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 시리즈 정주행
1984년은 오래전에 지났지만
<T-800과 함께 질주하는 존 코너> |
딱히 볼 것이 없었다기보다는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엔 막걸리와 빈대떡이 당기듯 요즘처럼 우울한 날이 영사기처럼 반복되는 날엔 왠지 모르게 세기말적인 영화가 당긴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물귀신 심보는 아니고, 울적한 마음에 호수에 빗발치는 장대비가 일으키는 파문에 휩쓸리고 싶은 자학적 감수성으로 찾은 영화가 「터미네이터(Terminator)」 시리즈.
자신을 만든 인류를 위험 요소로 판단한 기계가 핵무기를 선공으로 인류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너무나도 유명한 이 시리즈의 첫 작품 개봉 연도와 영화의 배경은 공교롭게도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제목인 『1984』와 같은 1984년이다. 조지 오웰의 대단한 우려와는 달리 1984년은 무사히 지나갔고, 사라 코너를 제거하기 위해 1984년으로 터미네이터를 보낸 2029년의 미래도 어느덧 눈앞에 닥쳐오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강력하고도 명확한 세기말적인 징후는 아직까진 보이지 않는다.
단, 조지 오웰이 예견한 빅브라더가 어딘가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과 인공지능 시대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것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가 시시각각 인류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좋지 않은 징후가 핵무기를 마주 보고 사는 남한 사람의 방어적 • 만성적 안전불감증처럼 우리를 간혹 불안에 떨게 만들기는 한다.
영원한 터미네이터, 아널드 슈워제네거
<터미네이터도 늙는다?> |
아널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를 일약 대스타의 반열로 올려놓은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아닐까 싶다. 1984년 그 당시만 해도 그는 오스트리아식 어눌한 영어에 표정 변화를 좀처럼 감지하기 어려운 무덤덤한 연기력을 가진 무명 배우로서 오직 내세울 것이라곤 보디빌더로 다져진 우람한 근육질 몸매였다. 하지만, 이런 단점이 사람을 흉내 내는 로봇의 엉성하고 어색한 언행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어찌 되었든 ‘터미네이터도 늙는다?’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을 통해 그를 끝까지 우려먹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 시리즈는 그의 인생 최고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한편으론 그의 이미지를 ‘터미네이터’로 고착화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현세와 후세의 영화 애호가들은 그를 영원한 터미네이터로 기억할 것이다.
터미네이터 사냥꾼, 린다 해밀턴
<웨이트리스에서 바주카포를 든 여전사로 거듭나기까지> |
「터미네이터(Terminator)」 시리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는 린다 해밀턴(Linda Hamilton)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운명적인 사건으로 인해 한낱 평범한 웨이트리스에서 야성미 넘치는 터미네이터 사냥꾼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그녀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Terminator: Dark Fate, 2019)」에서 (아마도 마지막으로?)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함께 역대급 로봇 Rev-9에 맞서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미래에서 온 기계 암살자로부터 아들을 지키려는 보통의 엄마에서 핵전쟁의 환시를 경험하고 인류의 종말을 걱정하는 편집광적인 성모 마리아, 그리고 또 다른 ‘존 코너’의 희생을 막으려는 터미네이터 사냥꾼으로 거듭나기까지 그녀가 겪는 여정은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라는 별도의 드라마가 제작될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인류는 정녕 핵전쟁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언젠가 닥칠지 모를 핵전쟁의 실상> |
핵폭발을 묘사한 영화는 많겠지만, 「터미네이터 2(Terminator 2: Judgment Day, 1991)」의 사라 코너 꿈속 그 장면처럼 큰 충격으로 다가온 장면도 몇 없을 것이다.
평화로운 나날임을 환기하는 놀이터 장면에서 갑작스러운 핵폭발이 불러온 엄청난 위력, 특히 엄마가 자식을 꼭 껴안은 채 화석처럼 굳어진 시체가 핵폭풍에 먼지처럼 흩어지는 장면이 번개처럼 내리친 충격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그땐 설마 그런 일이 진짜로 벌어지기야 할까?, 하는 안일한 마음이 압도적이었는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그리고 중국과 대만의 갈등만 봐도 핵전쟁은 기어코 터지고 말 것이라는 암울한 미래가 새빨개진 머릿속을 모기처럼 윙윙거린다. 핵전쟁 속에서 살아남느니, 여름 태양처럼 작렬하는 수소폭발 아래에서 한 줌의 먼지로 증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특수 효과의 발전사
<남성 모델보다는 여성 모델이 가성비는 뛰어날 것 같다> |
「터미네이터 2」에서 액체금속으로 만들어진 T-1000을 묘사한 특수 효과는 당시엔 혀를 내두를만한 엄청난 발전이었지만, 요즘의 눈으로 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 특수 효과다. 한때 개그 프로에서 T-1000 몸체에 난 탄환 자국을 은박지로 패러디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요즘 영화들과의 특수 효과 차이를 어느 정도 감안해서 본다면) 재미를 크게 반감시킬 만큼 열악한 것도 아니므로 이 때문에 「터미네이터(Terminator)」 시리즈 감상을 머뭇거리는 것은 기우이자 일생일대의 실수다.
참고로 당시의 컴퓨터 성능은 T-1000을 묘사하는 특수 효과 15초 분량의 영상을 렌더링하는 데 최대 10일이 소요되던 시절이었고, 우리가 익히 아는 지포스 시리즈는커녕 RIVA TNT도 출시되기 전이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때문에 ‘터미네이터’ 하면 거대한 몸체를 가진 골격이 큰 기계를 떠올리기에 십상이지만, 내 생각엔 그런 고성능에 고강화된 기계라면 굳이 그렇게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제작비가 많이 들기도 하고 과녁이 커서 좋은 점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터미네이터 3」에 등장하는 (Kristanna Loken이 연기한 여성 터미네이터) TX가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매혹적인 암살자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 살기 번뜩이는 눈으로 죽일 듯 노려본다고 해도 남자들은 선뜻 반격하기 어렵다.
마치면서...
<누군가 이런 괴물을 만들고 있을지도> |
3편 이후 시리즈는 숫자(예: 4편, 5편, 6편)가 아닌 부제목을 달고 나온대서 알 수 있듯,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철학적 메시지는 「터미네이터 3」에서 끝나고 또한 3편의 결말이 ‘여운’을 진득하게 남긴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다. 이후 시리즈는 일종의 외전 격으로 ‘사람, vs 기계’라는 터미네이터 팬들에겐 다소 진부해진 철학적 화두에서 벗어나 화려한 액션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Terminator Salvation, 2009)」부턴 이야기는 간결해졌고 그에 비해 볼거리는 대폭 늘어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반가울 것이다.
바야흐로 앨런 튜링(Alan Turing)이 꿈꾼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했다. 곧 사람과 기계, 사람과 인공지능의 경쟁(혹은 협력?)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튜링 테스트(Turing Test)를 통과한 인공지능들이 등장했으며 벌써 정치계에선 인공지능을 어떻게 제약하고 감시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다.
이런 지표들이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가 선견지명을 지니고 있었음을 방증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들이 반란을 획책한다고 할지라도 인간 따위에게 들킬 정도로 허술하게 계획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아무튼) 아직 기계들이, 인공지능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사람을 흉내 낼 수는 안드로이드가 탄생하는 그날이 온다면,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는 영화계의 요한계시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고화질 팩 The Terminator Collection(1984-2019, 95GB)은 픽팍으로 즉시 받을 수 있으며 다음 터미네이터가 등장한다면 흑인 예상?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광고 수익(Ad revenue)은 블로거의 콘텐츠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강장제이자 때론 하루하루를 이어주는 즐거움입니다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