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고백 | 마치다 고 | 분노형 범죄, 그것은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구마타로의 입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총소리가 메아리쳤다.
흰 연기가 푸른 하늘로 솟아오르다 이내 사라졌다. (下권, p462)
‘평범한 농사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아닌
우선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살인의 고백(告白)』 뒤표지에 실린 간략한 소개글 중 기도 구마타로가 ‘평범한 농사꾼’이라고 설명한 대목이다. 구마타로가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또래들이 부모의 농사일을 조금씩 거들기 시작할 때부터 요즘 일본인들이 에어 기타를 연주하듯 피리도 없이 피리 부는 시늉을 하며 허공을 향해 뱃구레를 들썩이며 농사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위인이다. 그는 농사꾼의 자식이지만, 밭도 갈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소 발톱을 잘라주는 일을 일컫는 ‘요조코’라는 말의 의미조차 모른다. 그는 소년티를 벗자마자 이때다 싶어 서둘러 주색잡기 흠뻑 빠져든 허랑방탕한 남자다.
내가 볼 때 체면에 살고 허세에 죽는 협객 망상에 지독히도 빠진 구마타로를 ‘평범한 농사꾼’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생 아무렇게나 사는 괴짜에게 ‘평범한 농사꾼’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뭔가 영웅적인 면이 있거나, 아니면 그가 남다른 의협심을 품은 진짜 협객이라는 말은 아니다. 즉, 구마타로가 농사꾼의 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농사일은 전혀 못 하고 일찌감치 주색잡기에 빠져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 모든 비난을 얼버무리고자 간간이 협객인 척 행세하는, 대단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아닌, 그런 별난 사람이다. 저승에서든, 지옥에서든, 아니면 천국에서든 아무튼 어딘가에서 자신을 ‘평범한 농사꾼’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구마타로가 듣는다면 기뻐할지 화를 낼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책 소개에 구마타로를 ‘평범한 농사꾼’이라고 굳이 지칭한 이유는 아마도 홍보 효과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것은 일도 하지 않는 주색잡기에 빠진 괴짜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보다는 ‘평범한 농사꾼’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이 더 극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이 말은 마치 당신이나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언제 어느 때고 여차하면 살인마로 둔갑할 수 있다는, 무지막지하면서도 자극적인 연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분노 살인’이라는 주제와도 꽤 상통하기에 꽤 자극적이다.
인간은 왜 인간을 죽이는가?
그렇지만 뒤표지에 실린 소개글 중 ‘인간은 왜 인간을 죽이는가?’라는 화두를 언급한 것은 매우 지당한 표현이다. 왜 그 사람을 죽였나?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죽였다. 왜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나? 이에 대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살인 동기는, 대부분 분노, 원한, 질투, 증오, 복수, 쾌락, 애증, 사랑, 탐욕, 배신 혹은, 이들 중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얽히고설켜 빚어낸 다소 복잡한 감정들로 대부분은 설명할 수 있다. 하룻밤 만에 마을 사람 10명을 무참히 죽인 구마타로와 그의 의동생 다니 야고로의 살해 동기도 앞서 언급한 감정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즉 겉으로 드러난 동기 면에서는 보통의 살인과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다만, 그들은 하룻밤 만에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만 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끝인가?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사람에게 이리저리 치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타인을 내치기도 한다. 한정된 지역에 한정된 자원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살다 보면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일상다반사다(그래서 누군가는 사람의 삶을 ‘갈등’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크든 작든 분노와 원한을 품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혹은 의도적으로 타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거나, 타인에게 원한을 사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살인이 일어난다면 과연 세상에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 같아도 하루에도 여러 명을 죽어야 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여러 명에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 사람이 섣불리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이유에는 법의 처벌이 두려워서, 사람을 죽일 만큼 용기가 없거나 대범하지 못해서,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보복이 두려워서, 뭔가 잃을 것이 두려워서 등 나름 합리적인 설명을 둘러댈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을 고려하기에 앞서 우선 적으로 작용하는 뭔가가 우리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댐처럼 막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까?
만약 어떠한 일로 자기도 모르게 눈깔이 뒤집힐 정도로 분노가 확 치밀어오르면서 ‘저 새끼, 확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강타하고, 이러한 분노가 순간적으로 나의 모든 것을 압도하려는 순간, 앞으로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이 걸린 그 순간에 앞서 언급한 이유를 차근차근 심사숙고하며 살인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가 살인자가 되는 것을 막는가? 그것은 도덕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 양심이라고 불릴 수도 있으며, 정의와 관계되는 일일 수도 있다.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위기일발의 순간에 무언가 견고한 것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다잡는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살인은 나쁜 일이니, 좋은 일이니 라는 것을 떠나서 그 안전장치가 대부분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우리는 겉으로나마 꽤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가끔은 이런 안전장치가 쓸모없을 때가 있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말이다.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급격하게 무너지는 댐처럼 그런 일이 부지불식 간에 일어난다면 우발적인 살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조금씩 조금씩 불어나는 물에 저항하던 댐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그 틈새로 물이 새다가 결국 무너져 내린다면 계획적인 살인이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구마타로의 계획적인 살인은 그에게 쌓이고 쌓인 게 참으로 많았다는 이야기다.
과도한 사색에서 비롯한 허세, 체면, 그리고 망상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그토록 집요하게 구마타로를 살인자로 내몰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자. 당신은 어떨 때 계획적인 살인을 망상 속에서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원한이든, 증오든, 분노든 이런 것들이 얼마만큼이나 쌓이고 쌓여야 당신을 지탱하는 댐이 무너지겠는가? 물론 사람마다 댐의 강도와 높이도 다르다. 댐의 강도는 강하지만 높이가 낮다면 일시적으로 불어난 물살에 범람 될 가능성이 크기에 살인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우발적인 살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에 강도는 약하지만, 높이가 높은 댐을 가지고 있다면 일시적으로 불어난 물살은 견딜 수 있겠지만, 지속해서 불어나는 수압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속해서 늘어나는 수압에 댐이 금이 가고 금이 간 곳에서 물이 새고 있다는 것은 당사자는 엄청난 번뇌와 고통에 휩싸여 있다는 말이다.
사회생활로부터 파생되는 갖가지 마찰, 충돌, 그리고 압박, 그리고 그러한 외압으로부터 일어난 내면의 갈등이 우리의 댐을 훼손한다고 볼 때, 허랑방탕한 건달 생활로 일관하던 구마타로가 마을 사람들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무시당하는 일, 순진한 바보처럼 타인의 의도적인 거짓말에 농락당한 일, 사기를 당해 돈을 뜯긴 일, 아내가 평소에 자신을 형처럼 따르던 남자와 바람난 일은 사회로부터 받은 외압이다. 반면에 이런 일들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분노하고, 의기소침해지고, 자괴감에 빠지는 일은 외압으로부터 기인한 내면의 갈등이다.
그런데 구마타로는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답지 않게 매우 사변적이고 사색적이다. 그렇다고 생각의 깊이가 중후하다거나 사고가 고상한 것은 아니다. 이치에 맞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는 생각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쉴 틈 없이 쓰레기장으로 꾸역꾸역 밀려오는 도시의 온갖 쓰레기처럼 잡다하고 쓸데없는 생각과 몽상들로 가득 찼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생각이 많다. 그래서 간단한 일상 대화조차 매끄럽게 이어나가질 못해 곤란하다. 로봇처럼 정해진 일과대로 일하는 농사꾼의 단순함과 성실함이 미덕인 시대에 머릿속이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찬 것은 독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구마타로 인생에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면, 여기에 허세와 체면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웃기지도 않는 협객 망상이 더해져 비극의 완성을 위한 삼위일체가 완성되었다.
자기가 손해 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체면 때문에 거절을 못 한다. 한두 번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이 계속 누적되고 버릇이 되면 멍청이 취급당하기 딱 좋다. 사람들로부터 멍청이 취급당하는 그 자신은 자신이 한 짓은 생각 못 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배척하고 멍청이 취급한다고 증오한다. 시간으로 해소되는 증오심보다 쌓이는 증오심이 더 많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피폐해지기에 십상이다. 댐에 균열이 생긴다. 한편, 자신을 툭하면 무시하고 속여 먹으려고 드는 원수 같은 놈에게 아량을 베풀어 상대를 관대함으로 굴복시키겠다는 허세는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나 진짜 악질에게 걸리면 바보천치라는 비웃음을 사기에 딱 좋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기만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쓸쓸하다. 쓸쓸함을 달래고자 술과 노름에 더 빠져들고,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자 더욱더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구마타로는 결국 자승자박의 본보기가 되고 말았다.
<평범한 농사꾼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그가 왜?> |
살인을 일으키게 된 심리를 파고들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가와치 10인 살해사건(河内十人斬り)’의 원인은 ‘금전 · 교제 문제’라고 표기되어 있다. 사실 모든 살인 사건이 혼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명백한 점을 고려하면 (자살이 아닌 이상 죽는 사람 한 사람, 죽이는 사람 한 사람, 이렇게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 사건의 원인을 ‘교제 문제’라고 표기한 것은 역시 일본인다운 교묘한 발상이다. 그러나 마치다 고(町田康)는 참혹한 결과치곤 너무나 간결한 사건 설명이 마뜩잖았는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건을 다시 들고 일어섰다. 그렇다고 그가 사건을 재수사한 것은 아니고 결과만 덩그러니 남은 사건을 ‘기승전결’과 ‘육하원칙’에 충실한 온전한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역사이며, 그 사람의 말로가 무자비한 살인마였다는 점에서 ‘살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책 뒤표지의 실린 ‘작가는 살인의 역사를 철저히 고증하며 그 심리를 파고든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마치다 고(町田康)는 ‘교제 문제’라는 모호함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여기에 단 한 줄의 사실만 가지고도 오롯한 한 권의 책을 완성할 수 있는 왕성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마타로가 왜 ‘교제 문제’를 겪어야 했는지를 밝혀낸다. 결말만 놓고 보면 범죄소설이지만, 그 범죄가 완성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은 심리소설이라고 불리어도 좋을 만큼 구마타로의 내면을 잠식한 사변의 흐름에 대한 징그러울 정도의 천착은 도스토옙스키를 연상시킬 정도로 탁월하다. 또한, 진공청소기 같은 대단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군더더기 없는 텍스트 또한 나쁘지 않다. 덕분에 독자는 마치 김용의 무협 소설을 읽듯 너무나도 안일하게 소설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충고하건대, 『살인의 고백(告白)』 역시 김용의 무협 소설처럼 독자의 감정을 심히 농락하지만, 다만 그 감정의 기복이 ‘애락(哀樂)’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독자는 책이 파손되지 않도록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 책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라면 아예 두 팔을 단단히 묶고 책을 보도록 하자. 아차, 이러면 책장을 넘길 수가 없겠구나. 아, 이 썰렁함이란!
‘분노 살인’의 과거형, 구마타로
이 책은 한 사람이 계획적인 살인을 단행하기로 굳은 결심을 하기까지의 그 길고도 긴 역사를 말하고 있다. 구마타로가 살인을 계획하게 된 연유에 대해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위키백과에서 ‘교제 문제’라고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한 사람과 그 사람을 포함한 사회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을 죽인 구마타로가 문제인가?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문제인가? 그러한 원인이 발생하도록 수수방관한 사회에도 책임이 있는가? 또한, 한 사람이 살인을 계획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의 번뇌에 휩싸인 채 고통받는지 우리는 무책임하게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마타로의 삶이 평범함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는 절대 악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보살님께 자신의 죄를 빌고 구원받았다고 믿을 정도로 순박했으며, 자신이 밟은 풀 한 포기를 가엾어할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 여자 앞에선 부끄러워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순진했고, 불의를 보면 앞뒤 제지 않고 일단 뛰어들고 보는 의협심도 다분히 있었다. 그가 비록 술과 여자, 노름에 빠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로 말미암아 ─ 그의 부모를 제외하고는 ─ 누군가에게 커다란 피해를 준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본의와는 다르게 일을 엉망으로 그르치면서도 내심 착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협객처럼 활개를 쭉 펴면서 걷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비록 구마타로의 어리숙해 보이는 언행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복잡하면서도 나름의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진 결과물이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내면을 그렇게까지 자세히 관찰할 만큼 세상은 한가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무정한 세상은 이런 구마타로를 어리숙한 바보로, 철없는 어른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그가 허세와 체면을 내세우는 점을 역이용해 실컷 부려먹고 골려 먹는다. 사람을 곧이곧대로 믿는 아이처럼 순진한 구마타로가 잘못한 것일까? 이러한 그의 단점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그들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이런 잘못된 연결고리를 방치한 사회가 잘못한 것일까?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분노 살인’을 보면 이런 악순환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며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구마타로는 ‘분노 살인’의 과거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편으론 현대 사회의 법체제는 사람을 죽인 자만을 처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범죄를 한 사람의 기질적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분노형 범죄’가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요즘, 그리고 상황이 기질을 압도하여 평범한 사람을 악인으로 몰고 간다는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의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를 읽어보면, 범죄를 일어나게 하는 상황이나 요인이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의 기질보다 더욱 중요함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점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치면서...
구마타로는 죽기 전에 말한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라고. 무엇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을까? 애초에 농사일을 내팽개치는 것이 안 되는 거였을까? 그랬더라면 특별한 것은 없지만, 남들처럼 먹고사는 문제 정도는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마을 사람들로부터 괄시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살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구마타로의 처지에서 되돌아보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라고 되짚어볼 수 있는 삶의 무수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한두 가지 정도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다리 타기 같은 선택의 연속에서 그 끝이 살인마일지라도 우리는 앞일을 내다볼 수 없기에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가야만 한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라고 말할 땐 이미 늦었다.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선택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인가? 때론 막다른 길에 몰려, 때론 누군가의 음모에 말려들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상황에 따라, 자신이 가진 것의 명확한 한계에 따라 선택의 폭은 엿가락처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현재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오직 당신의 의지만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구마타로가 살아온 길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기도 하다. 무엇이 그를 그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을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구마타로의 심정을 영영 알 수 없지만, 자신을 괄시하고 무시한 사회에 대한 구마타로의 질책이자 자신을 살인마로 몰고 간 구마타로의 하소연 같기도 한 『살인의 고백(告白)』을 읽다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리고 인제야 나마 우리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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