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4

엿보는 고헤이지 | 유령 같은 기이한 인연

Nozoki Koheiji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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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고헤이지 | 교고쿠 나쓰히코 |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그래. 무엇이든 이야기해야만 비로소 존재가 되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어. 거짓말이든 허풍이든 입 밖에 내면 낸 만큼 존재가 되는 거야. 자네가 얄팍한 것도, 내 속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둘 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얄팍하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자네에게는 두께가 있을 것일세. 텅 비었다고 여기지만 피도 있고 살도 있잖은가. 밥도 먹고 똥도 눈단 말이지. 사람이란 누구나 약간은 한심한 법이야.” (p233)

살아 있는 유령, 얼뜨기 고헤이지

유명한 요괴 연구가, 하지만 고서점 주인 교고쿠도의 능란한 화술을 빌려 유령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던 작가 교고쿠 나쓰히코(京極夏彦)가 ‘유령’ 추리소설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에는 한국의 전설적인 공포 드라마 ‘전설의 고향’처럼 진짜 유령이 등장할까? 민속학과 종교학에 박학한 요괴 연구가인 교고쿠 나쓰히코가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꿔 유령의 존재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다. 대신 독자를 한껏 홀릴 어처구니없는 인물을, 그것도 지금까지 읽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런 유일무이한 인물을 창조해냈다.

그는 유령 같은 외모와 행동 때문에 막무가내로 유령 취급당하지만 그렇다고 유령은 아니다. 무엇보다 칠흑처럼 캄캄한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그는 유령 자격 미달이다. 하지만, 그는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영락없는 유령이다. 그는 땅거미 질 무렵의 어둑어둑함에 자신의 엷고 얇은, 그래서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고 수육처럼 흐물흐물한 육체를 묻어버리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소설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존재감은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는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처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괴상한 존재가 몰래 자신을 훔쳐보고 있음을 자각할 때나 느낄법한 그 소름 끼치는 섬뜩함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가 가까이에 있다면,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반드시 엿보고 있다는 음산한 상상에 기분도 나빠진다. 그는 유령처럼 흐릿하면서도 섬뜩한 존재감 때문에 아내처럼 보이는 여자에게나 그의 단 하나뿐인 친구처럼 행세하는 무뢰한에게나 반푼이 취급당한다. 툭하면 죽어버리라는 악담을 견뎌야 한다. 그가 바로 얼뜨기 배우 ‘고헤이지’다.

형편없는 인물이 내뿜는 유령 같은 음산한 매력

그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친구처럼 행세하는 무뢰한으로부터 기관총처럼 사정없이 퍼부어대는 악담과 싸늘한 시선을 묵묵히 견딘다. 집중포화를 피해 참호로 기어들어 가는 다친 병사처럼 고헤이지는 악담과 냉대를 피해 어둑한 헛방 속으로 스멀스멀 소리 없이 기어들어 간다. 그리고는 자궁 속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하릴없이 발꿈치를 문지르면서, 한 치 반 틈 사이로 열린 문틈으로 세상을 엿본다. 아내 같은 여자를 엿본다. 아내 같은 여자가 자신의 친구인 척하는 무뢰한과 한껏 놀아나는 것을 엿본다. 고헤이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헤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래저래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괴롭기는 하다. 하지만, 무리해서 괴로움을 벗어나기보다는 괴로움을 견딘다. 괴로움을 벗어난다고 편안함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을 견디는 것이 꼭 나쁜 일도 아니다. 그것이 그가 존재하는 방식, 아니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엿보는 고헤이지’는 그 어떤 소설에서도 보기 어려운 정말 형편없는 주인공이다. 쓸모도 없고, 근성도 없다. 그 누구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얼뜨기 중의 얼뜨기다. 우울하고 음산한 존재로서 살아 있는 유령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서 살아 있는 반푼이 유령 취급당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외면할 수가 없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심통을 부리며 애써 텍스트를 외면해 보지만, 한껏 돌 다 멈춘 눈알의 초점은 무심하게도 텍스트에 맞춰져 있다.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하게도 침까지 질질 흘리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 텍스트를 읽고 있다. 고헤이지를 읽고 있다. 고헤이지를 상상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야심한 밤에 혼자 숲을 산책하다 유령과 딱 마주쳤을 때, 유령이 내뿜는 음산한 공포에 사로잡혀 얼음처럼 얼어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유령이 내뱉는 말을 따라 하고 유령이 시키는 대로 하는 둥, 유령이 발산하는 음산하고 어두운 기운에 유혹되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니라. 이런 연유가 아니라면, 나만큼이나 형편없는 고헤이지를 왜 읽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굳이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의 장르를 구분 짓는다면,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미스터리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스터리소설과는 달리 교고쿠 나쓰히코 특유의 현학적인 텍스트에서 송진처럼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그리고 고헤이지만큼이나 음산한 기운이 듬뿍 보태진 철학적 분위기가 묘한 중독성을 발휘한다. 이번 작품은 고헤이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왜 고헤이지는 유령 같은 음산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오쓰카라고 불리는 여자는 왜 죽도록 싫어하는 무능한 남자 고헤이지와 함께 사는 것일까? 무뢰한 다구로는 어떤 도움도 안 되는 고헤이지의 유일한 친구 행세를 왜 5년 동안이나 해왔던 것일까? 한때 미소년이라 칭송받았던 가센을 비롯해 14살 때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살인마 운페이와 다구로는 왜 아무런 존재감 없는 고헤이지를 죽일 마음을 먹었을까? 단지 무대 위에서 평소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유령 역할을 멋들어지게 소화해내는 것이 유일무이한 쓸모인 고헤이지의 무엇이 그들의 살의를 부추겼을까? 한편, 아홉 번 둔갑한다는 도적 지헤이는 위험에 빠진 고헤이지를 왜 굳이 도우려고 마음먹었을까?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등장인물들 사이를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인연과 관계의 실타래를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는 길뿐이다. 하지만, 살해, 살인, 죽음, 인신매매, 남창, 윤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진 사람이 비슷한 과거를 가진 사람과 좋든 싫든, 그리고 크고 작든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마이너스 더하기 마이너스가 더 큰 마이너스를 내놓는 것처럼 끔찍한 상처를 앓는 누군가가 비슷한 상처를 앓는 누군가와 인연을 맺을 때, 그들의 상처는 서로 상쇄되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보태주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상처까지도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과거를 숨기지 않는다. 숨기지 않기에 그들 모르게 상처끼리 맞부딪혀 덧나거나 악화되는 것 역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다. 반대로 새로운 인연은 새로운 출발을 이야기한다. 보통 새로운 출발은 그때까지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전제로 시작한다. 인연이 깊지 않을 땐 더더욱 그러하다. 때에 따라선 과거가 새로운 출발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연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 과거를 묻지 않기에 그 사람이 어떤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사는지 알 턱이 없다. 언제 어느 날, 서로의 과거가 남몰래 안고 온 상처와 고통이 두 사람 모르게 얽히고, 맞물리고, 결합하고, 반응하여 현재의 관계를 뒤틀고 뒤흔들 때, 그들은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기에 그 파장과 충격은 알고 당하는 것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깊던 얕든, 두껍든 얇든 인연이 한 번 맺어지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영광스럽지 못한 과거의 상처와 고통이 전염병처럼 스멀스멀 퍼져나가 인연이라는 희미한 줄을 타고 상대에게 옮겨붙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엿보는 고헤이지』는 긴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언제 어느 날 상대가 짊어진 짐 중 하나가 어떤 계기를 통해 부지불식 간에 나에게로 굴러떨어져 발등을 찍을지도 모를 일이다.

Pickling Kodaira by Natsuhiko Kyogoku
<음침한 분위기의 소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저마다 소름 끼치는 과거 한두 개씩 짊어지고 사는 등장인물들도 기이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그들은 이름을 고침으로써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이지만, 무수한 인연의 매듭으로부터 불거져 낳은 파괴적인 결말을 고려하면, 마치 벌레가 허물을 벗으려는 듯한 그들의 개명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려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 정도로만 치부될 뿐이다. 그 누구도 완전히 허물을 벗지 못했을뿐더러, 무리하게 허물을 벗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각자 짊어진 상처를 덧나게 한 격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허물을 던져버림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벌레가 아니며, 벌레가 아니기에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만약 그들 서로가 인연으로만 그치지 않고, 서로의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밝힐 수 있는 진지한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면, 그런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결말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한때 도둑이었던 지헤이가 유령 고헤이지에게 한 충고처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거짓말이든 허풍이든 이야기한 것만큼 두께가 생기고 부피가 생긴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득하게 듣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새로 심은 치아처럼 단단히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이야기한 사람의 존재감은 완성된다. 하지만,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의 등장인물들은 인연은 맺지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야기하더라도 자기 이야기만 실컷 떠들 뿐 진지하게 듣는 이가 없다. 그들 모두 고헤이지가 유령 같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고무줄 같은 팽팽한 인연의 연결고리를 통해 서로 끌어당기고, 물렁물렁하고 흐릿한 존재감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서로 겹쳐지고 포개지다 보니 벼룩이 옮는 것처럼 서로의 상처와 고통까지 사이좋게 옮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현대인은 그렇게 미치도록 SNS에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를 세상에 이야기함으로써 미약한 존재감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은 허영으로 부푼 열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치 반 틈 사이로...

기괴한 인물이다. 그리고 기구한 인연이다. 무슨 심보로 이런 소설을 내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아무리 실화를 참고했다지만 ─ 정말 무지막지한 인물과 으스스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말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이상 어찌 손 쓸 도리도 없다. 그런 곤란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또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유령처럼 스르르 싹 트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 있는 유령처럼 살아가는 고헤이지에게서 얼뜨기 같은 나를 봐서일까? 아니면 이런 얼뜨기 같은 인물도 나름대로 존재의 법칙을 유지하며 흐릿하게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보잘것없는 삶의 위안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도 한 치 반 틈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고 싶다.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살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별로 대단치 아니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뒤집어 놓을 때가 있다.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가 대단한 소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지만, 교고쿠 나쓰히코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정치가가 유세하는 것 같은 능변과 종교인이 설교하는 것 같은 초월적인 무언가가 고명처럼 얹어지고, 여기에 교수가 강의하는 것 같은 현학적이고 선문답 같은 양념이 뿌려지면서, 신들린 약장수가 선전하는 것처럼 어딘가 미심쩍으면서도 왠지 믿고 싶어지는 텍스트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은 뻔히 알고도 속아 주는, 그것도 그냥 우울하게 속아 주는 것이 아니라 기껍게 속아 주는 거역하기 어려운 기괴한 매력을 발산한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텍스트를 읽노라면 마치 불량식품을 앞에 놓고 인생 최고의 고민에 빠진 나머지 침과 땀으로 범벅된 손가락을 쪽쪽 빠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지금 한 치 반 틈 사이로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당신을 엿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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