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 | 필립 지글러 | 유럽 대륙이 통째로 상(喪)을 당하다
방탕과 방종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원기를 돋우기 위해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고 술을 마시는 방어적인 장치였다. 이들의 광란적인 기쁨은 그 기저의 우울을 더욱 강조할 따름이었다. “먹고 마시고 즐겨라. 내일이면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내일은 매우 가까워 보였으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죽음의 공포를 오랫동안 억누를 수 없었다. (p338)
14세기 유럽에서 태어나고 싶은 사람 손!
누군가는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지구라는 행성에, 그것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현재 삶이 그럭저럭 만족스럽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삶에 달관한 사람이라면 이 공허한 겸손의 말에 공감할 수 있겠지만, 삶이 고달플 뿐만 아니라 그 고달픔의 늪에서 벗어날 희망을 꿈꾸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최악의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 그래서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죽음을 맞이해야 할 암담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라면 심히 불쾌하고 못마땅할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물어본다면, 만약 당신이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 맹위를 떨쳤던 중세 유럽 14세기에 태어났더라면,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지구라는 행성에, 그것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저주라고 받아들였을까? 난 당신이 어디에 사는 누구며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할 수 있다. 당신에게 흑사병이 창궐한 유럽 14세기에서의 삶과 현재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제아무리 현실이 엿 같더라도 열에 아홉은 현재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비단 흑사병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14세기 유럽은 중세 기후의 최적기가 막을 내려 생산성이 하락하고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면서 굶주림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불안정한 기후로 말미암아 기근이 뿌리내리고 인구 압박으로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는, 그래서 경기는 장기적인 침체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고, 기근으로 사람들의 영양 상태는 엉망진창인, 아무리 낙관하려 해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삶을 비관할 정도로 충분히 암울한 상태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흑사병까지 맞아들여야 했으니, 누군가의 말대로 정말 ‘재난의 시대’였다.
‘소작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성인이나 군자의 반열까지 오를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양심 정도는 갖춘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 도덕성과 양심의 미덕이 가차 없이 파괴된다. 그리고 당신은 광란과 방종과 악덕의 화신으로 타락한다. 당신에게 어떠한 압박이 어느 정도 가해져야 그것이 가능해질까?
사업이 실패해서 가족이 당장 거리로 쫓겨나고 굶주려야 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신의 양심과 도덕성은 안전한 수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면, 가족을 더 큰 위험이나 슬픔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인내심과 자제심을 부단히 발휘하여 새 출발을 각오할 것이다. 설령 당신은 혼자일지라도 경제적인 실패나 사회적인 실패가 파도처럼 몰고 온 좌절감과 절망감에 빠져 잠시 자살을 고려할망정 타인의 비웃음거리가 될 방종과 타락의 늪으로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에서 겪게 되는 참담한 실패가 당신을 뒤흔들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삶의 궤적에서 완전히 이탈할 정도로 당신은 나약하지 않다. 당신은 충분히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 장담하건대, 그런 당신의 충성스러운 이성과 감정을 마비시키고 동물적인 방탕과 방종의 길로 내모는 확실하면서도 기가 막힌 방법이 있다. 바로 당신을 지구를 가득 채운 공기처럼 사방팔방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흑사병의 시대로 보내는 것이다. 누군가 인류의 종말을 진지하게 고려하며 최후의 글을 남기려 했던 곳, 죽음이 내일보다 더 가까웠던 곳, “소작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라는 간결한 표현 뒤에 수많은 개인적인 비극이 숨겨져 있는 곳, 홍수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쓰레기를 휩쓸어 가듯 죽음이 신에게 버림받은 인류를 무참히 휩쓸어 가던 시대. 그곳에서 내 가족과 이웃이 고통스럽고 역겨운 원인 모를 병에 하루하루 쓰러져간다면, 그리고 내일은 바로 당신이나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 같은, 오직 죽음만이 유일한 벗인 그런 세상에서 과연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유 있는 타락
다행스럽게도 현대인은 그렇게 쉽게 타락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흑사병이 돌던 중세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사병을 타락한 인류에 대해 신이 내린 징벌로 받아들였다. 의사는 신부보다 훨씬 뒷전이었다. 그렇다고 의사에게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더러운 피를 몸에서 뽑아내고자 하는 심히 우려스러운 의도에서 방혈을 해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매우 운이 좋게도 신의 징벌을 피한 마을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시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는 못했다. 어떤 마을은 그 이후 지도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마을도 있었다. 학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럽 인구의 1/3, 혹은 1억 명에 가까운 사람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뭔가를 단정하기엔 당시 기록들은 충분치도 않고 명확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부족하지만 충분히 의미심장한 기록들을 통해 중세인들은 가늠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오돌오돌 떨면서 살아야 했으며, 그러한 하루하루 삶이 심히 편치 않았으리라는 것 정도는 바보라도 짐작할 수 있다. 고로 중세인이 현대인보다 타락했다고 해서 그들이 특히 도덕적으로 나빴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불공평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사과나무를 심을 수는 없는 것처럼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죽음의 공포는 중세인이건 현대인이건 이성을 마비시키고도 남을 만하다.
<이렇게 썰렁한 묘지가 존재하지는 않았겠지?> |
'대강'으로도 감춰지지 않은 공포
좀 더 연구가 진정되고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진다고 해도 중세인에게 흑사병이 정확히 어떤 의미였고 어떤 경험이었는지 아마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전장의 한복판에 선 병사와 평화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의미가 각각 다른 이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과학사가인 코이레(Koyre)의 말처럼 중세가 아무리 ‘대강’(a peu pres)의 시대였다고 해도, 당시의 자료가 불충분하고 막연하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테(Dante)가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상상 속의 지옥을 묘사한 것처럼 당시 많은 지식인은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현실 속의 지옥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흑사병이 중세인에게 선물한 아비규환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필립 지글러(Philip Ziegler)의 『흑사병(The Black Death)』이다. 스스로 아마추어 학자라고 칭한 저자가 학술적인 면은 의도적으로 피한 책이니만큼 읽기도 쉽지만, 재난 영화가 잔인한 재미를 선사하는 것처럼 ─ 중세인에게는 굉장히 미안한 일이지만 ─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한 계기는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에서 급격한 부의 평준화를 가져온 대압착(Great Compression, 大壓搾) 시대를 불러온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 중 하나가 대유행병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큰 대압착을 불러온 것은 14세기의 흑사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 지글러의 『흑사병(The Black Death)』에서는 발터 샤이델이 언급한 ‘대압착’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회 • 경제적 변화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다만, 노동자 수의 급격한 감소로 그들의 임금이 다소 오르고, 지대나 토지 상황이 그들에게 다소간 유리하게 적용되었다는 정황은 포착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페스트의 극적인 효과를 예시하기 위해 이미 인용된 모든 사례는 그 효과가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필립 지글러는 말한다. 흑사병으로 우연히 찾아온 노동자 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과거로 회귀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견해 차이는 『흑사병(The Black Death)』과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의 50년이라는 나이 차이와 그에 따른 누적된 연구 성과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인 것 같다.
'흑사병'이름의 기원
흥미로운 점은 ‘흑사병’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견해차다. 위키백과에는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1883년에 붙여졌는데, 피부의 혈소 침전에 의해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반면에 필립 지글러는 전염병의 이름이 피해자의 외양에서 파생되었다면 전염병 당시에도 그런 이름으로 통용되어야 했는데, 그러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위키백과의 견해와는 다른 의견을 피력한다. 필립 지글러는 ‘흑사병’ 이름의 유래를 라틴어에서 찾는데, 페스티스 아트라(pestis atra) 또는, 아트라 모르스(atra mors)를 영어나 스칸디나비아어로 곧이곧대로 직역했다는 것이다. 14세기에 ‘아트라’는 ‘검은’이라는 의미 외에도 ‘지독한’이나 ‘무서운’이라는 의미를 함축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위키백과의 설명보다는 필립 지글러의 설명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체념'의 시대, 그리고 '인고'의 시대
사실 평화로운 시대를 사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인의 안일한 시선으로 보면 중세 유럽인은 재난의 시대를 살았다고 해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더군다나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 개척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의지를 갖는 것조차 발칙하다는 이유로 절대 용납되지 않았던 불관용의 시대를 살았던 중세인은 모든 불행과 고통을 얄궂은 운명의 여신이나 잔인한 신의 의지로 돌림으로써 체념의 미덕 하나만은 현대인을 압도하고도 남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절망의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내일의 죽음에 맞서 방탕과 방종으로 저항했고, 누군가는 인류에 내려진 신의 형벌을 조금이라도 덜까 하는 기특한 희망을 품고 스스로 고행의 길로 들어섰다. 14세기까지 인류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신앙이나 사회 기반이 된 상식과 추론이 무너졌다. 하지만, 중세인은 전무후무했던 죽음의 시대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무덤 앞에서도, 공포와 두려움을 끌어안은 채 담담하게 일상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히 용감무쌍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삶을 초월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무지(無智)라는 시대의 표상과 체념이라는 경험적 교훈에 어떻게든 삶의 굴레 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원시적 본능이 삼위일체로써 결합한 그 알 수 없는 추진력에 떠밀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그것은 지옥 같은 현실을 저주하고, 절대 오지 않을 희망찬 미래로 자신을 고문하면서 꾸역꾸역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참한 현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죽음과 얼마나 가까우냐 하는 정도가 아닐까?
극단적인 공포와 극단적인 절망, 걷잡을 수 없는 사회의 붕괴와 침체, 그리고 그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인간의 정신과 문화, 도덕성에 지속해서 영향을 끼친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슬픔,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음침한 고통의 잔해 속에 가냘프지만 선명하게 남겨진 중세인의 흔적이 『흑사병(The Black Death)』 곳곳에 누덕누덕 기워져 있다. 운명과 신이 내린 날벼락 같은 저주에 맞서기보다는 체념과 순종으로 묵묵히 일관했던 중세인의 삶이 비록 우리의 눈에는 고되고 비참하고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체념과 순종을 미덕으로 여겼던 중세인의 삶과 사회의 부당한 대우와 굴욕적인 갑질에 항거하기보다는 쓰디쓴 인고와 좌절의 눈물로 견뎌야 하는 우리의 삶이 과연 그들보다 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마치면서...
역시 책과는 별반 상관없는 리뷰가 되고 말았다. 요즘 리뷰는 그냥 내 몸속의 찌꺼기를 배출하듯, 내 머릿속의 불순물을 짜내듯, 그런 불손한 글쓰기가 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글쓰기의 궁극적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니까. '흑사병'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중세인의 비참한 삶이 ─ 그들의 눈에는 가소롭게 비칠 ─ 나의 비참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니, 자연스럽게 리뷰도 칙칙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젖어 든 것 같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도 그들을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하물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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