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평전 | 알렉산더 판초프 • 스티븐 레빈 | 만자에 달하는 글자로도 부족한 엄청난 인물
마오쩌둥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중국 공산당 혁명 원로 중 경제전문가로서 대약진의 참담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 마련의 책임을 맡았던 천윈(陈云)은 마오쩌둥(毛泽东)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로운 황제들(The new emperors)』, 해리슨 E. 솔즈베리, 박월라 • 박병덕 옮김, 다섯수레, p331). 마오쩌둥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천윈의 이 말은 마치 유명한 경구라도 되는 듯 한 번 음미하기 시작하면 머릿속에 박힌 총알처럼 쉽게 빠지질 않는다. 한국 사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논할 때 천윈이 마오쩌둥에 대해 말했던 맥락과 같은 질문으로 역사적 가정의 논쟁을 부추기곤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처음의 약속을 지켜 깨끗하게 물러났다면, 혹은 한국을 산업화 라인에 어느 정도 안착시킨 어느 년에 하야했다면 ‘암살’이라는 개인적 비극과 국가적 불명예를 겪을 필요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한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둥 말이다.
누군가는 역사를 논함에 있어 ‘가정’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유혹이자 사고력의 낭비라고 주장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고 학문적 차원에서 진중하게 역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에게나 통하는 규칙이고, 개처럼 여기저기 킁킁거리고 기웃거리며 상상력이 뻗어가는 대로 호기심을 빨아들이는 나 같은 무지한 사람들이야 그저 상상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손가락이 까닥거리는 대로 지껄이고 끄적거릴 뿐이다.
아무튼, 천윈이 1966년도 아니고 1946년도 아닌 굳이 ‘1956년’으로 말뚝을 박은 것은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우선 그해 2월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난하는 ‘깜짝’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중국과 소련의 우호적인 관계가 훗날 핵전쟁까지 고려할 정도로 크게 틀어지기 시작한다. 1957년 11월, 10월 혁명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마오쩌둥은 흐루쇼프가 15년 후 소련이 미국을 앞서게 될 것이라는 허풍 가득한 호언장담에 영감을 얻어 그 답례로 중국은 15년 후 철강 생산량에서 영국을 앞지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 ‘대약진’ 중 중국의 삼림과 인민의 수중에 있던 철이란 철을 모두 먹어치운 다음 잔뜩 고무된 마오쩌둥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쓸모없는 폐철을 토해낸 ─ ‘토법고로(土法高爐)’가 신중국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곧이어 등장하게 될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잔혹극이자 인류 최대의 사회주의 실험인 ‘문화대혁명’,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이 중국에 끼친 엄청난 악영향은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만큼은 알 것이다.
<1959년 천원(陈云) / 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뒤에 숨은 ’소련 귀신‘
어떻게 보면 중국이 50년, 100년 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소련을 제치고 세계 강대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과대망상에 가까운 확신에 마오쩌둥이 심취한 원인은 그 자신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흐루쇼프의 칠칠치 못했던 언동에서도 그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흐루쇼프의 기습적인 스탈린 비난과 마오쩌둥과 중국 관리 앞에서 보여준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신중하지 못했던 실언과 허풍,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오쩌둥의 호감을 사려는 흐루쇼프의 지나친 선물 공세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권력만 존중하는 마오쩌둥에겐 부담이 되었고, 한편으론 나약함의 표시처럼 보였다.
이후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멍청이로 보기 시작했고, 그런 인물이 지휘하는 소련도 당연히 얕잡아 보게 되었다. 소련을 변절한 ‘수정주의자’로 보기 시작한 마오쩌둥이 판단하기에 이제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 지도자는 당연히 중국, 그중에서도 자신이 돼야 할 터였다. 언제나 최고 권력에 목말라했던 마오쩌둥이 그동안 공산주의 세계의 큰형님으로 자처했던 스탈린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위상을 우뚝 세울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무오류를 철저하게 확신했던 마오쩌둥에겐 무지하지만, 그 어떤 민족보다도 성실 근면한 중국의 6억 인민을 동원한다면 어떤 꿈도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대약진은 시작되었고, 인민은 무엇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사탕발림 선전과 위협적인 선동에 휩쓸려 끝없는 시련과 고통의 끝없는 나락으로 깊게 깊게 빠져들어 갔다.
대약진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지만, 자신의 무오류를 여전히 확신했던 마오쩌둥으로서는 여기서 그칠 수 없었다. ‘영구혁명’이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도 인정했듯 원래부터 잘 알지 못했던 경제 분야에서 실패했기에 그렇게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번엔 성공하여 대약진 실패로 야기된 ‘수정주의자’들의 득세와 사상적 무질서, 그리고 구겨진 체면을 단박에 바로잡으면 되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가장 자신 있는 대중 선동 능력을 발휘하여 체험하지 못한 혁명적 낭만이라는 그릇된 열정에 사로잡힌 순진한 학생들을 선동하여 또 한 번 중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름하여 ‘문화대혁명’. 중국 공산당에 쥐새끼처럼 숨은 서풍에 홀린 ‘수정주의자’ 숙청이라는 소련의 변절이 이번에도 명목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극비 문서를 다룬 첫 번째 마오쩌둥 전기
사실 지금까지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은 덕분에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와 내 나름의 판단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지만, 중국을 파괴와 혼란으로 이끈 두 실험이 펼쳐져야만 했던 배경에 마오쩌둥의 기질과 공상적 이상주의에 대한 광신적인 집착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이라는 소련의 역사적 배경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렉산더 판초프(Alexander V. Pantsov), 스티븐 레빈(Steven I. Levine)가 지은 『마오쩌둥 평전(Mao: The Real Story)』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뿐만 아니라 『마오쩌둥 평전』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모스크바에 계속해서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해 냈다. 또한, 이 책은 자금이나 기술 지원 때문인지, 아니면 미국의 위협을 견제할 버팀목이 필요했었는지, 혹은 위대한 스승을 따르는 충실한 학생의 깨끗하고 여린 마음 같은 진심이었는지 등등 마오쩌둥의 속내는 끝내 알 수 없지만, 그가 위대한 스탈린의 순종적인 학생이었음을 (또는 평생에 걸쳐 그렇게 연기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마오쩌둥 평전』에는 한국인으로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있는데, 바로 한국 전쟁과 관련한 김일성과 마오쩌둥, 스탈린의 미묘한 삼각관계다. 김일성이 중국군의 지원보다는 마지막까지 소련군의 참전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중국군 지원을 호언장담했던 마오쩌둥이 막상 파병해야 할 시기가 닥치자 고심의 고심을 거듭하면서 수락과 거절을 번복하다가 스탈린이 항공기 지원을 거절한 것에도 제대로 항의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스탈린의 영향력에 굴복하여 최후의 순간에 물러서고 말았다는 등 한국 전쟁과 관련한 내용은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을 사이에 두고 영악하게 외줄 타기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는 것, 중국군 참전이 툭하면 세계대전 이야기를 끄집어내 주변 사람들을 기겁하게 했던 마오쩌둥의 흔쾌한 승낙이 아니라 어려운 결정 끝에 내려졌다는 것,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가슴 철렁이게도) 스탈린이 3차대전을 각오하고 있었다는 것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참고로 이 책은 1990년대 초반 옐친의 짧았던 이데올로기 ‘해빙’ 기간에 알렉산더 판초프를 포함한 몇 명의 전문가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극비 문서를 활용한 첫 번째 마오쩌둥 전기이기 때문에 기존 역사서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세부 사항들이 이제나마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었다.
낭만적인 혁명가로서의 마오쩌둥
권력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았던 독재자이자 수천만 인민의 아사와 수억 인민의 고통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폭군이자 혁명 동지뿐만 아니라 수많은 당원을 몰락의 수렁 속으로 내모는 권모술수에 능수능란했던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마오쩌둥에 익숙한 사람에겐 나라를 생각하는 젊은이라면 한 번쯤 품을법한 순수한 이상주의와 당시 중국 지식 청년을 휩쓸었던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한 마오쩌둥의 청년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다.
19세기 초, 루쉰의 문학에서 비극적으로 묘사된 것처럼 무기력한 중국인이 제국주의 수탈에 허덕이고 있을 때, 마오쩌둥이 애국 지심에 불타는 여타 청년들처럼 우매한 민중을 일깨우고 나라를 일으켜 세울 이상과 사상의 격변 속에서 서투른 혁명가답게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은 그에게도 한때는 나라를 근심하고 인민을 걱정하는 낭만적인 면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런 연유로 그는 한때나마 자신이 좋아하고 즐겨 읽던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을 모아 “개인과 전체 인류의 삶을 향상시킨다.”라는 공동의 꿈을 달성하고자 ‘신민학회’를 조직했으며, 민중 계몽에 이바지하고자 중국 최초의 협동조합 서점인 ‘문화서사’를 운영했다. 그가 캉유웨이나 량치차오, 양창지, 천두슈 등 그 밖의 여러 대중 운동지도자나 선도적인 사상가들을 존경했다는 점도 우국애민(憂國愛民)이 넘쳐나는 그의 충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가 아직 볼셰비즘에 전도되지 않은 입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신중했으며, 폭력을 숭배하지 않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혁명에는 유혈 폭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폭력을 뒤엎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여전히 폭력의 지배 속에 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그는 명철했으며 약간의 인간적인 면도 남아 있었다. 아직은 앳되고 미숙하지만, 기필코 중국 민족을 부흥시키겠다는 열정과 신념으로 다져진 그가 훗날 폭력과 피로 얼룩진 토지 재분배 정책과 기아와 아사의 대명사 ‘대약진’, 그리고 목적 없는 파괴와 끝을 알 수 없는 혼란으로 중국을 혼돈에 빠트린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이라는 것을 그 누가 짐작이라 할 수 있었을까?
<마오쩌둥의 마음 속엔 보살은 없었을까?> |
낭만적인 혁명가에서 냉혹한 혁명가로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기 전에 사상적 방황과 실천적 시행착오로 거듭되는 혼란을 겪으면서도 낭만적인 혁명가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세상에 포효하는 모습은 우리가 마오쩌둥 하면 흔히 떠오르는 독재자, 폭군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엄청나게 멀다. 그렇지만 입당 전에 마오쩌둥이 품은 이상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독재자, 폭군으로 불리게 될만한 일들을 충분히 저지르고 있을 때의 마오쩌둥이 품은 이상은 쑨원의 원칙과 마르크스 • 레닌주의 원칙처럼 인민을 보다 잘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한 줌의 권력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한 것도, 모든 영역에서 공산당의 독재를 요구한 것도, 마음을 바꿔 폭력을 옹호한 것도 무기력한 인민을 계몽하고 심하게 부패한 정계를 개혁하여 중국을 부흥시키고, 인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진부하게 설명하자면 마오쩌둥에게 권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에 그 수단이 목적과 전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건강과 행복과 이상과 꿈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돈이 오히려 주인을 집어삼켜 사람을 돈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꼴과 같은 맥락이다.
알다시피 이런 고리타분한 설명은 심심하면 뱀을 유인해낸다느니 하면서 당원들과 지식인, 기술자들을 들쑤시며 갖은 요란법석을 떨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정풍 운동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대약진’과 ‘문화대혁명’까지 포괄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족하다. 마오쩌둥이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한 것은 중국의 부흥을 실현하겠다는 포부와 그것을 기필코 자신의 손으로 실현하겠다는 의지와 오만의 연장선으로 봐도 무방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다. 인민이 무지하다는 이유로 그들이 진짜 원하는 바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무지한 인민들을 교육과 선전만으로 사회주의 인민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망상에 가까운 믿음에 소련을 뛰어넘어 단숨에 사회주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황당한 조급함이 보태지니 ‘파괴가 없으면 창조도 없다’라는 요망한 문구를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낭만적인 혁명가에서 냉혹한 혁명가로 돌변한 가장 큰 이유이자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이 품은 허황한 이상 속에 숨은 가장 큰 오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은 일찍이 자신의 무오류를 숭배했던 마오쩌둥의 오류가 맞다.
끝내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사람
흥미로운 점은 그가 낭만적인 혁명가였을 때까지만 해도 간직하고 있었던 인간적인 면과 젊었을 때의 순수함을 하나둘씩 벗어던지면서 위대한 독재자이자 냉혹한 폭군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나의 흐리멍덩한 이해력과 졸렬한 필설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더없이 세밀하고 더없이 섬세한 삶의 흐름이다. 오랜 투쟁과 고된 혁명의 시련 끝에 그의 발 앞에 무궁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위대한 나라가 놓여 있었다. 그가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을 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곧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실현될 사회주의 중국의 밝은 미래였을까? 아니면 지금의 가난과 낙후된 경제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지에 대한 근심 • 걱정이었을까? 아니면 고양이 손안에 든 생쥐나 다름없는 무지와 땀으로 뒤범벅된 수억 인민들의 어리둥절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음흉한 성취감에 푹 빠져있었을까?
이후 잦은 권력 출동과 사상 다툼에서 패한 친구와 동지들이 하나둘씩 파멸을 맞이하며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져가고 있었을 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위했을까? 아니면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옛 혁명 시절을 회상하며 안타까움에 사뭇 쳤을까? 아니면 승리감에 취해, 그리고 그 승리로 말미암아 좀 더 확고해진 자신의 권위와 권력이 가져다준 안정과 여유에 취해 그들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을까?
한편,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이 초래한 파괴와 혼란으로 죽음과 공포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바라보면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잔인한 쾌감이 일으킨 흥분과 전율의 도가니를 만끽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꿈꿔왔던 대로 이제 곧 사회주의 이상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이라고 추고 있었을까? 아니면 고통받는 인민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마오쩌둥 평전(Mao: The Real Story)』을 읽음으로써 무엇이 그를 우국애민의 기치를 내세웠던 낭만적인 혁명가에서 수천만의 희생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마치 우리 안에 갇힌 생쥐를 가지고 온갖 실험을 자행하는 제약회사의 연구자 같은 냉혹한 사회주의 실험자로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를 농민과 노동자를 동정적인 눈길로 바라봤던 인간적인 혁명가에서 공포 정치로 인민을 억압한 잔인한 폭군으로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를 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순진한 청년에서 혁명 동지들조차 넘볼 수 없는 독재자로 만들었는지 어슴푸레하게나마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마오쩌둥은 끝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고 끝내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사람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나마 그가 낭만적인 혁명가이자 자유주의에 심취한 순진한 청년에서 피와 권력에 굶주린 위대한 독재자이자 잔인한 폭군으로 변해가는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도 매우 드라마틱한 여정을 들춰봄으로써 끝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의 의중을 조심스럽게 헤아리는 매우 수준 높은 추리를 시험해 본다.
글이 너무 길어 두 편으로 나누었다. 「마오쩌둥 평전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에서 나머지 이야기가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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