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좋은 추리소설
<너무 단순해도 재미없는 것이 추리소설이다> |
이 글은 「모든 것이 F가 된다 | 삼중 밀실 미스터리」의 전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추리소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킨 미스터리의 실체를 본문에 주어진 단서만으로 얼마나 매끄럽게 잘 풀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좋은 추리소설을 판별하는 나만의 기준이다. 물론 여기에는 독자의 지식수준과 살아온 경험, 그리고 상상력과 추리력 등의 지적 능력에 따른 개인차가 존재한다. 이에 따라 한 개의 단서에서 열 개의 답이라는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개의 단서에서 단지 한두 개 정도의 수확에서 만족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그것이 단서라는 것조차 모른 채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단서라는 것조차 모른 채 지나가는 사람’에 속할 때가 많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부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나의 무지함을 일반화시키는 물귀신 작전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어보겠다는 몰염치함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에 빠져들다 보면 슬라이드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가는 그 수많은 텍스트 속에 어떤 낱말, 어떤 문장이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푸는, 혹은 드러나지 않은 미스터리에 다다를 수 있는 열쇠 조각이 되는지는 언어학자가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문자를 분석하는 것처럼 세밀한 관찰과 고도의 집중, 그리고 천착의 천착을 거듭하지 않는 이상 분간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이야기 전개 능력이 독자를 무아지경에 빠트리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장을 넘기는 손을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뿐하게 만들고, 그 가뿐한 손놀림에 ‘다음 페이지에는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까?’ 하는 기대감과 그 기대감이 어떻게든 충족될 것이라는 흥분감을 느끼게 할 정도의 흡입력을 갖췄다는 전제로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독자의 눈꺼풀은 한없이 무거워지고 동시에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마치 공사판에서 벽돌을 나르는 것처럼 힘겨워지게 되니 이때는 단서고 나발이고 다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런 고로 작가가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재미와 긴장감을 적절하게 조율하며 이야기를 잘 꾸려나간다면 당연히 작가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추리소설에서 작가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독자를 유혹하기 쉬운 위치에 있고, 굳이 서술 트릭 같은 것을 써먹지 않더라도 독자는 작가가 일부러 흘린 빵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먹는데 정신이 팔리다 보면 주변에 언뜻언뜻 내비치는 단서는 놓치기 일쑤다. 애초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작가를 독자가 따라잡으려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추리소설의 묘미는 ‘추리’에 있고, ‘추리’는 반드시 어느 정도 이상의 ‘단서’가 주어져야만 순수한 논리와 냉철한 이성을 동원하여 합리적인 추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인색하지 않게 이야기 중간중간마다 시기적절하게 단서를 흘려놓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단서가 충분히 주어졌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판별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개인차로 인하여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단서가 너무 많이 주어져 누구라도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다면 시시하기 그지없다. 작가가 세상에 둘도 없는 반전을 내놓겠다는 야심에, 그래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겠다는 자아 도취감에 휩싸인 나머지 모든 것을 꼭꼭 숨겨놓는다면 지각 있는 독자는 ‘반전’의 묘미를 만끽하기보다는 속았다는 ‘배신감’으로 속이 쓰리다.
그래서 내가 볼 땐 주어진 단서들만 가지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개연성 있는 추리 과정을 거쳐 작가가 준비한 결말을 간파할 수 있다면 작가와 독자의 가장 공정한 게임이라 볼 수 있고, 이 추리 과정에 상상력과 공상력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결말을 알고 있는 작가가 유리하다고 볼 수 있으니 그만큼 덜 공정한 게임이다. 하지만, 주어진 단서만으로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트릭을 구성한다면 자칫 잘못하다간 너무 쉬운 게임이 될 수 있고, 반면에 단서는 조금 적게 두는 대신 상상력과 공상력을 더 요구하게 트릭을 구성한다면 반전의 묘미를 살릴 수는 있지만,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의 폭과 상상력의 한계에 따라 다소 어이없는 결말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면서 응당 개연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의 사고력과 호기심이 흥미를 잃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최적의 단서 배치와 독자의 상상력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구성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조합인데, 말로는 쉽게 내뱉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읽은 추리소설들을 떠올리면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추리소설의 격을 판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트릭을 푸는 데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
지나치지 않은 단서에 지나치지 않은 상상력
사건의 결말을 매듭짓기 위해 단서에 상상과 공상의 살을 덧붙이는 과정을 최대한 억제한 작품은 ‘독자와의 대결’로 유명한 본격파 추리작가의 거장 ‘엘러리 퀸’의 소설들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요즘 추리소설들은 ‘엘러리 퀸’ 시대에 살았던 독자들보다 트릭 간파 능력이 뛰어난 (그때보다 더 많은, 그리고 더 다양한 트릭으로 무장한 추리소설을 접할 수 있는 현대의 독자는 그만큼 더 많은 문제 풀이를 경험한 격이다) 현대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야 하기에 시시한 트릭으로 끝날 수도 있는 지나치게 공정하고 정직한 대결은 지양하고, 대신 적절한 선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는 편이다. 한편으론 소설은 독자의 무뎌진 상상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오묘한 재미가 있다는 점에서 수수께끼나 트릭을 푸는 데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상상력을 한 푼어치도 자극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소설들은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처럼 땔감으로나 유용할 뿐이다. 다만, 그 결말을 조금이라도 엇비치는 어떠한 단서도 없이 뜬금없이 ‘범인은 쌍둥이였다!’라는 식으로 억지 반전을 꾀한다면 한창 달아오른 책 읽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나 다름없다. 이것만큼 무성의하고 게으른 구성은 없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결말을 추리해 낼 수 있는 합당한 단서가 적절하게 주어졌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쉽고도 완벽한 방법은 책을 끝까지 읽고 한 번 더 읽는 것이다. 차선책은 한 번 책을 읽고 나서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회상하고 사건을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책을 대충 흩어보며 중요 장면을 다시 확인하는 것도 좋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되짚어본다.
이 글의 나머지는 「모든 것이 F가 된다 | 삼중 밀실 미스터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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