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천룡팔부 | 김용 | 결말을 본 사람이 진정한 승자다
피비린내 나는 강호를 불교적 세계관으로 풀어쓰다
아무리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의 작품이라 해도 10권이나 되는 분량의 책을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다. 특히 『천룡팔부(天龍八部)』처럼 독자의 속을 박박 긁다 못해 종종 울화통까지 터트리게 하는 주인공들이 다분히 등장하고 ─ 보통의 무협소설 같은 흑백논리식의 단순하고 명쾌한 도덕 관념을 기대했던 독자에게 ─ 복잡다단한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혼란스러운 은원 관계가 혼란을 부추기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김용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오강호(笑傲江湖)』나 『영웅문(英雄門)』처럼 시원하고 통쾌한 맛에 무협지를 찾는 독자라면 『천룡팔부』는 극복해야 할 몇 가지 난관이 존재한다. 『천룡팔부』는 기존 무협소설의 통념에서 경공술을 펼쳐 달아나듯 멀어지려는 경향이 독자의 기대에 다소 그림자를 드리우는 작품이다.
그 첫째는 『천룡팔부』엔 불교적인 색채가 드리워져 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즉 마음에 욕심과 잡념들을 제거한 사심 없는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해탈을 중요시한 불교는 결과만으로써 선악을 판단하지 않고, 행위의 동기나 원인 등 마음에서 일어나는 역할을 중요시한다. 안옥선 교수의 『불교의 선악론』에 실린 글을 인용하자면, “선(善)이 주관적인 것이며 그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마음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도덕의 발생, 도덕의 실천, 그리고 도덕의 완성의 중심이 마음에 있다는 의미에서 선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 중략 - 불교가 선악(善惡)을 공(空)하다고 할 때 그것은 선과 악이 없다는 의미에서 공하다는 것이 아니고, 선악은 고정적인 것도 아니며 절대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선악은 연속적이고, 상호규정적이고, 상황의존적이라는 의미에서 선악은 공하다는 뜻인 것이다.”
이런 불교의 선악론을 받아들인 『천룡팔부』는 선과 악, 시비(是非)의 경계는 모호하고 흐릿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살아가는 것 자체를 고통으로 보는 불교이니만큼 선과 악, 시비는 해탈의 도리를 깨우치지 못한 중생들이 속세의 방법으로 어떻게든 고통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친 결과 생겨난 갈등, 대립, 마찰 등이 빚어낸 업보다.
그래서 『천룡팔부』엔 절대 악인도, 절대 선인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저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고 탐심을 채우고자 타인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생겨나고 선과 악이 구별된다. 불교에 조예가 깊고 한없이 인자한 마음을 지닌 단예(段譽)는 측은지심으로 불편해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자 악명이 자자한 사람을 돕기도 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아무런 은원관계가 없는 사람을 죽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지식하게 실천하는 소림사 제자 허죽(虛竹) 역시 파계승이 되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위해 악인을 돕는다. 스스로 악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때론 상황이나 이해득실에 따라, 혹은 의도치 않게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드라마 천룡팔부 2019에서 왕어언 역을 맡은 文咏珊(문영산) 사진 출처: 유튜브> |
선악과 시비는 마음의 고통에서 비롯된다
악행의 배경에는 오욕을 가진 사람으로썬 어찌할 도리가 없는 八苦(팔고: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8가지 고통)에서 비롯한 마음의 고통이 깊숙이 배어 있다. 이들을 비롯해 우리가 소위 악행이라 불리는 것들은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타인을 고통의 늪으로 빠트린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업보와 원한 관계는 그 사람을 또 다른 고통의 늪으로 빠트린다. 선과 악, 시비에 휘말리는 일은 육체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중생으로선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그것은 사람의 운명을 헤살놓는 은원관계가 나은 업보다. 인생의 가장 큰 고달픔이라 할 수 있는 원증회고(怨憎會苦: 만나고 싶지 않은 미운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 얻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 오음치성(五陰熾盛: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이 불길같이 성하게 일어남)은 업보의 굴레가 끊임없이 순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오직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힘으로써 선과 악을 구분하고, 시비를 따지려 드는 강호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다. 한 번이라도 원한 관계에 얽매이게 되면 그 자신이 죽을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업보의 무서움이다. 고로 강호에선 죽음이 곧 해탈이고, 해탈이 곧 죽음이다.
타인의 행동과 그 결과만을 보고 선악을 판별하는 우리는 남의 아이를 하루 동안만 가지고 놀다 죽이는 무악부작(無惡不作) 섭이랑(葉二娘)이나 역대 최고급 악녀인 아자(阿紫) 같은 인물들의 하늘마저 무너트릴 것 같은 악랄함에 이를 갈고 분통을 터트린다. 하지만 소설은 이들이 악행을 자행하게 된 근원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혹은 잠시 잊었던 이들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면서 악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던 독자의 머릿속에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처연한 감상에 젖어 드는 시간이다.
소설은 그렇게 사람을 쉽게 악행에 빠져들게 만든 은원과 업보가 존재하고 그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마음의 고통을 받는 중생들이 있을 뿐, 태어날 때부터 악당인 사람은 없다고 설득한다. 이것은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같은 진화심리학자들의 환경이나 상황의 힘이 사람을 범죄자로 몰고 간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천룡팔부(天龍八部)』를 읽는 내내 미워하고 가증스럽게 여기는 악인이 있다면, 그들이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그 연유를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가장 큰 난관은 초반의 지루함과 밋밋함
『천룡팔부(天龍八部)』는 이런 업보의 순환이라는 불교적인 세계관을 다양한 개성을 가진 다양한 등장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사건 • 인연 • 기연을 통해 은연중에 설파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천룡팔부』는 초 • 중반까지도 등장인물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은원 관계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등장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도와 언제 어디로 튀고 뻗어 나갈지 모르는 이야기의 불가사의함은 상상 이상이고, 이런 스케일과 복잡성을 뒷받침하고자 개성이 넘치는 주인공급 인물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갖춘 영웅이 대륙 곳곳을 이 잡듯이 방랑하더라도 한 사람이 행하는 업보만으로는 작가가 품은 원대한 이야기를 완성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이다. 한편으론, 은원 관계의 내막을 추리할 수 있는 단서 • 암시 등을 간간이 심어놓은 점도 흥미롭다. 이런 구성은 추리소설만큼 세밀하고 명확하지는 않지만, 집필 시기를 고려하면 신선한 시도이자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 안으로 끈끈하게 집결시켜놓는 숨은 공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워낙 이야기가 만리장성처럼 길게 늘어지다 보니 이런 단서를 발견하기란 모래에서 바늘 찾기다. 대부분은 사건에 얽힌 은원 관계가 드러난 다음에야 ‘아차, 그랬었지’라고 외치며 단서가 되었던 문장을 비로소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기존 무협소설의 통념을 벗어나려는 경향 두 번째를 언급할 수 있다. 바로 길게 늘어지는 듯한 이야기의 지루함이다.
무협소설은 통쾌한 맛도 있지만, 단순한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즉,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쾌도난마 같은 이야기가 다른 장르에선 느낄 수 없는 명쾌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한데 『천룡팔부』는 교봉(喬峯), 허죽, 단예를 비롯한 주인공뿐만 아니라 웬만큼 비중 인물 하나하나에 독자적인 은원 관계와 업보를 설정한 다음, 모든 설정을 전체적인 맥락에 들어맞게 짜깁고 조율하다 보니 쓸데없이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장황하게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작가가 이야기를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말이고, 한편으론 소소한 반전을 위한 밑바탕이 튼튼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성이나 짜임새 역시 나름 옹골지고 일관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끝장을 본 나 같은 사람이나 할법한 말이다. 초반의 지루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면 이도 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소 지루하고 길게 느껴지는 초 • 중반부는 쓸데없이 장황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는 장황함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초반의 지루함과 밋밋함을 얼마나 잘 극복하고, 또한 그 이후 얼마나 진득하고 착실하게 텍스트를 읽어나갈 수 있느냐에 따라 중 • 후반부에 수확할 수 있는 감동과 재미의 질과 양이 달라진다.
독자의 울화통을 터트려 죽이려는 수작?
기존 무협소설의 통념을 벗어나려는 경향 세 번째는 독자의 울화통을 심심치 않게 터트리는 주인공들이다. 일명 ‘암 유발자’들이다.
통속적인 무협소설의 틀에 걸맞은 영웅적이고 호방한 기상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주인공은 기껏해야 교봉(소봉) 정도다(그래서 교봉이 활약할 때까지만이라도 참고 읽으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겉모습만큼은 준수하고 훤칠한 귀공자가 틀림없는 단예는 사랑에 빠진 이후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팔푼이 같은 모습을 왕왕 드러낸다. 겉모습도 볼썽사나운 허죽은 시종일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려는 고지식한 행동으로 이야기를 질질 끌어가게 만드는 주범이자 독자의 온갖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이다(그 외 트집의 귀재 포부동이나 툭하면 남의 싸움에 훈수를 두어 흥을 깨는 왕어언도 밉상이긴 마찬가지며, 경이로운 악녀 아자 같은 경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기연으로 상승 무공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비굴하게 느껴질 정도로 싸움을 회피한다. 하지만, 그들은 등장인물 중에서 설령 악인일지라도 위험해 빠지면 일단 구해주려고 하는 인자함을 지닌 유일한 사람들이다. 물론 이런 오지랖 넓은 인자함이 독자의 달아오른 감흥, 혹은 짜릿한 복수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찬물을 끼얹는 일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그런 두 사람조차 작가가 그물처럼 펼쳐놓은 은원 관계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는 없었으니 작가의 집념은 부처님의 손바닥보다 넓다.
그렇더라도 이런 답답함도 길어야 중반까지이다. 어느 정도 인물들에 대한 성격을 파악하게 되고(달리 말하면 적응?, 혹은 포기?), 그 성격들이 내포하는 의미와 그 의미가 인물들의 은원 관계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불교적인 세계관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받아들이게 되면 지금까지 그들로부터 받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답답함은 한결 부드럽게 풀어짐은 물론 결말에 가선 존경심으로 승화된다. 왜냐하면, 악인이 득세하고, 위선과 가식이 판을 치는 강호에서 세간의 위협과 비웃음을 무릅쓰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정과 측은지심으로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대할 뿐만 아니라 무공이 상대방보다 나은데도 우쭐대지 않는 단예와 허죽 두 사람은 어찌 보면 살아 있는 보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천룡팔부 2013에서 왕어언 역을 맡은 刘亦菲(유역비) 사진 출처: 유튜브> |
작품의 격을 떨어트리는 대필의 상처
읽는 사람의 소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난히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초 • 중반부가 지루하게 느껴진 것은 바로 대필의 흔적 때문일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31. 바둑의 승부로 영웅들을 끌어모으다」에서 소성하(蘇星河)가 강호의 인물들을 두루 초대하여 기인이 남긴 바둑 대국인 진롱(珍瓏)은 푸는 장면에서 ‘대필’을 퍼뜩 깨닫게 되었다. 내가 볼 때 이쯤에서부터 마치 김용이 집필한 것처럼 텍스트의 격이 확실히 높아졌다고 느껴졌는데,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3권 정도 분량 정도가 대필 되었다고 한다(「천룡팔부 나무위키」 참고).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진롱을 푸는 장면 전까진 이렇다 할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답답증을 유발하는 주인공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용의 작품이라기엔 너무나 조야한 텍스트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 대필 분량은 2~3권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고 봐야한다.
결말을 본 사람이 진정한 승자다
초반부는 (특히 교봉이 활약하기 전까지) 정말 김용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읽으면 읽을수록 먹구름처럼 짙어가는 의혹을 떨쳐내지 못해 계속 읽어야 할지, 아니면 여기서 과감하게 읽기를 그만두고 시간을 절약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인지를 두고 번뇌에 빠졌던 기억이 엊그제였다. 지금은 그런 고민을 했던 자신을 어리석었다고 자책하기보다는 고진감래의 기쁨과 달콤함을 맛볼 수 있도록 부단히 인내심을 발휘한 자신이 대견스럽다.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초반부는 아무리 좋게 봐도 시원시원한 무협소설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악랄하고 괴팍한 성질머리에도 불구하고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아자와 그녀 못지않은 비련의 남주인공이 된 유탄지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은 아자가 자행했던 몸서리치는 악행들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지 못한 청춘과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해 기꺼이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애처롭다. 지금도 그 잊지 못할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과 함께 한 움큼의 뜨거운 눈물이 글썽거리면서 정말이지 끝까지 읽은 보람을 물씬 느끼게 한다. 아자, 섭이랑 같은 천인공노할 악인의 죽음조차 애처로운 감상에 젖어 들게 할 정도로 김용의 이야기는 생생하다.
교봉의 태생과 관련한 사실은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점에서 가혹하기는 하지만, 교봉처럼 최고의 무공과 영웅다운 기질,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인자함까지 고루 갖춘 걸출한 인물조차 누군가 뿌려놓은 은원과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애석하고도 애석하다. 이는 탐진치(貪, 瞋, 癡) 삼독(三毒)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八苦(팔고)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일까? 『천룡팔부』에서 깨달음은 얻은 스님들이 주변 상황과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잇달아 원적에 드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는 게 곧 고통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사람의 행복추구권을 일절 외면하는 것 같아 야속하고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평생 행복했던 순간을 합치면 한 시간도 채 안 된다는 오래전 어느 글을 떠올려보면 우린 이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행복을 위해 터무니없이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차피 모두 흙이 되어 사라질 것인데 말이다. 이렇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 참으로 허무하기 그지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고,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매일 아침 깨어나자마자 자기 죽음을 생각하는 수양을 쌓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내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엔 탐욕 같은 것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기 때문이다.
대쪽같았던 영웅은 끝내 절개를 지키고자 스스로 부러지고,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며 강호를 종횡하고 다녔던 또 다른 영웅은 스스로가 강요한 환상에 영원히 갇히고 만다. 좋게 말하면 풍류남아, 내가 보기엔 호색한에 가까운 또 한 사람의 영웅은 자신이 젊었을 때 뿌린 씨앗이 자라면서 뻗친 가시에 찔려 허망하게 객사한다. 덕망과 무공이 높았던 스님은 단 한 번의 삼독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연한 죽음을 맞이한다. 장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우수 어린 감상을 남기는 씁쓸한 결말도 여타 무협소설과는 다르다.
『천룡팔부』는 깊게 스며든 불교적인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다양한 군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내는 기상천외하고 곡절이 숨겨진 다채로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어필할만한 소설이다. 단, 다소 지루고도 밋밋할 수도 있는 초반부만 잘 이겨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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