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2

이름 모를 새야, 나와 함께 날아주겠니?

이름 모를 새야, 나와 함께 날아주겠니?

새벽에 산책하러 나가다 학교 뒤 가로수들이 늘어선 샛길 길가에 이름 모를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봤다. 순간 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제지당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내 몸이 새의 주검처럼 굳어진다. 오싹함이 냉동육처럼 굳은 나의 몸을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흩고 지나간다. 누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창백해진 내 얼굴을 다소나마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빛처럼 누리끼리하게 덧칠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 해도 뜨기 전의 이른 시간이니 당연히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별걸 다 걱정한다. 오바이트처럼 밀어 오르는 잡념을 힘겹게 떨쳐내고 묵념 한 번 정도 할 시간이 채 못 지나 나는 다시 내 갈 길을 간다. 하지만, 냉혹한 채권자처럼 쌀쌀맞지 못한 나는 몇 걸음 옮기지 못해 다시 새에 대한 상념에 휩싸인다. 몇 년이나 살았을까? 새는 사람처럼 쭈글쭈글 늙지 않는다고 하니 겉모습만 보고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새가 우리 동네에서 한 20년, 아니 10년이라도 살았다면, 나와 아주 인연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동네를 돌아다니는 동안 그 새의 울음소리를 최소 한번 이상은 들어봤을 것이고, 새 역시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내 머리 위를 적어도 한 번 정도는 활공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먼 이웃사촌이었던 셈이다. 이름을 모르고 종(種)이 다르다고 해도 이웃사촌이 죽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때에 따라 이렇게 내 감수성은 매우 값이 싸진다. 때에 따라서 말이다.

주검이 아직 온전한 것으로 보아 죽은지는 얼마 안 된 것 같다. 특별한 외상도 없는 것으로 보아 몇몇 짓궂은 학생들의 소행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 길에서 간간이 들고양이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고양이의 짓일까? 아무튼, 사람의 짓으로 보이지 않아 왠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설령 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 마음 편할 수 있는 방향으로 믿고 싶은 것이 치사하고 얄궂은 사람의 마음이다.

새벽부터 도시의 환한 가로등 불빛 사이에 놓인 어둡고 깊은 죽음과 마주하니 약간 당혹스럽다. 죽음이 기분 나쁜 것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사람일지라도 주검과 마주치는 것도 기분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죽음은 마지못해서라도 겸허히 수용해야 할 삶의 일부니까. 그렇다고 마냥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죽음과 마주치게 되면 약간은 기분이 언짢거나, 약간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왜일까? 자신과 평행선을 그으며 살아왔던 새의 죽음에서 언제가 직면하게 될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어서일까? 아무튼, 난 후자다. 그러나 이름 모를 새의 죽음 그 자체보다는 새의 주검이 길가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것이 더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 불편함이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는 나의 냉혹함에서일지, 아니면 진정 새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동정심에서일지는 꼭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이대로 지나치려니 내 값싼 동정심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아마 며칠 동안은 이 일이 내 머릿속을 보란 듯이 활공하고 다닐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급히 되돌린다. 주검은 나를 기다리기나 한 듯이 아까 봤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약간은 괘씸하다. 어디 내 눈에 안 띄는 대로 어떻게든 굴러가 주었으면 좋으련만. 작은 삽이라도 있다면, 주변 흙을 파 꿈꾸듯 잠든 작은 주검처럼 앙증맞은 무덤을 만들어주련만, 지금 이 시간에 어디 가서 삽을 구한담. 터무니없고 지나친 생각이다. 그래서 주변에 떨어진 낙엽을 약간씩 긁어모아 주검 위에 수북이 쌓아올린다. 근처에 커다란 돌덩이도 있어 특별한 이유없이 옆에 가져다 놓는다. 묘비도 아니고, 제사상 올리는 제단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약간은 등에 떠밀려 완성된 성의없고 보잘것없는 무덤이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만히 감상해 보니 그래도 모양만은 그럴싸하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금 한결 가벼워진다.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며칠은 그럭저럭 버틸 것 같다. 부디 오늘의 낙엽묘가 주검이 흙으로 말끔히 되돌아갈 때까지만 잘 버텨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마무리를 짓고 아까보단 확실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나는 다시 산책을 떠난다.

<어느 이름 모를 새를 위한 낙엽묘>

그런데 저녁이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몇 시간 잊고 있었던 낙엽묘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무심한 날씨에 대한 원망과 비에 휩쓸려 떠내려갈지도 모를 낙엽묘에 대한 걱정이 나를 짓궂게 휘감고 돈다. 비가 오면 엄마의 무덤이 걱정돼서 우는 청개구리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이왕 만드는 거 좀 더 튼실하게 묘를 만들어 주지 못한 나의 무심함과 경솔함에 화가 난다. 아마 지금쯤은 차갑게 식은 새의 깃털 속으로 차가운 빗물이 속속 스며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난 정말 차가운 것은 질색인데 새는 어떨까? 뜨끈 미지근한 내 눈물이 식을 대로 식은 주검을 덥혀줄 수 없는 아쉬움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 착잡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 내가 보인 자그마하고 소심한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아니면 이런 멍청한 나를 가엽게 여겨서라도 훗날 내가 죽으면 내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주겠니? 그래서 외롭지 않게 나와 함께 날아주겠니? 나는 그저 자유롭게 날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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