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 | 김내성 | 예술의 파괴적인 충동과 연쇄살인마의 광기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추리’로만 먹고 살라는 법은 없다!
『경성 탐정 이상』(「경성 탐정 이상 1 | 낙상과 독서, 그리고 실망」)에 ‘경성’이 없다고 억지에 가까운 불만을 토로하게 된 계기는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를 읽고 난 직후였기 때문이다(거꾸로 풀이하면 미야베의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런 불만은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미시마야’ 시리즈를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무시무시한 괴담 속에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에도를 잘도 담아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우리가 살아 보지 못한 에도 시대를 기러기 아빠가 집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시름시름 향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에도 시대는 미신이 나름에 역할을 하던 시기였던 만큼, 그리고 귀신이나 요괴니 하는 초자연적 존재 자체가 인간의 희로애락과 비극적 삶과 오진(五塵)에서 기인하는 만큼 ‘괴담’으로 시대소설을 곡진하게 우려낸다는 발상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피바람 몰아치는 흉흉한 자극에 목마른 자가 공포영화를 찾듯 자극적이고 단순한 괴담소설인 줄만 알고 책을 선택하게 된 난 뜻밖의 높은 격조에 역시 미야베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탄성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에도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비통하고 아름다운 괴담을 읽고 난 후에, 폐부를 찌르르 울리는 감흥이 완전히 가시기 전에 김재희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이니, 나로선 ‘일본의 에도’가 아닌 ‘조선의 경성’을 음미할 수 있는 시대적 진국을 절절하게 요구하고 싶었다. 과거를 향한 손해 볼 것 없는 상사병을 앓는 동안만큼은 현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도 하고, 지나치게 문명화된 현실의 메마른 삶에 진저리가 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애초 작품 구상에 그런 요소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반면에 미야베 미유키는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 그리고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에도 시대를 그리겠다는 작심이 있었다) 김재희 작가 처지에서 보면 나의 요구는 통닭집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냉면을 내놓으라고 생짜 놓는 진상 손님처럼 황당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추리’로만 먹고 살라는 법은 없다. 삼겹살은 그 야들야들한 고기 한 첩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맛을 선사하지만, 깻잎장아찌를 싸 먹는다면 고기만 먹을 때와는 격이 다른 천상의 맛을 선사한다. 또한, 동침한 신혼부부처럼 삼겹살 옆에 묵은지를 사이좋게 굽는다면 정말로 옆 사람이 죽어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비주얼과 맛이 나온다. 고로 추리소설에 오직 ‘추리’만 있는 것보단 삼겹살과 생사를 같이하는 묵은지나 깻잎장아찌처럼 소설의 격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뭔가가 더 있다면 독자가 얻는 재미와 감흥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일본 작가의 장르소설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단순히 ‘재미’에만 있지 않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본격 추리소설가, 김내성(출처: 나무위키)> |
한국 추리소설 계보의 시작, 김내성
‘경성 탐정’하니까 떠오르는 것은 한국 최초의 명탐정 캐릭터 유불란(劉不亂)이 등장하는, 그리고 한국 작가로선 최초로 본격적인 추리소설가로 활동했던 김내성의 소설 『마인』(「마인 | 한국 추리소설 계보의 시작」)이다. ‘마인’은 요즘의 괜찮은 한국 추리소설과 비교해도 트릭의 구성이나 범죄의 치밀한 면은 조금 뒤질 수 있지만, 문장삼이(文章三易)를 고루 갖춘 유창한 문장과 민첩한 재기가 돋보이는 필치는 이들보다 한 수 위다. 김내성은 ‘통속성’과 ‘대중성’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한편으론 한때나마 추리소설을 추리문학으로 격상시키려고 했던, 지금의 시점으로 봐도 신념과 포부가 도발적이었던 작가답게 자신만의 문체를 구사하려고 노력했던 진정한 작가다. ‘마인’은 이미 읽었고 해서 김내성의 단편 모음집인 『비밀의 문』을 읽었다.
다섯 편의 단편만으론 어떻게 ‘통속성’과 ‘대중성’을 구분하는지, 추리소설이 추리문학으로 격상되는 필요조건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나의 한정된 지식으로 어쭙잖은 평가를 하자면 괴기소설이 괴기문학으로 나아가는 그 시발점에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놓을 수 있다면, 한국의 추리소설이 추리문학으로 발돋움하는 그 시발점엔 김내성의 작품을 놓는다면 꽤 그럴듯할 것 같다.
물론 이 단편집은 ‘문학’ 운운하기엔 ‘마인’보다도 한없이 부족하지만, 거침없는 필치로부터 와르르 전해져오는 비장함이 글을 읽는 재미를 한층 더 우아하게 만드는 점은, ‘소설’이라는 딱지조차 가당치도 않은 졸렬한 문장을 ‘라이트 노벨’이라는 유치한 간판을 내세워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작가의 자부심도 없고 발전도 포기한 요즘 작가들이 분명히 배워야 할 점인 것만은 사실이다.
<남녀의 삼각관계는 죽음의 전도사> |
예술의 파괴적인 충동과 연쇄살인마의 광기
『비밀의 문』에 실린 첫 번째 단편 「비밀(秘密)의 문(門)」은 추리소설 좀 읽었다 하면 트릭의 대략적인 윤곽 정도는 간파할 수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비밀의 문’에서 화자는 트릭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독자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유도하는데, 요즘 용어로 치면 ‘서술 트릭’이라 할 수 있겠다. 젊은 남녀의 애정 행각을 다룬 ‘비밀의 문’은 뒤를 이은 단편들에 비하면 수수한 편이다.
두 번째 단편 「이단자(異端者)의 사랑」부터 악마적이고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찬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처럼 으스스하게 스며 나온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 정도로는 성애 차지 않는다는 듯 ‘살인’ 이후에 펼쳐지는, 혹은 신선한 사체를 앞에 두고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악마적인 취미는 예술의 파괴적인 충동과 연쇄살인마의 광기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술을 빙자한 악마의 유희인가? 아니면 단지 주체할 수 없는 예술적 광기에 휩쓸린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수많은 일화 중 하나일 뿐인가?
어찌 되었든 죽음에서 생명, 생명에서 죽음이라는 생태계 순환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죽음의 결과물이자 새로운 생명의 토대가 되는 시체에서 창작 욕구를 자극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는 과정만큼은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말이다.
재밌는 것은 모든 단편에서 비극적 사달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삼각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사나이 하나에 계집 둘, 계집 하나에 사나이 둘, 이것은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내려오는 한 개의 너무나 진부한 비극이라고 화자도 인정하듯,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한 독자를 실망하게 만들 수도 있는 소재이기는 하다. 하지만, 재료가 같다고 해서 결과물이 같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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