모두 합치면 억만 겁은 될 것이다.
<러시아의 자동차를 다 부숴버려라!(A Good Day To Die Hard)> |
<아빠와 아들이 나란히 총질이라니, 화기가 무성한 집안이다(A Good Day To Die Hard)> |
정글엔 람보가 있었다면, 도시엔 존 맥클레인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브루스 윌리스가 맡은 존 맥클레인의 1인 영웅 놀이는 냉소적인 관객일지라도 그 엄정하게 굳은 얼굴에 단 1초간의 조소도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감과 통쾌함이 가득한 액션을 폭풍처럼 몰아붙인다. 한마디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브루스 윌리스의 연기에 압도되고, 존 맥클레인의 액션에 졸도한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이대로 다리 병신이 되어 좀비처럼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당치도 않는 불안은 개에게 쫓기는 도둑처럼 살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냉철하게 보면 「다이하드(Die Hard)」 시리즈는 밑도 끝도 없이 허황한 미국식, 할리우드식 영웅 놀이로 돈 좀 벌어보려는 상업 영화의 교과서 같은 표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관객이 영화를 찾는 다양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재미’와 ‘통쾌함’을 논한다면 이만한 영화도 드물다. 복잡한 사람의 삶에서 복잡하게 응어리진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피로를 풀기 위해 자나 깨나 약에 의지하는 것보단 가끔은 단순하고 무식하게 통쾌한 액션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은 처방이다. 복잡함이 단순함에서 온다면 단순함으로 복잡함을 풀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악당은 쳐부수라고 있는 것이고, 또 쳐부숴야 제맛이다. 이런 관객의 권선징악적이면서도 한편으론 무지막지하기도 한 바람을 술잔 비우듯 잔챙이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쓸어주는 「다이하드(Die Hard)」의 액션은 통쾌하다 못해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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