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 티모시 C. 와인가드 | 어제의 무엇이 오늘의 세계를 만들었나?
인간 몰살의 선봉대장
내가 한때 지독히도 혐오했던 그녀는 한 해에만 약 83만 명의 사람을 살해하는 무자비한 살인귀다. 각종 위험이 도사리는 자연 앞에서 무지와 무모함으로 무장한 호모 사피엔스 조상 1,080억 명 중 약 520억 명이 그녀의 야만스럽지만, 생존과 번식을 위해 부득이하게 꽂을 수밖에 없는 보일 듯 말 듯 한 침 앞에 남은 인생을 속절없이 빨렸다. 그녀는 단연코 인류 문명 최악의 불청객으로서 인간 몰살의 선봉대장이다. 별 매력 없는 굵은 허리와는 달리 개미허리처럼 가느다란 침으로 표적에 죽음의 이정표를 새기기 전, 집요하게 거슬리는 고주파 개선가로 많은 사람의 단잠을 방해하는 그녀의 이름은 다름 아닌 ‘모기(The Mosquito)’다.
그녀의 주공격 무기인 침에는 인간이 걸리는 감염병 중 가장 오래된 질병이자 지금까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말라리아부터 시작해 뎅기열, 사상충, 황열병,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선보인 신무기인 지카 바이러스, 웨스트나일, 마야로 등 열다섯 종 이상의 생물학 무기가 탑재되어 있다. 실로 팔방미인이다.
인류사의 숨겨진 영웅, 모기
요즘은 기후 변화 때문인지 나의 일일 모기 KILL 수는 한여름보단 (예전 같으면 모기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안도감과 도취감이 새벽노을처럼 피어오르는) 늦은 가을에 두각을 나타낸다. 한 해 동안 모기와의 지루한 전투로 흘린 땀과 방심으로 빼앗긴 피의 양만 대충 계산해도 모기 한 마리 무게인 2~3mg을 수십 배 이상 웃돌아 소주 반 잔 정도는 채울 것 같지만, 그것보단 그 면벽 같은 고단한 싸움에 허비한 시간이 아깝다. 이 매해 반복되는 소모전과 그로 인한 매해 반복되는 (무진장 가려운) 영광의 흉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답지 않은 모기와의 싸움을 블로그에 유유자적 끼적거릴 수 있는 것은 운이 좋게도 내가 사는 지역은 말라리아 같은 모기 매개 질병과는 무관한 세계이거나 백신 같은 대비책이 잘 갖춰진 보건 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에선 모기는 여전히 위협적이다.
그렇다면, 과거 눈앞에서 보란 듯이 ‘날 잡아봐요’라고 윙윙거려도 무지와 무모함 때문에 범인을 매번 놓쳤던 조상들과는 달리 과학과 기술로 무장한 현대에 와서도 매년 83만 명이라는, 피시방 죽돌이가 지존으로 군림하는 게임 세계에서도 못 올릴 것 같은 기록적인 킬 수를 너끈히 해치우는 모기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을까?
비교적 모기 매개 질병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에 사는 우리 주위에서 지싯거리는 모기는 매년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는 귀찮고 가려운 존재 정도일 것이다. ‘박멸’, ‘멸종’, ‘절멸’이라는 끔찍한 수식어를 (한때 모기와의 전투에서 인류의 구세주로 등극했지만, 이제는 퇴물이 된) DDT를 쏟아붓듯 퍼부어도 양심에 거슬리지 않고, 도덕적으로도 께름칙하게 여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절대악‘ 같은 존재 중 하나가 모기이지 않을까.
그런데 그거 아는가? 만약 모기 역사에 정통한 똑똑한 모기가 있다면, 그는 분명 인류 역사에도 정통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인류사에서 모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얄궂게도 때론 인류 운명과 문명의 흐름을 결정지은 숨은 공신이라는 것을.
오늘을 만든 어제의 모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업을 도운 것도 모기였고, 한창때의 그를 죽음으로 끌어내린 것도 모기였다. 로마의 쇠락과 몰락을 부추겼던 말라리아는 당연히 얼룩날개모기의 전과였으며, 기독교가 치유의 종교로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도 모기 매개 질병이 비상의 날개를 펼쳤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서유럽 진입을 차단한 것도 마자르족 농부들과 모기들이 이때만큼은 잠시 적의를 내려놓고 일심동체로 방어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이어지는 식민시대, 제국주의 시대의 얼룩날개모기 장군과 숲모기 장군의 암약은 가히 ‘호러 쇼 투어’라고 불릴만하다. 모기는 유럽 열강들의 300여 년에 걸친 카리브해 정복을 기어코 포기하게 했으며,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비극과 해방하는 혁명에도 관여했다. 미국의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은 말할 것도 없으며, 미국이 현재의 패권을 쥐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일찌감치 모기와 말라리아 퇴치의 중요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한 예로 말라리아 프로젝트에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과 같은 수준의 기밀과 보안이 유지되었다). 스타벅스는 그 누구보다 모기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커피가 한때 카페인 특유의 효능 때문에 말라리아 치료제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모기가 관여하기로 한 전투의 승패는 사람의 지략, 작전, 용기, 물량, 화력이 아니라 모기가 어떤 쪽의 피를 더 선호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상업시대의 유일한 무관세 수입품으로써 본의 아니게 군인으로 활약했던 모기는 많은 전쟁에서 사람 군인들이 휘두른 총과 칼보다 더 위협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인류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오늘을 만든 건 어제의 모기였다고 할까나? 그렇다면 작금의 모기는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모기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경이로운 책
서문에서 모기에 대해 ‘내가 한때 지독히도 혐오했던’이라고 과거형으로 말한 이유는 티모시 C. 와인가드(Timothy C. Winegard)가 자신의 저서 『모기(The Mosquito)』를 읽고 나면 모기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든 변할 수밖에 없다고 당당하게 써 내린 확신에 찬 문장이 강렬한 텔레파시라도 되는 것처럼 나의 줏대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기습 작전으로 우리의 밤잠을 설치게 할 것이 뻔한 그녀들이 여전히 혐오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녀들이 억척스럽게 우리의 피를 갈망하는 것은 인류의 엄마들이 ‘모정’이라는 가슴 뭉클한 기치 아래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이 역시 가슴 뭉클하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그리고 지구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에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그저 먹고 먹히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살아남으려고 애쓸 뿐이다.
모기의 진화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 코드를 불완전하게나마 변경시켰을 정도로 인류사와 밀접하게 엮어있다. 그래서 모기에 대한 감상은 우스개 같은 잡담으로 그쳐선 안 된다. 그것은 모기에 의해 희생된 520억 명의 조상에 대한 불경이자, 이 순간에도 말라리아로 30초마다 죽어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인류사의 판도를 뒤집은 굵직한 사건에 혜성처럼 난입하여 헤살꾼처럼 신이 나게 훼방 놓은 모기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역사를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 전투에서 아군의 총칼에 쓰러진 적군보다 모기에 의해 드러누운 적군이 압도적으로 많을 때, 과연 이 승리의 공적을 오롯이 아군의 용맹으로 치하하는 것이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기 전쟁 기념관’이라도 지어놓고 모기의 업적을 칭송해야 할까?
아무튼, 여기까지 와놓고 보니 기분 나쁘게도 모기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번져 나온다. 그렇다고 내 주위를 기민하게 날아다니는 모기를 그냥 놔둘 생각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모기 박멸 운동에 동참할 생각도 없어진다. 그동안은 순전히 보신을 위한 방어적인 행동으로 모기와의 전쟁을 수행했다면, 이제는 자신을 죽인 범인도 모른 채 허무하게 숨진 520억 조상에 대한 공허한 복수로, 그리고 모기들의 높은 전투력을 기리는 의미에서 진지하게 전투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고집해 왔던 것처럼 모기와의 전투는 일대일을 고집해야 할 것이다. 얍삽하게 살충제나 전기모기채 같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지 말지어다. 사람이 로봇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만큼 비참하고 허망한 것은 없다. 모기들도 그런 심정일 것이다. 인류의 육신에 흡혈 빨대를 꽂은 다음 마음껏 휘젓고 빨아댐으로써 역사의 물길마저 바꿔놓은 모기들을 적군으로서 높이 평가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손으로 때려잡아라. 늦지 않았으니 모기 후려치기 기술을 갈고닦아라!
끝으로 『모기』는 역사서로선 지나치게 익살스러운 것이 흠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유쾌하게 술술 읽히는 책이다. 모기를 빙자해 제국주의의 수탈을 고발한 책은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식민사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과 모기의 생물학적이고 생태학적인 진화사를 다룬 책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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