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Recent Comments

2016. 2. 29.

[책 리뷰] 일상이 된 죽음에 적응한다는 것 ~ 들불(오오카 쇼헤이)

Wildfire book cover
review rating

일상이 된 죽음에 적응한다는 것

Original Title: 野火 by 大岡 昇平

산속 밭에 남은 몇 개인가의 고구마로 한정된 나의 삶은, 과연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죽음 또한 죽을 가치가 없다고 한다면, 나는 역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들불(野火)』, p119)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내게 집에 돌아온 듯한 편안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해 보든 앞에는 반드시 이것이 있는 걸 보면, 결국 이것이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고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들불(野火)』, p149)

평양 전쟁 말기, 필리핀 레이테섬에 보충병으로 투입된 다무라 일병. 병에 걸려 전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중대에서 쫓겨난 그는 의지할 곳을 찾아 야전병원으로 간다. 야전병원은 입원한 병사들의 식량을 군의관이 강탈하는 등 패색이 짙어가는 절박한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다무라는 중대에서 받은 식량이 떨어지자 다른 부상병들처럼 병원에서조차 쫓겨나고 마지못해 중대로 가보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죽지 않고 왜 왔냐’는 식의 싸늘한 눈초리와 냉대뿐이었다. 다무라는 분대장의 마지막 선심으로 받은 덩이뿌리 6개를 가지고 야전병원 근처 골짜기로 향한다. 거기엔 다무라처럼 오갈 데 없고 오갈 수 있는 몸도 아닌 패잔병 같은 부상병들이 숲 가에, 폭탄 맞은 시체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는 처량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마저 미군의 가차 없는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자 어쩔 수 없이 다무라는 자리를 떠난다. 배낭에 든 수류탄 한 개를 생각하며 죽을 때만큼은 자유롭게 자신이 결정할 수 있음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며 다무라는 정처 없이 섬을 떠돌며 방황한다.

제로 태평양 전쟁 말기 필리핀 민도로섬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하다 미군의 포로가 되어 종전을 맞이했던 오오카 쇼헤이(大岡 昇平)가 쓴 소설 『들불(野火)』은 전쟁문학의 걸작이라고 평한다. 그렇다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장면을 떠올리면 안 된다. 다무라의 죽음과 삶, 죄와 구원, 그리고 광기와 신으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거장이자 ‘영혼의 투시자’인 도스토옙스키를 연상시키는 형이상학적인 고찰과 심리적 번뇌가 이 작품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의 목적도 상실하고, 살아서 돌아갈 희망도 없이 오로지 죽을 자유밖에 없는 다무라에게 남은 시간은 무한한 상념의 연속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몽상에 젖기도 하고, 우주적 차원의 죽음과 삶을 그려보기도 한다. 성냥을 얻으려다 얼떨결에 민간인을 사살하면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다무라는 죄와 구윈, 그리고 신에 대한 상념에 심취한 나머지 신의 목소리까지 듣는 등 서서히 광기에 휩싸인다.

무뇌충이 아닌 이상 사람에게는 철학적 성찰과 고뇌도 필요하지만, 다무라처럼 절박한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생존’이다. 굶주리고 병들고 피곤한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처절하게 발악하는 극한 상황에서 동료 병사들의 극단적인 이기심과 ‘인간 사냥’을 자행하는 인간성의 상실은 다무라를 경악하게 하면서도 그 자신 역시 어느덧 인간이 지녀야 할 마지막 자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엉덩이 살점이 떨어져 나간 시체를 보며 그는 그 고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서 만난 죽어가던 미친 한 장교는 마지막으로 제정신이 들었을 때 다무라에게 자신이 죽으면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자 특유의 관대함을 발휘하며 왼팔 상박부 부위를 두드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다무라는 먹지 못한다. 왜 그는 먹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를 막았든, 그것은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곧 무너지고 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남긴 마지막 객기일까. 아니면 이성과 문명의 승리일까.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야전병원에서 안면이 있었던 나가마쓰와 우연히 마주친 다무라는 그가 건네준 ‘원숭이’ 육포를 정신없이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다무라는 알고 있었다. 몇 날 며칠, 아니 그 이상 숲을 돌아다녔음에도 원숭이 한 마리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죽어가면서 자신의 살점을 먹으라고 허락한 장교의 살점은 먹지 못하고, 남이 잡아 마련한 인육을 먹으며 다무라는 나카마쓰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소나 돼지, 또는 닭을 잡아먹지는 못하면서도, 누군가 그것을 도살하여 먹기 좋게 썰어준 고기는 아주 맛있게 잘 먹는, 그러면서도 동물 애호를 외치는 우리의 위선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한의 상황에 혼자 남은 다무라의 독백과도 같은 무한한 상념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죽음이 일상이 되고 그 명백한 증거가 썩은 달걀 같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곳곳에 널려 있는 전쟁터에 혼자 남은 병사는 우리의 상상과는 반대로 죽음을 집처럼 편안하게 생각한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하는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주변에 흔해진다면 그것에조차 인간은 면역되고 적응하는 것일까. 정말 만물의 영장답게 놀라운 적응력이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참으로 많은 걸 변화시킨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섭고 끔찍한 것은 바로 인간성의 상실이다. 인간성을 잃은 사람은 어떠한 짓을 할지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을뿐더러 그 자신 역시 그러한 행동의 의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가마쓰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다무라가 야전병원에서 처음 나카마쓰를 만났을 때는 중년의 노련한 병사 야스다에게 의지하려는 마음 약한 젊은이였을 뿐이었다. 그런 나카마쓰가 적군이고 아군이고 상관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사냥한 다음 다시 인육을 육포로 만들어 먹는 ‘인간 사냥꾼’으로 돌변한 것이다.

예전에 「동물농장」이라는 예능 프로에서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들이 굶어 죽어가면서도 같은 우리 안에 갇혀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한 동족의 살은 끝내 먹지 않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위급한 상황에 부닥치면 오랫동안 자부해온 문명과 이성이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것처럼 굶주림 앞에서는 부모 자식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생존’을 위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이라며 일부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 살아남아야 할 정도로 인간의, 아니 ‘나’의 생명은 소중한 것일까. 말은 이렇게 그럴싸하게 하지만, 나 역시 극한 상황에 닥치면 무슨 짓을 행할지 장담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이 리뷰는 2016년 2월 29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Share:

2016. 2. 24.

[책 리뷰] 질투여, 그대는 정령 사랑의 형제란 말인가! ~ 춘희(알렉상드르 뒤마 피스)

The Lady of the Camellias book cover
review rating

아, 질투여. 그대는 정령 사랑의 형제란 말인가!

Original Title: La Dame aux Camélias by Alexandre Dumas fils
내가 죽기 전에 당신은 돌아오지 못하실까요? 그러니 우린 이대로 영원히 다시 못 만나는 건가요? 당신이 오시면 내 병이 나을 것만 같아요. 하지만 나은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춘희(La Dame aux Camélias)』, p294)

너무 유명한 것도 선택의 장애가 될 수 있다!

실 원작보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가 각색한 오페라 ‘춘희’가 더 유명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re Dumas fils)의 소설 『춘희(La Dame aux Camélias)』는 줄거리까지는 몰라도 제목만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원작을 읽어볼 엄두가 쉽게 나지는 않는다. 작품성이 좋아서든지 아니면 단순히 내용이 재밌어서든지 어찌 되었든 세상에 제목이 너무 알려진 유명한 책들은 여기저기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도배된 리뷰들을 대강 읽고 나면 원작을 읽지 않아도 왠지 읽은 것 같은 오만한 착각이 들기 때문에 실제로 원작을 읽으려고 하면 다른 책 읽을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다. 너무 유명한 소설을 읽는 것은 왠지 유행을 좇는 것 같아 싱겁기도 하고, 이미 남들 다 읽었던 것을 뒤늦게 읽으려고 하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너무 기대가 큰 나머지 실제 작품을 읽고는 실망할까 봐 지레 겁먹기도 한다.

그러나 직접 읽어보지도 않은 작품에 대해 세간의 말만 듣고 이런저런 평을 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며 저자와 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제목만큼은 책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두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이 작품을 선택했다. 나는 『춘희』에 대해서 제목과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고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고급 매춘부와 순진한 한 청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통속소설이었다.

아, 질투여. 그대는 정령 사랑의 형제란 말인가!

제부터인지는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에서도 로맨스 장르를 꺼려왔다.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SF 영화 속의 미래보다 더 먼 거리감이 느껴졌으며 솔로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달콤하면서도 느끼한 장면들은 나의 비쩍 마른 옆구리를 더욱 시리고 건조하게 하였고 까닭 모를 질투심까지 솟구쳐 오르게 했다.

이 모든 장애에도 『춘희』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슬픈 비극으로 끝난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나를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발명하자면 나는 절대 그런 냉혈한은 아니다. 다만, 가진 것만큼 가진 배부른 사람들의 불행보다 가진 것도 별거 없이 음지를 살아가는 소수를 더 동정하고, 사람보다는 사람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동물들을 더 불쌍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소수’를 더 동정한다고 말했듯, 나 역시 『춘희』의 주인공 창녀 마르그리트를 저자 뒤마만큼이나 진심으로 동정하며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아르망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음속 깊이 애도했다. 그 슬픔은 ‘가슴이 찢어지도록’까지는 아니지만, 나의 홀쭉한 가슴 이곳저곳에 약간의 생채기가 날 정도로 쓰라렸다. 설령 그녀가 평생을 다른 사람의 신세를 망치는 파렴치한 일만 저질러 온 악녀였더라도 그녀의 죽음은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에서 언제가 있을 자신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죽어갈 때, 마르그리트처럼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보고 싶은 누군가를 못 본 채 눈을 감는다면? 그 이유가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사이처럼 사소한 다툼이나 오해 때문이라면, 그 묵은 앙금과 옥죄던 매듭을 끝내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이의 원통함과 안타까움을 어찌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르그리트의 죽음은 더더욱 애달프다.

병마로 피폐해진 그녀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문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눈만은 번쩍번쩍 빛났다. 혹시나 아르망이 돌아왔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무정한가. 마르그리트의 메마르고 새파란 입술이 죽어가는 나비의 마지막 날갯짓처럼 미약하게 떨리며 아르망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음에도 스스로 불을 지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매몰차게 마르그리트를 내버렸던 아르망. 그 잔인하도록 무정한 후레자식을 땅에 떨어진 담배꽁초 짓밟듯 마구 밟고도 성에 안 차 껌처럼 잘근잘근 씹었지만 그래도 울분을 토할 길이 없다.

아, 질투여. 그대는 정녕 사랑의 그림자로 남아 다정한 연인들을 불행과 어둠의 나락으로 끌어내려야만 만족스러운가. 사랑과 증오가 ‘감정’이라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니, 이 얼마나 가혹하고 냉정한 운명의 섭리인가.

마치면서...

자들에겐 한낱 놀잇감 상대로, 같은 여자에게선 멸시와 냉대를 받으면서 늑대처럼 포악한 남자들을 순간이나마 온순한 양으로 길들였던 양치기 소녀들을 뒤마는 진심으로 한 사람의 여자로서 바라보았다. 그것은 창녀 마르그리트가 그 어떤 사랑보다도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며 새벽이슬처럼 순수한 사랑을 아르망에게 바친대서 알 수 있다. 또한, 진실한 사랑을 믿지 못하고 순간의 질투에 눈이 멀어 마르그리트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다 못해 증오심에 불타 복수까지 결심한 아르망을 통해 남자들의 욕정만 채우기에 급급해 남발하는 부질없는 사랑의 약속을 질타한다.

남녀의 사랑을 다룬 통속소설임에도 당시나 지금이나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던 창녀들을 동정하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뒤마에게 머리를 숙여 깊은 공감의 뜻을 표하며, 원래 남자란 그런 동물이라는 더럽고 파렴치한 속성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이 리뷰는 2016년 2월 2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Share:

2016. 2. 23.

Abbyy FindReader 11, 내부 프로그램 오류 ~ Src\Pdf\Exporter\Fonts\FontDescriptorlmpl.cpp

내부 프로그램 오류:
.\Src\PdfExporter\Fonts\FontDescriptorlmpl.cpp.107.

Abbyy FindReader 11에서 PDF로 저장할 때 간혹 위와 같은 오류가 뜨면서 작업이 완료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 한두 페이지가 문제를 일으킨 것인데, 어떤 페이지가 문제인지 알아내려면 아래 스샷처럼 PDF로 저장할 때 [각 페이지를 별도 파일로 만들기]로 저장하면 된다. 그러면 맨 아래 스샷처럼 어떤 페이지가 문제를 일으켰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킨 389페이지를 삭제하고 389페이지의 원본 이미지를 다시 추가해서 OCR 한 후 다시 PDF로 저장하니 이번에는 문제없이 완료되었다.

또 다른 방법은 Abbyy FindReader 11에서 FindReader 문서로 저장한 후 그것을 Abbyy FindReader 12에서 열어 작업하면 된다.

이 리뷰는 2016년 2월 23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Share:

2016. 2. 18.

[책 리뷰]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거침없이 써 나가라 ~ 힘 있는 글쓰기(피터 엘보)

Writing With Power book cover
review rating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거침없이 써 나가라

Original Title: Writing With Power by Peter Elbow
나는 학생들이 계획하고 조심스럽게 기준에 맞추려고 애쓰며 쓴 글을 읽을 때보다 조심스러움을 내던지고 ‘쓰레기면 어때’하는 마음으로 쓴 글을 읽을 때 나를 사로잡거나 끌어당기는 문구를 더 자주 마주친다. (『힘 있는 글쓰기』, p25)

개인이건 문명인이건 사람은 세상에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한다. 그중에는 태초부터 내려오는 원시적 방법이자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목적인 번식을 통해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보통은 이것을 동물적 본능이라고 말한다. 이 외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많은 사람을 감탄하게 할 만한 업적을 남겨 역사적 •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 본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앞선 방법은 대부분 사람이 가능한 보편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유명인이 되라는 후자의 방법은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운이 좋은 소수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문명 시대에는 꼭 이 두 경우가 아니더라도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쉽고 간편한 방법이 있으며 실제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자신만의 블로그나 트위터,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는 것이 바로 이 경우인데 이 방법은 누구나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만 있으면 가능하다. 이 방법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공명심을 만족시켜주는 사회적 • 문화적 욕망의 배출구로서 매우 유용하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는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이런 소박한 공명심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블로그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그때나 지금이나 누가 읽건 안 읽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고,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 더더욱 아니지만,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인터넷 공간에 나의 유치한 생각이나 알량한 의견을 남긴다는 사실 그 자체와 혹시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지도 모르는 얕은 지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런 이유로 내가 쓴 글이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다. 굳이 자평해본다면 처음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는 작문 실력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문장은 평범하고 구성은 불분명하며 주제는 모호하다. 그러나 이왕이면 다른 사람도 읽고 싶어 하는, 그리고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독자의 마음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바람이 아예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다. 단지 그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욕심을 낸다고 될 일도 아니며, 어차피 좋은 글을 쓰는 실력은 나의 능력 밖이라는 체념은 이미 마음속에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때론 위대한 작품들에서 발산하는 거대한 아우라에 압도되어 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힘 있는 글쓰기(Writing With Power)』의 저자 피터 엘보(Peter Elbow)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나 꾸준한 노력으로 ‘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마법 같고 낭만적이며 자유방임적인 글쓰기 방법은 그 가능성을 가늠한다. 그렇다면 피터 엘보가 말하는 ‘힘 있는’ 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논리적이고 구성이 완벽하며 화려한 수식어와 현란한 기교를 부린 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힘 있는 글이란 글자와 문장이 살아 숨 쉬면서 독자에게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글이다. 독자를 압도하고 독자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듣게 하거나 독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경험을 하게 하는 글이다.

피터 엘보는 이러한 ‘힘 있는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유롭게 글쓰기’는 나쁜 글이든 상관하지 말고 10분 동안만이라도 마음에 떠오르는 언어를 존중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언어를 존중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은 글에 힘을 불어넣는 최고의 손쉬운 만능 연습법이다. 여기에는 어떤 비판도, 어떤 독자도 고려하지 않는다. 나쁜 글이라는 두려움은 잊고 그저 쓰고 또 쓰는 것이며 설령 실제로 나쁜 글이라도 상관하지 말고 쓰는 것이다. 글의 주제나 내용과 상관없어도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써나가는 것이 자유로운 글쓰기의 핵심이다.

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든 독후감이든 꾸준히 뭔가를 써보지 못한 채 성장했다. 당시의 학교 교육 시스템이 요구하는 글쓰기 능력은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 것을 공책에 베껴 쓰는 것과 숙제로 내준(기억으로는 작문 숙제는 전혀 없었다) 문제를 푸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졸업 후 자발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글을 쓴 최초의 기억은 아마도 군대 가서 여자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이었고, 그것도 제대 후에는 인터넷 메일과 MSN메신저, 그리고 문자 메시지 등으로 뚝 끊기고 말았다. 그 이후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정말 글쓰기와는 담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블로그 덕분에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그래도 뭔가를 쓰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맞춤법도 틈틈이 다시 보게 되었다. 이제는 좀 더 욕심이 난 것일까? 주제넘게 ‘힘 있는 글’에 도전하려고 하다니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필자처럼 블로그 등에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에게 상당히 유용한 책이지만, 피터 엘보가 글쓰기에 관해 설명하는 그 대상의 글이 주로 논리적인 글에 가깝다는 점을 보면 사회생활에서 무미건조한 보고서나 평가서, 기획서 등을 남발하는 것에 질린 사람이나 남들과 다른 특별한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더 유용할 듯싶다.

이 리뷰는 2016년 2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Share:

2016. 2. 15.

바이두 클라우드 두 계정 간의 자료 이동

바이두 클라우드 사용자는 [비밀 공유] 기능을 이용하여 친구에게 자료를 공유하거나 다른 계정으로 자료를 옮길 수가 있는데, 음원처럼 저작권 자료가 공유 파일에 포함된 경우는 공유 링크 생성은 되지만 막상 받으려고 하면 저작권 경고 문구와 함께 자료를 받을 수가 없다. 이럴 때는 두 계정을 친구로 맺은 다음 [친구 공유] 기능으로 자료를 쉽게 옮길 수 있다.

자료를 공유할 계정은 바이두 클라우드로 로그인(사용된 버전은 5.3.4)하고, 자료를 공유 받을 계정은 인터넷 브라우저로 로그인(혹은 VMware 같은 가상 머신을 사용)해서 서로 채팅하듯 공유 링크를 주고 받으면 된다.

2017년 12월 3일 추가: 두 번째 스크린샷, 그러니까 바로 위 스크린샷에 찍힌 윈도우 작업 표시줄에는 크롬 아이콘이 안 보이고 파이어폭스 아이콘이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파이어폭스에서 구글로 갈아탄 것이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정식 출시한 파이어폭스 퀀텀이 기대 이상 선전을 하고 있지만, 아직 내가 원하는 부가기능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으며, 갖춰질지도 의문이다. 사용자 입장에선 파이어폭스 부가기능과 크롬 확장기능이 서로 호환되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이것이 가능할까?

이 리뷰는 2016년 2월 15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Share:

2016. 2. 12.

[책 리뷰] ‘양의 탈을 쓴 늑대’, 남자의 이중성을 고백하다 ~ 이불(다야마 가타이)

Futon book cover
review rating

‘양의 탈을 쓴 늑대’, 남자의 이중성을 고백하다

Original Title: 蒲団 by 田山花袋
두 사람의 사랑의 열쇠를 자신이 쥐고 있다고 믿고 있는 만큼 도키오는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자신의 부당한 질투, 부정한 연정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의 열렬한 사랑을 희생시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동시에, 스스로 말한 “온정어린 보호자’로서 도덕가처럼 처신하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또 한편으로는 이 일이 고향에 알려져 요시코가 부모님 때문에 귀향하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이불(蒲団)』, p73)

키오는 자신의 작품을 숭배하는 문학 지망생 요시코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부유하며 엄격한 크리스천인 부모 밑에서 자란 요시코는 부모의 허락을 얻어 도쿄의 도키오 집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하게 된다. 자신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오직 온순과 정절, 그리고 자식만 잘 키우면 되는 줄 아는 아내를 늘 ‘구식’이라고 핀잔을 주곤 했던 도시코였기에 화려한 옷차림과 풍부한 표정을 고루 갖춘 신식에 미모까지 겸비한 요시코를 보자 이내 그동안의 고독한 생활이 인제야 보답을 받는 것 같은 환상에 들떠 흥분한다.

도키오는 구식의 아내만 없다면 신식의 요시코를 아내로 얻고 싶었고 요시코도 능히 그럴 것으로 생각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요시코에게 애인이 생기면서 도키오의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고독한 번민은 시작된다.

키오가 요시코에게 바라는 것은 “끊이지 않는 욕망과 생식력”을 발산하는데 적당한 “한창때의 여자”였다. 낭만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바로 요시코의 육체를 갈망했던 도키오는 요시코에게 애인이 생기자 요시코의 정절에 유난히도 큰 집착을 보인다. 이는 이광수의 『무정』에서 이형식이 재산과 명성을 두루 갖춘 김장로의 딸 선형과 여렸을 적부터 고아인 자신을 보살펴주고 가르쳐준 박진사의 딸 영채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영채가 유명한 기생이 된 것을 알고 나서 영채의 정절을 의심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무정』의 형식처럼 도키오 역시 겉으로는 신식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하이칼라였지만, 막상 진짜 신식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경계선에 도착하자 억압되어 있던 보수적 가치관이 고개를 쳐들며 문명의 가식을 드러낸다. 도키오는 사회로부터도 용서받기 어려운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을 선생이라는 떳떳한 가면 뒤에 숨기고 세간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선생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도덕성을 내세운다. 그래서 그는 요시코와 그녀의 애인 다나카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음을 믿는 척하면서 두 사람의 정신적 사랑을 지지하는 “온정어린 보호자”로서 처신한다. 한편으로는 요시코를 빼앗겼다는 질투심과 요시코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욕구불만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의 사이가 진정으로 틀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불(蒲団)』(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의 도키오도 결혼 후 권태기에 접어든 남성이 그러하듯,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잇따라 호소하며 ‘사랑’을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젊은 육체를 향한 발정의 다름없었음은 작품 마지막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요시코의 고백으로 그녀가 더는 처녀가 아님을 알게 되자 도키오는 “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고 있었던 정도라면 굳이 그 처녀의 정조를 존중할 것까지는 없었다. 자기도 대담하게 손을 내밀어 성욕을 만족시켰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자탄하며 본심을 드러낸다.

도키오가 젊은 여자를 갈망하는 욕구는 모든 남성의 욕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도키오 자신이 유부남이고 또한 그 대상이 제자라는 점에서 비도덕적이다. 그런 점과는 별개로 그는 번뇌를 거듭할 뿐 끝내 요시코에게 마수의 손을 뻗지는 못한다. 남자의 무차별적이고 난잡한 성적 공상이 대부분 공상으로 끝나듯, 도키오 스스로 인정한 두 번의 기회를 놓친 것을 보면 어쩌면 도키오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용기와 의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즉 선생, 유부남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책임감과 보편적 도덕심이 표면적으로나마 승리했다는 뜻이다. 이는 대부분의 남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그래서 필자는 도키오의 발정적인 고뇌를 충분히 이해하며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러하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더욱 난잡했을 것이다.

찌 되었든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남자의 이중성은 비단 근대화의 길에서 구식과 신식 사이의 혼란에서 방황했던 그 당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류는 문명이 생기고부터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 오면서도 ‘본능’을 잠시 감추거나 억제할 수 있을망정 그것을 영영 제거할 수는 없다는 점에 간혹 당황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여타 동물과 크게 다른 점이 없지만, ‘본능’을 상황에 따라 통제하려고 노력하고 ‘본능’과 ‘행동’ 사이에서 나름의 이성적인 선택을 고려하며 갈등을 겪는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는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발정이 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나 화가 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을 보면 짐승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번뇌와 갈등은 사람이 어설프게나마 ‘이성’을 갖춘 동물이라는 점을 미약하게나마 증명한다. 그런 점에서 도키오의 번뇌를 바라본다면 그는 ‘이성’과 ‘본능’ 사이의 갈등이라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당연히 겪는 매우 보편타당한 번뇌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음흉한 속마음을 비록 겉으로 태연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연중 자신의 행동을 통해 내비친다. 요시코를 잊지 못해 술을 마시고 난폭하게 행동하거나, 요시코를 향한 못마땅함을 드러내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 그러하다. 번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마음을 다잡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추태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일본 근대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이불(蒲団)』은 다야마 가타이가 실제로 자신과 여제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특히 남자의 심리를 매우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에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의 결점을 만연하에 알리는 작품이기도 해서 발표하기까지 상당한 용기도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도키오를 (실제는 다야마 가타이 자신의 일이었겠지만) 남의 일 말하듯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절제된 담백한 필치에서 이미 그 과거에 대해 어떠한 미련도 남지 않은 그의 초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리뷰는 2016년 02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Share:

Category

팔로어

Recent Comments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