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5

뮤지코필리아 | 음악 없는 세상에서의 쓸쓸함

Musicophilia: Tales of Music and the Brain by Oliver S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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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 올리버 색스 | 음악 없는 세상에서의 쓸쓸함과 고독감은 마침표가 없다

Musicophilia: Tales of Music and the Brain by Oliver Sacks
<먼지 쌓인 카세트테이프 수납장>

테이프 시절의 추억담

고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정확히는 길동 사거리)에 음반 테이프를 무조건 1000원 (CD는 아마 2000원?) 할인해서 파는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여기에 (지금은 흔한 마케팅이지만, 그때는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온) 짜장면 한 그릇 먹고 도장 하나 받는 식으로 쿠폰에 도장 열 개를 적립하면 나중에 공짜로 짜장면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이벤트처럼 테이프 열 개 사면 한 개를 공짜로, CD 같은 경우는 20개 사면 한 개를 덤으로 주었다. 지갑이라 할 것도 없었을 만큼 주머니가 깃털처럼 가벼운 고등학생에게 무조건 천 원 할인은 엄청난 유혹이었다. 당시 테이프 음반 가격이 4000원 안팎이었음을 고려하면 1000원은 매우 큰 할인 폭이었다. 거기에 열 개 살 때마다 한 개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사지 않는 것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모은 테이프는 100개가 훌쩍 넘는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을 다 빨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정도로 왕성한 호기심을 자랑하는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나는 나의 좋은 식성만큼이나 음악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김현식, 부활, 조관우, 이소라, 박진영, 베이시스, 터보 등의 한국 가요, 비비 킹, 빌리 홀리데이, 쳇 베이커, 마일드 데이비스, 허비 행콕 등의 재즈, 소닉 유스, 오아시스, 라디오 헤드, 블랙홀, 루 리드, 스틱스 등의 록, Mo' Better Blues, 금지옥엽, Devil In A Blue Dress, Trainspotting, That Thing You Do, 흑인 올훼(Orphée Noir), Once upon a time in America 등의 OST, 여명, 장국영, 유덕화 등의 홍콩 가수, 그밖에 제이 제이 케일, 로이 오비슨, 포 탑스, 알 그린, 데비 깁슨, 시크릿 가든,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 등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러모았다. 물론 당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김건모 3집’도 장만했으며 당연히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지금은 흔하디흔한 것이 ‘리뷰’라지만, 그 당시 ‘리뷰’는 전문 기자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실은 기사가 전무였다. 신문이나 잡지를 도통 읽지 않았던 난 친구들이 추천한 음악과 라디오를 통해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을 제외하고는 모든 음반을 오로지 나의 감에 의존해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워크맨과도 졸업했고, 더불어 라디오와의 인연도 끊어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라디오가 음반 선택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음악을 들을 수 없었던 그땐 공짜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라디오를 켜는 것이 전부였다. 라디오를 듣고, 혹은 친구가 빌려준 테이프를 듣고, 그래서 ‘아, 정말 좋다~’라는 감흥을 받으면, 바늘에 실 가듯 마음은 자연스럽게 음악으로 쏠리고, 지갑은 레코드 가게로 쏠렸다.

아직도 내 방 한편엔 자신들이 이미 퇴물 취급받는 것도 모른 채, 한때 찬란했던 옛 영광을 고독하게 되씹으며 나와 세상으로부터의 완벽한 소외를 꿋꿋이 버티고 있는 테이프들이 탑을 이루고 있다. 아무리 모으고 모아도 테이프처럼 거추장스럽게 방구석을 차지하지 않는 디지털 음원이 득세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그들이지만, 한때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줬음에도 결국엔 변화의 물결 속에 묻혀버린 모든 것들이 자아내는 쓸쓸한 기억처럼 테이프 역시 우리의 때깔 벗겨진 과거 속의 빛바랜 필름처럼 고이 간직되어 있다.

Musicophilia: Tales of Music and the Brain by Oliver Sacks
<올리버 색스, 2013년, Maria Popova / CC BY-SA>

취향이 아니라 본능으로서의 음악

내 인생에서 잠깐 떠오른 음악과 관련된 일화와 감상을 서둘러 적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구구절절하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마냥 되새기고 싶은 그리운 추억이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터지는 슬픈 추억이든, 혹은 얘깃거리가 되든 안 되는 간에 저마다 음악과 관련한 일화나 추억담은 한두 개 정도는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음악이 인생의 주제나 주인공이 되는 사람도 있고, 엑스트라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음악으로, 혹은 음악과 관련된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 있지만, 나처럼 음악을 그저 취미로 듣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나처럼 음악을 밥 먹듯 매일 듣는 사람이 있다면, 잊을만하면 생각나는 첫사랑처럼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혹은 특별하게 어떤 음악이 떠오를 때나 필요할 때만 찾아 듣는 사람도 있다. 설령 이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광고, TV, 영화, 드라마, 게임을 통해 무심코 음악을 듣게 된다. 결국, 좋아하건 싫어하건 모든 사람의 삶 속에 음악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음악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음악 없는 삶은 새 소리가 사라진 ‘침묵의 봄(Silent Spring)’처럼 삭막하고 황폐하고 건조할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음악이 있어 사람은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풍부하고 안정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사람의 감정은 본능에 가깝다는 점에도 기꺼이 동의한다면 Music(음악)과 Philia(사랑)의 합성어이자 책 제목이기도 한 ‘뮤지코필리아(Musicophilia)’는 음악과 사람의 관계를 문명의 인위적이고 선택적인 속성의 하나가 아니라 사람의 원초적 본능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의미 함축적인 단어다.

‘음악사랑’이 우리의 본능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과 시기를 놓치지 않은 조기 교육, 그리고 그 이후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고된 훈련이 잘 맞아떨어져야만 우리가 아는 그런 뛰어난 음악가들이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비록 음악을 창조하는 능력은 소수에게만 주어지지만, 음악을 감상하는 능력은 사람 대부분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음악이 위대한 것은, 그 예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예술과는 달리 그것을 감상하는데 특별한 지식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뻥 뚫린 두 귀만 있다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지능이 높건 낮건 학식이 있건 없건 개나 소나 즐길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다. 그러고 보니 동물이나 식물들도 ─ 사람만큼은 뛰어나지 않더라도 ─ 음악적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역시 음악은 위대하다.

나 역시 앞에서도 장황하게 얘기했듯, 보통 수준의 음악 감상 능력에는 지장이 없다. 더 나아가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배운 경험 때문에 코 푸는 소리가 ‘사’음으로 들리는 절대음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잡하지 않은 피아노 선율 정도는 어림짐작과 시행착오로 어느 정도 따라 연주할 수 있는 보잘것없는 재주와 고등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농담 삼아 작곡과 지망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볼 정도로 간단한 선율 정도는 작곡할 수도 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지 스카룰리스(George Skaroulis)의 Parents를 듣고 있는데, 피아노 선율인 ‘시도레미도’, ‘미파솔미파’, ‘도레미파레’ 정도는 귀에 들린다. 피아노를 그만둔 지가 20년이나 지났음에도, 그리고 평소에 이런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음악을 감상했음에도 여전히 선율이 귀에 들리는 것을 보면, 음악은 역시 조기 교육이 답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나이가 들수록 음악 능력과 감수성이 쇠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양이를 ‘노이즈 트라우마’에 노출시킨 실험에서 소음에 노출된 뒤 몇 주 동안 음향적으로 풍성한 환경에 두었더니, ─ 조용한 환경에 둔 고양이가 청력을 상실한 것에 반해 ─ 청력 상실이 훨씬 덜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적당한 볼륨으로 꾸준히 음악을 감상한다면 음악 능력과 감수성이 쇠퇴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는 있을 것 같다. 꾸준히 운동해온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나이를 먹어서도 잘 걷고 잘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사람의 뇌세포는 너무 사용하지 않으면 가치를 잃는다.

음악과 마음과 뇌를 잇는 삼각관계

음악은 사람을 진정시키고 고통과 슬픔을 잊게 해준다. 음악은 기쁨을 배가시키고,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음악은 우리를 슬픔과 처량함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안과 위로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준다. 음악은 학습 능력과 집중력을 향상시키기도 하고, 집단에 리듬감을 부여하여 작업 능률을 올리기도 한다. 굳이 이렇게 음악의 효과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음악은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음악은 무형의 파동을 그리며 우리의 청각을 자극하고, 우리의 뇌는 그에 반응하여 달콤하고 향긋한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은 촉촉하게 젖는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혼을 좀 더 풍요로운 삶으로 안내한다.

음악을 듣고, 그에 반응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모든 작용이 우리의 커다란 뇌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등 세부적이고 과학적인 질문으로 파고 들어가면 여전히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있다. 우리가 여전히 뇌에 대한 많은 것들을 풀어내지 못했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손 놓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나 같은 평범한 독자까지도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뇌과학 분야에 많은 발견과 진보가 있었다는 방증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음악을 즐겨왔으면서도 음악과 마음과 뇌를 잇는 삼각관계를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우둔한 나에게 복잡미묘한 남녀관계가 나은 삼각관계처럼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그 삼각관계 이상으로 호기심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지적 충만감까지 선사한 책이다.

이 책은 음악에 관한 본격적인 신경학적 연구를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집필된 책이니만큼, 그리고 정형화하거나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풀어쓰기가 어려운 음악의 특성상 ─ 누군가에게는 수면제 처방이 될 수 있는 ─ 학술적인 서술보다는 흥미진진한 임상 관찰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음악과 관련한 특이한 사연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임상 관찰은 영화나 드라마 못지않게 극적일 뿐만 아니라 때론 가슴이 뭉클할 감동적이라 누구라도 쉽게 읽힌다. 특히 사연에 소개된 음악을 들으면서 읽는다면 그 감동은 더더욱 풍성해지고 선명해질 것이다. 음악을 통해 장애를 기적적으로 극복한 몇몇 사연들은 ‘휴먼 드라마’가 따로 없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깊은 유대감과 신뢰가 건조하고 냉정한 임상 관찰로만 끝날법한 사연을 한 편의 드라마로 승화시키고, 적절하게 등장하는 과학적인 접근 방법이 초콜릿 칩 쿠키 속에 박힌 쿠키처럼 달곰하게 독자의 지적 충만감을 채워준다. 과학적 소재에 문학적 글쓰기가 매끄럽게 접목된 읽기도 좋고, 생각하기도 좋은 책이다.

3초만 기억할 수 있는 남자의 피아노 독주

벼락 맞고 음악을 사랑하게 된 남자, 청력을 잃었음에도 음악 환청을 듣는 사람들, 시각이나 언어의 손실이 가져온 고삐 풀린 음악성, 실어증 환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기억상실증을 앓는 환자들이 곡을 연주하는 기적, 더듬거리거나 딱딱 끊어지는 동작과 굳은 표정의 파킨슨병 환자들이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추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 투렛 증후군이나 강박장애 환자가 자신도 모르게 동작이나 소리, 단어를 반복하는 증상 등의 종잡을 수 없이 분출하는 에너지를 음악으로 전환하여 난치병을 전화위복으로 삼은 음악가들, 혼자서는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지적장애를 안고 살지만 사교성과 음악성 면에서는 평범한 우리를 ‘지체’로 만드는 윌리엄스 증후군,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웃기고 울게 만든 사연은 역행성 기억상실증으로 모든 과거의 기억을 잃은 것도 모자라 몇 초밖에 안 되는 기억력만 남음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연속성을 박탈당한 전직 피아니스트인 클라이브의 사연이다.

클라이브가 왼쪽 손바닥 위에 놓인 초콜릿을 들어 올릴 때마다 ─ 마치 누군가 마술을 부린 것처럼 ─ 초콜릿이 새로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일화나 자신의 연속성과 생각의 끈을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가기 위해 몇 가지 안 되는 화제로 강박적일 만큼 수다를 떨고 대화에 매달리는 모습은 서글프고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일 때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초콜릿을 새 초콜릿으로 받아들였으며, 수다를 멈추면 깊은 암흑의 심연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인지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3초만 기억하는 그를 주제로 영화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클라이브의 사연은 가슴을 후벼팔 정도로 딱하고 안쓰럽지만, 한편으론 지독히도 비참하고 지독히도 희극적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억이 망가진 클라이브지만 피아노를 연주할 때만큼은 기억이 무너지기 전의 삶에서 그랬던 것처럼 생생하고 완전하다. 이보다 더욱 놀라운, 아니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또 하나의 사실은 아내 데버러만큼은 항상 알아본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아내를 알아보는 즉시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이것은 정서적 기억은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데 사용하는 서술기억이나 절차기억보다 더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기억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이렇게 기억이 정서적으로 깊이 새겨질 수 있는 특징 때문에 죽은 사람이 원한이나 은혜를 갚으러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귀신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서적 기억은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영혼에까지 선명한 흔적을 남기는 듯싶다. 또한, 음악이 정서와 상호 긴밀하게 소통한다는 점에서, 앞선 사례에서 실어증 환자들도 음악에 감응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은 언어보다 앞서 진화한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Musicophilia: Tales of Music and the Brain by Oliver Sacks
<스마트폰 덕분에 음악이 더 가까워졌다>

음악과 정서발달, 그리고 성 선택

사람은 새들의 다양한 노랫소리를 듣고 모방하여 새처럼 구애에 활용했을지도 모른다. 소나 돼지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짐승들이 순순히 잡히는 것도 아니고, 사자나 호랑이 같은 야수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안 먹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성 선택은 당시에는 먹잇감을 사냥하거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실재적인 가치가 없었던 음악을 일약 대스타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진화적 지표였다. 남자가 부르는 노랫소리에 감흥을 느낄 수 있었던 여자가 선택되었다면 이로써 음악과 정서적 사이의 깊고도 넓은 유착 관계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다. 음악이 집단의 응집력과 단결력을 함양시켜주고 집단에 정서적 일체감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에 정서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 부족이 그렇지 않은 부족보다 생존에도 유리하다. 하지만, 음악에 감응을 느낄 수 있는 정서발달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음악이 먼저였는지, 이도 아니면 둘이 동시에 진화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서발달 없이는 음악의 효용성을 측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감정이 사람의 본능이라면 음악 역시 사람의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이 없어서 음악을 못 듣는다는 것

단지 돈이 없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는 것만큼 불쌍한 일은 없다. 또한, 돈이 없어서 읽고 싶은 책을 못 읽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듣고 싶은 음악을 못 듣는 것은 불쌍한 일이라고 말해야 할까?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불행한 일이라고 말해야 할까?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워크맨도 졸업한 내가 본격적으로 다시 음악 세계로 돌아온 것은 독서 세계로 한창 빠져들기 시작할 무렵에 등장한 스마트폰 덕분이다. 처음에는 주변 소음 차단이 주요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책과 함께 내 삶을 좀 더 풍부하게 해주는 몇 안 되는 효자 중 한 녀석으로 자리 잡은 것이 음악이다. 책을 읽을 때, 컴퓨터를 다룰 때, 산책할 때,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음악은 나의 집중력을 높여 주고, 심신의 활력을 발산하도록 도와주고,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안정을 가져다준다. 이런 작금의 나에게 음악을 떼어놓는다면, 갓난아기가 앙칼스럽게 쥐고 있는 손에서 초콜릿을 뺏는 것만큼이나 억울하고도 충격적이고 허망한 일이다. 음악이 없다고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 없는 삶은 상상하기조차 싫을 정도로 쓸쓸하고 고독하다. 그것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 쓸쓸함과 고독함을 달래주었던 음악이 없으므로, 음악이 없는 세상에서의 쓸쓸함과 고독감은 마침표가 없다.

한편으론, 음악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와 소양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다양한 문화생활 중 ─ 도서관에서 공짜로 책을 빌려볼 수 있는 ─ 독서 다음으로 가장 저렴하면서도, ─ 스마트폰과 이어폰, PC와 스피커 등 기본적인 여건만 갖춰진다면 ─ 독서보다 더 쉽고 편리하게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이다. 그냥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인터넷 스트리밍 사이트에 접속하거나 음악 앱으로 원하는 음악을 선곡한 다음 들으면 그만이다. 일하면서도, 산책하면서도, 운전하면서도, 운동하면서도, 심지어 공부하면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 감상이다.

고로 내가 볼 땐 돈이 없어서 듣고 싶은 음악을 못 듣는 것은 최소한의 문화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쌍한 일이고, 삶의 고독에서 벗어날 하나의 위안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며, 이 두 가지를 모두 놓쳤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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