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역사 | 발터 샤이델 | 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대평준화’
제국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고, 전염병은 어느 시점이건 한때 발병하게 마련이었다. 끝없는 로마 제국이나 전염병 없는 세상은 현실적인 반사실이 아니다. 실제 충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결국에는 다른 충격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주 최근까지도 주기적인 폭력적 평준화에 대한 그럴듯한 대안은 없었다. (p518)
나의 독서 습관과 그 흐름에 대하여
사실 난 뭔가 내세우기 위해, 혹은 남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책을 읽지는 않는다. 도박이나 게임에 중독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독서에 중독되면 ‘할 일 되게 없나 보네’라고 비웃는 요즘, 그리고 일 중독이 만연한 요즘에는 독서는 그저 시간이 남아도는, 혹은 백수들의 알량한 취미 정도로 보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 독서의 가치 또한 알지 못한다. 나 같은 경우는 그저 사는 게 지루하고, 지루하지 않더라도 죽을 날을 하릴없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선택한 ‘시간 보내기’ 놀이가 독서다. 그렇게 발을 붙인 취미가 뜻밖에 죽은 듯이 잠자던 나의 지적 호기심을 깨우며 느슨한 중독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안중근 선생의 유명한 경구인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의 체험적 의미까지 어렴풋이나마 깨우치면서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이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목적 없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책을 읽을 것에 대한 목적의식도 희미할 때가 있다. 주식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지적 호기심이 다행스럽게 상승 분위기를 유지하고, 여기에 조금 전 읽은 책이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하겠다는 ‘독서 릴레이’의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면,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을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권장할만한 분위기가 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주식이 급락하는 것처럼 지적 호기심이 바닥을 쳐 독서에 흥미를 잃을 때도 있고, 침몰한 배처럼 지적 호기심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잃기도 한다. 두 권을 고른다고 할 때 한 권 정도는 부담 없이 시원스럽게 읽을 수 있는 ─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풍 위주의 ─ 장르소설이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독서 자체에 흥미를 잃는 것은 미리 방지할 수 있지만, 지적 호기심이나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는 선택하기 어려운 ─ 소설을 제외한 ─ 교양 도서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넘길 수가 없다. 꼭 교양 도서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나 의무는 없지만, 좋은 주제로 잘 쓰인 교양 도서는 웬만한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 읽어본 사람만이 아는 ─ 짜릿한 지적 충만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나의 대출 습관이 어렴풋이 소설 1~2권, 교양 도서 1권의 비율로 자리 잡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아무튼, 나의 본받을만한 식성처럼 책을 선택함에서도 종교 분야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구애받는 것은 없다. 이런 나이지만, 막상 목적의식이나 내 구미를 자극하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막연하다. 이럴 땐 옛 골목처럼 더럽게 비좁은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헤매기 일쑤다. 마치 마트에서 수많은 반찬거리를 앞에 두고 오늘 저녁에는 어떤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야 할지 망설이는 알뜰살뜰한 주부의 마음이랄까?
참고로 사람마다 제각각인 식성처럼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난 ‘추천 도서’나 ‘권장 도서’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다. 남이 권해주는 반찬이나 음식이 언제나 맛있는 것은 아니고, 가족이 먹을 음식은 오로지 자신이 직접 선택해야 안심할 수 있는 성실한 주부처럼 책 역시 나의 입맛과 나의 지적 나침반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선택해야 후회가 없다. 후회한다고 해도 오로지 내 잘못이니 선택의 실패로부터 교훈도 배울 수 있다.
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역시나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는데, 그렇게 뭘 골라야 할지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선택한 책이 바로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이다. 사람은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질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 선택보다 직감에 따른 신속한 선택이 때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로 난 직감에 따라 두툼한 것이 뭔가 품위 있어 보이는 양장이라는 겉모양에 현혹되어 이 책을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 자화자찬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은 고루하기 이룰 데 없는 책을 고를 때도 있지만, 책을 선택하는 것에서만큼은 나의 직감은 매우 훌륭하게 작동해 왔음을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가 다시 한번 증명해 준 셈이다. 내가 읽은 책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사전 지식 없이 오로지 나의 직감과 ─ 책을 고를 때만 발동하는 듯한 ─ 사려 깊은 판단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선택한 책들이다.
읽기 전에는 몰랐지만, 『불평등의 역사』을 읽으니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 떠오른다. 둘 다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라는, 인류가 농경, 가축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떠오른 고질적인 문제이자 ─ 내 생각엔 상위 10% 정도를 제외한 ─ 다수의 관심을 끌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피케티가 20세기 유럽의 심상치 않은 부, 소득분배, 자본의 불평등을 도식적으로 표시한 여러 등락 곡선을 처음 봤을 때 눈에 띄었던 것은 세계대전이 가져온 곡선의 급락, 즉 부의 소득분배의 급작스러운 평준화이다. 샤이델은 이처럼 세계대전 시기에 이룩한 급격한 부의 평준화를 ‘대압착(Great Compression, 大壓搾)’이라고 지칭한다.
아무튼,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대규모 전쟁이 이런 대압착을 불러온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손한 생각이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이 인류 문헌에 기록된 역사에서 불평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유일무이한 시기였다고 해서, 더는 다다를 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딱 부러지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세계대전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전쟁이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는 어떤 극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는 볼 수 있다. 피케티의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불안한 생각들이 길 잃은 파리처럼 왱왱거리며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친절하게도 샤이델은 나의 그런 불손한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나의 의심이 전혀 허튼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오히려 정곡을 찔렀다는 점에서 약간의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류사에서 대규모 전쟁만이 부를 거머쥔 소수를 거덜 내는 평준화를 이룰 수 있다면, 세계대전 이후로 30~4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된 평준화 시기가 1980년대 전후로 반등하여 다시 20세기 초 상황으로 치닫는 지금, 이 부의 불평등이 깨지려면 세계대전 같은 파멸적인 총력전을 바라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과 망측함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대규모 폭력만이 괄목할만한 평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샤이델이 개괄하는 ‘불평등의 역사’는 수렵 • 채집 생활에 바탕을 둔 선사 시대부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최초의 잉여 자원을 생산하고 권력을 등에 업은 소수가 잉여 자원을 축적할 수 있게 된 농사 • 가축 생활로 시작된 인류의 ‘불평등의 역사’는 찡하게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부와 소득분배 불평등의 심상치 않은 증가 추세는 최고 정점을 찍었던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불평등의 역사’에서 부의 불평등이 언제나 상승 곡선을 달렸던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끝없이 치솟을 것 같았던 불평등이 ─ 드물지만 ─ 대폭 감소하여 잠시 평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무엇이 그런 급작스러운 평준화, 즉 대압착 시대를 불러왔을까? 그것은 성장지상주의자의 희망대로 경제 성장의 성과도 아니었고, 민주주의의 허울뿐인 경제정의도 아니었다. 신의 계시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우연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본과 자원의 가공할만한 물리적 파괴와 대량의 인명 살상을 불러온 엄청난 규모의 폭력이었다. 대평준화는 대규모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 대규모 폭력만이 유일무이한 원인이었다. 샤이델은 대압착 시대를 불러온 네 가지의 대규모 폭력으로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그리고 치명적 대유행병을 언급하며 이들을 당당히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라 부른다.
이 사총사(四銃士) 중 단연코 효과가 제일이었던 것은 대중 동원 전쟁, 즉 세계대전이다. 세계대전이 폭풍처럼 일으킨 총력전은 전쟁에 소요되는 모든 자원을 끄집어내는데 필요한 급진적 몰수와 ─ 현재처럼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수월하게 끌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세계대전에 대한 경각심과 전쟁만큼이나 무자비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전쟁 중에 도출된 재분배 정책에 대한 합의를 유지해나가는 의지와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 진영의 두 거두 중국과 소련이 각기 다른 이유로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세상은 또다시 평화와 안정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그 결과 아직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특했던 평준화 시대도 종식을 고했다.
이로써 다시 부의 소득분배의 불평등 곡선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도, 그리고 일말의 주저 없이 작금의 불평등 곡선의 상승 추세가 불평등의 역사상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했던 20세기 초에 근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20세기 전과 비교하면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가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으로 GDP가 최저 생계 비용을 웃돌면서 극빈층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로써 1세기 전과 비교하면 잃을 것이 훨씬 많아지고 나름대로 살만해진 저소득층이 대중 동원 전쟁이나 공산주의 혁명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고 파괴적인 폭력을 선호할 이유는 지극히 낮아졌다. 설령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 현재의 눈으로는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아 보이는 ─ 대중 동원 전쟁보다는 드론과 정교한 무기, 로봇 등이 활개 치는 최첨단 기술의 실험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국지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세계대전 시절보다 점잖아지고 가진 것도 더 많아진 국민은 재분배 정책에도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한다. 하지만, 현실과 역사는 이런 식의 점잖은 개혁이나 허울뿐인 정책만으로는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상승하는 것을 반등시키기는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한다.
경제적 평준화에 대한 필요성
경제학자들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불평등을 억제하고 감소시킬 수 있는 정책들은 넘쳐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부와 소득분배 곡선에서 최상위층에 존재하는, 소위 ‘엘리트들’, 혹은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재발로 자신들의 재산을 깎아 먹을 칭찬받을 짓을 할 리는 없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그들을 대단히 압박하는 사회적 합의나 민주적인 추진력이 필요하다. 평준화를 지향하는 사회적 합의와 민주적인 추진력을 국민으로부터 끌어내려면 평준화를 기필코 실현하고자 하는 국민의 강력한 의지가 발동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지는 평준화 필요성에 대한 동기가 인지되어야만 비로소 발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한번 곱씹어보자.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평준화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에 대해 샤이델은 소득과 부의 불균형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를 빈곤이나 막대한 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참으로 성의 없고 모호한 대답이다. 당연히 나라고 뾰족한 대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여전히 상당한 비율로 존재하지만 ─ 극빈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고, 저소득층이라 할지라도 한 세기 전과 비교하면 눈부시도록 향상된 물질적 혜택으로 소시민적인 만족을 불러일으키는 요즘, 그래서 가식적이고 위선적일지라도 대다수가 살만해졌다고 말하는 요즘 부의 불평등이나 평준화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의식이 깨어 있는 시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경제 성장이 평준화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는 암울한 현실 그 자체가 가장 적절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다수 사람은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확고하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개선할 의지도 없을뿐더러 평준화 필요성에 대한 동기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먹고살 만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말이다.
<전쟁만이 대평준화를 실현할 수 있을까?> |
無대책이 암시하는 미래의 불평등을 그려본다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는 정말 우연한 선택이, 그리고 나의 훌륭한 직감이 뜻밖의 기쁨을 안겨준 경우라 할 수 있다. 비록 통계학이나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한 부분에서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었지만, 그 밖은 역사를 읽어나가듯 무난하게 책장을 넘길 수가 있었다. 불평등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토마 피케티의 책과 더불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쉬운 것은 샤이델마저도 평준화의 미래에 대한 뾰족한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책상의 부재라기보다는 피케티도 시인했듯 의지의 문제다. 평준화 정책들은 국가, 정치, 권력, 경제, 시민의 의지가 일심동체가 되어야만 실행될 수 있다. 현재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국가들이 그나마 가장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경우는 이것마저 따라 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이미 엘리트들이 권력과 정치, 경제, 사회 곳곳을 장악한 상태에서 몰수나 다름없는 상속세 같은 것들이 실행되기를 바라는 것은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가 스님처럼 묵묵히 명상에만 잠겨있기를 희망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런 일은 단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곤 전무후무했다. 그 단 한 번이란 바로 부의 불평등과 평준화 역사에서 홍일점과도 같았던 세계대전이다. 그렇다고 평준화를 위해 전쟁을 기도해야만 하는가? 물론 이것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말한다. 세상을 초토화하는 대규모 폭력만이 평준화라는 위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디스토피아적인 SF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미래에는 유전 공학과 로봇 공학 등 최첨단 기술을 독차지한 덕분에 인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적, 정신적 힘을 보유하고 영생을 얻은 엘리트층이 전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한 덕분에 나 같은 자연인들은 할 일이 없어지고, 자연스럽게 극빈층으로 떨어진다. 로봇 군단에 대항할 수 없는 자연인 무리는 과거 순박했지만, 한편으론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면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농민들처럼 반란도, 봉기조차 일으킬 수 없다. 이런 미래는 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기술의 불평등도, 그리고 영화 「인 타임(In Time, 2011)」처럼 수명의 불평등도 극대화된 암울한 미래다. 반대로 모두가 기술을 공유하고 로봇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전쟁은 들어갈 틈이 없다. ─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 또다시 세계대전 같은 적의로 가득한 대중 동원 전쟁이 일어났다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의 향연으로 사람이 살만한 곳은 초토화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대평준화가 아니라 대빈곤화로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만큼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미래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그 많은 가능성 덕분에 문명은 꽃을 피웠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 꽃을 후대에 무사히 넘겨줄 수 있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불평등의 역사’에서 과연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쁘게 반길지, 아니면 우리의 모든 낙관적 기대와 믿음을 가혹하게 내동댕이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으며 흥미롭기까지 하다. 과연 당신이 바라는, 혹은 예견하는 미래에 전개될 ‘불평등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바라고 생각하는 평준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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