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1

도망자 | 단지 무료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도망자 | 아이 | 단지 무료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도망자 | 아이 | 단지 무료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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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 ‘살인’은 쉽게 용납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사람의 절대 순탄치 않은 인생에는 피치 못할 사연이 우후죽순 피어날 수 있고, 나름의 깊고 얇은 굴곡과도 마주치기 마련이다. 엄청난 인파가 서로 부대끼며 빚어내는 마찰과 갈등은 목욕탕 때밀이의 손에서 매일 같이 육체에서 이탈하는 암흑색 때처럼 어두울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중에는 장대높이뛰기 하듯 평범함을 극단적으로 뛰어넘는 비극적이고 신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삶이 고되고 괴롭고 비참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하루에도 수십, 아니 수백 명을 죽일지라도 인류의 인구가 심히 염려될 정도로 증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 어떤 이유에서든 ─ 마음속 살인의 99.999%가 마음속 살인으로만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결국에 누군가는 살인을 저지른다.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살인 행위 그 자체는 용납받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살인 동기는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라도 그런 상황에 부닥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의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상식이나 보편적 심리학 정도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도발적인 살인 동기가 때때로 대중을 경악시킨다. 여기에 극악무도한 살해 방법까지 더해지면 대중은 기겁하며 나자빠지기 일쑤고, 이처럼 순도 높은 자극적인 소재들을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라고 만세를 부르며 반기는 언론과 네티즌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기차게 마녀사냥에 나선다. 아이(阿乙)의 『도망자(下面, 我該干些什麼)』에서 묘사하는 살인도 그런 경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단지 게임을 시작하고자 사람을 죽인다

중국의 떠오르는 문제 작가라고 불리는 ─ 그렇다고 옌롄커(閻連科)처럼 ‘금서’ 경지까지 오른 것은 아니지만 ─ 아이는 사회적 파장을 염려해 주인공 이름까지 생략했다. 주인공의 이름까지 생략할 정도로 『도망자』는 문제작일까? 물 론 여기에는 ‘살인’에 대한 이해의 폭과 ‘살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르는 가치관 차이에서 오는 개인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무의식적으로 그 ‘개인차’가 만들어지는 배경으로 관여하는 문화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다분히 고려해도 단지 인생의 무료함을 달래고자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을망정 충분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도망자』의 주인공 ‘도망자’에게 살인은 ‘도망가는 쥐와 도망가는 쥐를 쫓는 고양이’라는 긴박하고 스릴 넘치는 게임을 시작하기 위한 오락실 게임기의 코인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목숨이 누군가에게 일회성인 오락실 게임기의 시작 버튼을 누르기 위한 코인 정도에 불과할 때, 부산 가는 열차표 정도로 지극히 부수적일 때, 우리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회에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의 그악스러운 생면과 마주치게 된다.

우리는, 그리고 사회는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인 원한이나 증오심이 초래한 살인은 그럭저럭 봐 줄 한다고 여기면서도 ‘도망자’처럼 생명의 가치와 삶의 기대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사회의 기틀을 송두리째 뿌리 뽑는 살인을 두고서는 갑자기 모두가 용한 점쟁이라도 된 듯 혀를 차며 세상의 말세를 점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작가 아이는 끝에 ‘나는 독자들이 작품을 봤으면 싶지만 동시에 그것을 잊어버렸으면 한다.’라고 실토한다. 이 말은 자신의 소설이 내재한 파괴력을 과신한다는 점에서 오만하고, 인제 와 뭔가 떳떳하지 못한 짓이라도 한 것처럼 한 발짝 물러나니 싱겁기도 하지만, 독자의 정신이 혹시라도 오염될 것을 염려한다는 점에서 성실한 태도다.

인생에서 단 한 번 즐길 수 있는 게임

얼마나 무료해고 지루해야 사람을 죽일 생각까지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말대로 평생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인류 문명의 토대는 ‘놀이’에서 왔다는 말이다. 생각해봐라. ‘도구’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원시 사회에서 어떻게 돌도끼 같은 도구가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지극한 ‘무료함’이 방출한 에너지가 창작의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당분간 먹을 것 걱정 없는 누군가가 무료함을 달래고자 아이처럼 돌을 가지고 노는 과정에서 ‘돌도끼’ 비슷한 것을 발견, 혹은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애초에 사람이 무료함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놀이할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끔찍한 상상은 아니지만, 아마도 차분하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수준에서 머물렀으리라(어쩌면 지구의 모든 종을 위해서는 그런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는 놀이의 한 방편이자 이름만 다를 뿐이다. 공부하고, 직업을 갖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도 놀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놀이이며,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것도 놀이다. 심문하고 감옥에 가둬 감시하는 것도 놀이이며 합의금 맞추고 재판하는 것도 놀이다. 물론 가벼운 놀이와 진지한 놀이 등으로 굳이 구분할 수는 있겠지만,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무슨 짓을 하든 ‘놀이’라는 범주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무료함과 지루함을 참으로 견디기 어려워하고, ‘직업’이라는 놀이만으로는 부족해 무료함을 달래줄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래서 오락 산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성장하며 축구처럼 인기 있는 놀이는 천문학적인 자본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한편으론 ‘직업’이란 놀이는 우리 자신을 진지함에 가둬두는 경향이 강하므로 이에 적절한 균형을 맞춰줄 가벼운 놀이가 필요하다. 이름하여 ‘취미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나와 ‘도망자’의 차이를 말하자면, 난 무료함을 달래고자 독서와 글쓰기를 선택했고, ‘도망자’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즐길 수 있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뿐이다. 그는 단 한 번의 놀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았으며, 자신의 목숨값을 미리 수금하듯 사람을 죽였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그의 선택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도망자 | 아이 | 단지 무료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도망자(下面, 我該干些什麼)의 영어본 표지(출처: http://book.kongfz.com/)>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악(惡)’마저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국가와 사회가 정한 규칙에 속박됨으로써 안주하는 자유가 있다면 이중 어느 것이 진짜 자유일까?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는 수많은 선택 모두가 정말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일까? 보이지 않는 압박이나 각박하고 긴급한 상황이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우리를 현재의 이곳으로 몰아온 것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도망자’ 스스로 쥐덫으로 뛰쳐들 듯 그가 물러설 수 없는 무료함에 빠져든 것은 ‘선택’의 기회가 박탈당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한껏 좁혀질 대로 좁혀진 덕분에 몇 개 남지 않은 선택의 수에서 최후의 선택으로 ‘쥐와 고양이’ 게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상위 한자리 퍼센트가 엘리트층을 형성하며 가장 좋은 것들을 모두 차지하고, 그 뒤를 바짝 쫓는 10~20%가 중산층을 형성해 괜찮은 것들을 차지한다고 볼 때, 나머지 사람들은 그 뒤에 처질수록 자신의 자유의지에 상응하는 선택의 기회와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선택을 강요당하거나 무언의 압박을 느낄 때, 처음에 사람은 분노 비슷한 감정에 휩싸이며 부당한 세상을 향해 울분을 토하지만, 그러한 일이 지속하여 반복적인 일상의 한 끄트머리로 정착되고 나면 불행의 아가리가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쯤에서 체념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면 불행 중 다행이고, 좌절감에 빠지면 더는 살 생각을 말거나 살고 싶다면 정신과로 달려가 약물치료라도 받아야 한다. 요행으로 이 두 경우를 비껴갔다고 해도 숨을 쉬던, 밥을 먹던, 똥을 싸던 무슨 짓으로든 시간을 소비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녀석이 있으니 바로 무료함이다. 이 죽음처럼 깊고도 처절한 ‘무료함’은 성장지상주의에 눈이 먼 중국 정부의 무관심,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사회주의 이상의 상실과 소외로 인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수를 말살당한 중국 청년들의 암담한 삶을 은유한다. 원제 ‘下面, 我該干些什麼’, 즉 ‘다음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도 바로 그런 뜻이리라.

물론 ‘도망자’의 선택은 사회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극단적이었지만,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한 것도 아니었고, 본능이 일어나는 대로 이끌린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돌출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인간적이다. 그의 선택은 자신이 처한 죽음과도 같은 무료함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문제는 그의 선택을 기꺼이 받아줄 수 있는 사회가 거의 없다는 데 있다. 무서운 것은 비록 우리 사회가 그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 참혹한 결과만큼은 수많은 사람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오락적 요소로 매우 훌륭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대중을 경악시킬만한 사건이 터지면, ─ 언론은 차치하고 ─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갑자기 성인군자로 돌변하여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고 키보드를 놀리는 보람찬 마녀사냥에 매진하면서, 그동안 제 할 일을 찾지 못해 고여있던 부패할 대로 부패한 에너지를 임자 만났다는 듯 한껏 폭발시키며 잠시나마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너무나 쉽다.

도망자 | 아이 | 단지 무료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 중국 청년의 뒷모습>

살인자보다 더 냉혹한 살인 작가들

옮긴이는 아이의 문장을 ‘수공예로 빚어낸’ 문장이라고 극찬한다. 그만큼 정성과 노력이 깃들어있다는 뜻이지만, 한편으론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한 작위적이고 정교한 연출이 흐름을 막을 때도 있다. 하지만, 아이의 텍스트는 문장에 그리 큰 공을 들이지 않는, 혹은 그런 능력이 안 되는 삼류 소설들과는 달리 멋들어진 기교와 재치 있는 은유가 단짝이 되어 춤을 추게 되고, 그러면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그들의 춤을 음미하는 운치가 있어 좋다. 그렇다고 나쓰메 소세키처럼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빚어낸 문장이라고 치켜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하고 텍스트 읽는 재미를 넉넉하게 선물하는 아이의 글만으로도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품기에는 하등 모자람이 없다. 여기에 현대 중국 젊은이들이 겪어야만 하는 문제점을 마치 누군가에게 도전하듯 도발적으로 표출해낸 아이의 의지와 용기는 중국 정부의 미움을 사 인터넷에서 하루아침에 말살된 중국 가수 리지(李志)를 떠올리면 만용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가상하다.

핑루(平路)의 『검은 강(黑水)』과 마치다 고(町田康)의 『살인의 고백(告白)』 모두 살인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다. 여기에 『도망자』까지 포함해 이 세 소설이 훌륭한 점은 빛이 신에게서 온 것이든 악마에게서 온 것이든 상관없이 보고 듣고 느낀 감상만을 정확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 세 명의 작가는 그 행위들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따지지 않고 철저하게 제삼자의 입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설교자처럼 도덕성을 강조했던 톨스토이 같은 고전 작가들과는 다르다. 여기저기 토막 난 시체들이 널브러지고 바닥과 벽과 천장은 시체에서 튄 피로 칠갑이 되었지만, 이것을 묘사하는 작가의 손길에서 한점의 흔들림과 미세한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 독자는 참혹한 살인 현장을 연출한 살인자보다 더한 작가의 냉혹함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고루한 설교가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현대성의 그 무엇 ─ 아마도 그것은 흔히 말하는 소외나 차별, 모욕과 멸시 같은 것 ─ 이라는 점에서 살인을 대하는 작가의 냉정함은 반드시 유지될 필요가 있다. 그 냉정함 속에서 우리는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돌연변이로 태어난 괴물이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할 사람일 수도 있음을, 비록 인정하기 싫은 사실일지라도 비로소 명확하게 직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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