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08

약살 | 그가 강간하는 이유, 우리가 그것을 보는 이유

Red To Kill 1994 movie p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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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살(Red To Kill, 1994) | 그가 강간하는 이유, 우리가 그것을 보는 이유

"내가 죽도록 네년을 강간하겠다" - 강간범
"해봐! 와서 날 강간해봐!" - 카록

영화의 첫 인사는 꽤 상냥하다. 상냥하다 못해 오금을 저리게 한다. 음침하고 추루한 아파트에서 자식의 장애를 비관한 모자의 투신자살이 애피타이저로, 그리고 오늘의 주요리로는 젊은 여자의 채 식지 않은 싱싱한 시체를 정체 모를 남자가 포효하며 강간하는 섬뜩한 장면이 뒤를 따른다. 디저트로 알맞게 솟아오른 여자의 검은 유두뿐만 아니라 보기 좋게 숲을 이룬 검은 음모도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이쯤 되면 이 영화 「약살(Red To Kill, 1994)」의 장르나 등급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친절한 imdb는 간단명료하게 ‘호러’라고 구분 짓지만, 영화 「약살」은 그런 ‘장르’ 놀이를 아주 우습게 짓밟는다. 근육질 남자가 잔인하게 여자를 강간하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분명히 누군가는 금지된 욕망을 자극받아 짜릿한 전율을 발작적으로 일으키게 할 그것을 그저 단순히 ‘공포’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강간 장면과 이와 쌍벽을 이루는 과도한 노출 장면은 매우 불쾌하면서도 남자의 비틀린 성적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대리 만족시켜 준다는 점에서 「약살(Red To Kill, 1994)」에 등장하는 야만적인 남자 주인공은 어쩌면 모든 남자의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위선적 가면 아래 숨겨진 판도라 상자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강간범 같은 근육질의 우람한 남자가 되는 것도 모든 남자의 꿈이 아닌가?

Red To Kill 1994 scene 01

영화 「약살(Red To Kill, 1994)」은 앞선 언급한 대로 끔찍한 두 사건을 시작으로 강간의 포문을 연다. 모자(母子)의 투신자살 현장에는 그들을 담당했던 사회복지사 카록이 있었다. 그녀는 모자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한편으로는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푸대접하고 괄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흉흉한 인심에 넌더리를 낸 나머지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사직을 결심한다. 하지만, 사직이 처리되기까지는 무려 3개월이나 걸렸다. 하는 수 없이 카록은 사회복지사로서 마지막 일이 될 교통사고로 죽은 한 남자의 정신지체 딸 밍밍을 떠맡는다.

Red To Kill 1994 scene 02

카록은 밍밍을 찬 선생이 운영하는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보호소로 데려간다. 그곳에는 밍밍처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바보 멍청이 취급받는 장애인들이 찬 선생의 보호와 감독 아래 작은 사업을 꾸려가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된 밍밍은 서서히 잃어버린 활기를 되찾아 가고, 카록은 댄서가 되고 싶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밍밍으로부터 잊어버린 사명감을 되찾게 된다. 하지만, 장애인들을 기필코 내쫓으려고 소란을 일으키는 아파트 주민들과의 계속되는 마찰과 강간살인범이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는 위험한 상황이 이제 막 안정을 찾은 밍밍과 카록을 그냥 놔두지를 않는다.

Red To Kill 1994 scene 03

이런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영화지만, 뜻밖에 (비록 그것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만큼이나 싸구려 같을지라도) 소소한 감동과 여자들만의 진한 의리도 엿보이는 영화다. 아쉬운 점은 덩치에는 걸맞지 않게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볼일(?)을 보는, 정력 면에서는 보기보단 뭔가 후달려 보이는 야수에게 걸리는 여자는 죄다 젖가슴을 내보이기 마련인데, 카록만은 끝까지 정절을 지킨다는 것이다. 심지어 순진한 처녀 밍밍마저 예외 없이 까발려지는 데 말이다. 아마도 카록의 출연료가 가장 비쌌던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카록이 야수에게 겁탈당하기 직전, 카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알몸을 야수에게 바치려는 (비록 그 갸륵한 의도는 성공을 이루지 못했지만) 밍밍의 숭고한 우정은 정말이지 고금에 보기 드문 진정한 의리였다. 착실한 모습을 보일 땐 배우 ‘유준상’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던 남자가 트라우마와 연결된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 마주치면 헐크처럼 옷을 찢어발기며 야수처럼 포효하는 짐승으로 돌변하는 남자 배우의 처량한 연기도 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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