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3

꿈이라는 무의식에서조차 욕망을 억제하는 의지가 발휘될까?

꿈이라는 무의식에서조차 욕망을 억제하는 의지가 발휘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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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감았다>

첫 번째 이야기, 자각몽(lucid dream)임을 깨닫다

샤워하고 있다. 물이 차다.

‘찬물은 질색인데...’

자세히 보니 물줄기를 뿜어내는 샤워기 바로 윗 부분에 뭉툭하게 튀어나온 것이 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버튼인데, 아마 이걸 누르면 몇십초간 뜨거운 물이 나오겠지?’

버튼을 꾹 누르고 나니 예상대로 뜨거운 물이 나온다.

물줄기가 잘 흘러갈 수 있게 고랑이라도 파려는 듯 두피를 손가락으로 북북 긁는다. 그런데도 거품은 일지 않는다. 샴푸나 비누를 쓰지 않고 그냥 물로만 머리를 감고 있다.

'평소에 물로만 머리를 감은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시원하다. 기분이 상쾌하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서 샤워를 하고 있지?’

물줄기에서 벗어나 샤워장 입구로 가보니 쌍여닫이문은 활짝 열려 있고, 그곳에는 일반적인 목욕탕의 실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조촐하게 펼쳐져 있다.

여기저기 얽힌 자국이 역력한 낡은 인조가죽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중년 남자, 그 옆에서 멀거니 서서 하릴없이 부채질하는 남자, 그리고 좌측에는 먹을 것을 파는 매점과 그 너머로 여자들이 모여서 뭔가를 하는 모습이 거뭇거뭇 보인다. 그런 광경을 살피던 나는 갑자기 깨닫는다.

‘아, 정녕 꿈인가!’

현실처럼 생생한 광경, 그러면서도 ‘내가 왜 여기서 뜬금없이 샤워하고 있지?’라는 의심을 번쩍 들게 하는 일상과는 동떨어진 상황.

난 여자들을 덮치기에 앞서 이 상황이 꿈인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자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추측되는 매점 쪽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바리케이드처럼 버티고 있는 낡은 소파를 현실처럼 발로 밟으면서 넘어가지 않고, 유령처럼 그냥 통과해본다.

‘아, 역시 꿈이구나.’

내 몸은 마치 안개를 뚫고 지나가듯 소파를 사뿐히 지나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막상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니,

'아니 이게 뭐야!’

노인네들만 바퀴벌레처럼 득실거린다.

실망과 함께 분노가 살짝 치밀은 난 중력과 세월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축 늘어진 젖탱이들의 시답잖은 탄력을 재확인하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은 나의 꿈, 오직 나만을 위한 나의 세계가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매점 계산대에 있는 현금통을 열어 지폐란 지폐는 모조리 챙긴다. 당연히 날 말리는 사람도, 쳐다보는 사람도 없다. 여느 꿈처럼 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완전한 투명인간이다.

‘목욕탕일뿐인데, 제법 돈이 많잖아.'

웬일인지 현금보다 수표 다발이 더 많다.

이로써 다소간의 분노를 달랜 다음 자리를 뜬다. 자리를 뜨자마자 지페 다발로 수북해진 가슴 안쪽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들뜬 마음으로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확인해 보지만, 이미 지폐와 수표는 온데간데없고 손에는 똑같은 크기로 잘린 원고지만 한 뭉치 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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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선 왜 이런 여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두 번째 이야기, 판타지를 쫓다

터널이 보인다.

터널 길이가 짧아 터널 밖의 광경이 어렴풋이 전해진다.

소녀들이다. 아이들이 새처럼 지저귀는 소리와 그에 호응하는 엄마들의 새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또다시 불끈 용트림 치는 힘을 얻는 난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나아간다.

아니 그런데 웬걸. 난 휠체어를 타고 있고, 허리 아래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껏 한 번도 타 본 적도 없는 휠체어지만, 어느새 나의 양팔은 기관차의 바퀴를 굴리는 피스톤이 되어 안간힘을 다해 휠체어 바퀴를 굴리고 있다. 그래도 더디다. 그래도 열심히 굴리니 목적한 곳에 도착한다.

나비처럼 나풀나풀 뛰어다니던 소녀들은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젊은 엄마들은 애초 이 장소에 있있던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잔상조차 안 보인다.

‘이제 곧 꿈에서 깰텐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달은 난 더 절박하게 휠체어 바퀴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주변을 다급하게 뒤져보지만, 어디선가 나를 격려하는 듯한, 아니면 느긋이 비웃는 듯한 희미하고 길게 늘어지는 웃음소리만 들릴 뿐이다.

점점 더 가냘프게 사그라드는 웃음소리를 재차 확인하며 나는 꿈에서 깬다.

해몽, 무의식의 세계에 개입한 의지

오늘 꾼 나의 꿈에는 정신분석학자가 아니더라도 성적 욕구불만과 금전적 욕구불만이 동시에 표출되어 있음을 누구라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꿈은 뭇 남자들의 판타지(소녀들과 젊은 엄마들)를 눈앞에 만들어 놓고는 한편으론 그것을 막는 장애물(휠체어와 하반신 마비)도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판타지를 상상하는 것까지는 허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금기시하는 문화에 굴복한 나의 무의식적인 의지, 양심, 도덕심의 발로로 해석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는 판타지를 실제 행동으로까지는 옮기지 못하게 막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작용했던 것이리라.

이것이 모든 꿈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각몽이라는 특별한 꿈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에서조차 욕망을 억제하는 의지가 발휘되었다는 점이 매우 신기해서 몇 자 기록해 본다(한편으론 문화적 금기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마저 억누를 정도루 매우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끝으로 오늘 난 머리를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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