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퍼 이펙트 | 필립 짐바르도 | 우리를 악마로 둔갑시키는 상황의 힘
SPE가 몇십 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사람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 실험이 ‘성격의 변환’,착한 사람이 갑자기 상황의 힘에 대한 반응으로 악을 저지르는 교도관이나 병적으로 수동적인 희생자 모습의 수감자로 돌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339)
당신은 ‘기본적 귀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진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인류의 영원한 논쟁거리는 다름 아닌 ‘선과 악’이다. ‘선과 악이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고찰부터 ‘왜 신은 악을 허용하는가?’라는 종교적 고찰, ‘선과 악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사회학적 고찰, 그리고 ‘선과 악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인가?’ 하는 철학적 고찰, 그리고 사람은 착하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단지 이기적일 뿐이라는 실리적 고찰까지, 인류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자신을 굴비처럼 엮어 왔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평범한 사람을 나쁜 길로 밀어붙이는 상황은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대놓고 질문을 던져놓고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법체제나 우리 사회는 악행을 전적으로 개인의 ‘기질적’ 문제로 돌리는 강한 심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이것은 어떤 행동의 원인을 추론할 때 상황적인 요소나 외부 요소를 고려하지 않거나 과소평가하는 대신, 그 사람의 성격, 태도, 가치관 등과 같은 사람의 내부적 성향에서 원인을 찾는 경향을 말한다.
이렇게 글로 설명하면 우리 자신은 그렇게까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다. 더군다나 사람은 그 어떤 동물보다 합리적인 동물 아닌가? 그러나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 한두 가지만으로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쉽게 결론 내렸던 적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할 것이다. 직장이든 학교든 지각 몇 번만 해도 게으른 사람이라고 낙인찍히기는 쉽지만, 한번 그렇게 찍힌 낙인은 좀처럼 벗겨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정말 게으름을 피워서 지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교통 환경이 매우 열악할 수도 있고 약을 먹이고 체온을 재는 등 이런저런 병증을 확인해야 할 환자를 돌보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지각한 이유에는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해서인지 (혹은 여기에도 ‘오컴의 면도날’이 작용하는 것일까?) 보통은 간단하고 편리하게 그 사람의 성격이 게으른 탓이라고 판결한다. ─ 만약 지각한 사람이 당신이라면 ─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당신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지만, 가는 말이 고아와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당신이 타인의 대수롭지 않은 언행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짧은 사고 과정도 이와 같기에 ─ 사람들이 한두 번 지각한 당신을 두고 게으름뱅이라고 놀린다 해도 ─ 그렇게 억울할 것은 없다.
이뿐만 아니다. 무단횡단하는 보행자, 과속 운전하는 운전자, 신호를 위반하는 운전자,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이 등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치는 불쾌한 행동들이다. 분명 좋은 행동은 아니지만, ‘악인’으로 낙인찍어야 할 정도로 나쁜 행동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책임하게도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의 한두 가지 결점이나 실수만 보고 되먹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이렇게 그 사람에 대해 잘못된 첫인상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이 나에게 대단한 친절을 베풀지 않는 이상이 첫인상을 뒤집기는 축구 주심의 판정을 뒤집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사람은 놀랍도록 복잡한 동물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과정만큼은 놀랍도록 단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단순한 동물이다.
‘썩은 상자’ 안의 ‘썩은 사과’
기본적 귀인 오류는 범죄 같은 악행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우리는 살인, 고문, 학살, 학대, 테러 등 인류를 경악시키고 분노케 하는 가공할만한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 서슴없이 ‘악당’, ‘악마’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평소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때만큼은 잠시 이성과 지성은 어딘가로 자취를 감춘다. ‘홀로코스트’나 ‘난징 대학살’ 등 인류사에 전례 없던 무자비한 악행을 책으로 읽거나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으로 시청할 땐 끓는 냄비처럼 분노로 펄펄 끓어오른다. 감정이 새벽이슬처럼 순수한 사람은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우리는 이웃이나 인류의 악행을 대할 땐 자신도 모르게 ‘욱’하는 감정적인 판단이 앞장서고, 그 당면한 결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가차 없이 ‘악당’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그들은 애초에 무시무시한 범죄 유전자를 품고 태어난 ‘악당’인 것이고, 썩어도 한참 썩은 사과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ET처럼 쭈글쭈글 못생긴 외계인 쳐다보듯, 혹은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쳐다보듯, 사람들은 ‘악당’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흘낏흘낏 쳐다보며 선과 악의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 지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내심으로는 나 자신은 선의 세계에 있음을,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신만큼은 선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토록 당신은 정말 선량한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사람은 보통 자신은 타인보다 좀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의 유명한 사회심리학 실험인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PE: Stanford Prison Experiment)은 그 모든 것이 우리만의 착각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1971년 여름,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 건물 지하에 임시로 만들어진 교도소에서 진행된 이 모의 교도소 실험의 참가자들은 고작 닷새 만에 성적 수치심을 주는 학대 행위를 일으켰다. 고작 닷새 만이다. 수학여행보다 조금 긴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들은 진짜 수감자가 되어버렸고, 진짜 교도관이 되어버렸다. 참가자들은 실험 시작 전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된 육체와 정신 감정 결과에서 모두 정상임을 판정받은, 대학 이상의 학력과 중상층 이상의 경제력을 갖춘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참가자들은 실험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교도관과 수감자라는 역할도 무작위로 배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험이 시작되자 놀랍게도 자신들이 맡은 역할에 메소드 연기를 하는 명배우처럼 빠르게 녹아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실험을 계획하고 주관한 짐바르도 역시 단지 ‘실험’일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매우 훌륭하고 진지하게 교도관 책임자 역할에 빠져들었다. 짐바르도는 수감자들이 탈옥할 수도 있다는 걱정과 불안감에 휩싸인 나머지 수감자들을 비어 있는 진짜 교도소로 옮기려고 경찰서와 협의까지 했다! 또한,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감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수감자들을 관찰하며 수감자들의 나약한 기질을 들먹이지 않았던가! 실험 주체자인 그조차 어떤 일이 일어나든 무조건 기질을 탓하고 보는 사람들의 무책임함에 반기를 들고, 상황의 힘이 ─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격, 기질에 크게 상관없이 ─ 사람의 언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이 모의 교도소 실험하고 있다는 현실을 잊었다. 이 사실은 짐바르도 역시 교도소 감독관 역할이라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힘에 압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교도관들의 학대와 갇혀 있다는 압박감을 못 견디고 심각한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수감자들도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실험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않았다. 그들은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보수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 실험은 교도관이나 수감자들은 ─ 그리고 실험 주체자이자 교도소 감독관인 짐바르도도 포함하여 ─ 교도소라는 ‘썩은 상자’와 그 ‘썩은 상자’를 운영하고 지지하는 시스템의 강력한 영향을 받기 전까지는 그 어느 쪽도 ‘썩은 사과’로 간주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또한, 이 실험은 2004년 한 용감한 내부고발자의 결단으로 폭로된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일어난 학대 사건으로 확장 적용될 수 있다.
대부분이 결백한 이라크인으로 추정되지만, 설령 그들이 죄를 지은 범죄자라고 해도 수감자들에 대한 미군의 고문과 학대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고 국제법에 위반되는 반인륜적 행위다. 그런 일이 21세기에, 그것도 자칭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국가의 보호 아래 벌어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미군들이 자신들의 학대 행위를 찍은 사진에는 그 시간을 즐기는 듯한, 마치 유원지에 놀러 간 사람들이 기념 촬영하듯 미소가 꽃처럼 활짝 피어 있어 더욱 충격적이다. 이 충격적인 사진을 보면 그 누구도 그들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일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를 인류와 우리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서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는 이 ‘7인의 썩은 사과’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장담할 것이다. 아무리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저 같은 상황에서 학대나 고문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것 아는가?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을 고수하는 것은 상황의 힘에 충분한 경계와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우리를 내몰면서 그 결과 우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또한, 그 ‘7인의 썩은 사과’도 군인이 아니었을 때 이와 비슷한 사건을 접했더라면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을 것이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내가 교도소 실험에 교도관으로 참여하면 어떤 사람으로 변할까?> |
악행보다 더 무서운 ‘악의 평범성’
애초부터 ‘썩은 사과’는 없었다. 다만, 신선한 사과를 썩게 하는 ‘썩은 상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을 악의 길로 내모는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 범죄 유전자 때문도 아니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때문도 아니다. 신선한 사과를 고문과 학대를 일삼고 즐기는 ‘썩은 사과’로 변질시키는 것은 강력한 상황의 힘과 그 상황의 힘을 연출하고 조장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심리적 과정을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라고 할 수 있겠다. 강력한 상황의 힘이 그 누구라도 악의 길로 내몰 수 있다면, 선과 악의 경계는 우리의 바람만큼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당신이 제아무리 확신하고 자신만만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저 ‘7인의 썩은 사과’가 근무했던 아부그라이브 수용소라는, ─ 수감자나, 그 수감자를 감시하는 군인 모두에게 ─ 가혹하고 혼란스럽고 통제되지 않는 환경에서 군인이자 교도관으로서 근무하게 된다면, 지금의 신선함을 유지하며 썩지 않는다는 것에 돈을 걸기보다는 그 반대에 돈을 걸겠다. 그것은 당신이 못 미덥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미치지 않고 못 배기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먹잇감이 존재하고, 시스템이 가해자에게 익명성을 부여하는 탈개인화와 희생자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비인간화를 보장했을 때, 과연 그 누가 이 손쉬운 먹잇감을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잘해야 동료의 악행에 가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 수준 정도에서 머무르리라. 하지만, 이런 ‘행동하지 않는 악’은 결국 ‘썩은 사과’를 양산해내는 시스템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행동하지 않는 악’은 악행에는 직접 가담하지는 않지만, 그 악행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을 수수방관한다는 점에서 선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독일 나치스의 친위대 중령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찰하고서 가히 충격적인 개념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다. 이 말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예외적인 사람, 괴물, 도착적인 사디스트로 보아서는 안 되며, 아이히만과 그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 그대로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든 사회에 숨어 있는 만연한 위험이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상황과 시스템의 힘을 과소평가하거나 간과한다면 우리 중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믿기지 않게도 아이히만을 검사한 6명의 심리학자 모두 그가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그가 제복을 입지 않았을 땐,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에 참여한 대학생들처럼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아이히만뿐만 아니라 학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을 학살한 두 손으로 집에서는 아내와 딸을 어루만지고,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입으로 가족들과는 친근한, 연인과는 달콤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류가 저지른 온갖 만행에 가담한 사람들은 그 상황을 벗어나면 우리처럼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곧 깨닫고는 한 번 더 소름이 돋는다. 이것은 난징 대학살을 자행한 일본 군인도, 한국 전쟁 시기와 제주 4 • 3 사건 때 일어난 갖가지 만행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런 거지 같은 상황만 맞닥트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좀 더 좋은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모두가 좋은 사람들, 아니 최소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 남았을 가능성이 매우 컸을 것이라는 말이다.
악행의 숨은 연결고리
내가 얼마 전에 읽은 핑루(平路)의 『검은 강(黑水)』과 마치다 고(町田康)의 『살인의 고백(告白)』은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돌연변이 같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할 사람일 수도 있음을 명확하게 내비쳤다.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 역시 사람은 상황과 환경의 힘에 좌지우지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재수 없게 겪게 된 층간 소음이 평범한 이웃을 범죄자로 만든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런 상황과 마주치지 않은 행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이 상황의 강력한 힘에 지배될 수 있다는 이 책의 연구가 범죄를 두둔하고자 나온 것은 절대 아니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착하게만 보였던 사람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살인 기계로 둔갑하고, 국가나 사회는 적군에 대한 살인을 장려한다. 이런 경우처럼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한다면, 그 악행이 일어난 전후의 심리적 상황과 그 상황을 유발한 시스템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을 방어하고 유지하려는 자생력을 갖추기도 하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서 파생하는 상황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악의 평범성’을 절대 이해할 수 없으며, ‘악의 평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악행의 악순환을 끊을 수도 없다. ‘악의 평범성’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우리 누구라도 상황의 힘의 지배되어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그럴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상황의 힘을 더는 간과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악행의 이면 속에 숨은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우리의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경제적 상황도 나아졌음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각종 범죄로 몸살을 앓는다는 것이다. 분명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잘 먹고 잘살 뿐만 아니라 부유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과학과 기술의 혜택을 받으며 편리함과 안락함까지 만끽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범죄는 소멸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사람의 끝없는 탐욕과 지치지 않는 이기심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를 범죄자로 밀어붙이는 상황의 강력한 힘과 그 이면에 숨어 마리오네트처럼 상황을 조정하는 시스템의 힘을 우리가 너무 얕보고 있기 때문일까?
1%의 악당, 1%의 영웅, 그리고 나머지 98%의 중립적인 사람들
때론 잘 쓰인 교양 도서가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힐 때가 있는데, 바로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가 그런 책이다. 특히 앞에 잠깐 언급한 두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내 생각, 즉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을 시원하게 퍼붓는 소나기처럼 해갈해주는 명쾌한 해설이 담뿍 담겨 있어 읽으면서 신명이 나기까지 했다. 또한, 다양하게 소개되는 사회심리학 실험 결과들은 우리가 그동안 인지하고 있었던 사람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단숨에 깨고도 남을 만하다. 교묘하게 조정된 권위와 상황의 힘으로 평범한 사람을 너무나도 쉽게 악행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실험 결과들은 우리에게 과연 선한 마음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의심케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일말의 위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상황의 힘이라고 해서 반드시 악행의 길로만 안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월호 같은 사고 속에서 평범한 영웅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사람은 상황에 따라 악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영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과 시스템의 힘이 사람의 본성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반영한 영화가 있으니 바로 「퍼지(The Purge)」다. 영화에서 ‘퍼지의 날’에는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가 허용된다. ‘퍼지’가 실시되는 날에는 대다수가 집에 은둔하며 안전을 기하지만, 또 다른 다수는 조직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살인과 폭력의 향유를 마음껏 누린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러하듯,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시스템에 대항하는 사람은 소수이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타인의 생명을 지키려는 영웅 역시 소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는 그저 자극적이고 통쾌한 액션이 볼만한 그저 그런 영화로 생각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영화적 상황이 사회심리학적으로 꽤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퍼지’ 같은 상황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사람들이 영화에서처럼 얼마든지 폭력적으로 급변할 수 있다는 불량한 믿음 쪽으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기운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악행을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 악’으로 일관하며, 어떤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황과 그 상황을 유발한 시스템에 대항한다. 우리는 무엇이 그런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지 아직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타고난 천성일 수도 있고, 성격이나 기질일 수도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악행을 저질렀다 해도 만약 그 사람이 그 상황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악인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 범죄자가 되지 않은 것은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불행한 상황과 아직 맞닥트리지 않은 행운 덕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교도소에 갇힌 수많은 죄수가 범죄를 일으켰던 상황을 비껴갈 수 있었더라면, 여전히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많은 가능성과 자유와 구속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또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는 상황의 강력한 힘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천만다행일까?
원사이드 시점이 아님에 대한 확인? 같은 느낌적인 링크.. 를
답글삭제타고 와서 봅니다.
명절 연휴는 잘 보내셨는 지요.
천성이냐 환경이냐 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 그에 대한 많은 실험들이 사실
양 사이드 중간에 선을 그어 놓고 마이 사이드만 고집하기에
그 많은 이론이나 실험들이 표준편차가 클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사실 교집합에 가까운 합집합인 데
물리적인 시간이나 관념에 따라 교집합을 제외한
A 또는 B 사이드만 보니 초승달이나 그믐달로 보여질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인간의 삶은 그 교집합이 정규분포를 이루고 있는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 단편들도 트윅의 과정이라 여겨지네요.
트윅의 끝은 순정인 만큼..
끝없이 트윅을 하는 과정들에서 참된 순정으로 회귀하는 거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인류는 천성이냐 환경이냐는 질문에 대한 수학 같은 답을 우주 팽창이 끝날 때까지 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상황과 갖가지 상념에 대해 수많은 설명을 도출해낼 수 있는 그 과학적 탐구 과정이 흥미로워 이런 책을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삭제운동한답시고 턱걸이 좀 했다가 그 부작용으로 고생 중입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