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내인 | 찬호께이 | 가학성 취미 험담을 부추기는 인터넷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불행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면 다시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복수는 오히려 불행을 지속시키고 또 다른 형태로 세상에 원한을 남겨놓을 뿐이다. (p625)
재능과 재력 모두 역대급 탐정
아마 찬호께이(陳浩基)의 『망내인(网内人)』을 선택한 독자가 거쳐온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과정은 나와 비슷하리라 본다. 2011년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으면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로부터는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끌어낸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에 매료된 나머지 그 이후 발표한 소설 『13.67』을 거쳐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리라. 아마도 말이다. 『망내인』에 대한 세간의 평은 뜻밖에 좋아 보이지만, 내게 미치도록 감상적이면서도 문학적 격이 느껴지는 텍스트를 선물한 『별들의 고향(최인호)』을 읽은 직후라서 그런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소설 읽기가 되어버렸다.
예전 작품과 비교해 어딘지 모르게 퇴화하여버린 듯 단조로워진 텍스트는 장르소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재능, 사회적 지위, 명성, 재력 등 어디 한군데 빠질 데 없이 너무나도 완벽한 탐정 아녜의 완벽한 계획과 완벽한 리드가 톱니바퀴 맞물리듯 잘 짜여 있어 싱겁다 못해 허탈하게까지 느껴진다. 마치 롤플레잉 게임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퀘스트처럼 한 치의 오차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그는 전지전능한 해커 실력과 ‘사회 공학’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상대의 모든 허점과 개인 정보를 꿰뚫어 볼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이용해 상대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며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상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조종당한다. 아마도 이러한 설정을 통해 맹목적으로 과학기술을 추종하고, 인터넷과 SNS에 중독된 일부 독자에게 이제라도 개인 정보 유출과 신상털기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일침을 가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은둔한 고수처럼 괴짜 같은 성격만 빼놓으면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내색하지 않는 그는 정말 완전무결한 인간이지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탐정 아녜라는 인물에게서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역겹다 못해 기가 찬다.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작품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다양하고 독특한 개성으로 넘쳐나는 탐정들이 발산하는 인간적인 매력이라 할 수 있는데, 아녜에게서는 그런 것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는 인공지능처럼 퍼펙트한 계획을 짜고, 악마처럼 감정의 동요 역시 계획을 착착 진행한다. 하물며 그는 인과응보도 믿는다. 그렇다면 돈을 받고, 혹은 심심풀이로 재미 삼아 염라대왕처럼 단호히 복수를 집행하는 그가 뿌린 것은 어떻게 거둬들여야 할 것인가?
아녜는 보기에 따라 이제껏 보지 못한 독특한 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엄청난 재력에 질린 나머지 일찍이 은거하여 취미 삼아 마치 신이 세상의 악을 단죄하듯 탐정 일과 복수 사업을 병행하는 그를 하등 보잘것없는 내가 어찌 시샘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런 재수 없는 밥맛 같은 탐정을 나는 내내 질투하고 있었으니, 염라대왕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담판을 짓고 싶다. 그런데 무슨 담판을 짓는다는 거지?
아무튼, 질투와 시샘이 극에 달해도 그 격한 감정을 풀 때가 없으니 제풀에 꺾일 수밖에 없고, 대신 그 반작용으로 우울증이 도진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리뷰를 쓰는 지금도 그 우울한 감정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그만큼 아녜가 알게 모르게 눈부시도록 생생하게 그려졌다는 방증이 아닌가? 아, 이 모든 것이 찬호께이의 트릭이었나?
인간의 가학성을 부추기는 인터넷
어쨌거나 『망내인(网内人)』은 이전 두 작품에 비하면 실망스럽다. 물론 읽는 재미는 있다. 지루하지도 않다. 그러나 추리 깊이나 트릭의 신선함은 예전만 못하다. 특히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에 비하면 ‘무한대의 재능’이 벌써 소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앞으로 찬호께이가 추리소설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긴다면, 이 소설은 위대한 작가의 평작으로 남을 그런 소설이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조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푸른 묘점(蒼い描点)』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망내인』을 고른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아무리 이 소설이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무너진 우물처럼 깊이가 떨어지고 막판 할인에 들어간 생선처럼 신선치 못하다 하더라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단순히 공감을 넘어서 마땅히 우리가 인지하고 직시하고 그래서 반드시 개선해야 할 인터넷 세상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인터넷 마녀사냥이다.
『망내인』은 여타 추리소설과는 달리 단 한 사람의 죽음만이 부각된다. 바로 15살 소녀 샤오원이다. 한창 예민할 대로 예민한 사춘기 시기의 소녀가 말 못 할 고민 몇 가지쯤 가지고 있는 것은 대수가 아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음을 떠올리더라도 그것은 누구나 응당 겪을 수 있는, 삶을 배우고 이해해 나가는 수업의 한 과정이다. 어른들이 멋대로 설정한 교과서 같은 경로에서 약간 벗어난 정도의 성장통이다. 그러나 소녀가 정말로 자살했고, 그 발단이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악의적인 글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녀의 나약함을 질책해야 할까? 아니면 그 소녀를 모욕하는 더러운 글을 올려 선동질한 누리꾼과 무수한 댓글로 이에 동조한 키보드 워리어들을 탓해야 할까? 아마 이것은 각자가 가진 가치관이나 신념, 인격에 따라 차이가 날 것 같다. 그중에는 어차피 그런 것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나을 거라고 가차 없이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고, 그래서 도태되는 쪽이 되지 않으려면 도태시키는 계층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차가운 피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서는 일말의 인간성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현실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하기보다는 탄식하기 일쑤다.
아무튼, 선동적인 글을 올린 누리꾼을 탓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그 글의 표적이 된 소녀가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정신적 붕괴를 일으켜 자살했다고 해도 그 누리꾼은 기껏해야 명예훼손죄에 해당할 뿐이다. 그 사람은 그저 인터넷에 글을 올린 것뿐이니까. 이것이 『망내인』에서 사달을 일으키는 시발점이다. 소설은 범죄와 추리를 다루는 만큼 잔인하게도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즉, 그저 재미 삼아, 혹은 화풀이로 누군가를 비방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것이 아니라 표적이 된 사람이 자살하게끔 의도적으로 그런 글을 올려 마치 여론몰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리꾼들을 선동하고 댓글을 조작한다. 참으로 비열하고 비겁하고 더없이 야비한 짓이지만, 인터넷 사용이 활발한 오늘날, 그 누구도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름 끼치는 일이지 아닐 수가 없다.
『망내인』처럼 특정인을 자살하려는 목적으로 마녀사냥을 일으킨다면, 그래서 그 목적이 이루어졌다면, 그 누리꾼을 살인자라고 딱 부러지게 지목할 수 있을까?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참으로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문명과 기술이 안락함과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 사고방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심각한 부조리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이버 범죄다. 우리가 남이 안 보는 곳에서 맘 놓고 험담을 지껄이듯,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학적 취미인 험담을 방종의 상태로 풀어놨다. 사회에서는 점잖은 옷을 입고 점잖게 말하는 그가 모니터 화면 앞에 숨어 인신공격으로 가득한 댓글을 따발총처럼 쏘아댈 때, 과연 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하물며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인터넷에 어떤 글과 댓글을 남기는가? 인터넷이 스트레스에 찌들 때로 찌든 현대인의 해우소 역할을 돈독히 한다고 해도, 변소에 남긴 똥과 오줌이 오롯이 당신 것인 것처럼 인터넷에 남긴 글은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망내인』은 인간성의 적나라한 모습이 가장 심각하고 저급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곳인 인터넷과 그 뒤에 숨은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샤오원의 자살과 샤오원을 자살로 몰아간 사람들의 동기와 교차시키며 독자의 양심을 자극한다. 다만, 그 천착의 깊이가 다소 얕고 두루뭉술하며 교조적이라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Т. Mattson. Interrogation of the sorceress. Canvas. 1853. Fragment> |
복수의 굴레에 빠진 자만이 복수를 끝낼 수 있다
독자는 『망내인(网内人)』을 읽는 내내 반드시 한 가지 의구심이 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샤오원의 언니 아이의 처지에서는 범인들이) 샤오원을 마녀사냥으로 자살로 몰아간 동기다. 이 동기를 알게 된 순간, 그토록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아이는 동생을 위한 복수를 망설이게 된다. 이대로 복수를 강행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쯤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복수를 멈추어야 하는 걸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아녜에게 복수를 의뢰할 때까지만 해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던,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던 복수심이었지만, ─ 분명 동생이 받았을 법한 ─ 고통에 시달리는 한 소녀를 보자 아이의 마음은 동요한다. 복수한다고 자신이 겪는 불행과 고통, 슬픔이 기쁨과 행복으로 마법처럼 탈바꿈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복수했다는 기억만큼은 평생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건 그 복수극의 도화선이 된 소중한 누군가, 즉 아이에게는 샤오원을 잃은 것만큼이나 쓸쓸하고 우울한 기억이자 아물만하면 마음 한구석을 찔러 상처를 남기는 영원의 가시이지 않을까? 난 아이의 선택이 옳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녀의 선택이 현명했다고 말하고 싶다. 비참한 운명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그 비참한 운명에 빠진 그 사람뿐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의 선택은 현명했다.
반은 추리, 나머지 반은 복수에 할당한 긴 소설이자,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해커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해킹 실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기에 탐정이 발로 뛰며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고전적인 맛은 부족하다. 하지만, 사이버 시대의 추리소설은 구시대 탐정들이 필수적으로 갖춘 명석한 두뇌에 아녜 같은 컴퓨터 실력까지 갖춘 탐정이 제격일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검색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에, SNS에는 온갖 잡다한 개인 정보가 벼룩시장에 나온 잡동사니처럼 진열된 요즘에, 우리의 신상털기는 총체로 먼지를 털어내는 것만큼이나 쉽다. 현실이 그러하니 구태여 발품을 들여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수고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난 아무리 구린 발 냄새가 사방천지에 진동하더라도 발로 뛰는 탐정들이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이 좋다. 현실과 소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아무튼, 전작에 비교해 다소 진부한 소재와 번득이는 맛이 부족한 평작이지만, 찬호께이의 전작 두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그래도 읽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는 없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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