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 장지 | 자네 출가 한번 해보지 않을 텐가?
‘中国梦’이 아닌 ‘中国懜’
제 앞가림조차 못 하는 나로서는 ─ 장지(張忌)의 소설 『출가(出家)』에 등장하는 ─ 억척스럽고 붙임성 좋은 가장 팡취안(方泉)을 읽는다는 것은 무척 고역스럽다. 밑바닥 인생을 우려낸 니시무리 겐타의 사소설 『고역열차(苦役列車)』를 읽는 것만큼이나 불쾌하고 심란하다. 나의 무능과 나태함을 사정없이 질타하고 한편으론 은근히 조롱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눈물겹도록 아등바등 살아가는 팡취안의 노력과 의지가 가상스럽고 부럽지만, 한편으론 그토록 노력함에도 내 가족 보살피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 아련한 애수를 자아낸다. 물에 빠진 강아지가 한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듯 죽어라 하고 노력해도 코딱지만 한 집 한 칸 마련하기는커녕 초등학교 보내야 할 자식의 찬조금 마련하기도 힘겹다. 팡취안의 신산한 삶은 마치 늪에라도 빠진 것처럼 가난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는 농민공(農民工)을 비롯한 중국 하층민의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것이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제국’이라 선전하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엄연한 현실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중국몽(中国梦)’이 가야 할 길이 실크로드만큼이나 멀고 대장정만큼이나 힘겹고 고단하며, 자칫 잘못하다간 ‘中国懜’이 될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예견해 본다.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걷게 되면서 정부는 미국과 앞다투는 부국이 되었다. 일부는 창졸간에 솟아오른 기회를 움켜잡아 벼락부자가 되거나, 일부라고 칭하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중국 인민이 중국의 ‘부’가 허울뿐임을 아님을 증명하듯 짭짤한 소득을 거머쥐며 어엿한 중산층을 이루었다. 하지만 역시 일부라고 칭하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민이 국가의 속 빈 강정 같은 사회주의 선전에 파묻혀,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보다 더 악랄한 중국 특색 자본주의가 내리 꽃은 빨대에 고혈을 빨리며 신음하고 있다. 단지 팡취안은 그중 한 사람일 뿐이다.
생애 가장 짭짤한 선택, 이름하여 ‘출가’
어떻게든 아들을 얻어 대를 있고 싶은 팡취안은 당연히 두 딸로는 만족할 수 없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끝에 세 번째 아이를 통해 기어코 아들을 얻는다. 좁아터진 단칸방에 그 흔해 빠진 냉장고조차 없는 그의 살림은 조촐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궁핍의 끝판이다. 궁색한 살림에 먹여 살려야 할 입이 하나 더 늘었으니 팡취안의 수심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배운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느 나라를 가든 마찬가질 것이다. 우유배달, 신문배달, 아니면 페인트칠 같은 단순노무직. 이것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겠지만, 자식 셋을 교육하고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려면 턱도 없다. 복지 혜택이 잘 마련되어 있고 노동자 처우가 좋은 북유럽 같은 선진국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서구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자본주의다운 중국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뒤늦게 돈맛을 안 중국의 행태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팡취안이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선택한 길은 생뚱맞게도 스님이다. 즉, ‘출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출가한 이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정반대다. 보통은 더럽고 추잡한 속세에서 벗어나고자 출가한다지만, 그는 더럽고 추잡한 속세에서 살아남고자 출가한다. 보통은 부처님의 무량함 가르침을 받고자 출가한다지만, 그는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을 미끼로 무량한 돈을 벌고자 출가한다. 누군가에게는 출가가 생애 가장 빛나는 선택이라지만, 그에게 출가는 생애 가장 짭짤한 선택이다.
<자네 출가 한번 해보지 않을 텐가?> |
경건해야 할 종교마저 돈독에 찌든 말법의 시대
경건해야 할 종교마저 돈독에 찌든 말법의 시대 제목이 ‘출가(出家)’라고 해서 한 가정을 책임지는 남자가 무정하게 가족들을 버리고 속세를 떠난다는, 그래서 그런 남자의 무책임함에 치가 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출가해야 할 만큼 강렬한 무언가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는 비장함을 기대케 하는, 그런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출가’가 가족의 경제적 위기를 돌파할 기회이자 출세할 절호의 찬스가 될 줄이야.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야 할 독경으로 중생을 미혹하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자리인 불사를 빌려 중생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법을 수호해야 할 호법(護法)은 돈 많은 호구를 끌어들여 사찰의 배를 더욱더 불린다. 어디 이뿐이랴. 다단계 판매업자의 상술보다 한 술 더 떠는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아 한낱 우유 배달원에 불과했던 팡취안을 하루아침에 살아 있는 보살로 만들고, 이것도 모자라 부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띄운다. 이를 위해선 거짓말은 기본이며, 학력 날조는 양념이다. 결국엔 팡취안의 무지는 겸손으로 칭송받고, 그의 가난과 초라함은 청빈과 청렴의 상징으로 둔갑하기까지에 이른다. 사람이 신을 창조했듯, 그들은 살아 있는 보살을 만들어낸다. 정말이지 부처님의 재주가 따로 없다.
법을 설파하고 본보기를 보여야 할 스님들마저 돈독이 올라 눈깔을 뒤집고 돼지처럼 돈 냄새를 맡으러 다니고, 일부는 부처님 주문의 경건한 힘을 빌려 돈 많은 이혼녀의 가랑이를 후려치는 데 사용하고, 사찰은 마치 기업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살찌우고 덩치 불리기에만 급급하다.
현대 문명이 말살한 보편적인 도덕성을 되살리고, 끝도 없이 날뛰는 중생의 탐욕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힘으로써 중생의 혼탁해진 영혼을 정화하고, 아귀다툼이나 다름없는 속세의 혼란을 진정시켜야 할 종교가 오히려 이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그 흐름에 편승하여 사익을 취하려고 드니 한 마디로 세상 말세, 아니 말법(末法)의 시대다. 신도 수를 늘리고 교회 건물을 증축하여 세력 확장에만 급급한 한국의 기독교를 떠오르게 한다. 인간성 최후의 보루로 남겠다고 자처하는 종교가 말세와 말법의 시대를 초래하는 타락의 끝판을 보여준다면 정말이지 최후의 날도 멀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이로써 종교에 미혹된 사람들이 눈을 뜨고 제정신을 차리게 될, 그럼으로써 인류 의식 수준이 지금보다 한 단계 진보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도시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
자네 출가 한번 해보지 않을 텐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팡취안과 그 가족의 삶은 쑤퉁(蘇童)의 소설 『화씨 비가(菩萨蛮)』에 등장하는 화씨 일가에 견줄 만큼 처절하지는 않고, 비참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장지는 모질고 인정사정없는 작가는 아닌 모양이다. 그들에게 나름 살길을 마련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살길’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주변에서 구경하기도 힘든 ‘출가’라는 점에서 뜻밖이라면 뜻밖이다. 가족을 위해, 즉 돈벌이를 위해 출가를 선택한 사람의 그 갸륵하고도 절실한 마음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다만 절을 운영, 아니 경영하는 것이 큰 돈벌이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만 놓고 본다면 웬만한 월급쟁이보다는 훨씬 낫다(교회가 우후죽순 생기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는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누릴 수 없는 교교하고 고즈넉한 정취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신선 같은 삶을 누릴 수도 있다. 또한, 호법들이 잘만 띄워준다면 경외에 대상이 되어 왕 부럽지 않은 권위를 누릴 수도 있다. 그러하니 자네 출가 한번 해보지 않을 텐가?
마치면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는 아쉬운 소설이다. 산만한 구성과 ‘이야기’ 자체에만 머물려는 듯한 깊이가 얕고 문학적 멋이 없는 조촐한 텍스트, 홍시처럼 물러터진 플롯, 개성이 모호한 등장인물 등 전체적으로 가볍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문학적 품격을 느끼기 어려운 소설이다. 한마디로 ‘라이트 노벨’ 수준이다. 말이 좋아 라이트 노벨이지 옛날 같으면 삼류 소설 취급받던 것들 아닌가?
라면과 과자처럼 많이 팔린다고 해서 좋은 먹거리가 아닌 것처럼 책도 많이 팔린다고 해서 좋은 책이 아니다. 오히려 ‘라이트 노벨’ 수준의 책은 꾸준한 독서력 향상이나 유지를 위해서 때론 읽는 것보다는 안 읽는 것이 낫다. 계속해서 이런 책만 읽다 보면 이 수준 이상의 책은 읽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심풀이로 먹는 인스턴트 식품처럼 가끔 기분 전환할 겸 읽어줄 수는 있지만, 절대 독서 생활의 주류가 되어서는 아니 될 책이다. 적어도 내가 볼 땐 말이다.
그렇게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다음 이야기는 도대체 뭐지 하는 궁금함과 이왕 읽기 시작한 거 어서 빨리 후딱 해치우자는 조급함 사이에 양다리 걸친 묘한 서두름을 자아내기 때문에 그래도 끝까지 읽게는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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