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술사 | 미야베 미유키 | 작가는 미워하되 작품은 미워하지 말라!
셀프 미용, 피를 보다!
며칠 전, 몇 푼 절약한답시고 주제넘게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르다 그만 서투른 가위질에 왼손 집게손가락 두 번째 마디쯤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평소 조심성이 강한 (솔직히 말해서는 겁이 많은) 내가 칼이나 가위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다루다 상처를 입기는 실로 오랜만인지라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한 나머지 U자 모양으로 벗겨진 피부 틈새로 피가 아지랑이처럼 스며 나오는 모습을 남의 상처 바라보듯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땐 별다른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흘러나온 피가 세 번째 마디를 지나 감정선의 치켜 올라간 끝자락에 닿을 때쯤 되어야 찌르르한 통증이 밀려왔다. 익숙하지 않은 통증이 밀려오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 떨며 부랴부랴 응급처치를 수행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이 상처가 언제 아무나 하는 것이 나의 지상 최대의 관심사이자 가장 큰 걱정이다.
알다시피 혈우병 환자가 아니고서야 이깟 가위에 벤 상처쯤은 밴드만 붙이고도 이삼일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고, 역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빨간 피와 상처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통증으로 경황이 없었을 그 찰나엔 이 통증이 평생 나를 괴롭힐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아주 잠깐이지만 물 찬 제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은 이다지도 육체적 고통에 약하기 마련이고 그러기 때문에 ‘엄살’이란 보호 수단이 간혹 먹힐 수 있는 것이고, 더불어 고문의 역사는 흐드러지게 펼쳐질 수 있었다.
어쨌듯, 육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고, 훗날 흉터를 만든 사건 사고를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천재적인 기억력을 보유했다 할지라도 그때 느낀 그 고통까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참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온몸에 있는 크고 작은 흉터를 볼 때마다 그 흉터를 만들게 한 고통도 매번 견뎌야 한다면 진통제를 물처럼 마셔야 겨우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Photoshop AI 페인팅 플러그인 | Alpaca」로 생성한 이미지> |
비극은 비극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다스린다?
육체에 남은 상처는 그러하지만, 불행하게도 마음에 생긴 상처는 그러하지 못하다. 우린 지구에서 진화한 모든 종에서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공감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할 정도로 예민하고 세심한 마음을 지녀서 그런지 상처 입기도 쉽다. 그뿐만이 아니다. 때에 따라선 평생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간직한 채 마음의 1/3쯤은 슬픔과 상심에 절어 살아가는 불행을 짊어지기도 한다.
육체에 난 상처는 약방이나 병원에 가서 몇 푼 주고 치료하면 대부분 금방 낫지만, 마음의 상처는 전문가에게 거금을 주고 긴 시간 상담 치료를 받아도 완치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럼 우리의 오치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입에 머금다 뱉은 물마저 달콤할 것 같은 꽃다운 나이의 오치카가 겪은 영혼이 부서질 정도의 비극적인 일은 어떻게 다스려야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에서 나온 해답이 생뚱맞게도 타인이 겪은 괴담을 경청하는 것이니 이 자체가 괴담이다.
타인의 비극으로 내 비극을 치유한다니,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봐야 하나? 이런 망측하고도 고약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런저런 중독자들의 집단 상담 치료를 떠올리면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벌어지는 기기괴괴한 일은 그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마치 나의 일처럼 느끼는 호모 사피엔스의 전매특허인 감정 이입과 공감 능력이 보통 정도만 발휘된다면, 떠오를 때마다 영혼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는 마음의 상처를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감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 무리는 없다. 이 단순 명확한 사실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흉터처럼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상처 한두 개쯤은 운명처럼 남모르게 짊어지고 산다? 라는 삶의 진리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수선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기대가 오치카의 숙부 이헤에가 괴담 자리를 연 대담한 이유라고 한다면, 그런 비밀스러운 자리를 염탐해서 얻은 ‘소설’이라는 결과물로 독자를 미혹시키는 미야베 미유키(宮部 みゆき)는 요괴 같은 작가다.
<「Photoshop AI 페인팅 플러그인 | Alpaca」로 생성한 이미지> |
이전 작품보단 조금은 무시무시한?
『피리술사(泣き童子)』는 (미시마야 괴담 시리즈의 앞선 작품인) 『흑백(おそろし)』, 『안주(暗獸)』보단 아주 조금 더 무섭다. 사람을 통째로 싶어 삼키는 무시무시한 괴물 마구루가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 괴물을 퇴치하는 과정이 실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감추고 있는 악행을 꿰뚫어 보는 말 없는 아이가 마지막으로 쓱 던진 그 한마디는 유명한 괴담을 연상시켰음에도, 즉 한 번 이상 들은 반전임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소름 끼친다.
그래도 미야베 미유키 괴담만의 은은한 감개는 여전하다. 전반적으론 뭔가 뭉클뭉클한 것이 도시인의 황량한 마음 구석구석을 조물조물 안마해주는 듯하지만, 대놓고 훈훈한 이야기라고는 말할 순 없는, 그런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무는 아름다운 슬픔이 가을장마처럼 주룩주룩 마음을 적신다. 괴이하지만 좋은 일, 괴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일, 슬픔을 가장한 아름다운 이야기(요것은 『피리술사』보다는 『안주』에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겠지만). 그만의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를 머금은 이야기는 갈라진 틈 사이로 빗물을 흡수한 흙담처럼 아릿한 흙냄새와 함께 포근한 정서를 자아낸다.
사실 진짜 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마구루보다 잔인한 것은 작가의 모진 필설이다. ‘여기서 끝났으면. 더는 듣고 싶지 않아. 그래서 행복해졌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났으면.’ 하는 소박한 독자의 바람을 작가는 사무라이의 결연한 검도처럼 단칼로 베어 버린다. 뭐, 그래야만 괴담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고, 또 그래야 가슴을 철렁이는 감정의 격동을 안전하게 맛볼 수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위대한 ‘말’의 힘
『피리술사』엔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진짜 괴담 모임이 등장한다. 이름깨나 알려진 유지가 주최하는 이 모임은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때가 묻고 금전에 더러워져서 칙칙해진 얼굴과 마음을 대청소하듯 괴담으로 털어낸다는, 역시나 괴이한 발상으로 시작된 모임이다.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 모인다는 이 모임에는 오치카와 오카쓰를 포함한 에도 사람 20여 명, 그리고 당신과 내가 작가의 약간의 금전과 약간의 명성을 염두에 둔 적반하장식의 배려 덕분에 참석하게 된다. 아마 작가 자신도 이런 식으로 여러 해 동안 묵은 뭔가를 총채로 털어내듯 떨어내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잇속에 밝은 작가가 얄밉고 부럽기도 하지만, 오치카만큼이나 사랑스러운 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미워하기는커녕 다음 작품만 넋 놓고 기다리게 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성경의 유명한 구절이 있지만, 소설의 경우는 그 반대다. 작가는 미워하되 작품은 미워하지 말라!
‘흑백의 방’을 몽롱하게 싸고도는 이야기는 각양각색이지만, 말하는 사람의 심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상처를, 나의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는 어둠을, 나를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지는 슬픔을 이야기로 털어낸다. 그럼으로써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것 같았던 마음의 무거운 짐이 예전보다는 조금은 더 견디기 쉬운 가벼운 짐으로 변한다.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슬픔을 희석하는 것이야말로 ‘말’의 위대한 힘이다. 말로 해소할 수 없는 난 글로 해소한다. 일명 ‘치유하는 글쓰기’. 내가 블로그에 아무도 읽을 성싶지 않은 글을 끈덕지게 쓰는 이유 중의 하나도 그것이다. 아마 이것이 없었다면 나의 정서적인 삶은 지금보다 더 피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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